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리포트

U2 2016. 1. 31. 21:27

 

 

 

 

 

 

쌍용차 정규·비정규직 간 연대의 힘이 이룬 값진 복직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사내하청 노동자 6명이 다음달 1일 7년 만에 정규직으로서 작업복을 입고 출근을 하게 됐다. 이들의 복직은 지난해 말 쌍용차 노사가 불법파견 소송 중인 사내하청 노동자 6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복직시키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쌍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굳은 신뢰와 연대의 힘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쌍용차 노조 측 교섭위원들은 그동안 교섭 과정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최우선 과제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복직 방식도 하청기업의 입사나 신규 채용 방식이 아니라 정규직 복직을 전제로 하며 해고 기간 밀린 임금과 경력 100% 인정을 요구했다. 사실상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불법파견과 직접고용 의무 인정을 전제로 협상이 진행된 것이다.

                   

 

 

 

사측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고 이 때문에 교섭이 난항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 문제 때문에 교섭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경력을 100% 인정받는 대신 1인당 4억원 넘는 체불임금을 양보함으로써 어렵게 합의를 이뤄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위기 순간에 서로의 입장을 먼저 존중함으로써 2009년 정리해고 후 28명이 목숨을 잃는 어려움에도 연대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쌍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보여준 연대의 정신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복직 방식을 놓고 수년째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차 노조의 상황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현대차 정규직 노조는 대법원이 2011년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에 대해 불법파견을 인정했음에도 단 한 번도 사측에 비정규직 경력 100% 인정을 요구해 본 적 없다. 현대차가 비정규직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내하청 노동자 해법으로 경력의 일부만 근속으로 인정하고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쌍용차 정규직 해고자 150명의 경우 합의문에 ‘2017년까지 노사가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고만 돼 있어 비정규직과 달리 복직이 보장됐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6명의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정규직 명찰을 달고 회사에 복귀하게 됐음에도 여전히 무거운 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쌍용차 대주주와 경영진이 합의 문구에 집착하기보다 합의 정신을 살려 2009년 정리해고의 악몽을 털고 새롭게 의미 있는 출발에 앞장서주길 기대해본다.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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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렌다, 7년 만의 출근…아프다, 아직 끝난 게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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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싸움 끝에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돼 기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규직 해고자들은 아직 못 돌아가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하다.”

 

지난 28일 경기 평택역 인근에 있는 와락센터(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공간)에서 만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장인 서맹섭씨(40)는 세월호 추모 리본이 달린 노조 조끼를 입고 있었다. 서씨는 쌍용차 협력업체에서 일하다 2009년 정규직에 대한 대규모 정리해고 이전에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다. 서씨는 다음달이면 노조 조끼를 벗고 회사로부터 지급받은 작업복을 입는다. 쌍용차 노사가 지난달 말 사내하청 노동자 6명을 우선 복직시키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7년간 거리에서 복직 투쟁을 벌이다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만큼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서씨는 1시간30분가량 진행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불편한 마음이 더 크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서씨와 함께 인터뷰에 응한 부지회장 유제선씨(36) 역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회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는, 구속력이 약한 합의서를 손에 쥐고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할 정규직 해고자들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메시지를 각인시킨 쌍용차 사태를 정규직 정리해고 문제로 기억한다.

                   

 

 

 

하지만 2009년 6월 976명에 대한 정리해고 이전에 먼저 잘려나가기 시작한 이들이 있다. 바로 서씨를 비롯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다. 2008년 10월부터 협력업체 강제휴업, 하청업체 폐업 등이 진행됐고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해고가 이뤄졌다. 서씨는 “위기감을 느낀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지회를 세우고 대응에 나섰지만 수백명이 희망퇴직하는 흐름을 막아낼 순 없었다”고 회상했다.

 

한때 150여명에 이르던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2009년 5월 정리해고에 맞서 쌍용차 평택공장을 점거하는 등 77일간 진행된 파업 당시엔 20명이 채 남지 않았다. 서씨 등 사내하청 노동자 4명은 정규직 해고자들로 구성된 쌍용차지부와 7년간 함께 복직 투쟁을 벌인 끝에 공장으로 돌아가게 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이질감은 7년간의 세월 속에 희미해졌고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을 제외한 복직 합의는 없다’는 원칙을 지켜냈다. 비정규직지회도 비정규직 문제가 해고자 복직 교섭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수억원의 임금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심경이 어떤가.

서맹섭(이하 서) = 2월1일부터 출근한다.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회사 통근버스를 타고 안성에 있는 인재개발원으로 간다고 한다. 3주간 교육을 받고 공장으로 돌아가 현장실습을 한 뒤 작업에 배치된다. 한편으로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돼 공장으로 돌아가니 좋다. 근속도 다 인정받았다. 하지만 150여명의 정규직 복직 희망자들은 아직 공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 불편한 마음이 더 크다.

 

유제선(이하 유) = 많이 착잡하다. 나 혼자 정규직 되려고 시작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다소 갑작스러운 복직이기도 하다. 합의서에 나머지 해고자들은 2017년 상반기까지 회사가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있다. ‘노력을 해도 안되면 어쩔 수 없다’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아직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해고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복직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협력업체 입사일 2년 경과 시부터 합의에 따른 채용일까지의 기간’을 근무경력으로 인정받았다. 근속을 온전히 인정받은 완성차 업계 최초의 노사 합의로, 회사가 사실상 불법파견을 인정한 것이다.

 

현대차 불법파견 특별교섭의 잠정 합의 내용은 협력업체 2~3년 근무 시 1년, 3~5년은 2년, 5~7년은 3년 등으로 근속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이 ‘경력 일부 인정, 신규 채용’이라면 쌍용차의 합의 방식은 ‘사내하청의 정규직 전환’인 셈이다.

 

- 근속을 온전히 인정받은 것은 다행이지만 해고 기간의 임금은 포기했다. 4억원가량이라고 들었는데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서 = 쉽지 않았지만 우리(비정규직)만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1월 5년5개월 만에 교섭이 재개됐는데 비정규직 복직 문제로 교섭이 중단될 위기까지 있었다. 정규직 해고자들과 7년을 같이 싸워 왔는데 우리 문제로 교섭이 중단돼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 나를 포함한 사내하청 노동자 4명은 2013년 11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승소를 했지만 나머지 2명은 아직 1심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나머지 2명을 남겨두고 4명만 돌아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해고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을 포기했다. 처음부터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포기하지 못했을 텐데 그런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쓴웃음을 지으며) 다만 가족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유 = 내부적으로 의견이 많이 갈렸다. “우리가 10년을 다녀도 4억원의 반도 못 받는다”는 현실적 이야기까지 나왔다. 밀린 임금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고 욕심부리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아직 미혼이라 다른 조합원들보다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쪽팔리지 말자’고 했다. 우리가 돈 포기 안 해서 일이 꼬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 싫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다른 조합원들에게 미안하더라.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설득하지 못할 것 같다. 항소심, 대법원까지 가도 쌍용차 노동자 지위를 확인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월세방에 사는데 7년간 싸우면서 파산, 면책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가정을 이룰 수 있겠느냐는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가 지난해 5월 해고자 14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명 중 3명에게 지난 1년간 우울·불안 증세가 있었고, 10명 중 4명은 건강이 좋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해고자 10명 중 9명은 해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 해고자 신분으로 지낸 7년의 시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미루어 짐작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서 = 나는 아이가 4명이어서 쉽지 않았는데 마음을 비웠다고 해야 할까. 그만두라는 압력도 많이 받았지만 집사람이 이해를 많이 해줬다.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 뜻을 지지해줬다. 사실 7년간 집 밖에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다. 평택역에서 2년6개월 농성하고 지역구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평택갑) 사무실 앞에서도 6개월간 농성을 했다. 주변에선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궁금해하는데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 임금이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애초부터 풍족한 삶 자체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 공백기가 길었는데 업무 적응에 대한 걱정은 없나. 

서 = 해고 전까지 단종된 차종인 로디우스 차체 공정에서 일했는데 돌아가면 어디서 일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가서 새로 다 배워야 한다. 새로운 회사 들어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가 안될 것 같다.

 

유 =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 정규직에 비해 노동 강도가 엄청 강했다. 예전 경험이 있는 만큼 정규직으로 복귀하면 적응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나이를 7살 더 먹은 게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다(웃음).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 = 7년간 가족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이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 그리고 밖에서 아직 싸우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잊지 않겠다.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제일 잘 안다. 함께 투쟁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할 수 있는 연대를 하고 싶다.

 

유 = 이번에 복직하지 못하는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많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이 아픔이 가실 때까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잊지 않겠다.

 

정규직 해고자 12명도…일터로 우선 복귀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정책기획실장 등 정규직 해고자 12명도 서맹섭씨 등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 6명과 함께 다음달 1일부터 공장으로 돌아간다.
 

쌍용차 노사가 지난달 말 조인한 합의서를 보면 향후 회사는 인력 충원 시 해고자, 2009년 정리해고 당시 희망퇴직자, 신규채용자의 비율을 각각 30%, 30%, 40%로 하기로 했다.
 

합의서에는 없었던 정규직 해고자 12명이 복귀하게 된 것은 교섭 과정에서 “회사가 이달 중 채용공고를 내고 40명을 새로 뽑는다”고 노사 간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합의서에 사내하청 노동자 6명을 채용키로 한 내용이 있었던 만큼 이들을 뽑을 때 “일부 인원을 더 충원하자”는 쌍용차지부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따라 회사는 최근 채용공고를 냈고 40명의 30%에 해당하는 12명(정규직 해고자)이 합격했다.
 

일단 정규직 해고자 중에서 복직을 희망하는 150여명 가운데 12명이 공장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나머지 해고자들이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노사 합의서에 2017년 상반기까지 이들이 복직될 수 있도록 회사가 노력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강제력은 없기 때문이다.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은 우선 복직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채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지부장은 29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선적으로 복귀하는 것이고 나머지 공장 밖에 있는 해고자들도 그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많은 분들이 아직 대기 중이라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그 불편함을 털어버리고 마음껏 기뻐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김지환

 

 

ⓒ 경향신문 ( http://www.khan.co.kr/)
 
 

 

 

 

 

 

 
 
 

시사리포트

U2 2016. 1. 25. 18:30

 

 

 

 

 

7년전 새벽 그 ‘참사 현장’에 다시 서다

 

 

 

철거민들, 용산참사 7주기 앞두고 ‘남일당 터’ 모여 책임자처벌 요구
“책임자 김석기, 총선 출마라니…”
 
찬바람이 쌩쌩 불어 절로 옷깃을 여미게 했던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로 일대엔 경쟁하듯 올라가는 주상복합건물 공사현장에서 나는 소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분주한 이곳과는 달리 길 건너엔 황량하다 싶을 정도의 텅빈 공간이 있다. 7년 전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남일당’ 터다.
 
몇년째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에 서면 본보기주택(모델하우스) 2동이 눈에 들어온다. 외벽엔 ‘누가 용산을 대표하는가’,‘동작 센트럴 서희스타힐스/조합설립인가/접수임박’이라는 대형 펼침막이 걸려 있다. .

 

 

2009년 1월20일, 강제철거에 항의하며 남일당 망루에 올랐다가 경찰특공대의 진압 과정에서 숨진 철거민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남일당 터에 다시 모였다. 용산참사 7주기 추모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들은 “참사 유가족들과 생존 철거민들에겐 2009년 1월20일 이후는 멈춰진 시간이었지만, 진압 책임자 김석기(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는 공기업(한국공항공사) 사장도 모자라 총선 출마를 선언하며 유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또 지난해 민중총궐기 진압 과정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농민 백남기씨가 중태에 빠진 점을 상기시키며, “강신명 경찰청장이 ‘법원이 용산참사 진압도 위법하지 않다고 판결했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한다. (무리한 경찰 진압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이 국가·경찰에 ‘살인면허’로 사용되고 있어 참담하기만 하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엔 용산참사 당시 현장에 함께 있던 서울 상도4동 철거민 천주석씨도 참여했다. 천씨는 용산4구역 철거민과 연대하기 위해 당시 망루에 올랐다가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2013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그는 “저 뒤(남일당 터 뒤)에 있는 모델하우스가 홍보하는 아파트는 상도4동에 있다. 그곳엔 아직도 집들이 남아있지만 건설사는 저렇게 홍보를 하고 있다”며 “상도4동은 아직도 폐허 상태다.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남일당 터 울타리에 국화를 꽂은 이들은 오는 21일 추모 촛불 기도회와 23일 7주기 추모대회를 위해 이 자리에 다시 모일 예정이다. 매년 추모대회가 열렸지만 참사 현장에서 열리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이원호 용산참사7주기 추모위원회 사무국장은 “공사가 시작되면 참사 흔적이 지워지는 셈이니 이를 마음속에 새기자는 의미로 참사 현장에서 추모대회를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경기침체와 조합 내부 갈등 등으로 개발사업이 지연됐던 용산4구역은 지난해 말 효성이 6479억원에 사업을 수주했다. 이곳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오피스텔·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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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어머니들-백남기씨 딸, 손 맞잡고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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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무리한 진압 피해자들 만나 “옆에 있으면 그래도 위로 될까 해서”
백남기씨 딸, 남편 잃은 가족들 위로
유가족들 “7년전 현장서도 물대포 쏴” “죽더라도 진상규명 했어야…또 다쳐”
백남기씨 쾌유 비는 미사 함께 하기로
 
“무슨 말로 위로한들 위로가 되겠어요. 마음만 있었지 선뜻 나서기가 힘들었는데, 옆에 있으면 그래도 위로가 될까 해서….”
 
‘두 가족’이 마주했다. 한쪽은 7년 전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가 이튿날 새벽 경찰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남편들’을 잃었다. 또다른 쪽은 역시 살기 위해 집회에 나섰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 곁을 두달째 지키고 있다.
 
이들은,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 당시 각각 남편을 잃은 김영덕·전재숙·권명숙씨와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 이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의 큰딸 백도라지씨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만남은 20일 서울 관수동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국가폭력 특별전’ 영화제에서 이뤄졌다.
 
김씨 등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이날 참사 7주기를 맞아 경기 남양주 마석모란공원에 몸을 누인 남편들을 만난 뒤 백씨를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회사도 휴직한 채 아버지가 누워 있는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던 백씨도 시간을 냈다. 백남기씨는 두달 넘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가족들을 애타게 하고 있다.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백남기씨 가족을 만나러 오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가서 뵈면 속상하잖아요. (우리도) 당해보니까….” 김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처음 만나는 백씨 앞에서 눈물을 비쳤다.

 

김영덕씨에게도 물대포는 ‘공포’의 대상이다. “7년 전 용산참사 현장에도 물대포가 있었거든요. (그래선지) 물대포 쏘는 것만 봐도 심장이 달달달 떨리고 답답해요.” 차분했던 김씨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려왔다. 김씨는 “민중총궐기 때 물대포 쏘는 장면을 보면서 ‘공권력 앞에 우리 같은 약자들은 희생만 당하는구나’ 싶어 속이 상했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대화는 자연히 경찰 등 공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갔다. ‘용산참사 당시 경찰의 진압작전은 위법하지 않았다’는 법원 판결을 잊지 못하는 용산참사 유가족들의 마음이 ‘물대포 사용은 정당한 공권력 집행이었다’는 강신명 경찰청장의 발언을 들은 백씨의 마음과 공명한 것이다. “그때 한 사람이 죽어나가는 한이 있어도 경찰 책임을 물었어야 했어요. 그걸 못해서 (백남기씨가 다치는) 이런 일이 또 생긴 것 같아요.” 김씨는 “저희가 힘이 부족했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백씨는 용산참사 당시 진압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경북 경주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걸 언급하며 “무얼 그리 잘했다고 (선거에) 나오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다치게 한 경찰 책임자들도 직후 인사에서 대부분 승진했더라고요. 잘했다고 상주는 것 같아서 진짜 화가 났어요.”
 
이들은 이날 만남에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었다. “아버지는 쓰러진 지 60여일밖에 안 됐지만, 7년을 버틴 어머니들 속은 속이 아닐 것 같아요. 억울함을 호소할 곳은 법 시스템일 텐데, 법은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 편이 아닌 것 같아요.” 백씨의 말에 용산참사 유가족 권씨는 “우리도 평범한 주부들이었는데 이젠 투사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백씨가) 앞으로 험난한 길을 가야 할 것 같아서 안타깝다”면서도 “함께하면 분명히 진실은 밝혀질 수 있으니, 맘 단단히 먹고 밥도 잘 잡숫길 바란다”고 했다.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앞으로 백남기씨의 쾌유를 비는 미사에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아무도 몰라준다고 생각하면 암담할 텐데, 농성장을 지키고 함께해주시는 시민분들이 있어 오히려 감사해요.” 백씨가 조용히 웃었다.

 

 

 

용산참사 생존자 다룬 영화 ‘두개의 문2’

 

 

월 DMZ영화제에서 첫선

 
용산참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2012년)의 속편이 제작된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미디어공동체 ‘연분홍치마’가 제작을 맡았는데, 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4구역 남일당 망루의 생존자들 증언이 담길 계획이다.
 
1편이 참사 당시 촬영된 영상·수사기록·경찰증언·재판과정 등에서 나온 사실을 중심으로 정교하고 분석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2편은 이충연 당시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을 비롯해, 천주석·지석준·김창수·김주완씨 등 참사 이후 생존자들의 삶을 4년째 따라가며, 이들이 겪은 참사의 후유증과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담길 예정이다.
 
김일란·이혁상 감독은 “용산참사가 슬픈 일, 불행한 일이 있다고 아련하게 생각되는 데 그치는 지금 상황에서 다큐가 용산참사가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잊혀져가는 것을 불러내 토론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영화는 오는 9월 디엠제트(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관객을 만난다.

 

 

-박태우

 

 

ⓒ 한겨레 ( http://www.hani.co.kr/)
 

 

 

 

 

 

 

 
 
 

시사리포트

U2 2016. 1. 15. 23:00

 

 

 

정대협 등, 박 대통령 주장 반박…'정의기억재단' 설립

 

 

 

 

 

 

 

 

위안부 합의, 역대 정부는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만들어낸 박근혜 대통령이 "역대 어느 정부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일"이라고 자평하는 가운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어느 정부도 이렇게 종지부를 찍으려 하지 않았다며 반박에 나섰다.

 

박 대통령은 지난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위안부)가 제기되고 지난 24년 동안 어떤 정부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심지어 포기까지 했던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면서 이번 위안부 합의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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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대협은 14일 '박근혜 대통령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에 대해 반박합니다'라는 이름의 자료를 통해 노태우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역대 정부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 한편, 박 대통령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정대협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차단됐던 문제를 여성단체들이 1980년대 후반 적극 우리 사회에 제기했고 이로써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일본 국왕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했다"며 "이후 1990년 6월 6일 일본 사회에서 일본 정부로 하여금 '군 개입이 아니다 민간 업자가 한 일'이라고 답변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정대협은 "이 입장은 곧 이은 자료 발견과 피해자 증언 등으로 바뀌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답변을 확인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정대협은 "1992년에는 외교부에 일본군 위안부 TF팀(정신대 실무대책반)을 만들어서 피해자들 신고전화를 받았으며 김영삼 대통령 때는 1993년 3월 처음으로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여 피해자들을 정책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했다"고 전했다.

 

김대중 정부는 일본 민간단체가 주도하고 정부가 일부 참여한 형태인 '아시아여성평화국민기금'을 민간 위로금으로 간주, 이를 거부했다. 정대협은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기금이 지급하려고 했던 지원금에 준하는 금액을 정부 세금으로 피해자들에게 지원했으며, 생활지원금도 대폭 인상해 지원했다"면서 피해자들의 생활 기반이 안정적으로 접어들었던 시기였다고 밝혔다.  

정대협은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한일협정 문서를 전면 공개하고 민관합동 조사기구를 만들었다면서 "노무현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 등의 문제가 한일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고 이를 추궁해 나가겠다고 밝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법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을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고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정대협은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2011년 11월 교토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렸다"고 전했다.

 

정대협은 "이런 전직 대통령들의 활동과 노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진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물론 피해자들의 국제 외교 활동에 비해 한국 정부의 외교 활동은 턱없이 부족하고 때로 많은 우려를 낳기도 했으나 현 박근혜 정부처럼 법적 책임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며 종지부를 찍고자 한 바는 없다"고 꼬집었다.

 

법적 책임 없는 일본 정부가 준 10억 엔? 우리는 그런 돈 안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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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기억재단'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이 지난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처럼 단순히 보상금 지급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인식 하에 진상규명, 사실인정, 공식사죄, 법적 배상, 후세교육, 추모사업 등의 재발방지 후속조치를 원칙으로 삼았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10억 엔 출연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전 세계인이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된 할머니들과 손잡는 모금운동을 시작한다"면서 "할머니들께 진정한 명예와 존엄을 안겨드릴 것이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시 성폭력과 전쟁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발족식에 참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출연하겠다는 10억 엔을 받지 않겠다면서 "우리는 그런 돈 안 받는다. 법적으로 사죄하고 배상을 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우리들은 이런 돈 받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용수 할머니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서 해결하려고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데, 올바르게 해야 한다"며 "일본이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 해야만 해방이 되는 것이다. 끝까지 일본하고 투쟁하겠다. 힘을 달라. 국민을 믿고 투쟁하겠다"라고 말했다.

발족식을 마친 참가자 100여 명은 '한국 정부에 보내는 요구서'를 채택하고 프레스센터에서 도렴동에 위치한 외교부 청사까지 행진했다. 해당 요구서는 외교부 관계자에게 전달됐다. 이들은 요구서를 통해 지난 합의를 파기하고, 피해자의 뜻이 전면적으로 반영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을 촉구했다.  

​- 이재호

프레시안 ( 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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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정대협 대표, 박 대통령 담화 '위안부 대목' 조목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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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서 말한 ‘한일 위안부 협상’ 대목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윤 대표는 “현실적으로 100% 만족할 순 없다” “지난 24년 동안 어떤 정부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 등 박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뒤, “(현실적 제약이 있다면서) 왜 최종적 불가역적이라고 종지부를 찍었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전직 대통령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 등으로 반박했다.
 
다음은 윤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밝힌 비판 전문이다. 앞 부분은 박 대통령의 담화문 내용, 뒷 부분은 윤 대표의 반박이다.
 
정말 답이 안 나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를 읽고, 뭐라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쓰기 시작하니 그냥 줄줄줄 나와서 적어봅니다.
 
1. 협상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100% 우리가 만족하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죠.
☞☞☞ 그런데 왜 최종적 불가역적이라고 종지부를 찍고, 앞으로는 다시는 국제사회에서 제기하지 않겠다고 했나요?  

 

2. 그러나 이 문제가 제기되고 지난 24년 동안 이걸 어떤 정부에서도 역대 정부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심지어 포기까지 하고 그랬던 아주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 65년 한일협정으로 차단되었던 문제를 여성단체들이 90년대 후반, 사회에 제기했고, 이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일 국왕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해서 90년 6월6일, 일본 국회에서 일본정부가 군개입이 아니다, 민간업자가 한 일이라는 답변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역할 또한 컸습니다. 92년도에는 외교부에 일본군‘위안부’TF팀(정신대실무대책반)을 만들어서 피해자들 신고전화를 받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처음으로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을 93년 3월에 제정하여 피해자들을 정책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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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의 법적 책임이 아닌, 민간위로금은 아시아여성평화국민기금을 반대하면서 정부세금으로 피해자들 각각에게 일본의 국민기금이 지급하려고 하는 지원금을 지원했으며, 생활지원금도 대폭 인상하여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생활기반이 안정화에 접어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일협정 문서를 모두 공개하고, 민관합동조사기구를 만들어 조사를 했고, 그 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원폭피해자, 사할린노동자 문제는 한일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 추궁해 나가가겠단”며, 한국정부로서는 처음으로 법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을 일본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헌법재판소 판결이 2011년 8월 30일, 있은 후 바로 그 해 11월 교토에서 열렸던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방 후 처음으로 외교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렸습니다.

이런 전직 대통령들의 활동과 노력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진전시키기 위한 노력들,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해 왔습니다. 물론, 피해자들의 국제 외교 활동에 비해서 한국정부의 외교활동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 정부의 진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법적 책임이 아니었음에도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며 거꾸로 돌려버린 정부가 누구일까요? 왜 박근혜 정부가 2016년에도 살텐데, 2015년을 몇 일 남겨둔 상태에서 후다닥 그렇게 종지부를 찍으려 했을까요? 국민들이 와~~~~ 그렇게 정말로 찬성할 줄 알았나요?

 그런데 그런 어려운 문제를 아주 최대한의 성의를 갖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그런 것을 받아내서 제대로 합의가 되도록 노력한 그건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3. 지금 현실적으로도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작년에 아홉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돌아가셨고 그래서 46분밖에 남지 않았고 그분들의 평균 연령이 89세에 달하고 있습니다.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한 분이라도 더 생존해계실 때 사과도 받고 마음의 한을 풀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분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시켜드려야 한다는 절박한, 그런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그동안 노력을 했습니다.

☞☞☞ 그래서 사과는 대독사과, 총리는 전화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은 한일협정으로 다 끝난 문제다라는 대답을 받으시고는 그것을 공식사죄받았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셨나요? 할머니들은 그런데 왜 그것이 진정어린 사죄라고 받아들이지 못하실까요? 왜 모독이라고 생각하실까요? 왜 국민들 역시 그것이 사죄가 아니라고 생각할까요? 바로 일본정부와 일본 우익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태가 그 답일 것입니다.

4. 작년만 해도 외교부 차원에서 지방 곳곳을 다니면서 15차례 관련 단체 또 피해자 할머니들하고 만나서 노력을 했고, 또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그분들이 진짜 바라는 것이 뭔가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설날에 설날 선물들고 오신 것. 그런 것도 그 만남 속에 넣는다면...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그 방문이 의견 청취를 위한 방문이었다고 미리 말씀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리고..

5. 할머니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것 이걸 확실하게 밝혀 달라. 그리고 일본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죄가 있어야 된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돈으로 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야 된다는 것, 그 3가지로 요약이 됐습니다,
☞☞☞ 너무나 잘 못 알고 계십니다. 이미 고노담화에서 일본군의 관여는 인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고노담화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그렇게 애매모호한 관여인정이었습니다/ ‘민간업자가 했을지라도 군의 관여하에 했다는 식의 강제성 인정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정부, 국가의 범죄입니다. 일본군이 주도한 범죄에 민간업자들을 관여하게 이용했던 범죄입니다. 거꾸로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이 공식적인 사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공식적인 사죄의 내용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는데 무엇에 대해서 사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간업자가 한 일에 군이 관여했다는 것을 사죄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왜 아베 총리는 한마디도 국민 앞에서, 공중앞에서 사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죄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정부가 그 가해자의 뻔뻔한 태도를 사죄했다고 평가해주고 싶어 하십니까?

6. 지금 오히려 같은 위안부 문제로 피해 받은 다른 동남아나 이런 나라들이 한국 수준으로 좀 해 달라, 이 문제를 풀어 달라. 이렇게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 나라들이 어떤 나라인지요? 알고 싶습니다. 정말 그런 나라가 있다면, 우리 피해자들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정부가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셨던 나라인지요? 그리고, 만약 그것과 상관이 없다 할지라도 그 나라들이 이번 합의의 진짜 내용을 알고 계십니까? 한국정부가 이렇게 잘못 해석하고, 사죄했다고, 일본정부가 책임을 인정했다고 하는 그 외국보도를 보고 그러지는 않습니까?

7. 이제 와서 무효화를 주장하고 또 정치적 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는 것은 참 안타까운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정치적 공격의 빌미라...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진실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치, 이미 그렇게 크게 기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현 정부이든, 과거 정부이든 잘하는 것은 잘한다 칭찬하고, 못하는 것은 못한다 비판하고 옳은 길 가달라 요구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 왔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박근혜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열심히 제기하고 노력하는 것에대해서 일본에서도, 유엔에서도 칭찬하고 자랑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랑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하시면 그저 생각도 하지 말고 입도 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참으라는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8. 그리고 앞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합의 내용이 충실하게 이행이 됨으로써 피해자분들의 명예와 존엄이 회복되고 또 여생 편안한 삶의 터전을 가지실 수 있도록 이행해 나가는 것이고,
☞☞☞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자신을 그렇게 성폭행한 범죄자가 자신은 대리인 뒤에 숨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애매모호하게... 내가 한 것은 아니고, 나는 관여를 했고, 그렇게 관여한 관점에서 책임을 느끼고...미안해. 내가 돈을 줄께. 대신에 다시는 어디에서도 말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명예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앞으로 그들의 역사교과서에서 대해서도, 진상규명에 대해서도, 추모사업에 대해서도...오히려 평화비를 철거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가 계속 높아가고 있는데, 배상이 아니었다며, 법적 책임이 아니었다면서... 총리는 자신은 자신의 입으로 사죄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있는 현실인데, 어떻게 피해자들의 상처와 명예가 회복될 수 있을까요?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은 범죄가가 토 달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살짝 피해자애게, 피해자가 있는 나라의 대통령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국의 국민들도 알 수 있게, 국제사회가 알 수 있게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다음 총리가 번복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피해자들도 우리도 대통령께 ’위안부‘ 문제가 해결안되면 일본총리와 만나서는 안된다고 요구한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그렇게 큰 짐을 스스로 안겨주셨습니까? 마치 한일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가 걸림돌인 것처럼 그렇게 분위기를 만드셨습니까? 걸림돌은 아베총리의 역사인식이고, 일본정부의 전쟁범죄 찬양, 미화정책이었음에도말입니다.

안타깝고 슬프고 절통 합니다. 얼마나 긴 세월을, 얼마나 피땀흘리며, 얼마나 온몸으로 살아온 25년인데, 그 길을 이렇게 차단해 버리십니까? 세계를 향해, 각지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홰서, 당신들도 우리처럼 포기하지 않으면 사법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며 길을 열어주며 달려왔는데, 이제 우리가 잠시 꺾어져 버렸습니다. 물론 그 꺾어진 길을 다시 펴서 우리는 갈 것입니다만, 참으로 슬픕니다. 국가가 국민개인에게 이렇게 무서운 겁박의 존재로 다가오는 이 현실이....

​- 박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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