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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 2015. 12. 28. 11:45

 

 

 

 

 

응답하라 1988 보라가 ‘정권 퇴진’을 외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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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보는 1988년 ①] ‘1980년대’가 만든 대학생들과 미래

 

매주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최근 드라마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캐릭터가 등장한다. 공부를 유달리 잘한 덕에 1987년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하는 ‘열혈 운동권’ 성보라(배우 류혜영)가 그 주인공이다.

 

다만 <응답하라 1988>을 이루는 두 축은 성덕선(배우 혜리)의 남편 찾기와 따뜻한 가족 이야기인 탓에 성보라의 대학생활이 그리 비중 있게 나오지는 않는다. 보라가 민정당사 점거농성에 참여해 부모와 갈등을 겪는 등 몇몇 장면에서 시청자들이 알아챌 수 있는 정도로만 노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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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골목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이자 부모가 “너만 믿고 산다”는 말을 할 정도로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보라는 왜 <민중의 함성>, <한국 민중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을 읽고, 정권 퇴진을 외치며 위험한 시위 현장에 그렇게 자주 나가야 했을까. 198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는 당시의 대학생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독재 청산’과 ‘민주화’ 열망 폭발했던 시기

 

1980년대는 말 그대로 혼란과 격동으로 점철됐던 시기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쏘아 죽인 1979년 10·26 사태로 무너지는 줄 알았던 독재정권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전두환은 단숨에 군권을 장악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한 후 시국을 수습했고 7년간 대통령 자리를 꿰차고 있다가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절친’ 노태우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1988년을 배경으로 하는 극중에서 보라는 대학교 2학년이다. 보라가 대학생이 되던 1987년 역시 한국 현대사에 획을 긋는 굵직한 시국 사건들이 많았다. 그 해 1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심한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한 경찰의 해명은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고, 그리하여 ‘박종철 정국’이 시작됐다.

 

야권과 시민운동단체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론악화를 우려한 전두환 정권은 모든 개헌 논의를 불허하는 조치를 내렸지만, 박종철 사건을 축소 및 은폐하려고 했던 계획이 뒤늦게 드러나 ‘개헌 요구’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여기에 <고문살인 은폐 규탄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진행된 시위에서 연세대생 이한열 씨가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의 폐해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고 자연히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전두환 정권과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결국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내놓는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과정의 희생으로 얻어낸 직선제는 만병통치약이 되지 못했다. 양김(김영삼-김대중)이 분열해 각각 선거에 나와,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로 1987년 대선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보라와 보라의 친구들이 고민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라의 입장에서 보면,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선배들이 독재 청산을 앞장서 주장하다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새내기 시절에 연달아 목격한 셈이다. 그러니 보라의 마음 속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렵지 않게 피어났을 것이다.

 

특히 그가 속한 서울대 학생들의 마음의 빚은 더 컸을 수 있다.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쿠데타에 명분을 줄 수 있다며 시위대 자진 해산 결정을 내린 ‘서울역 회군’의 주요 멤버 역시 서울대 출신이었다.

 

이들의 결정은 결국 광주에서 비극이 일어나는 하나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당장 투쟁에 나서기보다는 ‘운동’을 잘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게 먼저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던 그들에게 앞서 두 사람의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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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만이 참여한 대규모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도 세상은 꽤 더디게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였던 1987년 대선 결과는 보라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을 것이다. 직선제라는 제도를 쟁취했음에도 민주화 세력이 분열해 신군부의 통치를 연장하는 등 쉽게 나아지지 않는 정치 상황은 더욱 더 그를 운동(movement)에 매달리게 하는 동력이었을 수 있다.

 

예상대로 노태우 정권은 5공 청산에 소극적이었고 그 덕에 대학생들의 시위도 끊일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나 운동하러 갔어요”, “엄청 잘 도망 다녀요”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남동생의 말처럼 보라는 또래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보라와 보라의 친구들이 주목했던 문제는 ‘5공 청산’만이 아니었다.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 역시 보라를 설명하는 중요한 특성이다. 본의 아니게 ‘열혈 운동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부모와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민정당사 점거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1988년 11월,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과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산하 애국결사대 소속 대학생들은 △전두환-이순자 부부 구속 △공범인 노태우 정권 퇴진 등을 주장하며 가락동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본관 옥상에서 농성을 벌였다. 극중 보라도 ‘민정당사 점거 사건’의 주요 참가자로 나오는데 이때 보라의 친구가 요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광주학살 배후 조종자 미국에 대한 응징’이었다.

80년대에는 1980년 12월 광주 미 문화원 방화, 1982년 3월 부산 미 문화원 방화, 19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 폭탄 투척, 1985년 5월 서울 미 문화원 기습 점거 등 반미 정서를 바탕으로 한 각종 사건이 이어졌다. 신군부가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미국이 방치하고 묵인했다는 이유였다. 군부독재정권이 친미 성향을 보였고, 대중들이 이런 정권을 반대하는 것을 곧 ‘반미’로 인식한 시대적 상황도 한 몫 했다.

독재자의 죽음이 곧 독재정권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대학생들은, ‘다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 아래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맹렬히 토론하기도 했다. 역량을 축적한 후 운동에 나서자는 무림파와 조직적 투쟁이 우선이라는 학림파의 무림-학림 논쟁부터 NL-PD 대립까지 80년대 내내 각기 다른 이념을 견주는 학술적 논쟁이 벌어졌다.

정파에 따라 사회 현안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랐다. 1980년대의 가장 큰 국가적 행사였던 88 올림픽 개최에 대해서도 여러 사회모순을 촉발한다는 이유로 아예 반대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평화 올림픽’,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를 주장하는 입장도 있었다.

보라의 동생 덕선이 올림픽 피켓걸 연습을 하면서 자신을 건드리자 “정부의 우민화 정책(Sports, Sex, Screen 앞 글자를 따 3S 정책이라고 불렸음)에 놀아나고 있다”며 “올림픽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철거민이 생겨났는지 알아?”라고 일갈한 장면은, 보라가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철거민 이야기를 하기 전 보라가 읽고 있던 책은 도시 빈민층의 애환을 담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거칠게나마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캐릭터 ‘보라’

 

그렇다면 이렇게 ‘운동’에 몸을 던졌던 보라는 자라서 무엇이 되었을까. 10화까지 진행된 극중 배경이 여전히 1988년이라, 보라는 아직 대학 2학년에 머물러 있지만 ‘유추’는 가능하다. 시청자들이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점치는 미래는 ‘국회의원’이다. 실제로 학생운동을 하다 정치권에 발을 디딘 인물이 많기 때문이다. 주요 배역들이 판사, 대선 후보, 의사 등 사회 요직을 꿰차는 인물로 그려진 역대 <응답하라> 시리즈의 전통(?)을 고려해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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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보라는 서울대 사범대 출신이라는 점에서 정의당 심상정 대표를 모델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심상정 대표의 경우 학생운동을 하다 현장에 위장취업해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후 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장기간의 수배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보라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이름있는 노동운동가로 성장하고 이후에 정치권에 진입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심상정 대표처럼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과 같은 제1야당에 합류한 전대협 세대의 뒤를 따를 수도 있다. 현실에서 보자면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인영, 오영식, 우상호 의원이나 임종석 전 의원과 같은 사례다. 아니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생각으로 새누리당과 같은 여당에 몸을 던질 수도 있다. 민중당 실패 이후 문민정부 시절의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던 이재오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길을 걸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유지해 시민운동가 또는 노동운동가로 남을 수도 있다.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서 성장해 정치권을 좌우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고, 민주노총의 주요 인물이 돼 종교시설로 도피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사범대로 방향을 틀었지만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학업성적이 좋았던 것을 감안하면 교수나 법조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무사히 사범대를 졸업해 교사가 될 수도 있겠다. 교사가 되었을 경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할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응답하라 1988>는 극의 중심이 되는 쌍문동 5인방도 아니고 여주인공 덕선의 친언니라는 설정임에도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밝고 사랑스러운 여성’이라는 클리셰를 뛰어넘어, 1988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만 가능한 특징과 그에 따른 자신만의 서사를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보라는 읽고 있는 책, 외치는 구호, 듣는 음악, 학교 안팎에서의 모습 등으로, 굳건한 신념 아래 공부와 투쟁 활동 모두에 열심인 ‘운동권 대학생’이라는 캐릭터를 시청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렇게 보라는 거칠고 서투르게나마 과거(1988년)와 현재(2015년)의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김수정

​ⓒ 미디어스(http://www.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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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엄마의 희생, 대학생 성보라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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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학생과 엄마, 희생의 숭고함 일깨워주다

​tvN <응답하라 1988>에서 성동일의 큰딸 성보라(류혜영 분)는 그 시절 많은 대학생이 그랬듯이, 운동권 학생이다.

 

없는 집안에서 용케 서울대에 들어간 그는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기대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열망에 따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섰다가 비밀 경찰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뒤늦게 보라가 데모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성동일과 이일화는 눈이 뒤집어진다. 안다. 딸 보라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가면 반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기에 행여나 딸이 잘못될 까 봐  부모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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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방송된 <응답하라 1988> 7회의 또 다른 테마는 '희생'이었다. 첫 번째 '희생'은 가족을 위해 무조건적인 헌신을 베푸는 어머니들의 이야기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 속에서도 아이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우 엄마(김선영 분)에게는 온전한 양말 한쪽조차 없다. 죄다 헤지거나 구멍이 송송 뚫렸다.

 

선우네보다 형편이 나은 정환이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여보, 엄마를 찾는 세 남자 때문에 정봉 엄마(라미란 분)는 쉴틈이 없다. 여기에 보라 엄마(이일화 분)는 큰 딸이 민주화 운동에 연루되어 있어 속이 말이 아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 모든 엄마는 슈퍼맨이라고. 본래 이름 대신 '누구 엄마'로 더 많이 불리는 그녀들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는 가족이다. 때로는 몇몇 엄마의 과도한 자식 사랑이 지탄을 받을 때도 있지만, 엄마의 사랑과 희생이 있기에 세상 모든 아이들이 큰 걱정 없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응답하라 1988>은 1980년대 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숭고한 희생을 말한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고 하나, 서울의 주요 거리에는 최루탄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절반의 민주화 성공. 그래서 대학생들은 끊임없이 거리에 나서 진정한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을 표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갈 것 같은 두려움, 힘들게 들어간 학교에서 제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자신 때문에 속 끓일 부모님 등이 생각났겠지만 1980년대의 성보라들은 걱정과 고민을 뒤로 하고 용감하게 거리에 나섰고, 싸웠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대한민국은 어느 정도 민주화의 과실을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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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이 27년 전의 시대상을 소환하는 방식은 상당히 감상적이다. 가족, 이웃 간의 사랑이 전면에 등장하며, 웬만한 문제는 가족의 이름으로 용서되고 해결된다.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결국 철창 신세를 지게 된 성보라 또한 딸을 대신하여 경찰과 합의를 보고,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딸을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또한 너그럽게 감싸는 부모의 사랑으로 일단락된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봉합일 뿐, 어느 것도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없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은 그 시절 어두웠던 시대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1988년 서울 변두리 골목에서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 픽션이다. 전반적인 시대 분위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붙어져 새로운 에피소드가 만들어지는 만큼, 1988년을 대표하는 어떤 이야기가 등장할지는 철저히 연출자와 작가의 마음에 달려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응답하라 1988>은 최루탄 가스에 힘겨워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웠던 청춘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온몸을 내던진 어머니의 희생과 결부되어 더욱 뜨거운 눈물과 감동을 자아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잡혀갈 위기에 처한 대학생의 위기와 딸의 체포를 막고자 폭우 속에서도 애걸복걸하는 엄마의 눈물. 그 한 장면에 서울 올림픽, 유례없는 경제 호황기에 가려진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응답하라 1988>은 가족을 위해,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많은 보라 엄마와 성보라를 호명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이들의 노력과 일련의 변화에도 결국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과 다름없이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여전히 우리는 1980년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비록 많은 것들이 예전 그대로 돌아갔다고 하나,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1988년을 빌려, 2015년을 사는 우리에게 희생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는 <응답하라 1988>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 권진경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

 

 

 

 

 

 

 

 
 
 

시사브리핑

U2 2015. 12. 20. 00:02

 

 

 

 

 

YS 재조명에 더 도드라지는 '불통 박근혜'

 

 

 

김영삼 전 대통령(YS) 서거를 계기로 진행되고 있는 YS 공과(功過)에 대한 ‘재조명’ 작업 귀착점이 박근혜 대통령으로 향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과 역사 바로 세우기, 통합의 마지막 메시지, 이념·계파를 뛰어넘는 인사 스타일 등이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이나 리더십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면서다. 김 전 대통령의 공과를 이야기할수록 박 대통령의 과(過)가 도드라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은 이들은 고인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가장 많이 입에 올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 발전과 자유·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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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도 주목받고 있다. 친일잔재 청산,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성격 규정,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세력 처벌 등 일련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재임 중 최고 치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평가는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인권 가치가 훼손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역사 후퇴’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을 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인사 스타일도 재조명되고 있다. 고인은 다른 사람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반대 의견도 수용하는 유연성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야당 대표와 10차례 단독회담을 갖기도 했고, 공약 파기나 대형 참사 등에 대해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만사’라는 신조 아래 폭넓게 인재를 발탁했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아예 ‘불통 정부’라는 낙인이 찍힌 상황이다. 반대 의견을 설득하고 대화하기보다 국정과제라는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가 하면, 반대 의견을 아예 ‘비애국’으로 몰아치는 편 가르기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인사의 경우도 집권 후반부로 갈수록 ‘코드’나 충성심을 중시하고, 특정 지역 편향이 도드라지고 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지난 24일 TBS라디오에서 “박 대통령께서도 (김 전 대통령처럼) 좀 그렇게 개방된 자세라고 할까, 마음을 열어놓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훨씬 국정을 수행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소통 없는 독단’ 리더십은 갈수록 심화하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24일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노동구조 개편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비난하면서 테러집단인 ‘이슬람국가(IS)’에 비유했다. 국회를 향해서도 ‘위선’ ‘립서비스’ 등 날선 비난 발언을 쏟아냈다. 국민·국회를 향해 대결정치를 선언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양김’ 이후 우리 사회가 그들의 리더십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정치 리더십은 후퇴해온 단면을 확인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국정 난맥상, 대통령이 국민 분열에 앞장서는 모습 등 박근혜 정부의 퇴행적 측면에 국민들이 시달리다보니 개혁·소통 등 YS 리더십이 재조명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김진우·박순봉

 

 

ⓒ 경향신문 ( http://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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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김영삼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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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안타깝지만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데 커다란 공이 있는 김영삼 대통령이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전직 대통령 가운데 죽음이 안타까운 이는 없다. 가장 보기 좋은 사진 하나 퍼왔다. 이런 다정한 모습이 오래 이어졌다면 오늘날 우린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여기 저기에 김영삼 대통령을 기리는 글이 많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다. 다른 모습은 내가 어릴 때라 잘 모르고 또렷이 기억하는 모습은 6월 항쟁으로 얻어낸 절호의 기회를 욕심으로 날려버리고 결국은 노태우의 품으로 들어가 버린 모습이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도 대권에 대한 욕심으로 민주화를 가로막은 책임이 크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있을 때 추진한 개혁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를 동서로 갈라버린 일은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분명히 경상도에도 군부독재보다 민주화를 바라는 이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 어디에 있는가? 평소에 즐겨 썼다는 대도무문 글귀대로 조금더 기다렸더라면 오늘 문상객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어디 김무성이나 서청원같은 자가 상주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노무현이나 김상현처럼 멋진 이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 없는 일이다. 어쩌면 3당합당을 하지 않았다면 노태우를 이어 또다른 군인이 대통령을 했을 수도 있다. 하나회 숙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준  전직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이명박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를 보면 알 수 있다.

 

새누리당 안에서 김영삼을 정치적 스승으로 여기고 있는 이들은 적어도 지금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아야 한다. 세월호에도 눈물은커녕 조롱을 해대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에게도 막말을 해대면서 정치적 아들이라며 상주 타령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

 

김영삼 대통령은 암울한 시절에도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기회를 엿보며 자리만 탐하는 자로 기억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차남 현철씨도 김무성은 집에 가서 쉬라고 내보내는 것이 아버지를 위해 좋은 일임을 알아야 한다.

 

한때 민주화의 한축을 이끌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빈소에 기회주의자들이 큰소리 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 김영삼이 불쌍하게 여겨진다. 왜 그를 존경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민주화 투쟁을 이야기할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뒤로 돌리는 일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두환을 추앙한다는 일베들은 김영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당신들이 누리는 자유도 대부분 전두환이 아닌 김영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남긴 말을 덧붙인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1979년 10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중략)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1993년 취임사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1998년 2월) 퇴임사

 

마지막으로 제발 백남기님의 안타까운 희생이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중대회가 열리는 날은 프랑스에서 테러가 벌어져 묻히더니 이제 김영삼 대통령 서거 이야기로 모든 것이 묻히고 있다.

 

​*오마이뉴스 블로그:  이야기 만들기 (http://blog.ohmynews.com/partisan69/18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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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서거를 통해 본 '박근혜 문재인 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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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타임즈 사설의 박근혜 독재 비판과 질타는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재벌 오너들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하는 노동개악과, 유해물질이 섞인 물대포 직사 사태의 시위진압, 국정화 교과서 언급과 더불어 인터넷 통제 등의 언론자유 문제까지 거론한 것이다.

 

우연찮게도 이날은 36년 전 뉴욕타임즈가 김영삼 야당 총재의 박정희 비판 인터뷰 기사를 보도한 날짜였다고 한다. 김영삼 야당 총재는 이로인해 박정희로부터 부당하게 의원직 제명을 당했고 그 후로 김영삼은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급상했다.

                   

 

 

뉴욕타임즈의 박근혜 비판 보도 이후 연이어 들려온 소식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 여러 논란을 낳은 양김 정치였지만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권에 쌓아온 민주주의 역사를 꺼꾸러 되돌리는 박근혜의 독재적 강화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작금이다. 이명박과 더불어 반드시 청산되어야할 비정상적 역주행이다

 

비록 3당야합의 김영삼이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 초반에 보여준 일련의 통쾌함들은 잊을 수가 없다. 1992년 야당의 대선 패배에 낙심한 김대중 지지자였지만 대선실패 이후 응어리진 모든 것이 풀려지고 보상 받은 듯, 김영삼의 개혁에 응원을 보낸 기억이 새삼 떠오르게 된다

 

전광석화 같은 추진의 금융실명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공직자 재산공개, 전두환의 군 사조직 '하나회' 척결,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을 가능케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영삼의 공적이다.  호랑이를 잡으려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3당합당 명분을 위해 보여준 것이었다

 

특히나 하나회 척결에선 아직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아침 운동으로 역기를 들면서 기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의원을 할때 국방위 소속임을 잊었나"며 군에 대해 모든 것을 뚫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뭔가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멋있는 대통령으로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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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도는 영국에서 귀국한 김대중 전 총재의 응원 이후로 90프로의 지지도를 얻기까지 했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흔들기를 경계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개혁에 힘을 실어주던 김대중 야당총재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국민통합이라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권초기 개혁의 경우처럼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민주야권이 아닌 보수정권의 수장이 야당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여 추진할때, 비록 그 동기가 다른 데에 있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국민이 원하는 민심과 일치하게 된 김영삼의 통쾌한 행보였다.

 

물론 하나회를 척결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이 아니라 김영삼이기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고 추진했더라면 오히려 기득권층 세력의 크나큰 저항의 반감에 의해 머뭇거리나 어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김대중 아니면 김영삼이 당선되는 92년 대선이었기에, 여권의 김영삼이었기에 하나회 똥별들이 수긍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역설적 구조들은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의 3당합당이 군부독재 세력들에게 기고만장하게한 결과들이다. 3당합당 없이 당시의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다시 합심을 했었더라면 민정당 군부 세력이 무슨 얼굴을 들고 감히 저항하였겠는가.  고개를 수그려도 모자랄 상황을 바꾸게한 3당합당이 문제의 근원인 것이지, 김대중 전 대통령 추진 여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김영삼의 역사 바로세우기가 당내 헤게모니 차원에서 장악하려한 동기에서 그랬든 아니었든, 김대중 아니면 김영삼이 당선되는 92년 대선이었기에, 여권의 김영삼이었기에 하나회 똥별들이 수긍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에 비해 박근혜는 어떠한가?  국민을 이분법화시키다못해 양김이 쌓아온 민주화의 역사를 허무는 독재화가 진행중이다. 김영삼의 독재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도 스스로 뒤집는 김무성 박근혜의 모습이 지금 현실이다.

 

이명박 정권의 잘못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MB의 방송장악 상태를 그대로 수용했다. 복지와 경제민주화 등의 약속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세월호 진상규명 방해와 간첩조작, 언론악법 등도 모자라 친일독재 미화의 국정화 교과서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박근혜에게는 박근혜가 무엇을 하든 지역주의 정서와 과거향수로 지지하는 30프로의 고정 지지층이 있다. 이런 속에서 야당이 원하는 정치, 야당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정치를 했다면 야당 지지층도 긍정할 수 있는  매우 높은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새누리당 정권의 지지도 상승 조건은 야당보다 유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유신 향수의 과거회귀 세력과 뉴라이트 친일, 1퍼센트의 기득권층 이익에 매몰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야당의 문재인 대표는 높은 지지도를 이끌 조건이 충만함에도 야권 지지층의 다양함과 까다로움, 그리고 지역주의 정서 잣대 작동으로 그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 

 

호남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보수세력의 가치를 포용할 수구보수세력의 가치가 우리나라엔 없어 광폭행보의 끈덕지가 보이지가 않는다.  무턱대고 보수의 가치를 수용하다간 야당 지지층의 외면을 받기 십상인 상황이다.  결국 진보개혁의 가치를 어떻게 확장하고 긍정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프레임 능력 창출이 야당 정치인에게 필요하게될 노력이다

 

문재인 대표에 대한 호남 정치인의 이유 없는 이유의 흔들기를 보면서 87년 양김분열 당시 김영삼의 심정도 이해가 될 만도 하다. 2000년 들어서도 호남내의 보수 정치인의 텃새도 이렇게 심각할진데 87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변 동계동계 인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트집이나 꼬투리들이 얼마나 심각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3당합당 거부 전력의 노무현 - 친노임에도 끊임없이 흔들고 부정하는 모습에선 보수적 한계의 지역주의 정서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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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오늘날 지역주의 정치구도 문제에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야합한 3당합당이었지만, 호랑이만 잡았지 호랑이 새끼들과 함께한 야합은 근본적인 개혁을 할 수 없는.. 오히려 호남 대 비호남의 지역주의 구도 고착에 기여하기만 했다.  부산 경남의 야성 상실 상태는 매우 명확했으며 그 이후로 변절의 기회주의자들만이 득실거린 정치가 되어 버렸다

 

부산 경남의 일부 시민들은 김영삼의 독재청산으로 과거의 민정당과 다른 한나라당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독재청산이 완전치 못하게한 3당야합이었으며, 그 이후 그들의 지역주의 망발과 수구적 언행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주의 역행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낳기도 했다   

 

새누리당 YS계의 김무성, 서청원의 못난 모습도 3당합당이 낳은 유산이다. IMF를 초래한 재벌 거품경제, 노동법 개악 등도 근원적 개혁을 할 수 없는 3당합당의 한계였다. 노동법 개악이 IMF로 연결된 모습들이 노동개악 박근혜와 유사한 것으로 보여 걱정이 되는 지금 모습들이 3당합당에서 이어져온 결과들이다 

 

97년 이 당시 노동법 개악 정국에서는 'MBC FM 방송 DJ'들도 비판의 멘트를 날릴 만큼 방송계의 민주주의의 뿌리가 매우 깊었는데 지금의 방송들은 하나같이 관제화 속에서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 역주행 박근혜 정권을 탄생하게한 그 원흉도 김영삼의 3당합당으로부터 내려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가끔 오늘날 야당의 무기력함을 보면서 때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총재 당시의 투쟁력이 떠오르기도 한다. 민추협 사건 당시 민추협 건물을 둘러싼 경찰력에 맞서 5시간을 대치한 일화의 김영삼이기도 하다. 

 

김영삼은 또한 고향 거제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집안이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투쟁할 때는 투쟁을 아끼지 않았다. 단식 투쟁의 김영삼 모습도 지금도 기억되는 그의 승부수였다. 87년 이한열 열사에 대한 추모 및 시위 행렬에서도 당당하게 거리로 나와 함께 섞여 위로하기도 했다. 

 

힘이 없는 야당이지만 그것이 권력욕이든 아니든, 김영삼은 눈 앞의 막막한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저돌성이 돋보였다. 어떤 시기에 과감한 투쟁의 저돌성을 발휘해야하는 지에 대한 정치적 감각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김영삼 전 민자당 대표는 김대중 야당총재의 지방자치 요구 및 내각제 논의 중단의 단식 현장을 방문하며 수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위해 당내 투쟁에 돌입했고 내각제 추진의 민정계가 그를 정치적으로 죽이려하자 칩거 항거로 뚫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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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또한 김대중과의 대통령 경선이나 대표 경선에서 낙선했음에도 눈물을 삼키며 김대중을 위한 선거 운동 및 협조하기도 했다며 노유진 정치카페의 유시민은 설명했다. 박지원과 안철수를 겨냥한 언급으로 들렸다  

 

박근혜의 독재화 정국 속에서도 아직까지 열린우리당 시절의 여당으로 착각하는 야당에게서 김영삼의 저돌성과 김대중의 냉철함은 여전히 배워야할 모습인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카리스마의 양김 정치보다 합리성의 지도자가 적합한게 흐름이지만 때로는 양김의 카리스마도 필요한 야당인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야당은 퇴임당시 70프로의 압도적 지지로 명예롭게 물러난 브라질 룰라 대통령에게 배워야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반짝해서 뜬 90프로 지지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결국 IMF 사태와 퇴임 이후의 막말로 그 빛이 바랜 것에 비해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국민의 배고픔을 복지 정책 실현으로 극복해 나갔음이 비교된다. 

 

자기 정체성으로 국민의 지지가 회복되고 있는 오바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바마보다 더 높은 강도의 브라질 룰라의 경우처럼 국민의 배고픔과 민생 해결을 위한 비젼, 그리고 그러한 비젼들이 민주주의적 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는 설명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물론 IMF 사태의 책임을 온전히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만 돌릴 수 없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하는 외화낭비의 비생산적 과다투자 및 과다대출, 부채 급증 등이 IMF의 직접적 원인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돌아가면 재벌 경제의 고착화를 낳게한 박정희 전두환의 책임도 분명하다. 재벌 하나가 무너지면 나라 경제가 흔들리는 자체가 정상이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전두환은 언제 죽는지 모르겠다. 나쁜 사람은 오래 산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가 보다. 혹여 전두환이 사망하게 된다면 정권이 바뀐 속에서 사망했으면 좋겠다. 

 

언론의 정상화가 되지 않는 박근혜 정권에서 전두환이 죽는다면 '전두환 서거'니하는 이 딴 말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전두환이 죽을 때 수구보수언론들이 보수화 권력의 배경을 타고 그에 대한 과도한 찬양보도를 하게될 것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전두환이 죽는다면 그는 어떠한 찬양도 듣지 않고 조용하게 무덤에 뭍혀야 한다. 

 

 

*서프라이즈 - 두루객

 

 

 

 

 

 
 
 

네티즌

U2 2015. 12. 18. 19:11

 

 

 

 

 

김영삼 서거를 통해 본 '박근혜 문재인 룰라'

 

 

 

뉴욕타임즈 사설의 박근혜 독재 비판과 질타는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재벌 오너들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하는 노동개악과, 유해물질이 섞인 물대포 직사 사태의 시위진압, 국정화 교과서 언급과 더불어 인터넷 통제 등의 언론자유 문제까지 거론한 것이다.

 

우연찮게도 이날은 36년 전 뉴욕타임즈가 김영삼 야당 총재의 박정희 비판 인터뷰 기사를 보도한 날짜였다고 한다. 김영삼 야당 총재는 이로인해 박정희로부터 부당하게 의원직 제명을 당했고 그 후로 김영삼은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급상했다.

                   

 

 

 

뉴욕타임즈의 박근혜 비판 보도 이후 연이어 들려온 소식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 여러 논란을 낳은 양김 정치였지만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권에 쌓아온 민주주의 역사를 꺼꾸러 되돌리는 박근혜의 독재적 강화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작금이다. 이명박과 더불어 반드시 청산되어야할 비정상적 역주행이다

 

비록 3당야합의 김영삼이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 초반에 보여준 일련의 통쾌함들은 잊을 수가 없다. 1992년 야당의 대선 패배에 낙심한 김대중 지지자였지만 대선실패 이후 응어리진 모든 것이 풀려지고 보상 받은 듯, 김영삼의 개혁에 응원을 보낸 기억이 새삼 떠오르게 된다

 

전광석화 같은 추진의 금융실명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공직자 재산공개, 전두환의 군 사조직 '하나회' 척결, 전두

환- 노태우의 구속을 가능케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영삼의 공적이다.  호랑이를 잡으려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3당합당 명분을 위해 보여준 것이었다

 

특히나 하나회 척결에선 아직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아침 운동으로 역기를 들면서 기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의원을 할때 국방위 소속임을 잊었나"며 군에 대해 모든 것을 뚫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뭔가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멋있는 대통령으로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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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도는 영국에서 귀국한 김대중 전 총재의 응원 이후로 90프로의 지지도를 얻기까지 했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흔들기를 경계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개혁에 힘을 실어주던 김대중 야당총재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국민통합이라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권초기 개혁의 경우처럼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민주야권이 아닌 보수정권의 수장이 야당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여 추진할때, 비록 그 동기가 다른 데에 있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국민이 원하는 민심과 일치하게 된 김영삼의 통쾌한 행보였다.

 

물론 하나회를 척결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이 아니라 김영삼이기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고 추진했더라면 오히려 기득권층 세력의 크나큰 저항의 반감에 의해 머뭇거리나 어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김대중 아니면 김영삼이 당선되는 92년 대선이었기에, 여권의 김영삼이었기에 하나회 똥별들이 수긍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역설적 구조들은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의 3당합당이 군부독재 세력들에게 기고만장하게한 결과들이다. 3당합당 없이 당시의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다시 합심을 했었더라면 민정당 군부 세력이 무슨 얼굴을 들고 감히 저항하였겠는가.  고개를 수그려도 모자랄 상황을 바꾸게한 3당합당이 문제의 근원인 것이지, 김대중 전 대통령 추진 여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김영삼의 역사 바로세우기가 당내 헤게모니 차원에서 장악하려한 동기에서 그랬든 아니었든, 김대중 아니면 김영삼이 당선되는 92년 대선이었기에, 여권의 김영삼이었기에 하나회 똥별들이 수긍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에 비해 박근혜는 어떠한가?  국민을 이분법화시키다못해 양김이 쌓아온 민주화의 역사를 허무는 독재화가 진행중이다. 김영삼의 독재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도 스스로 뒤집는 김무성 박근혜의 모습이 지금 현실이다.

 

이명박 정권의 잘못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MB의 방송장악 상태를 그대로 수용했다. 복지와 경제민주화 등의 약속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세월호 진상규명 방해와 간첩조작, 언론악법 등도 모자라 친일독재 미화의 국정화 교과서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박근혜에게는 박근혜가 무엇을 하든 지역주의 정서와 과거향수로 지지하는 30프로의 고정 지지층이 있다. 이런 속에서 야당이 원하는 정치, 야당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정치를 했다면 야당 지지층도 긍정할 수 있는  매우 높은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새누리당 정권의 지지도 상승 조건은 야당보다 유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유신 향수의 과거회귀 세력과 뉴라이트 친일, 1퍼센트의 기득권층 이익에 매몰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야당의 문재인 대표는 높은 지지도를 이끌 조건이 충만함에도 야권 지지층의 다양함과 까다로움, 그리고 지역주의 정서 잣대 작동으로 그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 

 

호남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보수세력의 가치를 포용할 수구보수세력의 가치가 우리나라엔 없어 광폭행보의 끈덕지가 보이지가 않는다.  무턱대고 보수의 가치를 수용하다간 야당 지지층의 외면을 받기 십상인 상황이다.  결국 진보개혁의 가치를 어떻게 확장하고 긍정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프레임 능력 창출이 야당 정치인에게 필요하게될 노력이다

 

문재인 대표에 대한 호남 정치인의 이유 없는 이유의 흔들기를 보면서 87년 양김분열 당시 김영삼의 심정도 이해가 될 만도 하다. 2000년 들어서도 호남내의 보수 정치인의 텃새도 이렇게 심각할진데 87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변 동계동계 인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트집이나 꼬투리들이 얼마나 심각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3당합당 거부 전력의 노무현 - 친노임에도 끊임없이 흔들고 부정하는 모습에선 보수적 한계의 지역주의 정서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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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오늘날 지역주의 정치구도 문제에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야합한 3당합당이었지만, 호랑이만 잡았지 호랑이 새끼들과 함께한 야합은 근본적인 개혁을 할 수 없는.. 오히려 호남 대 비호남의 지역주의 구도 고착에 기여하기만 했다.  부산 경남의 야성 상실 상태는 매우 명확했으며 그 이후로 변절의 기회주의자들만이 득실거린 정치가 되어 버렸다

 

부산 경남의 일부 시민들은 김영삼의 독재청산으로 과거의 민정당과 다른 한나라당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독재청산이 완전치 못하게한 3당야합이었으며, 그 이후 그들의 지역주의 망발과 수구적 언행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주의 역행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낳기도 했다   

 

새누리당 YS계의 김무성, 서청원의 못난 모습도 3당합당이 낳은 유산이다. IMF를 초래한 재벌 거품경제, 노동법 개악 등도 근원적 개혁을 할 수 없는 3당합당의 한계였다. 노동법 개악이 IMF로 연결된 모습들이 노동개악 박근혜와 유사한 것으로 보여 걱정이 되는 지금 모습들이 3당합당에서 이어져온 결과들이다 

 

97년 이 당시 노동법 개악 정국에서는 'MBC FM 방송 DJ'들도 비판의 멘트를 날릴 만큼 방송계의 민주주의의 뿌리가 매우 깊었는데 지금의 방송들은 하나같이 관제화 속에서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 역주행 박근혜 정권을 탄생하게한 그 원흉도 김영삼의 3당합당으로부터 내려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가끔 오늘날 야당의 무기력함을 보면서 때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총재 당시의 투쟁력이 떠오르기도 한다. 민추협 사건 당시 민추협 건물을 둘러싼 경찰력에 맞서 5시간을 대치한 일화의 김영삼이기도 하다. 

 

김영삼은 또한 고향 거제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집안이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투쟁할 때는 투쟁을 아끼지 않았다. 단식 투쟁의 김영삼 모습도 지금도 기억되는 그의 승부수였다. 87년 이한열 열사에 대한 추모 및 시위 행렬에서도 당당하게 거리로 나와 함께 섞여 위로하기도 했다. 

 

힘이 없는 야당이지만 그것이 권력욕이든 아니든, 김영삼은 눈 앞의 막막한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저돌성이 돋보였다. 어떤 시기에 과감한 투쟁의 저돌성을 발휘해야하는 지에 대한 정치적 감각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김영삼 전 민자당 대표는 김대중 야당총재의 지방자치 요구 및 내각제 논의 중단의 단식 현장을 방문하며 수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위해 당내 투쟁에 돌입했고 내각제 추진의 민정계가 그를 정치적으로 죽이려하자 칩거 항거로 뚫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의 야당시절 김대중과 함께 '북한과의 대화, 예비군 제도 폐지'를 주장한 바 있는데 여러 언론에서 언급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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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또한 김대중과의 대통령 경선이나 대표 경선에서 낙선했음에도 눈물을 삼키며 김대중을 위한 선거 운동 및 협조하기도 했다며 노유진 정치카페의 유시민은 설명했다. 박지원과 안철수를 겨냥한 언급으로 들렸다  

 

박근혜의 독재화 정국 속에서도 아직까지 열린우리당 시절의 여당으로 착각하는 야당에게서 김영삼의 저돌성과 김대중의 냉철함은 여전히 배워야할 모습인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카리스마의 양김 정치보다 합리성의 지도자가 적합한게 흐름이지만 때로는 양김의 카리스마도 필요한 야당인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야당은 퇴임당시 70프로의 압도적 지지로 명예롭게 물러난 브라질 룰라 대통령에게 배워야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반짝해서 뜬 90프로 지지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결국 IMF 사태와 퇴임 이후의 막말로 그 빛이 바랜 것에 비해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국민의 배고픔을 복지 정책 실현으로 극복해 나갔음이 비교된다. 

 

자기 정체성으로 국민의 지지가 회복되고 있는 오바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바마보다 더 높은 강도의 브라질 룰라의 경우처럼 국민의 배고픔과 민생 해결을 위한 비젼, 그리고 그러한 비젼들이 민주주의적 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는 설명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물론 IMF 사태의 책임을 온전히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만 돌릴 수 없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하는 외화낭비의 비생산적 과다투자 및 과다대출, 부채 급증 등이 IMF의 직접적 원인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돌아가면 재벌 경제의 고착화를 낳게한 박정희 전두환의 책임도 분명하다. 재벌 하나가 무너지면 나라 경제가 흔들리는 자체가 정상이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전두환은 언제 죽는지 모르겠다. 나쁜 사람은 오래 산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가 보다. 혹여 전두환이 사망하게 된다면 정권이 바뀐 속에서 사망했으면 좋겠다. 

 

언론의 정상화가 되지 않는 박근혜 정권에서 전두환이 죽는다면 '전두환 서거'니하는 이 딴 말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전두환이 죽을 때 수구보수언론들이 보수화 권력의 배경을 타고 그에 대한 과도한 찬양보도를 하게될 것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전두환이 죽는다면 그는 어떠한 찬양도 듣지 않고 조용하게 무덤에 뭍혀야 한다. 

 

 

*서프라이즈 - 두루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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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김영삼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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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안타깝지만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데 커다란 공이 있는 김영삼 대통령이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전직 대통령 가운데 죽음이 안타까운 이는 없다. 가장 보기 좋은 사진 하나 퍼왔다. 이런 다정한 모습이 오래 이어졌다면 오늘날 우린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여기 저기에 김영삼 대통령을 기리는 글이 많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다. 다른 모습은 내가 어릴 때라 잘 모르고 또렷이 기억하는 모습은 6월 항쟁으로 얻어낸 절호의 기회를 욕심으로 날려버리고 결국은 노태우의 품으로 들어가 버린 모습이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도 대권에 대한 욕심으로 민주화를 가로막은 책임이 크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있을 때 추진한 개혁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를 동서로 갈라버린 일은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분명히 경상도에도 군부독재보다 민주화를 바라는 이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 어디에 있는가? 평소에 즐겨 썼다는 대도무문 글귀대로 조금더 기다렸더라면 오늘 문상객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어디 김무성이나 서청원같은 자가 상주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노무현이나 김상현처럼 멋진 이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 없는 일이다. 어쩌면 3당합당을 하지 않았다면 노태우를 이어 또다른 군인이 대통령을 했을 수도 있다. 하나회 숙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준  전직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이명박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를 보면 알 수 있다.

 

새누리당 안에서 김영삼을 정치적 스승으로 여기고 있는 이들은 적어도 지금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아야 한다. 세월호에도 눈물은커녕 조롱을 해대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에게도 막말을 해대면서 정치적 아들이라며 상주 타령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

 

김영삼 대통령은 암울한 시절에도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기회를 엿보며 자리만 탐하는 자로 기억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차남 현철씨도 김무성은 집에 가서 쉬라고 내보내는 것이 아버지를 위해 좋은 일임을 알아야 한다.

 

한때 민주화의 한축을 이끌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빈소에 기회주의자들이 큰소리 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 김영삼이 불쌍하게 여겨진다. 왜 그를 존경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민주화 투쟁을 이야기할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뒤로 돌리는 일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두환을 추앙한다는 일베들은 김영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당신들이 누리는 자유도 대부분 전두환이 아닌 김영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남긴 말을 덧붙인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1979년 10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중략)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1993년 취임사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1998년 2월) 퇴임사

 

마지막으로 제발 백남기님의 안타까운 희생이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중대회가 열리는 날은 프랑스에서 테러가 벌어져 묻히더니 이제 김영삼 대통령 서거 이야기로 모든 것이 묻히고 있다.

 

​*오마이뉴스 블로그:  이야기 만들기 (http://blog.ohmynews.com/partisan69/18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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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 차남 김현철 "친박 비노계 모두 한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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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차남 김현철 "정치개혁은커녕 계속 유신하고 있네"

"야당, 밥그릇 챙기기 위해 현대표 물어뜯고 있으니"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는 1일 "정치개혁은 커녕 계속 유신하고 있네"라며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했다.

김현철씨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청와대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질타와 관련, "여야 합의로 국회법 개정했다고 집권당 원내대표를 마음대로 자르고...여야합의로 공천룰을 만들었다고 당대표를 대놓고 비토하고..."라고 힐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한편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비주류에 대해서도 "지금 야당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다음 총선과 대선을 이길 생각은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똘똘 뭉쳐도 이길 수 있을까 싶은데 그저 밥그릇이나 챙기기 위해 현 대표를 물어뜯고 있으니.. 다른 대안도 없으면서 뭘 어쩌자는 건가?"라고 반문하면서 "형편없는 현정권보다 더 한심하다"고 개탄했다.

 

 "무능한 정권이 정말 사람 잡네"

 

"민주정부때 모든 삶의 질이 훤씬 좋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는 2일 메르스 대란 발발과 관련, "무능하고 거짓된 정권이 정말 사람 잡네"라며 박근혜 정권에 직격탄을 날렸다.

김현철씨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세월호도 초동대처가 늦어 대형사고가 되어 온 국민의 가슴을 멍들게 만들었는데.. 환자 한명만 제대로 격리치료했어도 이토록 온 국민의 가슴을 졸이게 하진 않을 텐데"라고 탄식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어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주범들은 경제성장을 자랑했지만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와 비교할 때 모든 분야의 삶의 질은 오히려 민주정부시절이 훨씬 좋다는 것이 여러 통계로 드러났다"면서 "그런데 반민주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면서 또 다시 크게 후퇴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국회와 전면전을 선포한 데 대해서도 "대통령이 무능하니 국회가 무시하고 그러다보니 제왕적이란 말을 어디다 붙여야 하는 건지..."라면서 "과거 행정권력을 남발하던 시절에 살다보니 전혀 맘에 들지 않겠지만 이젠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야 할 때인데 국회권력뿐 아니라 미래권력과도 소통하는 능력이 없으니..."라고 탄식했다.

 
 
"김무성, 대권은 꿈도 꾸지마라"
 
"YS는 굳건히 맞서 당당하게 권력 쟁취"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는 4일 사실상 친박의 전략공천-당원투표 요구를 수용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 대해 "YS문하생이라는 현 대표는 유전자가 틀렸거나 감히 현 권력에 맞설 결기가 애시당초 없는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김현철씨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집권당 대표는 야당대표와는 다르게 현재 권력과 상대해야 하는데, 과거 YS는 당시 대통령에게 굳건히 맞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해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김 대표에게 "어설프게 대권은 꿈도 꾸지마라"고 따가운 일침을 가했다.
 
 
- 최병성 심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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