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발렌슈타인의 첫번째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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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2016. 11. 6.


오늘 도심을 오랜 시간 걸었더니 몹시 피곤합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더 피곤할 것 같군요. 그래도 희망이 보여서 기분은 몹시 좋습니다. 



발렌슈타인과 가톨릭동맹은 처음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프리드리히의 패배 후에 남부영지를 나누었듯이 북부영지도 새 주인이 필요했다. 동맹은 가톨릭 영주의 권리를 주장했고 발렌슈타인은 황제군에 참여한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권리를 주장했다. 자신을 믿고 참전한 지휘관에게 보상하고 싶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동맹은 발렌슈타인이 개신교 영지에서 군수품을 노획하라고 주장한 반면에 발렌슈타인은 필요에 따라 가톨릭 영지에 주둔하거나 징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페르디난트가 발렌슈타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종교를 뛰어 넘어 제국의 통일과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발렌슈타인을 믿지 않았다. 그의 병력이 많고 상당히 공격적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페르디난트는 양쪽 어느 편도 들지 않았고 예전처럼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미뤘다. 이번에는 재상 한스 울리히 에겐베르크Hans Ulrich Eggenberg(그림 참조)였다. 11, 발렌슈타인은 그와 만나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전장에서 압도하고 전략요충지를 선점할 수 있도록 병력을 70,000명까지 늘려야하고, 페르디난트가 독일의 주인이 되고제국이 하나가 되면,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고 외국에서도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에겐베르크는 페르디난트에게 그 계획을 전달했다. 1, 페르디난트는 그에게 페르디난트 공작직함을 내려 승인했다. 페르디난트가 발렌슈타인을 통해 독일국민의 마음을 얻었다면 독일과 유럽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가톨릭동맹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는 독일국민이 아니라 가톨릭 주교와 교회의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적이 아직도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골적인 분열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외국의 개입도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영국 찰스 1세는 대출을 받아 군자금 일부를 마련했고 찰스 모건Charles Morgan 4,000명을 데리고 덴마크로 건너갔다. 나중에 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Bernhard로 명성을 얻는 요한 에르네스트의 동생이 다시 병력을 모았고 개신교 도시가 계속 저항하고 있는데다가 농부와 시민은 사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북부의 개신교 진영은 베슬렌 가볼리의 참전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신성로마제국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베슬렌 가볼리는 참전할 힘이 사라졌다.

등 뒤를 노리던 베슬렌 가볼리의 위협이 사라지자 발렌슈타인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적에 비해 3배가 넘는 병력을 보유했고 저항하던 도시도 하나씩 문을 열었다. 8월 말이 되자 슐레지아 전체가 손에 들어왔다. 노획한 55개 연대기를 빈으로 보냈다. 슐레지아 도시와 시민은 몸값을 지불했고 그 돈은 고스란히 군자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티앙은 평화협상으로 궤멸을 모면하려고 했지만 발렌슈타인과 틸리는 홀슈타인Holstein 전체를 요구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두 장군은 병력을 모아 북쪽으로 진격해 바덴Baden변경백과 덴마크군의 연결선을 끊었다. 바덴변경백과 주요 지휘관은 간신히 황제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덴마크행 배에 올랐고 바덴군과 덴마크군 정예 7개 연대가 그렇게 사라졌다.


 

틸리는 저지대 작센의 주요거점 포위했고 발렌슈타인은 덴마크왕을 추격했다. 2~3개 요새도시를 빼고는 모두 성문을 열었다.

발렌슈타인은 병력을 100,000명까지 늘린 후에 오스만투르크를 공격해 콘스틴타노플을 함락시킨다는 거대한 꿈을 꿨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이 다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선거후는 이번 기회에 개신교선거후를 완전히 몰아내고 권력을 독차지 하고 싶었다. 그리고 발렌슈타인이 이제 걸림돌이 되었다. 그가 만스펠트를 몰아내고 베슬렌 가볼리를 붙잡아 두고 슐레지아를 회복하고 루터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그의 존재가 독일전역을 지배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불만의 목소리가 갑자기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아직은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선거후는 노골적인 적대감은 숨겼다. 

반면에 독일 북부의 개신교 도시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었다. 여러 상인가문이 통치하던 북부도시는 개신교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했다. 남부는 가장 먼저 저항했지만 북부는 어쩔 수 없이 덴마크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 오히려 강압적인 영주보다 황제를 더 반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도시에 군대가 주둔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마그데부르크Magdeburg는 성문 안에 1개 중대도 들여 놓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함부르크는 황제에게는 복종해도 군대에게는 성문을 열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마그데부르크라면 몰라도 함부르크와 다른 해안도시는 난감했다. 덴마크왕은 본토로 달아났고 스웨덴은 발트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병력을 보내지는 않더라도 포위된 해안도시에 군수품을 지원할 수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해안도시를 점령해 제국을 완성시켜야 했다.

메클렌부르크Mecklenburg(지도 참조)의 두 공작은 황제에 대항해 덴마크왕을 지지해왔고 대부분의 영지가 더 이상 참전하지 않을 때에도 꾸준히 항전을 계속했다. 발렌슈타인은 메클렌부르크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력으로 점령하기로 했다.

1628, 황제는 팔츠 선거후의 처리를 따라 두 공작의 영지를 발렌슈타인에게 위임해 전쟁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당연히 가톨릭 선거후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황제는 스페인의 전쟁지원에 대해 무역독점권을 주어야 했고 한자동맹 해안교역도시가 필요했다. 무역독점권은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과의 충돌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고 발렌슈타인을 발트해 제독으로 임명하고 한자동맹이 함대를 마련하게 했다.

숫자에 밝은 상인이 스페인의 무역독점권을 환영할 리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정중하게 거절했고 발렌슈타인은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를 했던 것처럼 육로를 막고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물품을 압수했다.

 

이미 설명했듯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던 발렌슈타인은 덴마크와 스웨덴의 발트해 거점을 노렸다. 1627 11, 스웨덴 항구의 선박에 불을 지르겠다는 사람과 모의를 하기도 했다. 구스타브도 발트해 남쪽 해안에 집결하는 대병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비스마르Wismar도 발렌슈타인에게 성문을 열었다. 로스토크Rostock항은 선박을 침몰시켜 해로를 봉쇄했다. 포메라니아Pomerania공작 보구슬라프Boguslav는 해안도시를 방어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발렌슈타인의 전력이 너무 강했다.

발렌슈타인은 뜻을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 하나가 그 계획을 무산시켰다. 슈트랄준트Stralsund(그림 참조)는 자유도시가 아니라 포메라이나공작의 영지였다. 시민은 황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할 생각이 없었고 외국군을 독일에 들여놓을 생각도 없었다. 발렌슈타인의 병력을 주둔시킬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발렌슈타인은 아르님Arnim에게 공격을 명령해 항구 입구의 작은 섬을 점령했다. 3, 시민군은 섬을 공격해 황제군을 몰아냈다. 슈트랄준트에는 덴마크전쟁에서 살아남은 병사, 황폐해진 고향을 버린 농부가 피난해 있었고 성문을 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4, 성안의 모든 사람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종교와 자유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리고 황제와 제국법에는 충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지만 황제의 뜻이 바로 발렌슈타인의 군대였고 농성은 제국을 반대하는 진영에 참전하는 것이었다. 5, 덴마크 사절이 방문했고 스웨덴은 화약을 보내왔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제국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슈트랄준트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발렌슈타인은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직접 공성전을 이끌었다. 시민대표가 군대주둔만 포기한다면 성문을 열겠다고 하자 탁자 위에 손을 짚고는 너희의 도시는 이것처럼 평평한 땅만 남을 것이다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공포에 질린 시민은 아내와 딸을 스웨덴행 배에 태웠다. 그렇지만 절대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발렌슈타인도 도시의 해로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몇 주가 지났는데도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은 이제서야 관대한 조건을 내밀었다. 병력주둔을 포기하고 이제는 제국에 우호적인 포메라니아공작 병력으로 대신하겠다고 밝혔다. 포메라이나군으로 제국에 적대적인 외국의 상륙을 막을 생각이었다.

시청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시민이 완강하게 거부했다(그림 참조). 외국의 지원이 끊이지 않았고 발렌슈타인도 어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8 3일 슈트랄준트는 포위에서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