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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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군의 분전, 플레브나전투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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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017. 9. 13.


요즘 뉴욕배낭여행 준비에 하이파이 오디오 테스트 등으로 역사정리가 많이 늘어지고 있습니다. 


터키군의 분전, 플레브나전투 (2부)


러시아군은 84,000명의 병력을 그리비차Grivitza(우측), 크리스친Krischin(좌측), 라디스체보Radischevo(중앙)으로 나누어 오스만 방어선을 압도한다는 계획이었다. 9월 11일의 공격은 확신과 달리 참패로 이어졌다. 

4일간의 포격은 소리만 요란했을 뿐, 방어진지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고 보병의 공격도 러시아군 특유의 마구잡이식으로 벌어졌다.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비가 계속 내려 전지역이 진흙탕으로 변했다. 

루마니아군이 많이 편성된 우측공격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에 겨우 1번 진지만 점령했고 중앙공격은 완전히 실패했다. 




중앙과 우측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좌측에서는 34세의 미하일 스코벨렙Mikhail Skobelev이 이끄는 러시아군이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흰군복과 흰군마 때문에 백색 러시아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지휘관이었다. 



스코벨렙장군인데 여기에서는 흰군복이 아니군요. 여기에 삽입된 대부분의 그림은 니콜라이 드미트리옙-오렌부르그스키Nikolai Dmitriyev-Orenburgsky의 작품입니다. 


그는 오스만군 참호에 직접 뛰어 들었다가 칼이 부러지고 군마가 죽었다. 진흙과 화약연기를 뒤집어 쓴 그는 생존병력을 급히 모아 교두보를 마련했다. 더 이상 돌파구를 뚫지 못하자 1.8km 후방의 군단장 조톱Zotov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했다. 

스코벨렙은 총검, 식기, 맨손으로 참호를 더 파내 오스만군의 다른 진지의 공격을 막아냈다. 중앙과 우측공격을 막아낸 오스만군은 병력을 빼내 좌측진지의 러시아군을 몰아내려고 했다. 스코벨렙은 밤까지 오스만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조톱은 전령을 통해 버틸 수 없으면 후퇴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스코벨렙은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참호를 빠져나왔다. 


세번째 공격에서 15,000명의 러시아와 루마니아군이 목숨을 잃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지휘관회의가 열렸고 완전히 새로운 전술을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 

크림전쟁 세바스토폴Sevastopol방어전의 영웅으로 상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로 은퇴한 에두아르드 토틀레벤Eduard Totleben을 소환했다. 현장을 지켜본 미군장군은 토틀레벤이 플레브나 작전을 지휘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고 오스만군의 운명도 시간문제였다고 기록했다. 

토틀레벤은 우선 러시아 기병부대를 이동시켜 오스만군 후방의 주 도로를 끊고 주요 거점을 장악해 보급과 증원뿐만 아니라 통신망도 마비시켰다. 



플레브나전투가 끝난 후에 발행된 엽서로 알고 있습니다. 루마니아군이 배후를 끊는 것으로 보입니다. 


11월 중순, 100,000명이 넘는 러시아와 루마니아군이 곳곳에 수백문의 포를 배치하고 오스만의 50,000명을 완전히 포위했다. 매 5일마다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오스만군은 계속 늘어가는 손실을 복구할 방법이 없었다.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집, 마구간과 창고는 부상병과 환자로 가득 찬 야전병원이 되었고 마을은 지옥으로 변해갔다. 

식량이 귀해지면서 고양이, 개, 벌레 심지어 썩어가는 동물사체의 내장까지 먹었다. 11월 13일, 니콜라스대공은 휴전깃발을 세우고 오스만군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오스만군은 정중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패전을 극복한 메흐메드 알리가 구원군 전체의 지휘를 맡았다. 서쪽 소피아에 있던 압둘하미드Abdulhamid 2세는 병력을 모아 아라바코낙Arabakonak협로를 지나 러시아 포위망 배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메흐메드 알리는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병력 20,000명을 긁어 모았지만 플레브나 방면에서 미리 파견한 러시아군 30,000명을 상대하지 못했다. 


오스만은 구원군 희망이 보이지 않자, 항복과 탈출 중에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남은 병력 대부분을 방어선 후방으로 집결시키고 러시아군의 취약부분을 일시에 돌파해 소피아로 탈출하기로 했다. 

오스만군에 있던 윌리암 폰 허버트William von Herbert는 7월에는 활기차고 아름답던 플레브나가 12월 10일에는 황폐하고 신이 버린 오지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날 밤, 지치고 쇠약해진 오스만군이 화롯불 근처로 모여들었다. 

날이 밝자 오스만군은 밀집대형으로 2.7km 전방의 러시아군 진지로 달려갔다. 수천명이 비스밀라-이르-하르만-이르-라헤엠Bismillah-ir-Rahman-ir-Raheem(가장 자비롭고 따뜻한 알라의 이름으로)을 찬송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러시아군의 포화는 밀집대형 사이를 찢어 놓았다. 

오스만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포화와 연기를 뚫고 러시아 포위망에 구멍을 냈다. 양측은 손에 잡히는 대로 찌르고 때리며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허버트는 그런 참상은 설명을 물론이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회상했다. 






토틀레벤은 이미 최후의 반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첫번째 방어선은 돌파 당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러시아포대가 오스만군을 정확하게 겨냥했고 증원군이 구멍을 틀어막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선두에서 전투를 이끌던 오스만이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쓰러졌고 그가 죽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순식간에 사기가 떨어졌다. 

오스만은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143일째인 1877년 12월 10일 오전에 플레브나가 함락되었다. 오스만군은 탈출작전 중에 약 6,0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겨우 1,300명을 잃었다. 

굶주리고 병들어 플레브나에 남았던 오스만군은 러시아 수용소로 향했다. 겨우 15,000명만 살아남았고 도중에 쓰러진 병사는 모두 까마귀와 독수리의 밥이 되었다. 오스만은 알렉산드르 2세를 알현한 후에 마찬가지로 러시아로 후송되었다. 




이후 오스만군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플레브나 함락소식이 퍼지면서 곳곳에서 전열이 무너져 내렸다. 플레브나에 묶였던 100,000명의 병력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발칸 산맥을 지나 남진하면서 불가리아를 해방시켰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군이 수도 근방까지 접근하자 치욕적인 협정을 간청했고 1878년 3월에 산 스테파노San Stefano조약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오스만군

오스만 파샤 지휘

보병: 72개 대대

기병: 21개 대대

포병: 88문

총 34,000명


러시아군

알렉산드르 2세 지휘

보병: 132개 대대

기병: 66개 대대

포병: 487문

총 90,000~100,0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