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15분만에 끝난 저지섬 전투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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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017. 9. 30.


15분만에 끝난 저지섬 전투 (1781)


1781 1 5일 자정직전, 프랑스 전함소함대가 노르망디 해안 근처의 저지Jersey섬 남동쪽 끝에 있는 라 로크La Roque에 나타났다.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y에서 17km밖에 안 떨어진 거리였지만 1066년부터 부근 섬 건지Guernsey 등과 함께 영국영토였다.

700년 후에 플라망Flemish출신 용병 필립 샤를 펠릭스 마카르Philippe charles felix macquart남작이 수백명의 프랑스병력을 이끌고 저지섬을 점령하려고 나타난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단순히 영토탈환이 목적이 아니었다. 1775 4 19, 매사츄세츠만 뉴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영국군과 식민지민병대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지원하는 훨씬 큰 계획의 일부였다. 1777 10 7, 대륙군Continent Army이 사라토가Saratoga에서 영국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 스페인과 네덜란드Dutch공화국이 차례로 참전해 이전의 치욕을 갚으려 했다.

영국은 북미뿐만 아니라 서인도, 인도, 지브랄타Gibraltar, 지중해와 영국해협에서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저지섬전투는 미국독립전쟁 중 영국영토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였다.



지금도 영국령인 저지섬의 위치입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프랑스에는 난처한 곳입니다. 

 

노르망디공 윌리암이 영국왕위에 오르면서 해협제도Channel Islands 1066년부터 앵글로-노르만왕정의 영토가 되었다. 1204, 존왕이 노르망디를 프랑스 필립2세에게 내주었지만 제도는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았다.

저지섬은 겨우 119.5km²에 불과하지만 프랑스 해군기지인 브레스트Brest를 견제하는 전략요충지였다.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하자 영국은 저지섬의 사략선에게 프랑스와 미국해안 약탈을 명령했다. 프랑스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위협이었다.

 

1779, 모험가이자 이등해군지휘관 샤를 앙리Charles Henry가 저지섬을 공격했다. 4 30, 마카르남작을 포함한 5,000명의 병력은 50척의 평저선을 타고 프랑스전함 5척과 사략선 1척의 호위를 받으며 상-말로Saint Malo를 떠났다.

그렇지만 폭우와 강한 맞파람 때문에 새벽이 왔는데도 섬에 접근하지 못했고 모시스 코벳Moses Corbet소령은 여유있게 저지섬 민병대와 78보병연대를 집합시켰다. 해변에 자리잡은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지지부진한 침공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립저지포병대가 포를 견인해왔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상륙하러 접근하는 프랑스군에게 포도탄을 퍼부었다. 포탄세례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려는 배가 없었다. 18명이 익사하고 해변에는 겨우 20명만 발을 디뎠지만 곧바로 항복했다.

영국군에서는 포가 파열되면서 중상을 입은 토마스 피콧이 유일한 사상자였다. 프랑스군은 참담한 심정으로 상 말로로 되돌아가다가 영국해군의 기습을 받아 프랑스 전함 1척이 침몰하고 다른 한 척은 노회되었다.  



이름은 무척 자주 등장합니다만 저지섬전투에서는 들러리 역할을 한 코벳입니다. 

 

크게 놀란 영국은 1781년까지 해안 일대를 크게 강화시켰다. 거주민 2,500명을 5개 민병연대로 편성해 섬 일대에 배치했다. 78보병연대의 5개 중대는 저지섬의 수도이자 항구인 세인트 헬리어St Helier 바로 북쪽의 종합병원에 배치했다.

엘리자베스성과 포로 항구를 보호했고 세인트 헬리어는 몽 파티불레어Mont Patibulaire에 포를 배치해 방어했다. 그 밖에도 83보병연대의 5개 중대를 콘웨이Conway 요새에 추가로 배치해 동쪽 해안의 그루빌Gruville만을 방어하고, 95보병연대의 10개 중대는 섬 서쪽의 세인트 피터스 패리시St Peter’s Parish를 맡았다.

 

프랑스는 저지점의 사략선 본거지를 없애기로 결정하고 첫번째 침공에서 실패한 마카르남작에게다시 한 번 병력을 모으고 훈련시켜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루이Louis 16세는 당시 중령계급이었던 마카르남작에게 세인트 헬리어를 점령하면 바로 장군으로 승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마카르는 상륙지점으로 헬리어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진 라 로크를 골랐다.   

1780 12 27, 남작과 직접 선발한 1,200명이 그랑빌Granville을 출발했다. 마카르는 지난 번의 참패를 교훈삼아 해협제도의 남쪽 섬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며 악천후를 견뎠다. 1 5, 전함의 호위를 받으며 수송선이 다시 출발했고 8시간 만이 저녁 11시에 라 로크에 도착했다. 기습효과 만점의 시간대였다.



마카르남작입니다. 프랑스정부가 병력, 탄약과 함대까지 모두 지원했지만 본격적인 전쟁발발을 우려해 마카르남작의 개인적인 모험으로 위장했습니다. 심지어 병력도 모두 탈영처리한 후에 원정군으로 다시 편성했습니다. 

 

3개 정규연대의 고급장교는 거의 모두 크리스마스를 맞아 본토로 휴가를 떠났고 요새와 감시탑의 병력은 기독교 축제 십이야Twelfth Night를 즐기고 있었다. 1 6일 오전 1 30분에 선봉대가 상륙해 감시초소와 포대를 간단히 점령했다.

본대는 4개 부대였다. 마카르와 500명은 오전 2시에 상륙했지만 그 후는 순조롭지 않았다. 상륙을 엄호하던 전투함 레나르드Renard가 좌초하고는 부숴졌다. 바람과 강한 파도 때문에 2차와 3차 상륙부대는 대포와 함께 바다로 다시 밀려나갔다.

상륙에 성공한 4차병력까지 합쳐도 겨우 700명이 전체병력의 절반도 안되었다.



이번 이야기의 무대입니다. 라로크는 오른쪽 끝의 뾰족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저지섬의 영국군 수비대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한 병력이었다. 마카르는 적을 속일 수 있다고 믿었다. 라 로크에 100명을 남기고 오전 4시에 세인트 헬리어로 향했다. 프랑스군은 적을 피해 일부러 험로를 택해 오전 6시를 약간 넘겨 세인트 헬리어의 로얄 스퀘어Royal Square에 들어섰다.

보초 중 한 명이 78보병연대가 있는 종합병원 막사로 달려가 잠을 깨웠다. 오전 7시에 교회 종과 포성이 울려 퍼지며 적의 침공을 전체에 알렸다.

 

프랑스군은 광장 남쪽의 관청을 습격했다. 영국군 대위 2명이 재빨리 총독관저로 달려가 섬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던 코벳부총독에게 소식을 알렸다. 부총독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두 명을 서쪽의 78 95연대, 동쪽의 83연대로 각각 보냈다. 두 대위는 프랑스군이 관저에 들이닥치기 직전에 빠져나갔다.

프랑스군은 코벳을 의회로 데려갔고 마카르는 부총독에게 항복조건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모든 군사시설을 양도하고 섬 수비대의 소화기와 탄약을 모두 의회로 가져온다는 조건이었다.

코벳이 거부하자 마카르는 수도를 약탈하겠다고 위협했다. 마카르는 코벳에게 이미 4,000명을 상륙시켰고 10,000명이 더 상륙할 예정이라고 과장했다. 회중시계를 탁자에 놓고 30분의 여유를 주겠다고 말했다.

 

오전 8, 마카르가 코벳을 강요하는 동안 영국군이 몽 파티불레어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78연대가 집결지에 모이고 있었다. 마카르는 코벳이 시간을 끌고 있다고 소리를 지르며 바로 서명하지 않으면 세인트 헬리어를 불지르겠다고 다시 위협했다. 코벳을 결국 항복서명했고 전령이 78연대 본부로 복사본을 가져갔다.

섬 동쪽의 콘웨이 요새 83연대와 민병대는 라 로크에 남은 프랑스군 100명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했다. 세인트 마틴 교구목사 프랑소와 르 쿠터는 교구 대포를 콘웨이 요새로 옮겼다.

83연대 척탄병의 윌리암 캠벨William Campbell대위가 남은 장교 중에서 가장 선임이었다. 프랑스군의 항복요구를 무시하고 정찰병을 보내 프랑스군 후위병력을 정찰한 후에 병력과 포를 라 로크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오전 10, 캠벨은 병력을 둘로 나누고는 양쪽에서 프랑스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프랑스군은 항복요구를 거부하고 사격했다. 영국군도 응사를 한 후에 총검을 앞세워 돌격했다.

순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 20명과 영국군 7명이 전사했다. 프랑스군 30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바닷가 암초지대로 도망가 프랑스 수송선의 구조를 기다렸지만 영국군의 포격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다.

 

다시 세인트 헬리어의 상황을 보면, 마카르가 항복문서를 엘리자베스성으로 보냈다. 요새를 책임지고 있던 공병장교 프레데릭 멀캐스터Frederick Mulcaster대위는 항복문서를 주머니에 넣고는 프랑스어를 모른다며 전령을 돌려보냈다.

마카르는 썰물로 드러난 모래사장으로 병력을 보내 성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포격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영국군의 반격이 임박했고 마카르는 병력을 모두 로얄 스퀘어로 물려 방어태세를 굳혔다.

 

코벳의 항복문서가 78보병연대에 도착하자 장교들의 의견이 갈렸다. 일부는 부총독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침공군에 맞서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선임대위는 몽 파티불레어에 자리잡기로 결정하고 95연대에도 그 사실을 알렸다.

95연대의 프란시스 피어슨Francis Peirson은 이미 세인트 헬리어로 진군 중이었고 오전 10시에 78연대와 합류했다. 24살의 피어슨은 당시 저지섬에서는 부총독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었다. 코벳이 포로가 된 것을 알고는 지휘권을 잡았다.

피어슨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반격을 준비했다. 마카르는 세인트 헬리어 남쪽의 요충지 몽 드 라 빌Mont de la Ville을 그대로 두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피어슨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소령은 즉시 2개연대의 경보병 중대와 북부민병연대를 보내 고지를 점령했다.



24살에 목숨을 잃은 피어슨소령입니다. 당시에는 연대장이 선두에 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병력을 선도했었습니다.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수도를 향해 내려갔다. 도중에 백기를 들고 코벳의 항복명령을 제시하는 프랑스 장교를 만났다. 피어슨은 명령을 읽고는 좋소. 의회로 화기를 가져 가겠소만 항복할 생각은 없소라고 대답했다.

프랑스장교는 한시간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고 피어슨도 장교 2명을 보내 코벳석방을 요구했다. 마카르는 병사와 함께 코벳을 피어슨에게 보냈다. 피어슨은 코벳에게 프랑스 병력에 대해 물었고 코벳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프랑스장군의 약속을 가져왔고 명예를 지켜야 하네라고 대답했다.

피어슨은 부총독에게 정규군이나 민병대가 항복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리고 10분 후에 공격하겠다며 부총독을 돌려보냈다.

 

피어슨은 로얄 스퀘어(현재의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 서쪽 갈림길에서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78연대 로버트 럼스데인Robert Lumsdaine대위가 이끄는 첫번째 병력은 라 그랑 루La Grande Rue(현재의 브로드Broad거리)를 통해 직진했고 피어슨은 말을 타고 95연대와 함께 라 루 드 데리에흐Le Rue de Derriere(현재의 킹 거리)를 따라가다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정오가 되자 럼스데인의 병력이 광장부근에 도착했고 프랑스군은 노획한 대포로 선제포격을 쏘았다. 그렇지만 프랑스 포수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포탄이 모두 머리 위로 넘어갔다. 영국군 포수는 6파운드 포로 포도탄을 쏘아 프랑스군 대열에 구멍을 냈다.

럼스데인은 일제사격을 퍼붓고는 총검돌격을 감행했다.



현재의 로얄 스퀘어입니다. 

 

피어슨의 병력이 측면에서 접근하자, 부하들이 피어슨에게 몸을 낮추라고 간청했다. 혈기가 넘친 젊은 소령은 간청을 무시하고 광장에 그대로 들어섰다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그림 참조).

마카르의 신세도 마찬가지였다. 마카르는 코벳을 의회에서 데리고 나오며 항복의사를 밝히다가 4발을 맞았다. 부총독은 부상을 입지 않았다.

총격전이 벌어지자 몽 드 라 빌에 있던 병력도 급히 내려와 수도로 뛰어 들었다. 마카르를 잃은 프랑스군 장교는 의회로 물러나 코벳에게 전투를 중지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부총독은 간신히 지휘권을 되찾았고 전투는 겨우 15분 만에 끝났다.




오른쪽 서있는 사람이 코벳이고 칼을 건네주는 사람이 마카르입니다. 이미 항복의사를 밝힌 모습입니다. 



마카르가 후송되어 목숨을 잃은 피어슨 술집입니다. 저지섬에 가면 아래와 같이 마카르의 묘가 있다는군요.


 

영국군은 프랑스군 약 400명을 포로로 잡았고 이후 며칠 동안 수십병의 탈영병을 더 붙잡았다. 456명의 포로를 수송선에 태워 영국으로 후송했다.

코벳은 지휘권을 되찾았지만 수비대의 장교들이 노골적으로 그의 결정을 비난했고 심지어 내통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1 25, 영국정부는 부총독 체포명령을 내렸고 코벳은 5 1일에 군사재판을 받았다.

5일간 계속된 재판에서 내통혐의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대신에 항복조건에 서명하고 부대에 항복명령을 내린 죄는 인정되었다. 검사는 프랑스군이 겨우 세인트 헬리어 중심부만 장악했는데도 항복했는데 실제로는 모든 주요 시설과 요새가 그대로 아군에게 있었다고 지적했다.

코벳은 수도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명했고 다른 장교가 자신의 명령에 불복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항변했다. 프랑스군에게 협조한 덕분에 피어슨이 반격할 시간을 벌었다고 변명했다.

 

침공당시 저지섬을 비웠던 헨리 콘웨이Henry Conway총독은 어떤 증언도 하지 않았다. 코벳은 콘웨이에게서 부총독지위를 인정받았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콘웨이는 1년 후에 영국 총사령관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콘웨이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코벳은 부총독 지위를 박탈당했지만 무죄판결을 받았고 32년간 복무한 대가로 평생동안 250파운드의 연금을 수령했다.

 

1781년을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더 이상 저지섬을 노리지 않았지만 프랑스침공 거점으로 사용된 적이 한 번 있었다. 독일군이 1940년에 해협제도를 점령하고 1945 5 9일에 항복할 때까지 영유했는데, 3 8~9일 밤에 연합군 상선을 공습하려다가 실패했다. 그랑빌의 소규모 군수창을 노렸는데, 마카르가 164년 전에 출발했던 바로 그 항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