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들

U2 2014. 12. 26. 01:48

 

 

 

 

보는 순간 코끝이… 천국에서 만난 ‘마왕’과 세월호 학생들

 

 

 

 

 

 

 

 

 

 

일러스트레이터 석정현씨가 그린 신해철-세월호 희생 학생 추모 그림
“스스로 치유한다는 심정으로 그렸다” 

 

올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가수 신해철(1968-2014)씨와 세월호 침몰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천국에서 만나 노래를 부르고 들으며 치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페이스북에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석정현(38)씨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말 간만의 작업. 2014년을 그냥 이렇게 보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글과 함께 한 장의 삽화를 게재했다. 그림에는 화창한 날씨의 바닷가 모래사장에 놓인 바윗돌 위에 고 신해철 씨가 기타를 들고 앉아 있고, 그 주위에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턱을 괴고 둘러앉아 노래를 듣고 있는 풍경이 담겨 있다.

 

그림에서 학생들은 신씨에게 “아저씨! 이번엔 ‘굿모닝 얄리’ 불러주시면 안돼요?!”라고 요청하고, 신씨는 “왜 안돼? 근데 그건 저기 나머지 애들 다 모이면 하자”라고 답한다. 앉아 있는 학생들 뒤에선 다른 학생들이 신씨를 만나기 위해 뛰어오는 모습도 담겨 있다.

 

이 포스팅은 공개 8시간 만인 24일 오후 3시 현재 7600여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3989명이나 공유했으며, 685개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은 대부분 “이런 그림을 그려줘서 고맙다”는 내용이다.

 

석씨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새벽에 페이스북에 그림을 올린 뒤 자다가 오후 늦게 일어났는데 반응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고마워하는 분들이 많은데 오히려 제가 더 감동적이고 고맙다. 제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속에 같이 서 있고 공감하고 있구나 느껴지니까 뜨거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는 처참한 기분과 함께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철저한 무력감이 들어서 속이 상했고, 신해철씨가 돌아가셨을 때도 며칠 동안 슬프기보다 화만 났다”며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기 보다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미션이라는 생각으로, 또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로 저 스스로를 치유한다는 심정으로 그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해철씨의 실제 노래 제목이 ‘굿바이 얄리’임에도 ‘굿모닝 얄리’라고 쓴 이유에 대해서도 석씨는 “헤어졌을 때는 굿바이지만 거기서 서로 만나 헤어질 일이 없을 테니 굿모닝이라고 쓴 것”이라며 “그런 간략한 위트도 서로 해석해가면서 그림을 두고 올 한해를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 이재훈

 

 

 

 

 

 

 

신해철.. 세월호 추모곡 '거위의 꿈' 뒤에도 그가 있었다

 

 

 

 

 

 

 

 

신해철의 노래 인생에서 빼먹을 수 없는 것은 '사회 참여'다. 신해철에게 노래와 음악과 삶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해철 노래 인생에서 사회 참여는 일종의 '음악'이었다. 신해철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적 발언을 하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게 다 음악이라고 생각한다"며 "정치와 사회와 음악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음악이 이상해진다"고 말했다. 신해철 노래와 삶이 동떨어져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그는 2002년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 등 사회 변화를 위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냈다. 그해 두 여중생을 장갑차 사고로 숨지게 한 주한미군이 미군법정에서 무죄를 받자 추모 무대에 서기도 했다.

 

당시 1주기 무대에 선 신해철은 "1년 동안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비장한 심정을 전했다. 신해철은 '날아라 병아리'를 개사해 "효순·미선 너의 조그만 무덤가에는 올해도 꽃은 피겠지"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MBC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신해철은 간통죄 반대 및 폐지, 학생 체벌 금지 등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영어 공교육 정책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내뱉었다.

 

그런 신해철이 신곡발표을 뒤로하면서 애착을 기울이며 작업을 했던 것은 세월호 추모노래 제작이다.

가수 김장훈은 세월호 사건으로 숨진 고(故) 이보미양이 생전에 불렀던 '거위의 꿈' 음원을 기술적으로 다시 다듬은 뒤 자신의 목소리를 덧입혀 듀엣곡으로 만들었다. 이 노래는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공연에서 공개되면서 자녀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노래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해철이 있었다. 보미 양의 생전 마지막 리허설 장면이 담긴 영상에서 음원을 뽑아내는 등 기술적인 문제가 가장 큰 난제였고, 이 문제를 푼 사람은 신해철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장훈은 '거위의 꿈' 노래가 발표된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실 이 노래는 나 혼자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며 "먼저 보미 양의 리허설 녹음에서 보미 양의 목소리만 뽑아내고 여러 가지 기술적 어려움에 대한 해결은 신해철 씨의 도움을 받았다. 본인의 6년만의 신곡활동을 뒤로 하고 녹음실에서 열흘간 밤을 새워 작업해준 신해철 씨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김장훈은 신해철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보도가 한창 나오고 있을 때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니가 마법을 부린 그 곡(거위의꿈)의 노랫말처럼 마법처럼 깨어 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고 했지만 신해철은 결국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 및 패혈증으로 영원히 눈을 감았다...  ⓒ 민중의소리

 

 

 



 

 

 

 

 
 
 

그림들

U2 2013. 5. 23. 23:30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랑한 화가, 전혁림

 

 

 

 

 

전화백(全畵伯)
당신
얼굴에는
웃니만 하나 남고
당신 부인(夫人)께서는
위벽(胃壁)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
Cobalt blue,
이승의 더없이 살찐
여름 하늘이
당신네
지붕 위에 있었네
- 김춘수, <전혁림 화백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주문한 '한려수도'

노무현 대통령 재직 시절인 2006년, 청와대 벽면에 그림 한 점이 새로 걸렸다. 통영 앞바다를 그린 <한려수도>란 대작이다. 작가는 당시 나이 구십이 넘은 노 화백이었다. 화백이 젊은 시절 그린 그림이 아니라 구십 노구에 그린 신작. 그 그림의 작가가 전혁림(1915~2010) 화백이다. 코발트블루(Cobalt blue)! <한려수도>의 바다는 더없이 푸르고, 산도 푸르고 들도 푸르다. 화면에는 없지만 푸른 물빛으로 보아 분명 하늘도 푸르렀을 것이다!

2005년 11월 어느 날, 용인의 이영 미술관에서는 전혁림 화백 신작전 '구십, 아직은 젊다'(2005.11.12~2006.01.18)가 열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YTN 뉴스에서는 전시 소식이 나갔다. 아침 방송을 보던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가자" 하고는 버스를 타고 미술관을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전시회를 관람하고 전시된 전 화백의 작품 <한려수도>의 구매를 원했다. <한려수도>란 작품은 이영 미술관에서 전 화백의 기획전을 준비하며 전 화백에게 제목을 정해주고 의뢰해서 탄생한 작품이었다. 당시 이영 미술관에는 전 화백의 추상화만 있었지 풍경화가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통영 풍경을 대작으로 그려달라고 청했고 노 화백은 구상과 추상을 섞어 동화 같은 구성으로 2000호짜리 대작을 그렸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작품에 감동을 받고 작품 구매를 원했으나 사이즈가 너무 커 청와대에는 걸 곳이 없었다. 그래서 같은 그림을 다시 그려줄 것을 청했고 전 화백은 응낙했다. 전 화백의 <한려수도>가 청와대 벽에 걸리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전 화백의 아들 전영근 화백이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부터 전 화백의 그림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전 화백의 그림을 수집하던 친구의 집에서 그림을 많이 접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 돌아가신 줄 알았던 전 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듣자 반가움에 급히 달려갔던 것이다.
 

 

▲ 노무현 대통령이 주문해서 청와대에 소장 중인 전혁림 화백의 <한려수도> ⓒ전혁림 미술관 제공


해석에 반대한다!


색채의 마술사, 다도해의 물빛 화가, 색면추상의 대가, 한국적 추상화의 비조, 한국의 피카소. 모두 전혁림 화백을 일컫는 다양한 수식어들이다. 전혁림 화백은 이승을 뜨고 없지만, 통영에는 그의 작품이 상설전시 되는 미술관이 있다. 전혁림 미술관. 미술관은 통영 미륵산 아래 봉수골에 있다. 전혁림 미술관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기분이 환해진다. 미술관이 아니라 어디 바다나 들에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들뜬다. 건물을 보고 있으면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미술관 건물을 감싸고 있는 색채의 향연 때문이다.

미술관 건물은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건물의 외벽은 그대로 전시실이다. 건물에는 전혁림 화백과 아들 전영근 화백의 작품들이 7500장이나 전시되어 있다. 세라믹 타일에 두 화가의 작품을 담아 외벽에 붙인 것이다. 3층의 외벽은 전혁림 화백의 1992년 작, 창(Window)을 타일 조합으로 재구성해 대형 벽화를 만들었다. 미술관 건물의 안과 밖이 모두 전시장이니 미술관은 휴관 일에도 전시가 계속되는 셈이다!

미술관이 개관한 것은 전혁림 화백 생전인 2003년 5월 11일이다. 1975년부터 30여 년 살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등대와 탑의 형식을 접목해서 미술관을 건립했다. 등대는 전 화백이 즐겨 그리던 통영 바다를 상징하고 탑은 전 화백이 영감을 얻었던 우리의 전통 문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미술관 전시실에서는 전혁림 화백의 작품 80점과 관련 자료 50여 점이 상설전시되고 작품들은 3개월 단위로 교체 전시된다.

 

▲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인 전혁림 미술관 외벽. ⓒ강제윤 제공


나는 그림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추상화에는 문외한이다. 구상화는 눈으로 형태가 느껴지는 그림인데 추상화는 눈으로 형태가 느껴지지 않는 그림이라는 정도로만 추상화를 알고 있다. 어째서 추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전혁림 미술관> 관장이기도 한 전영근 화백에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명료하다.

"추상화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많은 그림을 보지 못했다는 증거예요. 더 많은 그림을 보세요. 그러면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참, 그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는 것이지!"

전 관장의 이야기에 나는 무릎을 쳤다. 추상화가 어렵게 느껴졌던 것은 내가 그림을 해석해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와 해석이 필요한 예술 작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이해와 해석에 앞서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는가. 이는 내가 늘 시를 해석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시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해석하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라! 그렇다. 해석은 예술의 적이다! 일찍이 수전 손택이 갈파한 것처럼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 그래서 해석에 반대한다!

"오늘날은 그런 시기, 대부분의 해석 작업이 반동행위에다 숨통을 조이고만 그런 시기다. 도시의 공기를 더럽히는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처럼,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 정력과 감성을 희생하면서까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지식인의 존재가 이미 해묵은 딜레마가 되어버린 문화권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 전혁림미술관에 전시중인 접시에 그린 전혁림 화백의 산수도. ⓒ강제윤 제공


예술에는 선생이 필요 없다!


전혁림 화백은 통영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화업을 성취해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부산과 마산에서도 활동했었지만 생애 대부분은 고향 통영에서 작업을 했고 통영에서 생애를 마쳤다. 전 화백은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에서 예술가에게는 스승이 필요 없다고 단언한다.

"예술은 선생이 필요 없어. 자기 혼자 배우는 거라고. 나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나 혼자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어. 스승이 있다면 책하고 자연이지."

나 또한 시를 누구에게 배운 적 없이 시인이 됐다. 스승이 있다면 책과 사회였다. 그래서 나는 전 화백의 예술관에 동의한다. 전 화백은 아흔이 넘어서도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붓을 들 정도로 열정이 넘치던 화가였다. 전혁림 화백에 대한 이 짧은 글을 쓰기 위해 나는 틈만 나면 미술관에 가서 그의 그림을 감상하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전 화백에 대한 책들을 섭렵했다. 공부한 만큼 눈이 조금씩 뜨이는 것 같다. 그래도 나의 전혁림 공부는 여전히 부족하다. 내가 만났던 책 중에 전 화백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은 그의 구술집이었다. 국립예술자료원에서 기획한 예술사 구술 총서 두 번째 책 <전혁림 : 다도해의 물빛 화가>(수류산방 펴냄). 거기 가슴을 때리는 전 화백의 말씀들이 많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 대목이다.

"희랍의 바다나 통영의 바다나 다 같잖아. 내가 희랍에 갔을 때 바다를 보고 이 바닷물이 통영항의 바닷물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

구술 당시 96세였던 노 화백은 자신이 바다를 그리는 이유가 바다에는 낭만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한 세기를 산 로맨티스트 노인이라니! 화백은 그리스 여행을 갔을 때 그리스의 바다와 통영의 바다가 같은 바다, 똑같은 바닷물이라고 느끼셨단다. 이국 취향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리스 같은 이방의 바다는 낭만적이라 여기면서 한국의 바다는 그저 범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혁림 화백은 한국의 바다에도 그리스 바다와 다르지 않은 낭만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전혁림 화백의 그림 속 통영 바다는 끝 간데없이 푸르고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또 한없이 낭만적이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로맨스를 꿈꾸게 한다. 전 화백은 한국 바다가 가진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강렬한 푸른 색채로 표출한다. 통영의 바다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늘 짙푸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 화백은 통영의 바다가 푸르름의 끝에 도달해 있을 때 그 푸른 바다를 얼른 포획해 화폭으로 옮겨버린다. 절정의 바다를 통째로 훔쳐다 화폭에 담아버린 것이다. 이건 마치 진묵대사의 게송처럼 "하늘을 이불 삼고 바다를 잔을 삼아" 놀던 그 경지가 아니겠는가.

 

▲ 전혁림 작 <만화로부터> ⓒ전혁림 미술관 제공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확실한 존재"


전혁림 화백은 일찍부터 그림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으나 오랜 세월 잊힌 작가로 살아야 했다. 1949년 1회 국전에서는 대통령상을 놓고 수상자와 겨루다 입선했고, 1953년 2회 국전에는 <늪>이란 작품을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다양한 단체전과 개인전에 참가했고 <국전>에도 꾸준히 출품해서 입선했지만 중앙화단과 교류를 끊고 지낸 탓에 비교적 오랜 세월 무명에 가까운 '지방 작가'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말년의 구술에서 전 화백은 서울중심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을 잊지 않는다.

"지금은 그래도 좀 낫지만 그전에는 서울 놈들이 얼매나 텃새가 심했는지 몰라요. 한국은 시골에 있으면 전부 다 지방 작가라 하는데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는 기고. 지금 서울도 하루만에 왔다갔다하는데 지방이 있나? 전부 대한민국이지, 서울이지. 멸시, 멸시, 멸시 많이 당했어요. 문화예술을 기획한다든지 무슨 행사가 있다든지 그러면 서울 사람들끼리 즈그만 해가 패거리 문화 패거리 문화 하는가 보던데. 지금도 그라는 갑데. 그거는 아주 안 좋은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울도 시골이오."
- <전혁림 : 다도해의 물빛 화가>

'멸시를 당하던 지방 작가' 전혁림이 한국 화단의 중심으로 불쑥 솟아오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79년 <계간 미술>이 기획한 <작가를 재평가한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는 환갑이 한참 지난 전 화백이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한 신호탄이었다. 전 화백은 백남준, 오지호 화백 등과 함께 과소평가 받는 작가로 재조명됐다. 당시 기사에서 석도륜은 "잊혀져 있어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전혁림. 전혁림이란 작가야말로 방금 인구마다 회자되고 있는 그 누구 열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작가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그는 가장 확실한 존재"라고 썼다. 반면 이중섭, 김은호 화백 등은 과대평가 받는 작가로 재평가됐다.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에서 질문자가 "석도륜은 이중섭 선생은 그림보다 신변잡기 얘기로만 평가됐던 사람인데 선생님은 그림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작가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 화백은 "이중섭은 사건이 많은 사람이지만 정당하게 평가된 사람이었다"고 옹호했다. 전혁림 화백과 이중섭 화백의 인연은 깊다. 이중섭 화백의 부산 피난 시절 처음 만났고 이후 이중섭 화백이 통영에 살던 2년 동안 내내 술도 마시고 그림도 그리며 함께 어울렸다. 1952년에는 통영의 호심다방에서 전혁림, 이중섭, 유강렬, 장윤성이 함께 어울려 4인전을 열기도 했었다.

 

▲ 전혁림 작 <새만다라> ⓒ전혁림 미술관 제공


구십, 아직은 젊다!


전혁림 화백은 <계간미술>의 재평가를 계기로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재조명 되며 국내외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를 지속해서 열었고 왕성한 창작을 이어갔다. 그래서 전 화백은 "조선 민화에서 느껴지는 조형적 미감과 오방색의 강렬한 색채대비로 단청이나 전통보자기 옛 장신구 등에서 느껴지는 민족 고유의 정서를 재해석하고 현대화한 한국적 색면 추상화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평가처럼 전혁림 화백은 흔히 한국 추상화의 대가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추상과 구상 어느 한 쪽에 속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경계인 반추상에도 있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경계가 없는 자유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구상과 추상, 반추상 같은 경계를 두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드러내는 데 필요하면 어떤 기법이든 형식이든 재료든 가르지 않고 자유롭게 썼다. 그러므로 전 화백의 작품을 구상이나 추상, 반추상 따위로 구분하여 묶어두려는 시도는 부질없어 보인다. 삶은 추상과 구상 혹은 반추상 어느 한 요소로만 구성될 정도로 단순한 것이 아니라 온갖 요소들이 혼융(混融)되어 있다. 예술은 그러한 삶의 반영이 아닌가.

전혁림 화백의 그림은 서양화지만 민화와 공예품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89년, 중앙일보 주최로 전혁림 근작전 '칠순의 젊음, 다도해의 물빛 화가' 전이 열렸을 때 전 화백은 중앙일보 정재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 그림은 오랫동안 경험을 통해서 걸러내진 내 삶의 총체다."

전 화백은 전통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찾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민족적인 것을 현대화하고 전혁림화했고 고령이 된 뒤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전영근 관장은 아버지 전혁림 화백이 작고할 때까지 한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어떤 이들은 그림 많이만 그리면 뭐하느냐, 좋은 그림 하나만 그리면 되지 한다. 하지만 만개를 그려야 그중에 하나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대가라 해서 그리는 것마다 명작이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천재 화가들도 하루에 열점 이상씩 그렸다. 정열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그림을 그리셨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던 까닭일까. 전혁림 화백이 구십이 넘어서 내놓은 작품들에서도 정열이 넘친다. 원로의 작품이 아니라 청년의 작품 같은 활기가 느껴진다. 그의 전시회 제목처럼 '구십 아직은 젊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예술가들뿐이랴. 조로해 버리는 이 사회가 새겨들어야 할 경구다. "구십, 아직은 젊다!"
 

 

 

/강제윤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프레시안 ( http://www.pressian.com/ 

 

 

 

 

 

 
 
 

그림들

U2 2009. 7. 9. 13:25

만화가 236명 시국선언에 누리꾼들 '참신'

 

 

만화가 236명이 지난 2일 블로그와 만화관련 카페 등 인터넷을 통해 시국선언을 발표해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정치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내용을 만화로 표현한 만화가들의 이 시국선언에는 '순정만화'로 유명한 강풀, '위대한 캣츠비'의 강도하, '폐인가족'의 김풍, '천하무적 홍대리'의 홍윤표, '악동이'의 이희재, '오돌또기'의 박재동 화백 등 인지도를 가진 만화·만평가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2009년 여름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만화 시국선언은 "이명박 정부와 여당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며 이런 경고(독재시대로의 회귀)를 반대세력의 정치공세 쯤으로 폄하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우리 사회에서 '법의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 '언론의 민주주의' '문화예술의 민주주의' '평화 민주주의' '광장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풍자하고 있다.

 

누리꾼들은 "지금까지 나온 가장 쿨한 시국선언문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노래로 시국선언하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블로그로 옮겨 놓거나 다른 블로거들에게도 스크랩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메시지가 분명한 이 만화 시국선언은 '꽃'과 '노근리 이야기' 등을 그린 만화가 박건웅씨가 그렸다. 만화가들은 조만간 2차 시국선언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은 236명의 만화가가 서명한 1차 만화 시국선언 전체 그림이다.

 

 

 

 

 

 

( 김상만 기자 )

 

 

미디어오늘 (  http://www.media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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