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구스타브의 대승, 브라이텐펠트 전투

댓글 1

중세/독일

2017. 3. 9.


드디어 내일이군요. 비정상의 정상화 그리고 광란과 노욕이 이성과 희망으로 바뀌는 날이기를 바랍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구스타브의 대승, 브라이텐펠트 전투



개신교도는 공포에 떨었다. 복구령에 격렬하게 항의하던 남부도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와 뉘렘베르크Nuremberg는 잠잠해졌다. 북부에서는 구스타브가 베를린 성벽 앞에 대포를 늘어 놓고 선거후의 중립태도를 협박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쉽게 응답하지 않았다.

헤센 카셀Hesse Cassel의 빌헬름William은 독일 영주 중 처음으로 구스타브 진영에 합류했다. 작센-바이마르Saxe-Weimar의 베른하르트Bernhard도 그 뒤를 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전력보탬은 되지 못했다.

구스타브는 공세로 나서지 않았다. 베르벤Werben에 진영을 세우고 틸리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렇지만 질병이 퍼지고 보급이 원활치 않아서 독일내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베른하르트는 당시 30살도 안된 젊은 나이였지만 군사경험이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은 꽤 노안이군요.

구스타브가 전사하자 사령관으로 황제군을 격파했다가 반격에 밀려 프랑스 진영에 다시 참여했습니다. 1639년에 병사했습니다

 

구스타브가 절실히 바라던 도움은 황당하게도 페르디난트에게서 나왔다. 체라스코조약으로 이탈리아에서 풀려난 40,000명이 8월에 드디어 북부에 진입했다. 틸리에게 요한 게오르크를 무력화시키라고 명령했다.

824, 틸리는 요한 게오르크에게 사절을 보내 황제에게 절대복종하라고 요구했다. 선거후는 뚜렷한 대답을 미루면서 군대해산도 거부했다. 틸리는 즉시 작센 국경을 넘었다. 파펜하임은 메르세부르크Merseburg를 점령했고 틸리는 라이프치히를 마그데부르크보다 더 참혹하게 처벌하겠다고 협박해서 무혈입성했다.



작센의 위치입니다.


그 동안 우유부단했던 요한 게오르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구스타브에게 전령을 보내 무조건 협력하겠다고 전했다. 

구스타브는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병력을 곧바로 일으켰고 브란덴부르크선거후를 대동했다. 작세군 지휘관은 루터파 아르님Arnim이었다. 그는 발렌슈타인군과 함께 슈트랄준트 공성전을 이끌었다가 복구령이 선포되고 발렌슈타인이 해임되자 요한 게오르크에게 합류했었다.


  

아르님은 황제군에서 작센군으로 다시 스웨덴연합군의 좌익을 맡아 프라하까지 점령합니다. 발렌슈타인과 요한 게오르크 사이를 중재하다가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하자 황제군을 격파합니다. 불화로 작센군을 떠났다가 스웨덴으로 피납되었고 탈출해 귀국한 후에는 프랑스와 스웨덴을 상대로 본토를 지키기 위해 분투합니다.

 

작센군의 위용은 대단했다. 새 군복을 입고 번쩍거리는 무기를 들었다. 스웨덴군은 도적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오랜 원정과 숙영으로 군복은 누더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스웨덴군은 역전의 정예였고 구스타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던 반면에 작센군은 겉치장뿐인 신병이었다.

틸리는 전통적인 스페인병법의 뛰어난 지휘관으로 압도적인 병력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압승을 거두는 전략을 즐겼다. 병사가 무리를 지어 창을 들고 밀어붙이는 힘의 전투를 즐긴 반면에 구스타브는 기동성과 유연성의 혁신을 우선하는 위대한 지휘관이었다.

그의 대포는 훨씬 쉽게 이동하고 전개할 수 있었고 화승총은 조작하기 쉬웠다. 스웨덴군의 발사속도는 당시 어느 군대보다 빨랐으며 치명적이었다. 병력을 3열 횡대로 전개해서 황제군 대열에서는 병력의 수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전투에 앞서 기도하는 스웨덴 소총수입니다. 당연히 무사귀환을 빌었겠죠.

 

917일 오전, 스웨덴과 작센은 라이프치히에서 8km 정도 떨어진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에서 황제군과 맞섰다. 구스타브에게는 모든 것이 걸린 전투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서 신병수준의 작센군은 마구 달아났다.

황제군은 스웨덴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구스타브는 침착하게 2개 여단을 불러들여 제2 전선을 만들었다. 위기에 몰렸는데도 전설적인 역전을 만들어냈다. 대포탄과 총탄이 밀집해서 접근하는 황제군을 마구 쓰러트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황제군의 대포는 오히려 아군의 대열 속에 떨어졌다.

6천명의 시체가 들판에 널렸고 틸리의 근위대는 틸리를 전장에서 구해 물러났다. 그렇게 틸리는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전투는 한낮에 시작되어 겨우 6시간 정도만 벌어졌습니다. 처음 2시간은 포격전이었는데 스웨덴군의 포격은 3~5:1 비율로 압도적이었습니다.

갑자기 파펜하임의 흑흉갑기병Black Cuirassiers이 명령도 없이 연합군 좌익에게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강력한 방어선 사이에 끼었고 6번이나 재돌격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기병대 사이에 있던 소총대가 근거리에서 맹렬한 사격을 퍼붓고 스웨덴 기병대가 반격해 파펜하임을 20km 이상 밀어냈습니다. 파펜하임의 무모한 돌격에 대해서는 사전에 계획한 합동 작전이었는지 아니면 독단이었는지가 불분명합니다.




우익에도 기병대 돌격이 있었는데, 틸리는 흔들리는 작센군쪽으로 보병 대부분을 대각선방향으로 투입했습니다. 작센군 전부가 달아나면서 스웨덴군 좌익 옆구리가 노출되었지만 좌익을 맡고 있던 호른은 황제군이 대열을 정렬하기 전에 반격에 나섰습니다.





황제군이 좌익에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스웨덴군의 우익과 중앙은 좌익으로 회전해서 호른과의전선을 탄탄하게 유지했습니다. 구스타브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황제군의 우익을 공격해 포대를 노획했습니다.

틸리의 보병대는 전방과 배후 모두에서 포격을 뒤집어 썼고 밀집대형 테르시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몰 전에 황제군은 결국 완전히 와해되었고 틸리와 파펜하임은 부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스웨덴군은 빼앗겼던 작센군 포대를 되찾았고 황제군의 모든 포대와 연대기 120개를 노획했습니다. 

황제군 35,000명 중 80%가 사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어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브라이텐펠트 또는 라이프치히전투는 평범한 전투가 아니었다. 페르디난트가 기세등등하게 강요한 복구령은 물론이고 독일은 다시 분열되었다. 백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황제, 궁정, 제국의회는 자신들만이 합법적인 정부라고 선포했었다. 그리고 발렌슈타인은 없어도 된다며 해임시켰었다. 이제 구스타브와 벌인 단 한번의 회전에서 황제와 제국의회는 백산전투 당시의 처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브라이텐펠트전투는 밀집대형의 수를 앞세워 유럽을 제패했던 스페인 병법의 끝을 알렸다.



1500년대 유럽을 지배했던 스페인의 밀집대형 테르시오Tercio입니다. 30년 전쟁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전투소식이 전해지자 독일남부는 다시 봉기를 준비했다. 프랑스에서도 감탄했고 런던탑에 수감되어 있던 엘리엇도 구스타브를 칭송했다. 보헤미아에 은둔한 발렌슈타인은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미 구스타브와 연락 중이었고 자신을 몰아낸 구교연합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스웨덴군 12,000명만 있으면 엄청난 일을 벌이겠다는 제안도 했다. 구스타브의 사절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차라리 자살할 것이오. 어쨌든 내게는 좋은 일이오. 왕께서 내게 병력을 맡기면 장교들을 이끌고 가겠소. 황제와 합스부르크가문을 알프스 너머까지 추격하겠소.”

 

발렌슈타인의 제안은 놀랍지 않았다. 그는 보헤미아 출신으로 독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존중하는 종교와 정치관도 없었다. 황제의 이름을 빌어 영주와 선거후를 추방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제는 스웨덴왕의 이름을 빌어 황제를 축출할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만스펠트처럼 공명심이 최우선 가치였다.

그렇지만 발렌슈타인과 구스타브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구스타브는 독실한 루터파로 이성과 감정을 존중했다. 

그리고 개신교 독일은 스웨덴과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다. 발렌슈타인은 물론이고 독일영주의 애국심과 거리가 멀었다.

 

구스타브는 라인강으로 진격하고 작센선거후는 보헤미아로 향했다. 구스타브가 왜 빈의 페르디난트로 향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견이 많다. 그렇지만 1631년 당시의 빈은 지금과 달리 수도가 아니었다. 반도전쟁Peninsular War 당시의 마드리드Madrid와 비슷했다.

스페인왕은 마드리드에 있었고 황제는 빈에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어떤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했다. 빈을 점령하더라도 구교연합의 군사행동은 와해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마드리드를 점령했을 뿐이며 스페인을 장악하지 못했다. 페르디난트도 빈에서 거주했지만 오스트리아나 보헤미아를 장악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군대가 머무는 곳에 권력이 있었다. 구스타브가 빈으로 진격해도 구교연합이 얼마든지 배후를 노릴 수 있었다.

 

구스타브가 노려야 할 첫번째 목표는 발렌슈타인이 완성시킨 군사체계였다. 그는 라인강으로 향하면서 발렌슈타인과는 다른 노선을 보여주었다. 스웨덴군은 개신교도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고 팔츠를 먼저 해방시켜야 했다.

아우크스부르크, 뉘렘베르크, 울름과 스트라스부르크 등, 복구령을 뒤엎을 해방자를 대환영하는 도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헤미아에도 개신교가 있었지만 라인강의 독일 개신교도를 훨씬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틸리가 무사히 후퇴해서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사제의 회랑Priest’s Lane이라고 부르는 밤베르크, 풀다, 콜롱, 트레비스, 멘츠 등 구교연합에 군자금과 병력을 보급하는 도시가 연이어 있었다. 이곳을 점령하면 스웨덴군의 군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라인강 왼쪽 강변에 있는 스페인 수비대를 몰아내고 프랑스군과도 연결해야 했다. 구스타브는 이런 중요한 목표를 요한 게오르크보다는 자신이 직접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