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U2 2014. 10. 26. 19:15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그는 왜 사랑 받을까

 

 

 

 

 

 

 

 

무히카 대통령 “우루과이 높은 경제성장률은 분배정책 덕분”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78·사진)의 신고된 재산은 32만2883달러(약 3억3130만원)이다. 그는 대통령 월급 1만2000달러의 90%를 기부하고 나머지만 챙긴다. 우루과이인들의 평균소득에 맞추기 위해서다. 그래서 별명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대통령’이지만 스스로 가난하지 않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무언가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끝없이 더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내가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딱 그 정도다.”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인 무히카는 14일(현지시간) 세계은행에서 강연을 했다. 쉽고 거침없는 이야기에 자리를 가득 메운 500여 청중은 박수 대신 폭소를 자주 터뜨렸다.

                   


 

그는 “일본 같은 나라는 매우 열심히 일해 기적을 이뤘다. 그런데 열심히 일만 해서 잘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잘살면서도 스트레스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인구 350여만명의 소국 우루과이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다만 그는 “최근 10년 사이 경제성장을 연평균 5.5%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분배 정책 덕분이었다”며 지난 10년 간 임금이 54% 상승했고, 이는 노·사가 함께 논쟁하고 결정한 것에 기인한다고 했다.  

 

그는 “재계는 이윤 증대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결국 정부가 개입해 노동자들에게 소득이 많이 가게 할 수밖에 없고, 가난한 사람이 줄어들면 기업들의 장사도 더 잘 될 것”이라고 했다.

무히카는 “전세계는 매분마다 20억 달러를 군사비에 쓴다. 나는 예전에 정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돈을 빈곤 퇴치에 써야 한다”고 말해 세계은행 직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정의로운 전쟁은 1970~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그가 ‘투파마루’라는 게릴라의 일원이었던 때를 염두에 둔 말이다. 그는 이 때문에 15년 가까이 감옥에 있었다. 한 청중이 그를 “라틴아메리카의 만델라”라고 칭하자 그는 “만델라는 메이저리그에 계셨던 분이고, 나와는 노는 물이 달랐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그저 동네 아저씨들 중 한 명이며, 그들이 체포하니 감옥에 간 것일 뿐이다. 그걸 신비화하지는 말자”고 했다.

한 청중이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의 일원이었던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고 묻자 “전혀 없다.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에 속해있고, 우리만의 이웃이 있다. 그것을 묶어주는 근본적인 기반은 아마존이다. 브라질은 대륙국가이고, 결국 그 중심을 향해 우리가 문을 더 열어놓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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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히카는 넥타이를 매지 않기로 유명하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도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세계은행 행사 제목도 ‘넥타이 풀고 하는 대화(Dialogo Sin Corbata)’였다.

 

- 손제민

 

 

ⓒ 경향신문 ( http://www.khan.co.kr/)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 대통령의 명연설

 

 

 

지구촌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 대통령이다. 2010년 우루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무히카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대통령 취임 때 전 재산이 1987년 형 폴크스바겐 비틀 한 대였다고 한다.


또 그는 대통령 관저 대신 수도 교외에 있는 부인 소유의 소박한 농장에서 생활한다. 무히카 대통령은 월급의 10%만을 쓰고 나머지 90%는 자선단체나 엔지오에 기부하고 있다. 1300만 원 정도 되는 월급 가운데 130만 원 정도로 생활하는 셈이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젊은 시절 독재정권과의 싸움에 참여해 여러 차례 투옥됐고 여러 차례의 총상을 입었으며 체포되어 14년 동안 옥살이를 했고 그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히카가 존경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는 지구촌이 불행한 근본 이유를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수감 생활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의 철학은 201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리우 정상회담’에서 행한 연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류가 건설한 문명,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꿰뚫는 무히카 대통령의 감동적인 연설을 발췌해 소개한다.

 

- 우루과이 호세 무희카 대통령의 연설

 

이곳에 오신 정부 대표와 관계자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저를 초청해 주신 브라질 국민들과 지우마 호제프 대통령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저보다 먼저 여기에 서서 연설한 훌륭한 연사들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의문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오후 내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왔습니다.과연 우리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현재 잘살고 있는 여러 나라의 발전과 소비 모델을 흉내 내자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독일 가정에서 보유한 자동차와 같은 수의 차를 인도인이 소유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을까요? 더 명확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양의 부유한 사회가 하는 그런 소비 행태를 세계의 70~80억 사람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원이 지구에 있을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언젠가 우리가 다른 논의를 해야만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문명은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명은 시장 경제와 경쟁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무한의 소비와 발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시장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가 자원을 찾아 세계 곳곳을 다니는 세계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계화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이런 무자비한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시스템 아래서 우리가 연대나 더불어 살아가자는 논의를 할 수 있나요? 어디까지가 동료이고 어디까지가 경쟁 관계인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번 행사의 중요성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큰 위기는 환경의 위기가 아닙니다. 그 위기는 정치적인 위기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인류가 만든 이 거대한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같은 소비사회에 통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대량소비가 세계를 파괴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소비가 사회의 모터인 세계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많이 그리고 빨리 소비를 해야만 합니다. 소비가 멈추면 경제가 마비되고 경제가 마비되면 불황이라는 괴물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대량소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수명을 단축하게 하고 가능한 한 많이 팔도록 해야 합니다.


즉, 10만 시간을 사용하는 전구를 만들 수 있어도 1000시간만 쓸 수 있는 전구만을 팔아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긴 시간 사용할 수 있는 전구는 이런 사회에서는 좋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더 일하고 더 많이 팔 수 있게 하려고 ‘일회용 사회’를 지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순환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분명히 정치 문제이고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써서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동굴에서 살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제 부족한 식견으로 보면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먼 옛날의 현자들, 에피쿠로스, 세네카, 아이마라 민족까지 이렇게 말합니다.“빈곤한 사람은 조금만 가진 사람이 아니고 욕망이 끝이 없으며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국가의 대표자로서 리우 회의에 그러한 마음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제 연설 중에는 귀에 거슬리는 단어가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수자원 위기와 환경 위기가 문제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만든 사회 모델인 것 입니다. 그리고 반성해야 할 우리들의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저는 환경자원이 풍부한 작은 나라의 대표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300만 명 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1300만 마리의 소가 있습니다. 염소도 800만에서 1000만 마리 정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식량, 유제품, 고기를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아주 작은 나라임에도 토지의 90%가 비옥합니다.제 동지들인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6시간 노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6시간 노동을 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하고 있어 결국 이전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의 구매에 들어간 할부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돈을 다 갚고 나면 자신이 저처럼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는 노인이 되어 있고, 자신의 인생이 이미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 아닌가 라고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개발이 행복을 가로 막아서는 안됩니다. 개발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만 합니다. 개발은 행복, 지구에 대한 사랑, 인간관계, 아이 돌봄, 친구 사귀기 등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은 바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환경 문제의 가장 핵심 가치가 바로 인류의 행복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 권복기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http://www.huffingtonpost.kr/)

 

 



 

 
 
 

인물과 사상

U2 2014. 10. 24. 23:48


 

故 성유보 선생을 기리며

 

 

 

 

 

 

 

흔치 않지만 살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여행 중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책을 읽다 작가의 통찰력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퇴근 길 지는 노을빛에 가슴이 울컥해지기도 한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우리의 삶을 자극하는 것이 감동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감동을 받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 대부분은 감동보다는 탄식과 분노를 일으키는 것들이다. 감동적인 사람들을 만나기란 더욱 쉽지 않다. 어릴 적 위인전을 많이 읽었지만, 나의 심장을 뛰게 한 위인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지만 감동적인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래도 나의 인생행로를 바꿀 정도로 감동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지난 8일 72세로 타계한 성유보 선생이다. 언론계에는 널리 알려진 분이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독재에 항거한 이유로 해직을 당했고, 한겨레신문 창간 주축으로 편집국장을 지냈다. 96년 총선에 출마해 고배를 마신 후, 줄곧 야인으로 머물면서 언론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분이다.

 

필자가 성유보 선생을 만난 것은 90년대 후반이었다. 그는 민주언론운동연합 이사장이었고, 필자는 지역언론도 언론민주화운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진학자였다. 당시 필자가 성유보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필자는 지역언론을 연구하는 언론학자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의 원래 전공인 언론법이나 언론윤리 분야나, 아니면 디지털이나 인터넷 등 연구주제도 다양하고 연구자금도 많은 신흥 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90년대 후반만해도 지역언론은, 특히 풀뿌리 지역언론은 언론으로 간주되지 않던 시대였다. 언론민주화 운동도 방송민주화나 소위 “조중동”에만 집중하던 시절이었다. 언론지원기관인 한국언론재단의 각종 통계자료에 주간신문은 포함되지도 않았고, 각종 교육이나 기금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었다.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 신문방송학과 전공이 있었지만, 지역언론을 연구하는 교수들은 극히 드물었다.

 

성유보 선생에게도 지역언론이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필자가 주장하는 지역언론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진지하게 수용한 몇 안되는 중앙언론 출신 인물이었다. 그는 필자의 주장, 즉 중앙언론의 독과점 폐해를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지역언론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했고, 언론민주화 운동에 지역사회와 지역언론을 포함시켰다.

 

필자는 언론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대전-충남, 경남, 전북 등 일부 지방에서도 언론시민운동이  뿌리를 내렸다. 2004년에는 지역신문발전법이 국회에 제정되었고, 한국의 지역언론도 명실상부하게 언론의 일부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가 성유보 선생에게 감동을 받은 것은 지역언론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한국의 대다수 중앙언론인들에서 배어나오는 객기나 허세나 냉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반독재 투쟁을 벌인 몇 안되는 강골 언론인이었지만, 성유보 선생처럼 부드럽고 인자하며 겸손한 언론인도 드물었다.

 

자신이 지역언론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다는 것을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지역을 다니며 지역언론에 대해 배우고 체험한 분이다.

 

성유보 선생이 민주언론운동연합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서, 필자가 그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민주화 진영이 추진했던 “언론개혁”이나, 지역언론계가 추진한 지역언론 활성화도 큰 결실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역언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크게 줄었고, 지역언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크게 늘었다. 풀뿌리 지역언론을 사랑해준 성유보 선생의 명복을 빈다.

 

 

-  담양곡성타임  장호순

 

 

 

 

 

 

언론자유 위해 싸운 삶 50년…끝까지 언론인이었다

 

 

 

 

 

 

유신정권 맞서 동아투위 결성.. 전두환정권 땐 민주화운동 이끌어


최근까지도 언론자유 위해 활동성유보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이 8일 오후 5시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급성 심근경색(심장마비)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 3일 지병으로 인한 합병증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었다. 향년 71.

 

1943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고인은 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래 언론자유와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해 초대 및 4대 편집위원장, 논설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이어 방송위원회 상임이사, 방송평가위원회 위원장, 한국케이블티브이방송협회 케이블티브이 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2000년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비롯해 2013년 희망래일 이사장, 2014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까지 최근까지 남북통일과 평화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해왔다.

                   

 

 

고인은 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래 50년 가까이 언론인의 한길을 걸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72년 유신체제를 구축한 뒤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는 74년 10월 동아일보의 ‘서울대 농대생 300명 데모’ 기사를 문제삼아 송건호 당시 편집국장 등을 연행했고, 다음날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아나운서 등 130여명이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유신정권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광고 탄압’에 나서 백지광고 사태를 빚었고, 이에 독자들은 익명의 광고 후원으로 이들을 응원했다. 이는 이듬해 기자 대량 해직사태로 이어지고, 해직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고인은 이 모든 과정에 앞장섰으며, 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뒤에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84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86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정책연구실장(87년) 등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고인은 한겨레 창간 작업에 참여하면서 언론인으로 ‘복귀’했고, 91년 한겨레를 떠난 뒤에도 언론인의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92년 <사회평론> 재창간위원장과 이듬해 사회평론사 대표를 맡았고, 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와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을 지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방송위원 등을 맡아 방송 개혁을 이끌었다.

 

영원한 현역 언론인으로 남고자 한 고인의 열망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0돌을 맞아, 지난 1월부터 한겨레의 회고록 ‘길을 찾아서’ 연재를 통해 70~80년대의 어두운 독재시대를 증언하고 그 교훈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고인은 ‘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이라는 부제의 연재물 마지막회([<한겨레> 6월24일치 31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 사람들 목소리를 듣는 보살이란 뜻이란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또한 그 시대 언론인이었다. 그러므로 한 시대 ‘언론의 자유’는 당대 백성들의 시대적 소망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요즈음 확실히 깨닫고 있다.”

 

한평생 자유언론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지켜온 칠순의 언론인은 2014년 오늘에도 언론의 자유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토로하면서 이렇게 글을 맺었다. “한국의 21세기 시민사회가 언론자유 쟁취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와 복지와 평화로의 새로운 대행진을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 한민족은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의 문명중심지’로 재탄생할 것이다. 한민족의 새로운 역동성에 희망을 건다.”

 

 

- 안창현

 

 

 

 

 

 

언론인 쫓아내고 보도지침 내리고…27년 전과 달라진 게 있는가

 

 

[길을 찾아서]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4)

 

전두환 독재정권이 언론에 보낸 비밀지령문

“신문 제목에 ‘호헌’이나 ‘개헌’이라는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말 것”, “신민당 광주 개헌 집회에서 시위 군중들이 ‘축 직할시 승격’ 아치를 불태우는 장면 사진을 꼭 실을 것”, “‘전국 대학 학생회 사무실을 수색했더니 화염병과 총기 등이 나왔다’는 것을 꼭 제목으로 뽑을 것”, “전방 입소 거부 서울대생 데모 때 분신 사망한 김세진·이재호 사건 보도에는 ‘신성한 병역의무인 입소를 거부하려 한다’고 기사 도입부에 꼭 넣을 것”, “5·3 인천사태 보도에는 ‘학생 근로자들 시위’로 쓰지 말고 ‘자민투, 민민투, 민통련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고 할 것”, “과격한 인천시위는 신민당이 유발했다고 다룰 것” 등등.

 

1986년 9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는 <말> 특집호로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을 발간했다. 전두환 정권의 문화공보부가 신문과 방송에 매일매일 전화로 지령한 10개월간의 보도지침(1985년 10월~86년 8월), 즉 비밀통신문을 요약·정리해 폭로했다.

 

이 ‘비밀지령문’의 원자료는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당시 편집부)가 편집국에서 철해서 보관중인 ‘비밀지령문’을 복사해 민언협에 제공한 것이었다. 김주언과 <말>지 초대 편집차장 고 김도연(당시 민통련 편집실장), 86년 2월부터 민언협 사무차장을 맡은 이석원은 무두 서울대 72학번 민주화운동 동지들이었다.

                   

 

 문리대 화학과 출신인 김주언은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강제징집됐고, 이석원은 75년 봄 박정희 정권이 전국 대학생 수백명을 학교에서 추방했을 때 제적당해 ‘학적 변동자’로 징집됐으며, 김도연은 75년 문리대 ‘오둘둘 시위 사건’으로 감옥에 갔었다.

 

86년 3월 초 셋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김주언이 “문공부의 보도지침 때문에 기자 노릇이 죽을 맛”이라고 푸념하자, 김도연이 “그 비밀통신문을 국민들에게 폭로하자”고 제안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김주언은 야근 때마다 남몰래 보도지침을 복사해놓았다가 두 차례에 걸쳐 김도연에게 넘겨주었다.

 

김도연은 원래 이를 민통련을 통해 폭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석원이 “언론 민주화운동을 맡은 민언협에서 하는 게 더 좋지 않으냐? 우리 쪽에 주면 <말>지에 싣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이던 나는 그 제안을 전해 듣고 “참 잘되었다”고 동의했다. 앞서 얘기했듯, 민통련은 86년 ‘5·3 인천집회’ 이후 공안 당국의 감시로 운신이 크게 부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보도지침 폭로작전’에 대해 일체 모른 척했다.

 

김주언 기자, 고문에 대비 양심선언

 

비밀통신문을 건네받은 민언협은 고 송건호 의장, 고 김태홍 사무국장, 박우정 편집국장, 이석원 사무차장, 신홍범 실행위원, 고 백기범·홍수원·박성득 회원, 최민희 간사 등이 협의해 <말>지 특집호로 내기로 했다. 편집책임자를 홍수원으로 결정해 서울 대방동 기상처 부근의 허름한 2층 건물을 전세 내어 비밀 편집작업에 들어갔다.

 

석달간 진행된 특집호 편집·인쇄·배포 과정에는 박성득·이석원·최민희·한승동(현 <한겨레> 기자)·권오상(전 <한겨레> 기자) 등이 참여했다. 박우정 편집국장과 허정화·정의길(현 <한겨레> 기자)·이근영(˝)·김태광 등은 별도로 월간 <말>의 편집 제작을 진행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보도지침을 폭로했을 때, 김주언을 고문해 “폭로 내용은 허위날조”라고 조작할 가능성이었다. 그즈음 권인숙이 ‘부천서 문귀동 형사의 성 고문’ 만행을 폭로했을 때,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제도 언론’에서 일제히 전두환 독재정권의 편에 서서 ‘운동권에서 성 문제까지 악용한다’고 매도하는 꼴을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비하고자 김태홍·김주언·신홍범은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과 상의한 끝에 김주언이 고 김승훈 신부에게 ‘양심선언’을 한 뒤, 민언협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보도지침을 폭로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

 

마침내 86년 9월6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고 송건호 의장, 고 김인한·최장학 공동대표, 김승훈·함세웅·정호경·김택암 신부가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말> 특집호 ‘보도지침’ 발간을 발표했다.

 

‘보도지침’이란 괴물은 전두환 정권이 언론기본법을 통해 신문·방송에 대한 허가권과 면허취소권 등 무소불위의 권한을 문공부 장관에게 부여하면서 태어났다. 이에 따라 문공부는 81년 초 홍보조정실(85년 홍보정책실로 변경)을 만들어, 88년 초 전두환이 퇴진할 때까지 무려 7년간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 언론을 지배했던 것이다. 86년 당시 홍보정책실에는 실장 밑에 홍보정책관(1명)·홍보기획관(3명)·홍보심의관(1명)·홍보담당관(7명)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언론인 또는 정보기관 출신이었다. 이들은 수시로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와 협의했다.

 

전두환 정권 문공부, 매일 전화 지령
‘절대불가’면 주저없이 빼고 ‘불가’면 미련 갖고 있다 빼고… 언론 허가권 쥐고 권력 휘둘러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 복사해 폭로 .민언협 통해 ‘말’지 특집호에 실어

공안당국, 보도불가 지시하고 압수·수거했지만 2만부 이상 팔려

김태홍·신홍범·김주언 구속되고 국가기밀 누설죄 등 적용

“불낸 자들이 신고자 처벌하는 꼴” 27년 지났지만…‘청영방송’ 현실

<말> 특집호 복사본까지 나돌아

 

<말> 특집호는 ‘보도지침이란 어떤 것인가?’에서, “이 보도지침(홍보조정지침)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하루도 빠짐없이 각 신문사에 은밀하게 시달하는 ‘보도 통제 가이드라인’이다. 보도지침에 ‘가’, ‘불가’, ‘절대(일체) 불가’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구애됨이 없이 ‘절대 불가’면 기사를 주저 없이 빼고, ‘불가’면 조금 미련을 갖고 있다가 빼며, ‘가’면 안심하고 서둘러 싣는다.

 

이런 빈틈없는 지시와 충실한 이행 과정 속에서 우리 주변에서는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작은 것이 큰 것으로,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뒤바뀌는 어이없는 대중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김주언이 제공한 보도지침은 10개월치에 불과한데도 건수는 무려 584개 항목에 이르렀다. “보도지침을 지시 유형별로 보면, 보도 불가가 46.1%, 정권의 홍보성 보도 요구가 24.5%, 축소 보도가 16.1%, 용어사용 불가가 6.9%였다. 이를 다시 지시 내용별로 나누면, 민주화운동에 대한 것이 24.6%, 대외관계가 18.5%, 집권세력에 대한 칭찬 보도가 13.8%였다.”(김정남,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 진실 광장에 서다>, 창비, 2005년)

 

보도지침이 공개되자 공안당국은 김태홍을 전국적으로 지명수배하는 한편, “이 사실을 일체 보도하지 말라”는 또 다른 보도지침을 언론에 즉각 시달했다. 동시에 전국의 경찰력을 동원해 <말> 특집호를 압수·수거하게 했다. 그러나 잡지는 전국의 민주화운동 네트워크와 용기 있는 시민들에 의해 무려 2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나중엔 복사판까지 나돌았다.

 

언론자유 탄압에 국가보안법을 악용하다

 

86년 12월10일 도피 중이던 김태홍이 잡히자, 12일에는 신홍범, 15일에는 김주언이 연행됐다. 박우정은 계속 도피했다. 하지만 아무리 군사독재 시절이라 해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진실”임을 보증한 ‘보도지침 폭로’를 “허위 날조”라고 조작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검찰은 <말> 특집호 기사 중에서 보도지침과 상관없는, 군사관계·외교관계 관련 내용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검찰은 “F-16 전투기 인수식 보도하지 말 것, 미 하원 전문위원 3명 항공기 구입 관련 뇌물공여 조사차 방한 사실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미국 핵무기 실은 전투기 각국 배치 중 한국은 빼고 보도할 것, 북한의 남북한 국회회담 제안 사실을 보도하지 말 것 등 국가기밀이 담긴 보도지침을 폭로했다”며 국가기밀 누설죄를 적용했다. 또 민언협·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 3단체 회원들이 85년 5월 개최한 5·18 광주민중항쟁 5돌 기념행사를 “불법집회”로 몰아 집시법 위반 혐의를 씌웠다.

 

 

 

87년 4월 시작된 ‘보도지침 사건’ 재판에는 당시 정법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민권변호사들, 한승헌·고영구·조준희·홍성우·고 황인철·이상수·고 조영래·김상철·신기하(신민당 의원)·함정호 <한국일보> 고문 변호사 등이 선임계를 냈다. 변호인단의 변론에 밀린 검찰은 애초 제출했던 11개 공소사실 가운데 4개항을 철회하는 이변을 보이기도 했다.

 

■ ‘언론자유’ 특강장으로 변한 보도지침 법정

 

1987년 4월 개시된 보도지침 사건 공판 과정에서 김태홍은 “현 정권은 이 나라 최고의 범죄자다. M-16 들고 미국으로부터 사주받아 정권을 찬탈한 자들이다. <에이피>(AP) 통신에서,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집단은 팔레비의 사바크(이란), 한국의 중앙정보부, 칠레의 정보기관으로 꼽힌다는 보도를 하자, 그 가운데 한국은 빼고 보도하라는 보도지침이 내려왔다”고 증언했다. 김주언은 “가장 큰 문제는 통일에 대한 권력의 태도다.

 

통일 논의가 국민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보도통제로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민족과 국민의 열망과는 달리 비밀로 취급, 권력이 주무르고 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남한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에 대한 정부의 태도다. 만약 핵전쟁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전멸할지라도 보도통제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진술했다.

 

신홍범은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생겨난) 75년 3월은 권력과 신문 기업주가 결탁해 언론을 죽인 ‘한국 언론의 24시’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던 680여명의 기자가 무더기로 쫓겨난 80년 8월을 나는 ‘한국 언론의 25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로부터 7년이 흘러 권력과 언론의 음모의 산물인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하여 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언론의 26시’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또 법정 최후진술에서, “조작된 (남북)긴장을 위해 쓰이는 (국가예산) 5조원을 문화비, 건설비, 공공투자비로 쓴다면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되겠는가?”(김태홍), “언론은 캄캄한 밤중을 달리는 자동차의 전조등과 같다. 그 자동차에는 국민 모두가 타고 있다. 재판장과 우리는 이 자동차의 전조등을 밝혀야 한다고 용감하게 말해야 한다”(신홍범), “우리가 공기 없이 살 수 없듯이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는 살아갈 수 없다”(김주언)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한승헌 변호사는 “보도지침 사건은 불낸 자들이 신고한 사람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꼴”이라고 정리했다.

 

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기 직전이던 6월3일 김태홍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김주언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자격정지 1년을, 신홍범은 선고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 오늘날 언론은 27년 전보다 나아졌는가

 

우리는 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언론자유는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다시 권언유착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한 언론은 박근혜 정권에서는 아예 관변화되고 있다. 특히 방송의 정권 예속화가 심각하다. ‘공영방송’이라고 자부하던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은 ‘청영방송’(靑營放送)이라 불릴 지경이다.

 

지난 22일 63개 언론사 5592명의 현역 언론인들이 시국선언문을 통해 반성과 함께 “오직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정진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뒤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KBS 제2노조)는 23일 “청영방송의 관리자” 길환영 사장의 사퇴와 공정방송 쟁취를 요구하는 파업을 결정했다.

 

방송 민주화 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들과 연대해서 그들을 지켜주는 것, 그것은 국민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언론자유는 언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만있으라’에 굴종하랴?…제3의 시민혁명이 필요하다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8)

 

■ 위기의 한국사회 민주주의

 

지난 6월10일 ‘6월항쟁’ 27돌을 맞은 당시의 항쟁 주역들은 정부 주최의 공식 기념식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의 기념식과 거리행진을 벌였다. ‘6월항쟁계승사업회’를 중심으로 성공회대성당에서 연 ‘민간 기념식’에서 500여명의 참가자 일동은 “다시, 민주·평화·복지를 위한 시민항쟁의 봉홧불을 올리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자 일동은 박근혜 정권이 전교조 등록 무효화, 진보당 해산 기도, 한국사 교과서 입맛대로 맞추기와 수구 기득권층의 친일·독재 행적 삭제, 거듭되는 파당적인 소통부재 인사정책 등을 지적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 기간사업의 민영화, 규제완화 정책 등을 비판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손배소나 업무방해 등 반민주적이고 야만적인 악법으로 탄압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규탄했다.

 

무엇보다 ‘6월항쟁’의 주역들은 수십년간에 걸친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물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자리마저 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지지자를 지명함으로써 사유화하려는 데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는 ‘제왕 주권’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민들이 “왕의 전쟁, 왕족의 사치를 위한 중과세를 감당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내전이 일어났고, 절대왕정은 무너졌다. 이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자유론’이 탄생했다.

 

특히 1789년 프랑스혁명은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인쇄할 수 있어야 한다”(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1조)고 선언하고,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등을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권’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혁명은 또한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제3조)고 하여, “왕권신수설”을 거부하고, “국민주권론”을 채택했다.

 

언론의 자유가 시민 민주주의와 쌍생아인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 국민들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졌나

 

저널리즘은 ‘육하원칙, 즉 누가 언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육하원칙에서 ‘누가’라는 주인공을 그릇 선택하면 ‘언론의 자유’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보도의 주인공이 권력자나 관료냐, 아니면 국민이냐가 권위주의 사회와 시민 민주주의 사회의 갈림길이다.

 

이러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6월항쟁’ 이후에도 시민을 뉴스의 주인공으로 삼기를 거부해왔다. 일제강점기에 언론은 “일본 천황이~”, “조선총독부는~” 식으로 뉴스를 시작해 늘 주인공은 식민 지배자들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 뉴스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정부 당국자는”, “검찰은”, “경찰은”, “집권 여당은”…, 독재자와 그 하수인인 관료들이 주어였다. 그렇다면 87년 이후 뉴스의 주어가 바뀐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으로는 없다. 아니 오히려 재벌기업의 목소리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6월항쟁’ 이후 우리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줄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요즈음에도 유권자들은 고작 선거 때나 잠깐 주권자 대접을 받고 있다. 선거가 끝나면 정당과 정치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약속을 까먹고 이해관계자들하고만 어울린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는 결코 주권자가 되지 못하고, 관료 독재와 천민 자본가의 노복이 된다. 그리고 언론은 늘 변함없는 정경유착의 충실한 동맹자였다.

 

6월항쟁은 ‘제왕주권’ 물리쳤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마저 박근혜 지지자로 사유화 ‘절망’

일제 해방 뒤 되찾은 ‘국민주권’ ‘4·19’ ‘6·10’ 거치고도 허울만
권력은 선거 때만 주권자 대접 ..언론은 한번도 ‘시민은…’ 주어 안써

‘청영방송 해바라기’ 길환영 몰아낸 ..KBS 사태 언론자유 중요성 보여줘
국민주권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 핵심은 ‘국민주권’운동이다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잠시 되돌아보자. 우리는 구한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주자학의 ‘민본주의’를 내세운 조선왕조는 실제로는 관료독재 사회였다. 관리들과 아전들, 지방 호족들은 착취를 일삼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헐벗었다.

 

박석무는 <다산 정약용 평전>에서 1797년의 ‘이계심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계심은 곡산 백성이다. 아전이 농간을 부려 200냥 세금을 900냥이나 거두자, 이계심이 백성 1000여명을 인솔하고 관청에 들어와 항의했다. 아전과 관노비들이 몽둥이로 쫓아내자 달아났다.” “다산이 곡산부사로 부임할 때, 정승 김이소 이하 여러 대신들이 주동자 몇 놈을 죽이라고 권했다.” “다산이 곡산 땅에 이르자 이계심이 자수했다. 이계심은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10여 조목을 기록해 올려 바쳤다.” “다산은 이렇게 판결했다. 피고인 이계심은 무죄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약용 같은 목민관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던 이계심은 목숨을 건졌지만,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던 ‘수십만의 이계심’은 개혁 대신에 외세를 끌어들인 조선왕조로 하여 목숨을 잃거나 야반도주했다. 당시 조정에는 정약용 같은 목민관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백성들의 일부는 하와이로, 멕시코로, 만주로, 시베리아로 흘러갔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그곳에서도 천대받았다. 시베리아 이민자 20여만명은 스탈린 시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는 신세가 되어 사막에 내버려지기도 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

 

.조선조는 끝내 나라를 잃었고 한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노예가 되어 100만명 이상이 일본 군수공장으로, 사할린으로 징용당했고, 무수한 학생들이 징집되었으며 처녀들은 일본 군인들의 성적 노예로 강제로 끌려갔다. 조선 땅에 남은 사람들은 ‘공출이다, 부역이다’ 하여 일제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병참 노예가 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 한민족은 남북 분단의 비극, 한국동란의 비극을 겪어야 했고, 400만명이 희생됐다. 이 분단과 전쟁의 한민족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건진 것이 있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며 ‘국민주권’을 국가이념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사는 헌법 조문으로만 존재하던 ‘국민주권 사상’을 일상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시민행동’이었다 할 수 있다. 이승만 독재를 타도한 60년 ‘4월혁명’은 최초의 국민주권운동이었다.

 

26년 동안의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끝에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라는 구호를 앞세워 대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87년의 ‘6월항쟁’은 제2차 국민주권운동이었다. 그러나 ‘6월항쟁’은 ‘제왕주권’은 물리친 것 같았으나 ‘국민주권’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사회는 원래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상과 이데올로기, 학문, 종교의 다양성을 혼란과 무질서, 정쟁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에서는 결코 시민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없다.

 

 

 - 성유보 (필명 이룰태림·71)

 

 

 

ⓒ 한겨레 ( http://www.hani.co.kr/)

 

 

 

 

 

 
 
 

인물과 사상

U2 2014. 8. 20. 19:55

 

 

 

 

'자유를 향한 긴 여정' 마친 넬슨 만델라

 

 

 

 

 

 

 

 

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미국인들에게 50년 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마틴 루터 킹이 있었다면, 만델라는 그 꿈을 실현시킨 ‘세계인의 마틴 루터 킹’이었다. 만델라의 타계는 한 정치인의 사망을 넘어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한다.

만델라가 일생을 바쳐 싸웠던 대상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만이 아니라 인종차별, 식민주의의 잔재, 냉전 체제와 반공 논리, 권력을 가진 자들의 폭압 등 20세기의 모든 모순들이었다.

모든 영웅에게는 적이 있게 마련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그에게 적은 없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적들도 끌어안을 수 있음을, 그리하여 적 또한 벗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프레데릭 데클레르크가 만델라가 출감한 뒤 1994년 흑인정권을 출범시키자 스스로 부통령으로 내려앉아 만델라를 도왔던 것이 바로 그런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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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클레르크는 만델라 타계 소식에 “우리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할 수 있었고, 협상을 통해 숱한 위기들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며 한때의 적이자 동지였던 고인을 애도했다. 만델라는 흑인들뿐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종 모두에게 칭송받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변호사에서 정치 투사로

 

만델라는 1918년 이스턴케이프주 트란스케이 지역의 작은 마을 쿠누에서 태어났다. 트란스케이는 남아공의 주요 부족 중 하나인 코사족의 자치지역 중 하나로, 백인 분리주의 정권 시절에 백인들이 만든 코사족 ‘괴뢰정권’이 세워졌던 곳이기도 하다. 만델라는 이곳에서 코사족의 한 갈래인 템부족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델라는 헤알트타운의 기독교 감리교계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 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인 올리버 탐보를 만난다. 대학 생활 첫 해가 끝나갈 무렵 만델라는 학교 측의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회 싸움을 이끌다가 퇴학당했다. 이후 부족의 부름을 받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쳐나왔고, 광산 감독관으로 잠시 일하다 변호사 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를 고용한 변호사 월터 시술루는 만델라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평생의 동지가 됐다. 시술루의 영향으로 만델라는 남아공대학과 비트바테어스란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됐다.

“나의 인생은 투쟁이었다”는 말은 그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28년간의 감옥생활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는 흑인들과 백인들 모두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 이끌어가기 위해 싸웠다. 그를 본격 정치투쟁에 끌어들인 것은 1948년의 총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주도하는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극악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시작됐다.

 

만델라는 1952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고, 1955년에는 인종차별 철폐투쟁의 이념적 기반인 ‘자유헌장’을 발표하며 인종차별 이데올로기에 맞섰다. 동시에 만델라는 탐보와 함께 ‘만델라&탐보 법률회사’를 만들어 저소득층 흑인들을 위한 법률구조활동을 펼쳐 신망을 쌓았다.

이 시기 만델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비폭력 투쟁을 실현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였다. 당시 남아공에는 큰 규모의 인도계 공동체가 있었다. 만델라는 2007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사티야그라하(비폭력불복종운동) 100주년 기념축제에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해 간디를 기리기도 했다.

민족회의는 백인정권의 극심한 탄압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1950년대 말이 되자 민족회의는 정치적 기로에 놓였다. 앨버트 리툴리와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 등 당시 지도부가 주도한 온건 노선에 젊은 당원들이 반발한 것이다.

컬러드(아시아계 유색인종)와 인도계, 공산당을 비롯한 백인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에도 균열이 왔다. 이 때 당의 일신을 위해 새 지도자가 된 인물이 만델라였다. 만델라는 1961년 무장분과인 ‘움콘토 웨 시즈웨(MK·국가의 창)’를 창설하고 사보타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노선은 대체로 비폭력 정치투쟁에 맞춰져 있었다.

■감옥에서의 28년

1962년 만델라는 체포돼 불법파업을 일으킨 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요하네스버그 북쪽 리보니아에서 민족회의 지도부가 대거 붙잡혔다. ‘리보니아 재판’으로 알려진 기나긴 법정투쟁의 시작이었다. 이 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만델라의 인생에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격동의 시기였다. 이 때 만델라는 두번째 부인이 된 위니 마디키젤라를 만났다. 지금도 민족회의 산하 여성 조직을 이끌고 있는 위니는 만델라의 아내이자 투사 동료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동지적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만델라가 수감된 뒤 위니는 남편 대신 정치투쟁에 나서 민족회의 최고위 여성정치인이 됐지만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남성 편력과 살인·폭력교사 등의 혐의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만델라는 옥중에서 위니에 대한 소문을 접하면서도 언제나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교도관들은 내 귀에 ‘위니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속삭이고 가곤 했다. 어떤 날은 위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실린 신문기사를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위니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던가를 생각하면서 이해하려 애썼다. 그녀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나이였다. 내가 수감돼 있는 동안 민족회의에서 나의 영향력을 유지시켜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위니였다.”(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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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에서의 17년을 비롯해 만델라는 28년을 창살 안에서 보냈다. 옥중에서 그는 공부를 하고, 동지들과 미래를 향한 토론을 하고, 젊은 흑인들을 가르치고, 무지한 백인들조차 교화시켰다. 만델라는 자서전에서 “수감생활을 견뎌내기 위해 동지들과 온갖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며 “아프리카에도 호랑이가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토론한 적도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뒷날 그는 옥중에서 취미로 삼았던 화초 재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역사적인 흑인 대통령

만델라의 싸움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석방 캠페인이 펼쳐졌다. 서방국들도 서서히 백인정권에 등을 돌렸다. 국제사회의 금수조치에 경제가 휘청이고 백인들 사이에서조차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대가 커졌다. 1989년 대통령이 된 데 클레르크는 백인정권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옥중의 만델라와 협상했다.

1990년 2월 마침내 만델라가 석방됐다. 하지만 그 후 몇 년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백인 강경우파들은 반발했고, 만델라와 민족회의의 투쟁을 물밑 지원했던 많은 백인들은 기쁨 속에서도 정치적 동요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갑자기 기세를 펴게 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갈등과 다툼이 빚어졌다. 특히 민족회의의 주축이면서도 흑인 중에서는 소수파인 코사족과, 흑인 주류를 차지하는 줄루족 간 충돌이 일어났다. 망고수투 부텔레지가 이끄는 줄루 정당 잉카타자유당과 민족회의 사이의 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994년 총선에서 민족회의는 62%의 표를 얻어 제1당이 됐다. 만델라는 흑백 합의로 이뤄진 새 헌법에 따라 의회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됐다. 자칫 대규모 유혈사태나 내전으로 갈 수도 있었던 혁명적인 시기를 비교적 안정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만델라의 굳은 의지와 지도력 덕분이었다고 남아공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기대 속에 집권한 그에게는 인종차별의 상흔을 치유할 책무가 있었다. 만델라의 남아공은 다인종·다민족이 공존하는 ‘무지개 국가’를 슬로건으로 삼았다. 그는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만들어 과거사 규명에 들어갔다. 민족회의 정부는 또 흑인경제력강화(BEE)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수탈당하던 흑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줌으로써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만델라는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1999년 퇴임했다. 물러난 뒤에는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던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서방과 협상할 수 있도록 중재하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등 평화의 메신저로 활동했다. 남아공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에이즈 문제와 싸우기 위한 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자유를 향한 만델라의 긴 여정은 이제 끝났다. 그의 이상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고, 남아공은 여전히 숱한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뒤에 남은 세대들에게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구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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