나의 이야기

비터스윗 2009. 5. 19. 12:18

현재는 폐간된 DVD 전문지 <the DVD>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기고한 글로, 제목은 "홍상수는 왜 에릭 로메르가 아닌가"입니다. 이 글에서 정성일은 홍상수와 에릭 로메르의 공통점(낭만적 사랑에 대한 불신)과 차이점(사랑의 지연/회피)을 세밀하게 분석하면서, 홍상수 영화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습니다. 두 감독의 팬들에게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일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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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에서 에릭 로메르의 회고전이 열렸다. 이 글은 로메르의 회고전을 보면서 홍상수를 유추해내고, 다시 왜 그들이 같을 수 없는지에까지 닿은 정성일 식 단상이다. 또한, 영화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정성일 식 작은 대답이며, 그의 사랑에 대한 짧은 생각과 비슷한 것이다. 이건 영화를 빌려 말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 누구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배치의 문제다. 이를테면 박찬욱스즈키 세이준 혹은 아벨 페라라 그리고 사무엘 풀러 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닮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계보 안에 두고 해석하려는 것이다. 혹은 임권택미조구치 겐지 와 닮았다고 말한다. 그건 그렇다. 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미조구치 겐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다음 임권택은 데뷔하였다) 하지만 거의 의심없이 말하는 비유 중 하나는 홍상수가 로베르 브레송 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물론 홍상수 자신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28세 때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고 난 다음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영화에 영향을 받는 것과 그 영화처럼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한국에서 타르코프스키 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말하는 수많은 감독들의 영화를 보았지만, 그중에서 정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그들에게 실망스러운 이야기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보았고, 마찬가지로 브레송의 모든 영화를 보았다. 나는 그 두 사람이 닮은 구석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상수는 시종일관 롱 테이크로 영화를 만들지만, 브레송은 롱 테이크로 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브레송은 예외 없이 1.33 : 1의 화면 비율로 영화를 찍었지만, 홍상수는 예외 없이 1.85 : 1의 비율로 영화를 찍었다. 브레송은 45도 위치의 상상선 제단 데코파주의 위치에 카메라를 세우지만, 홍상수의 카메라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를 피한다. 브레송은 대부분 후시녹음을 사용하지만, 홍상수는 [강원도의 힘] 이후 동시녹음을 한다. (그러고 난 다음 거의 폴리 작업을 하지 않는다) 브레송은 수없이 클로즈업을 찍지만, 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화분 속의 벌레, [강원도의 힘]의 세숫대야 안의 물고기를 제외하면) 클로즈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홍상수가 브레송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일상생활의 치밀한 집착과 심리적 묘사를 행동으로 대신한다는 설명은 브레송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1백 명 정도의 이름을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열거할 수도 있다.

 

 

다른 예.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이전 편집장이었던) 샤를 테송은 홍상수의 주인공들이 어른의 몸과 아이의 정신을 가진 그 불일치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점을 들어 루이스 부뉴엘 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비유는 거기까지다. 테송은 그 생각을 더 밀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홍상수를 보면서 언제나 에릭 로메르가 떠올랐다 (이 표현에는 에릭 로메르가 로베르 브레송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영화적 형식은 거의 공통점이 없다. 에릭 로메르는 대부분의 영화 장면들을 데코파주한다. 홍상수는 화면을 나누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그냥 롱 테이크로 찍는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보여준, 고정된 자리에서의 카메라 팬을 제외하면(중국집 장면 혹은 부천의 선화 아파트 안에서 검은 개를 이리저리 따라가는 카메라) 홍상수는 거의 그 자리에 카메라를 세워두었다. 에릭 로메르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아마추어 연기자들을 사용했지만, 홍상수는 직업 배우를 데리고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홍상수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한국영화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 것 같다. 홍상수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백종학오윤홍을 데리고 [강원도의 힘]에서 그의 다른 영화들과 거의 마찬가지인 인물들의 모습과 말투를 담아냈다. 한국에서 전문배우 없이 제작비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홍상수에게 전문배우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또는 이런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홍상수는 그 과정에서 하여튼 시간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지만, 에릭 로메르는 여하튼 시간을 되돌이키거나, 다시 반복시키거나 병렬시키지만, 에릭 로메르는 그것을 흘러게가 내버려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나면 나는 두 사람 사이의 비슷한 소재에 대한 열망에 놀라곤 한다.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의 비슷한 점은 그 영화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루려는 대상에 있다. 무엇보다도, 그냥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연애에 관심이 많다. 에릭 로메르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연애의 심리극을 다룬다. 홍상수는 예외 없이 연애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들의 연애는 섹스와의 사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목표가 사랑과 섹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롱당한다. 사랑은 섹스를 망치고, 그 반대로 섹스가 사랑을 망치기로 한다.

 

이를테면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 장 루이는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프랑수아즈의 불명료한 열정에 사로잡혀 지금 당장 눈앞에 다 벗고 침대에 누운 매력적인 여자 모드와 그저 말씨름을 하면서 하룻밤을 보낸다. [오! 수정]에서 재훈은 수정과 하룻밤을 자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한 그녀가 돈 많은 자신에게 꼬리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그녀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종종 자신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두 편은 모두 흑백으로 찍었으며, 겨울이 배경이다) 말하자면 그 두 사람은 연애를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혹은 그들에게 연애는 일종의 우주다. 그 모든 별이 두 사람을 중심에 놓고 회전하기 시작한다. 일단 시작되면 모든 상황은 연애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거기서 빠져 나가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욕망의 대상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덫과 같아서 일단 걸려들면 모든 것을 다해서 그 안에서 대상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원인이 그 자신이기 때문에 영원히 붙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는 무의미한 노력에 매달려야 하는 인간의 저 부질없는 열정을 담으려고 하는 것이다.

 

 최근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에릭 로메르 회고전'의 포스터.

 

하지만 내 질문은 그 다음이다. 왜 홍상수는 에릭 로메르가 주는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이것이 항상 궁금했다. 잠시만! 하지만 이 질문이 오해되면 안 된다. 내 말은 홍상수가 왜 에릭 로메르만큼 영화가 훌륭하지 못하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영화는 줄기차게 연애의 실패를 다루고 있다. 물론 '후기' 에릭 로메르는 가끔 성공하기도 한다. 그것이 에릭 로메르의 60년대 교훈극 연작과 80년대 희극과 격언 연작의 차이점이다. 이를테면 [내 친구의 친구]. 우연히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처음 만난 두 여자는 오해를 통해서 그녀들의 사랑을 얻어낸다. 그렇게 에릭 로메르의 주인공들의 사랑은 예기치 않게 이루어지거나 혹은 확인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성공은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여전히 홍상수는 예외 없이 실패를 맞이한다. 그래서 그 패턴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이제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우리를 진정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실패를 향해서 그들 자신도 모르는 과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례로 밟아나가느냐 하는 것을 매우 잔인하게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는 것이다. (나는 괄호 속의 반성적 자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냥 그 지켜보는 자리에 만족한다) 이를테면 [생활의 발견]. 우리가 경주에서 맞이하는 것은 춘천에서 실패한 사랑이 고스란히 반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비 내리는 날 경주의 골목길 여자 집 문 앞에서 1천 년 전 공주를 꽁꽁 묶고 있었던 뱀이 그만 속임수에 넘어가 풀어주었을 때 그렇게 버림받았던 운명이 되풀이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홍상수는 세상에 대한 신뢰가 없거나 혹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믿음이 없다. 그에게서 연애는 그것의 실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같은 실패에 이르렀을 때 에릭 로메르는 내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데, 홍상수는 그것을 주지 않았다. 이를테면 에릭 로메르의 [보름달이 뜨는 밤]에서 루이즈는 옥타브와 레미 두 남자 사이를 오간다. 루이즈는 그 두 남자 모두와의 연애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둘 모두로부터 그녀는 거의 동시에 버림받는다. 그때 그녀는 추운 겨울의 파리로 돌아오는 아침에 찬 공기를 맞는다. 그리고 그걸 우리는 불현듯 깨닫는다.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말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버린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 때 추운 겨울 아침 공기는 세상사의 싸늘한 질서가 된다. 그 실패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의 집행이다.

 

반면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문호는 선화와 헤어지고 난 다음에도 그대로 부천에 남아서 자신의 제자들과 술좌석에서 어울리다가 그중 한 여학생과 여관으로 섹스를 하러 간다. 하지만 그 섹스를 실패한다. 그러고 난 다음 문호는 부천에 버림받듯이 그대로 남아서 서울로 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길거리에 서 있는 걸로 영화는 끝난다.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이야기에 대한 갑작스러운 '끝장'이다. 사실 뒤의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문호를 기다리는 집의 (영화 속에 목소리만 등장하는) 아내, 추문에 얽히게 될 제자와의 실패한 섹스, 매우 소심할 뿐만 아니라 속물에 가까운 이 남자의 세속적인 안정감과 성공에 대한 집착, 하지만 이제 그런 기대가 다 끝나게 될 가련한 운명, 그런데도 하여튼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이 마지막 장면은 더 기다려볼 필요 없는 '끝장'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시작해야할 때 끝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의 잔인함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실패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둘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 에릭 로메르의 주인공도 그리고 홍상수의 주인공도, 그들은 신기하게도 자기의 연인을 사랑하지만 사실 그 연인-대상보다 더한 그 무엇, 그런데 그것을 그 연인이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여튼 매달린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오! 수정]에서 그것은 처녀막으로 치환된 첫 잠자리다. 하지만 처녀막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좀 더 유치하게 영혼처럼 질문하자면) 그것이 정말 처녀임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생활의 발견]에서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말을 쓴 메시지를 두 사람으로부터 각각 반복해서 받는다. "내 안에 있는 너, 당신 안에 있는 나."

 

 

 

그런데 이 말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 말은 (매우 교묘하게도) 그 순서가 반대로 쓰여 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눈 내리는 어느 날 두 남자는 중국집에서 낮술을 마시다 말고 홀린 듯이 부천으로 향한다. 그들은 거기서 그저 그 대상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얻으러 대상을 향해서 다가간다. [클레르의 무릎]에서 제롬은 클레르에게 다가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고 비 오는 날 선착장에서 그녀의 연인이 거짓말을 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늘어놓은 다음 울고 있는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어놓는다. 에릭 로메르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수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우선 하나의 깨달음이 있다. 에릭 로메르도 그리고 홍상수도 낭만적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연애에 대한 시작에는 낭만적 사랑의 거절로부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처음부터 스스로 포기한다. 물론 그 가치란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자기기만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사랑이 종종 목숨과도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그 무모한 나르시시즘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자살에 이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그것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들이 낭만적 사랑을 부정했다고 해서 곧장 육체로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가 일상적인 생활을 파고 들어와서 그들로 하여금 삶 안에 있는 그 어떤 잉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이를테면 에릭 로메르의 연애는 대부분 바캉스 중에 벌어지거나, 휴가를 떠난 다음 시작하거나 혹은 자기가 살고 있지 않은 장소에 가서 마주친다.

 

그런데 [오! 수정]에서도 그들이 연애를 시작하는 장소는 경복궁 안이다. 그곳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와서 만나게 되는 일상적인 삶 바깥의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은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애를 배제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왜냐하면 결국 일상 안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연애가 결혼과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누구라도 그 연애를 계속 지속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애가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종종 오해하는 것처럼 기쁨이 아니라 사실상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의 특징은 그 괴로움을 기쁨인 것처럼 자발적으로 위장하고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다. 연애는 자기희생 없이는 기쁨을 주지 않는 괴로움이다. 그런데 그 희생은 대부분 맹목적이다. 연애에 이성이 자리 잡으면 곧장 파국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에 대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감정적으로 기쁨을 주는 대신 슬픔을 주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울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영화를 크게 잘못 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연애의 슬픈 감정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최면에 걸린 그 낭만적 사랑의 자리에 가서 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의 관심은 이 사랑에서 누가 주인인가에 있다. 말하자면 주인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 경쟁에서 그들은 서로 유혹의 대상에 이끌린다. 그러나 그 대상은 상대가 내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설정해놓은 것이다. 이것이 사랑에서의 최면의 이유다. 상대가 사랑스러울수록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걸어놓은 최면의 나르시시즘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 사랑의 계략에 빠져들어 무아지경으로 끌려 들어가는 동안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는 그걸 바라보는 자리에 가서 지켜본다. 그것은 그들의 결단이다. 하지만 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일까? 그들은 결코 사랑이 숭고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상을 놓고 자기 자신과 벌이는 내기다. 여기까지가 그 둘 사이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에릭 로메르는 그 대상에 다가가려는 마지막 순간 그 실패를 맞이한다. 그것은 때로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한정 없이 그 순간을 미루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순간으로 인해 미루어진다. 반대로 홍상수는 언제나 그 대상을 그만 지나쳐버린다. 그러므로 그는 대상과의 관계를 망쳐버린다. 여기서 그 둘 사이는 전혀 다른 자리로 가는 것이다.

 

에릭 로메르는 그것을 미룸으로써 낭만적 사랑의 자리에 윤리적 사랑의 질문을 가져온다. (당신은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도덕적 사랑이라고 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릭 로메르의 주인공들은 종종 칸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사랑은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초자아의 실재와 마주 대면해야 한다. 그들은 그러기 위해서 욕망의 대상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것을 미룸으로써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는 일종의 역전이 존재한다. 이제 자기를 대상으로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홍상수는 연애의 욕망이 목표로 하는 대상을 지나쳐감으로써 결국 불안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실상 실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연애의 실재는 다가가면 갈수록 거기서 자기가 연출해낸 최면의 효과만을 보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실인 척했던 거짓과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상에 정확하게 가 닿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돌아서서 대상을 보는 또 다른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거짓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거짓을 끌어 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는 것은 사랑에 다가간다는 것은 결국 사회적 네트워크에 지나치게 다가가서 거짓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착각의 악순환이다. 처녀막은 그저 사회적 위선이 만들어낸 합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동시에 하나의 물(物)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랑이란 주관적 착각이라고 비웃은 홍상수가 걸려드는 것은 객관적 착각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서 이성을 갖고 비웃는 자들의 객관적 합리성을 조롱하는 것은 항상 사랑이 주관적 정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진실은 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혹은 양쪽 모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가 하나의 도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보기 위해서 항상 물구나무를 서야 한다. 그걸 막기 위해서 에릭 로메르는 최선의 방법이란 결국 미루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영화가 주는 감동은 결국 사랑의 실재와의 대면을 미루는 방법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다. 홍상수가 주지 못하는 감동은 그 실재를 지나쳐버림으로써 다시 환상을 동원해야 하는 객관적 착각의 주관적 오류다. 그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홍상수가 감동을 주려고 할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에릭 로메르의 선택에 다가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필연적인 실패에 대한 두 가지 태도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에 빠진 자들이여, 자만하지 마라. 당신은 최면에서 깨어나야 한다. 혹은 사랑을 잃고 외로워하는 자들이여, 당신 자신을 책망하라. 당신은 아직 좀 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당신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그 어떤 대상으로 향하게 될 때 당신은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당신의 눈앞에 다가온 크리스마스에 보내는 나의 충고다.

 

 

Copyright by 정성일

출처 : North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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