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마그데부르크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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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2017. 3. 8.


오늘 기대했던 헌재의 선고기일 공개가 늦춰졌습니다. 큰 일과 작은 일 모두 지지부진해서 답답합니다. 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모든 일이 다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30년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전되면서 정리하기도 많이 편해졌습니다. 반면에 그 인물과 사건에 대해 다시 파고 들어가면 30년 전쟁 이야기는 평생 숙제가 되겠죠. 그래도 이제는 지리한 배경설명에서 벗어나서 조금씩 재미있어집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마그데부르크 약탈


구교동맹Catholic League과 황제군 지휘관은 드디어 충돌했다. 발렌슈타인은 뤼베크조약 후에 병력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100,000명으로 늘렸다. 그는 만토바와 북해연안을 방어하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개신교 반란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만 병력이 늘어나면 문제도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다른 독일영주와 국민은 그를 싫어했고 병사들은 상인과 농부를 착취했다. 발렌슈타인의 태도도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독일 선거후와 영주를 보헤미아 귀족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성로마제국 영주라고 해도 보헤미아왕국의 영주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페르디난트가 프랑스와 스페인왕처럼 독일의 절대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선거후Elector는 이런 주장에 몹시 분노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지금까지 잘 유지된 오랜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고 항의했다. 황제칙령이었다면 약간의 항의 정도였겠지만 군사행동은 위험 그자체였고 당연히 심각한 반향을 불러왔다.

 

물론 발렌슈타인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황제의 복구령을 시행하면서 적이 급증했다. 황제는 복구령과 설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발렌슈타인은 무력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할베르슈타트 교구에 자신의 작은 아들을 임명하고 마그데부르크 행정관은 덴마크를 지원한 죄를 물어 몰아내려고 했다.

마그데부르크는 구교주교를 임명하지 않고 오히려 작센선거후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을 선택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자연스럽게 황제의 복구령의 반대편에 섰다.


 

1630 7 3, 황제는 선거후와 영주를 소집해 자신의 아들을 헝가리왕으로 선출하고 신성로마제국 후계자로 결정지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선거후는 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대로 발렌슈타인의 과도한 주장과 행동에 대해 항의했다.

심지어 슈트랄준트 공성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포메라니아Pomerania공도 불만을 폭발시켰을 정도였다. 그는 황제의 국민이 내몰려서 나무 잎과 풀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육이 없으면 자식을 잡아 먹는다고 말했다. 

황제는 군사독재를 원하지 않는다며 선거후를 달랬다. 이제 독일의 전통적인 영주와 발렌슈타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차례였다.

구교 선거후의 배후에는 리슐리외가 있었다. 그는 유능한 프랑스 사절 겸 신부 조세프Joseph를 회견장소로 보내 발렌슈타인에 대한 불만에 불을 붙이고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해도 신성로마제국이 중립을 지킨다는 분위기를 조장했다.

 

황제와 선거후가 무의미한 갑론을박을 벌이던 때에 구스타브 아돌푸스의 스웨덴군이 포메라니아 해안에 상륙했다5년 전만 해도 그는 다른 국가의 강력한 지원없이는 황제와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단독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프랑스의 확실한 지원약속도 없었다. 프랑스 사절은 군자금을 약속하며 조건을 걸었고 구스타브는 프랑스의 제안을 모조리 거절했다. 1625년보다 상황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구교선거후와 발렌슈타인은 갈라선 반면에 개신교영주는 스웨덴군을 구원의 손길로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가 구스타브가 승전하면 영주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내가 승전하면 그들도 먹이가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독일의 상황은 구스타브에게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무력했고 선거후는 발렌슈타인의 해임을 격렬하게 주장했고 발렌슈타인은 구교연맹 전체를 상대할 수 없었고 프랑스는 계속 구교연맹을 흔들었고 북부의 개신교는 다시 봉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황제와 발렌슈타인 모두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은 막강한 군사력을 그대로 두고 전장을 그대로 이탈해 은둔했다. 아마 황제가 다시 다급하게 자신을 부를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제국의 영주를 무너트려 황제를 절대군주로 만들려는 발렌슈타인의 계획이 무서웠다. 그는 발렌슈타인이 아닌 막시밀리안의 노선에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의 위기는 제국과 황제 자신이 아닌, 발렌슈타인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시키고 틸리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스웨덴을 지원하지 않도록 만토바를 느베르공에게 양보했다.

틸리는 발렌슈타인의 병력을 받으면서 스웨덴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두 군대의 성격이 너무 달라 전력이 크게 상승하지 않았다. 반면에 구스타브는 숫자만 부족했을 뿐이었다. 구스타브는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었고 병사는 잘 훈련되었고 종교적 열의가 흘러 넘쳤다.

 

구스타브는 포메라니아 공작령의 수도 슈체친Stettin 앞에 섰다. 그는 벤트Wendish혈통의 마지막 생존자 보구슬랍Boguslav과의 회담을 강요했다. 보구슬랍은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슈트랄준트에서는 발렌슈타인을 돕기도 했다.

그렇지만 최근에 있었던 황제와의 회동에서 낙담했기 때문에 구스타브에게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간청했다. 구스타브는 1623년의 틸리가 그랬던 것처럼 포메라니아의 중립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쇠한 보구슬랍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구스타브의 자리를 바란다고 전했다.



왼쪽이 구스타브, 오른쪽이 보구슬랍입니다. 보구슬랍은 어쩔 수 없이 30년 전쟁에 끌려 들어갔고 결국에는 발작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되어 은퇴했습니다. 포메라니아 영지는 결국 스웨덴에 넘어 갔지만 워낙 복잡한 이해관계때문에 20년 동안 시신이 안장되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구스타브는 한동안 해안에 머물면서 포메라니아와 메클렌부르크의 황제군을 몰아내는데 주력했다. 북부 개신교 영주는 아직 그의 편에 서지 않았고 사촌인 브란덴부르크 선거후는 사절을 보내 중립을 알렸다.

구스타브는 눈을 뜨고 세상을 제대로 볼 때입니다. 페하는 이제 자기 영지에서 황제의 지휘관이 될 수도 없고 충복이 될 수도 없을 것이요. 양처럼 가만히 있는다면 늑대에게 잡아 먹힐 것이요. 내가 국경에 나타나면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요. 그 중간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제대로 알리시오라고 말했다.

사절은 불명예스럽고 불충된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구스타브는 황제가 더 큰 실수를 저질러서 영주의 충성심을 뒤흔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Mary of Medici가 리슐리외 전복을 꾸미는 일이 벌어졌다. 마리는 아들에게 리슐리외가 구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루이는 듣지 않았다. 마리는 리슐리외가 정계를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리슐리외가 독일영주를 부추겨 발렌슈타인을 몰아낸 일은 기대이상의 대성공을 거뒀다. 틸리에게 막대한 병력이 넘어갔기 때문에, 리슐리외는 아무런 조건없이 구스타브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 23, 프랑스와 스웨덴은 베르발데Barwalde조약을 체결했고 프랑스는 스웨덴군에게 5년 동안 막대한 군자금을 약속했다. 대신에 스웨덴군은 점령한 구교영지의 종교자유를 보장하고 중립을 밝힌 영지는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1631, 두 명의 개신교 선거후가 구스타브 진영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요한 독일북부 전역의 개신교도가 요한 게오르크에게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원래 우유부단했고 수동적인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두 악마 중에 그나마 나은 쪽을 선택해야 했다.

한 악마는 적대종교의 우두머리였고 다른 악마는 독일을 분열시키는 외국세력이었다. 구질서가 무너져야 더 나은 질서가 만들어진다지만, 작센이 스웨덴의 힘을 빌어 승전하고 새 질서를 확립하더라도 여전히 문제투성이일 것이 분명했다.

 

3월에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열린 개신교 회의는 다시 한 번 황제에게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복구령을 취소한다면 북부의 개신교도는 기꺼이 충성스러운 신민이 될 수 있었고 어떤 외국세력도 황제와 개신교도의 사이에 끼어 들 수 없었다.

동시에 적극적인 저항준비도 함께 진행되었다. 개신교 영주는 모병에 동의했다. 구교동맹과 막시밀리안도 베르발데조약을 알고 있었다. 이제 외국세력은 둘로 늘어났다. 틸리는 구스타브를 상대하기 위해 북부로 급히 달려갔다.

페르디난트는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웨덴군의 상륙보고를 받자 오합지졸이 조금모였군이라고 말했다.

 

틸리는 달랐다. 그는 급히 병력을 몰아 포메라니아의 구스타브와 메클렌부르크의 호른Horn부관 사이를 파고 들려고 했다. 만약 이 움직임이 성공하면 스웨덴군은 둘로 나뉘어 산산조각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3 29, 라이프치히에서 아직 논쟁이 뜨거울 때에, 그는 신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하고 스웨덴 수비대 2,000명 전부를 죽였다. 그렇지만 구스타브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호른의 병력을 합친 후에 과감하게 틸리에 맞섰다.

틸리는 엘베강으로 물러났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황제군 8개 연대가 스웨덴군에게 항복했다. 이제 마그데부르크가 위험해졌다. 마그데부르크는 프랑크푸르트보다 훨씬 중요한 도시였는데 시민들이 먼저 독립의사를 밝혔고 구스타브는 장교 한 명을 보내 봉기를 도왔다. 그렇지만 황제군이 마그데부르크 주변에 대거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스타브가 마그데부르크로 향하려면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선거후의 지원이 필요했다.

 

4 26,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체라스코Cherasco에서 평화조약을 맺었고 황제의 군대는 이제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향했다. 틸리는 전황을 어둡게 봤지만 부관 파펜하임Pappenheim은 생각이 달랐다.

올 여름이면 적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신께서 그런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마그데부르크의 포위는 계속되었고 지켜만 봐야하는 구스타브는 두 선거후에게 간청했다. 브란덴부르크선거후에게는 슈판다우Spandau과 퀴스트린Küstrin요새 진입을 요구했다. 퀴스트린은 허락했지만 슈판다우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병력을 이끌고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5 13, 성문 밖에서 선거후 게오르크 빌헬름George William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파펜하임은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틸리 다음으로 황제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구스타브가 전사하는 날에 중상을 입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래는 황제군의 마그데부르크 공성전 그림입니다. 


 

구스파브는 동행한 메클렌부르크공에게 참담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나는 마그데부르크를 해방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소. 아무도 돕지 않는다면 바로 물러날 것이오. 황제와 조약을 맺고 스톡홀름 Stockholm으로 귀국할 것이오. 황제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오. 그렇지만 당신의 개신교도는 심판의 날에 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밝혀야 할 것이오. 마그데부르크가 함락되고 내가 물러난다면 이제 당신들 차례이오.”

이튿날 다시 회담이 재개되었고 선거후는 늦은 밤까지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스웨덴군의 기세에 눌린 선거후는 슈판다우의 성문도 열었다.



슈판다우 성 모습인데 나폴레옹에게 처음으로 함락된 후에 크게 훼손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2차대전에서 베를린 방어기지로 사용되면서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했지만 수비대가 소련군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여 다행히도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 

 

작센선거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 황제의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때까지는 어떤 세력과도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구스타브는 크게 실망해서 마그데부르트를 완전히 포기했다.

시의회는 시민병을 모았지만 방어는 용병에게 맡기거나 항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5 20, 파펜하임이 맹공을 펼쳤다. 당시 도시를 점령하면 병사들이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다. 몇 주 전에도 스웨덴군이 프랑크푸르트를 약탈했었다.

마그데부르크는 프랑크푸르트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첫번째 맹공 후에 방화였던지 아니면 사고였던지 일부 가옥이 불길에 휩싸였다. 병사들은 약탈하느라, 시민은 달아나느라 불길을 잡지 않았다. 황제군은 불길이 약탈품을 삼키자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졌다.

마그데부르크 시민은 병사와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어느 쪽을 만나던 목숨을 건지기 힘들었다. 카를 5세와 발렌슈타인을 상대로도 버텼던 위대한 도시는 몇 시간 만에 대성당 주변의 가옥 일부만 남기고 잿더미로 변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수많은 시민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마그데부르크 시민 30,000명 중 겨우 5,000명만 목숨을 건졌을 정도로 참혹한 약탈이었습니다. 파펜하임은 약탈덕분에 병사가 한 몫 단단히 챙겼다고 말했습니다. 

 

마그데부르크 참사는 틸리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가 잔인하게 개신교를 사냥했다거나 병사를 부추겼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마그데부르크를 파괴해서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도 도시를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그데부르크는 군대거점으로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지만 틸리와 황제가 마그데부르크를 공격했기 때문에 그런 참사가 벌어졌고 마그데부르크의 잔해 속에 외롭게 서 있는 대성당은 황제와 구교의 폭압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개신교 영주의 청원에 복구령 강행으로 대답했다. 요한 게오르크와 개신교 영주에게 군대해산을 명령하고 황제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페르디난트는 법은 준수하라고 있는 것이라고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