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터키군의 분전, 플레브나전투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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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017. 8. 30.


대부분의 전사는 터키군의 지리멸렬한 패배를 기록하고 있는데 플레브나전투는 터키의 자랑스러운 전투 중 하나입니다. 비록 패전해 산 스테파노San Stefano조약에 따라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잃었지만 최소한 플레브나에서 5개월을 버틴 수비군은 대단한 용기를 보였습니다. 



터키에게는 치욕적인 산 스테파노조약으로 왼쪽 지도처럼 강력한 불가리아 국가가 독립할 뻔 했습니다만, 러시아를 견제하는 강대국과 주변국가의 극심한 간섭으로, 베를린조약에서 대폭 수정되어 오른쪽 지도가 되었습니다.

500년 만에 독립하게 된 불가리아는 이런 만행에 대해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었고 자국국경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플레브나전투, 불가리아 1877 7 20~12 10

영국군에게는 워털루Waterloo, 그리스군에게는 테르모필레Thermopylae, 터키군에게는 플레브나Plevna(현재의 플레벤Pleven)가 있었다. 터키군은 143일 동안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이 1877 4~1978 3월에 벌인 10개월간의 전투는 당시의 정치, 군사, 경제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상당한데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이 전쟁 후에 벌어진 정치분쟁은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대공의 암살과 같은 큰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0세기 전쟁의 잔인한 교전상황의 예고편이 되었다. 현대식 후장소총과 단단한 요새는 구시대 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러시아 스코벨렙Skobelev은 삽과 후장소총이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오스만, 러시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285,000명이 겨우 10개월 사이에 목숨을 잃었고 수천명의 시민이 기아나 질병으로 죽거나 학살당했다. 전체 희생자 중 26% 75,000명은 1877년 여름~겨울에 플레브나라는 불가리아의 작은 마을 부근에서 죽었다.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은 300년 동안 10번의 전쟁을 벌였고 1877 4월의 전쟁은 11번째였다. 러시아군은 루마니아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를 해방시켰고 다시 루마니아는 러시아에게 수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오스만 총사령관 압둘케림 나디르Abdulkerim Nadir파샤는 구시대 인물로 러시아의 공세에 맞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160,000명의 병력을 다뉴브Danube강의 강변에 수백 km에 걸쳐 길게 늘어두었다.

7, 러시아군 4개군단은 아주 간단하게 시스토바Sistova에서 다뉴브강을 건넜다. 러시아군을 강 건너편에 못 박아 두겠다던 원계획은 처음부터 틀어졌다. 

러시아군은 오스만제국의 영토였던 불가리아에 들어와 놀라운 속도로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향해 남진했다. 수비전략을 선택한 오스만군은 러시아군의 재빠른 우회기동에 분리되어 격파되었고 주요 무슬림 도시는 무방비상태로 점령되었다.

이 당시만 해도 단 한 명의 오스만장군과 소규모 병력이 러시아 대군을 막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다뉴브강 너머로 다시 돌려보낸 역사가 거짓처럼 보였다.


오스만장군과 수비대를 기려 플레벤 행진곡이 만들어졌습니다. 



Tuna nehri akmam diyor
다뉴브 강이 "나는 흐르지 않겠다"라 말하네
Etrafımı yıkmam diyor
내 주변을 허물어뜨리지 않겠다 말하네
Şanı büyük Osman Paşa
명예 드높은 오스만 파샤가
Plevne'den çıkmam diyor.
플레브네에서 "나는 나가지 않겠다."라 말하네.
Şanı büyük Osman Paşa
명예 드높은 오스만 파샤가
Plevne'den çıkmam diyor.
플레브네에서 "나는 나가지 않겠다."라 말하네.

Düşman Tuna'yı atladı
적군이 다뉴브를 넘어섰네
Karakolları yokladı
정찰병들이 수색했네
Osman Paşa'nın kolunda
오스만 파샤의 손짓에
Beşbin top birden patladı.
오천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네
Osman Paşa'nın kolunda
오스만 파샤의 손짓에
Beşbin top birden patladı.
오천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네

Kılıcımı vurdum taşa
내 칼로 바위를 쳤네
Taş yarıldı baştan başa
바위가 완전히 반쪽이 났네
Askerinle binler yaşa.
그대 병사들에게 천세 있으라
Namı büyük Osman Paşa.
명성 드높은 오스만 파샤여.
Askerinle binler yaşa.
그대 병사들에게 천세 있으라
Namı büyük Osman Paşa.
명성 드높은 오스만 파샤여.

 

45세의 오스만 파샤Osman Pasha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휘하의 병력도 크림Crimean전쟁에 참전했던 정예였다. 한 서유럽 기록을 보면, 그는 미군장군 조지 B 맥클란George McClellan처럼 어깨가 넓고 체격이 좋았으며 검은 눈동자는 크고 불타올랐다고 한다.

미군장군 넬슨 A 마일스Nelson A Miles 1897년 그리스-터키전쟁을 참관한 후에, 그에 대해 허세나 과장이 없는 율리시스 S 그란트Ulysses Grant와 같다고 극찬했다. 오스만에 대해서는 한단어로 설명이 가능했다. 지독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승리가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믿었다.

인내심은 승전으로 이르는 위대한 비밀이다. 하루만에 승전할 수 없지만 목표를 향해 참고 견디면 결국에는 승전한다.”


 

불가리아 서부 위딘Widin(현재의 비딘Vidin)마을에 소규모 병력과 함께 있었던 오스만은 러시아군의 침공을 듣고 몹시 걱정했다. 그의 측면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있으면 안되었다. 11,000명과 54문의 포를 바로 움직여 남진하는 러시아군을 상대하기로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험로 160km를 단 6일만에 돌파하는 강행군 끝에 탈진한 오스만군은 1897년 7 19일에 플레브나에 들어섰다. 플레브나는 미국남북전쟁 게티스버그Gettysburg처럼 6개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전략거점이었다.

오스만은 탈진한 부하들에게 조금의 휴식도 주지 않았다. 참호를 파게 하고 러시아군이 침투할 허점을 틀어막았다.

 

이튿날 러시아군 1개 사단이 오스만 방어선 외곽에 나타났다. 사단장 유리Yuri은 방어선을 정찰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무모하게 병력을 2개로 나누어 돌격했다. 병력과 화력이 우월한 오스만군은 단단하게 구축된 방어선 뒤에서 러시아군 8,600명과 46문의 포를 상대해 3,000명 정도를 죽였다. 오스만은 겨우 50명만 잃었다. 유리는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지원군을 기다렸다.

크루데네르Krudener장군은 1877 7 16일에 니코폴Nikopol요새를 손쉽게 함락시킨 후에 9구단을 이끌고 플레브나에 도착했다. 35,000명과 176문을 가지고 온 크루데네르는 이번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오스만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러시아군은 크림전쟁 이후에도 현대식 소화기와 전술을 외면하고 전통적인 착검돌격을 선호했다. 오스만의 병력 대부분은 영국제 마티니-헨리Martini-Henry 간편형인 피바디-마티니Peabody-Martini(아래 그림 참조)를 무장하고 있었다. 1.6km 밖에서 목표물을 맞출 수 있으며 장전과 발사속도가 상당히 빠른 소총이었다. 러시아군의 표준무장인 베르당Berdan, 크므카Kmka, 카를레Karle소총보다 사정거리가 수백 미터는 길었다.

오스만은 최소한 8,000정을 가지고 있었고 착검하고 밀집대형으로 몰려오는 러시아군 대열에 큰 피해를 주었다.




 

러시아군은 7 30일 오전, 두터운 안개 속에서 두번째 공격을 시작했다. 오스만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간절히 기다리던 지원군이 소피아Sofia에서 출발해 험준한 산맥을 뚫고 도착해 22,000명과 59문으로 증원되었다.

러시아군은 오스만군 2,000명을 죽였지만 자신도 7,300명을 잃었고 목표인 플레브나에는 들어서지 못했다. 터키군의 피바디 마티니와 미국산 윈체스터Winchester소총은 달려드는 러시아군을 마구 쓰러트렸다. 오스만은 러시아군의 공격 두 차례를 완벽하게 막아냈고 10,000명을 죽여 러시아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렸다.


 

러시아군은 난감한 상황에 몰렸다. 러시아군은 멀리 떨어진 본토에서 루마니아를 거쳐 보급을 받고 있었는데 플레브나가 큰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플레브나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터키군을 상대하느라 병력손실이 막심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우회하면 쉬프카Shipka협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전진하는 러시아군의 측면이 위험했다. 플레브나는 하루라도 빨리 함락시켜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 불가리아의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고 영국이 참전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가 절대로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

플레브나전투는 러시아군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상에 대한 성전이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오스만제국 치하에 고통받는 기독교 슬라브민족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시작했고 만약 무슬림군이 승리를 거두면 성전의 의미가 무색해졌다.

 

알렉산드르Alexander차르가 플레브나에 도착하자 전투는 이제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한 판이 되었다. 더 이상의 패배는 러시아 왕조의 망신이었다. 양국은 플레브나에서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고 누가 먼저 무릎을 꿇을 것인지를 놓고 인내심 싸움으로 번졌다.

8월과 9월에 러시아군과 루마니아군 증원이 속속 도착해 오스만의 방어선을 반원으로 포위했다. 차르는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알렉산드르는 1855년 황위에 오른 후에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해 농노제를 폐지하고 크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군을 재편성했다.

무능력한 동생 니콜라스Nicholas대공이 불가리아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지만 알렉산드르가 표트르대제Peter the Great를 흉내내 실제 지휘를 했다. 고집세고 다혈질로 유명했던 차르는 동생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표트르가 될 수는 없었다.



세계역사상 최대규모의 인권회복을 시도한 알렉산드르 2세입니다. 그의 농노해방은 약 4천만명을 해방시켰지만 1881년에 무정부주의자의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러시아개혁은 완전히 멈췄고 알렉산드르 3세는 전제정치로 퇴행해 러시아혁명의 뇌관에 불을 붙였습니다. 


 

플레브나는 격전지가 되었고 오스만은 다음 공격에 대비해 방어선을 계속 보강했다. 양쪽의 서유럽 종군기자는 마을을 두고 강대국이 벌이는 견적을 본국에 알렸다. 주요 신문은 터키의 영웅적인 방어를 칭찬하며 러시아의 실패를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영국은 터키군에 동조하며 애완동물, 거리, 건물 등에 오스만과 플레브나의 이름을 붙였다. 심지어 프레드 버너비Fred Burnaby대위는 불가리아에 가서 러시아 포위망을 뚫고 터키군에 합류하려고 했다.

 

터키군의 증원은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독일출신의 메르메드 알리 파샤Mehmed Ali Pasha의 병력은 동쪽 롬Lom강 부근에서 작전 중이었고 술레이만 파샤 Suleyman Pasha의 병력은 남쪽 쉬피카 협로를 탈환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두 지휘관은 서로를 너무 혐오했기 때문에 절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메흐메드 알리는 러시아 황태자 병력을 상대로 몇차례 승리를 거두고는 곧바로 공세를 멈췄다. 술레이만은 쉬프카 협로의 산정상에 틀어박힌 러시아군을 상대로 무모하게 돌격했다가 수천명의 정예병사를 잃었다.

오스만은 당분간 자체 병력만으로 버틸 수 밖에 없었다.


 

1897 9 11, 러시아군의 세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알렉산드르 2세의 세례기념일로 플레브나 함락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나무 전망대를 세워 화려한 장식을 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즐길 간식과 보드카를 준비했다.

9 7일부터 4일 동안 424문이 약 30,000발의 포탄으로 터키군의 방어선을 두들겨 두었다. 영국용병 발렌틴 베이커Valentine Baker는 메흐메드 알리군에 복무하고 있었는데 160km 밖에서도 포격음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