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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6부) - 양국의 전쟁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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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2018. 9. 25.


이번 이야기는 양국의 전쟁준비편인데 지리하게 무슨 사단을 어떻게 늘리고 어디에 배치하고 등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줄였으니까 중간에 좀 앞뒤가 안 맞아도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기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6부) - 양국의 전쟁준비


반면에 러시아군은 프랑스군과 같은 자제조달이 없었고 보급창을 주로 이용했다. 전쟁 초반에는빌나, 슈베지니아, 콜티니아니, 그로드노, 슬로님, 슐루츠, 핀스크, 모시르, 브레스트, 코벨, 루츠크 등의 거점 보급창에 의존했다. 

그리고 네만Niemen에서 상페테르부르크St. Peterburg, 모스크바와 키에프Kiev로 이어지는 전선을 따라 2차 보급창을 마련했다. 러시아군은 충분한 군량을 준비해두었다. 

그렇지만 보급창이 너무 대규모인데다가 넓게 분산되어 있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수송대가 오가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프랑스군에게 보급창을 빼앗기면 재앙에 가까웠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너무 빨리 후퇴한 데다가 보급창의 곡식을 빵으로 구울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 중반, 러시아군은 특정지역에 소규모 보급창을 분산시키고 농노에게 군량을 구하도록 바꿨지만 전선이 워낙 빨리 후퇴해서 소용이 없었다. 원래는 드비나Dvina강까지만 후퇴할 계획이었지만 모스크바까지 밀리면서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수송부대는 프랑스군 선봉대를 피해 멀리 안전한 길로 우회했고 심지어 본대로 돌아오는데 2주가 걸리기도 했다. 

프랑스군이 후퇴하자,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한 외곽도시와 농촌지역에서 보급품을 조달했다. 현지에서 모은 보급품은 민간과 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원해서 수송했다. 러시아의 마차와 썰매는 조악한 러시아도로에 맞춰 만들어졌고 후퇴하는 프랑스군과 달리 코사크의 습격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다. 러시아군 수천명도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서드비나강(다우가바Daugava)의 위치입니다. 북드니바강은 모스크바 동쪽 멀리에 있으니까 혼동하지 마시길.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만난 문제는 병력부족이었다. 그는 예비대를 해체해서 보병연대의 4와 6대대를 증원했다. 1811년 7월 1일에는 대대적인 징집명령을 내렸다. 홀란트Holland, 라인강일대, 브레다Breda와 스헬더Scheldt일대에서도 징집했다. 

증원된 병력을 훈련시키고 지휘할 준사관 부족도 문제였다. 새로 편성된 6대대의 준사관 대부분은 최소한의 복무기준을 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반드시 미자격자를 일반병으로 되돌리고 2년 이상의 복무자를 준사관학교에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야 하사로 진급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계급은 기간을 최소 기간을 더 늘렸다. 

증편한 6대대 병사의 질에 문제 많았다. 다부Davout는 6대대 신병을 모두 다른 대대로 배치시키고 1~4대대의 고참병을 6대대로 보내 대대간의 차이를 없앴다고 보고했다. 다부는 준사관 후보의 지식을 지적하며 만약 후보가 읽고 쓸 수 있다면 최소기간과 상관없이 진급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징집과 모병의 결과가 좋아서, 나폴레옹은 아예 7대대를 편성하거나 각 대대의 인원을 늘리려고 했다. 다부는 960명 대대는 지나치게 비대하다고 조언하며 7대대 편성을 지지했다. 그리고 6~8주면 부족하나마 준사관을 충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원정은 1809년 대육군 해체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군은 쇤부른Schònbrunn(그림 참조)조약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부대는 본국으로 귀환했고 나머지는 독일에 주둔했다. 

5월 15일, 나폴레옹은 독일군Armée d'Allemagne 해체를 결정하고 다부에게 새 군대조직을 명령했다. 다부는 병력을 독일 전역에 재배치했다. 

네덜란드 지역의 바르반트군Armée de Barbant도 해체했다. 프랑스보병 38,791명, 프랑스기병 4,392기, 네덜란드보병 9,369명과 네덜란드기병 1,007기였다. 프랑스군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810년 5월 1일, 네덜란드병력 12,000명과 아직 남아 있는 프랑스병력을 합쳐 홀란트주둔군단Corps d' Observation de la Hollande을 새로 편성했다가 네덜란드를 메트로폴리탄 프랑스로 편입한 후에 프랑스군으로 통합했다. 

1810년 9월 19일, 외젠Eugene공에게 이탈리아군Armée d'Italie 편성을 명령했다. 총 30,000명의 병력이었다. 

1810년 10월 4일, 독일군을 재편성하기 시작하고 엘베주둔군단Corps d'Observation de l'Elbe이라고 불렀다. 원정직전에는 보병사단 9개, 경기병사단 1개, 중기병사단 1개, 야포 110문까지 불어났다. 

이밖에 해양주둔군Corps d'Observation des Còtes de 1'Ocean을 재편성해 4개 사단을 편성했다. 엘베주둔군단, 이탈리아주둔군단, 해양주둔군단이 1812년 대육군의 중심이 되었다. 


1811년 4월, 나폴레옹은 다부군단의 흉갑기병사단을 제1 흉갑기병사단으로 명명하고 본Bonn, 에르푸르트Erfurt, 쾰른Cologne에서 2, 3, 4흉갑기병사단을 편성했다. 

포대를 독일에 집결시키는 동시에 단치히Danzig(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에 부교수송대를 조직했다. 대육군이 진격을 시작하면 비스와Vistula강에 다리를 놓는 부대였다. 

스페인주둔 병력도 불러 들였고 단치히에 대대적인 보급창을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1811년 초에 바르샤바대공국과 베스트팔리아왕국에게 병력을 동원하라고 재촉했다. 당시만 해도 러시아군의 선제침공을 걱정해서 국경을 단단하게 다지고 싶었다. 라인강 일대에도 병력동원을 명령했다. 1811년 모병만으로는 부족해서 1812년에도 더 모병했다. 

1812년 2월, 베르크Berg, 바덴Baden, 헤세-다름슈타트Hesse-Darmstadt 병력으로 최초의 독일사단을 편성하고 북쪽으로 이동시켜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슈테틴과 구슈트린에 배치했다. 3월 초에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와 뷔르츠부르크Wurzburg 병력으로 예비사단을 편성했다. 

뷔르템부르크Wurttemberg – 보병 10,000명, 기병 2,000기, 포병 1,000명과 30문

바바리아Bavaria (그림 참조) – 보병 14,000명, 기병 3,174기, 포병 1,106명

작센Saxon – 약 20,000명(주로 독일거점에 주둔), 군마 6,160기, 포 59문

베스트팔리아 – 20,000명(단치히와 스페인 주둔 3개 연대 제외), 군마 4,416기, 포 40문



1812년 12월 말까지 약 120,000명의 신병을 새로 증원시켰고 그 중에 113,000명이 이미 훈련을 받고 있었다. 


니폴레옹은 후방에 대해서도 잊지 않았다. 3년 전에 있었던 영국군의 스헬더Scheldt상륙 후에 해안방어를 보강했다. 프랑스 육군과 해군포병의 실력을 유럽최고였지만 해안포병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는 민병대가 적의 정규군을 상대할 수 없다며 해안방어예산을 2배로 늘렸다. 해안부대에 육군포병 4개 연대를 편성하고 방어선을 재정비했다. 


러시아의 선제침공 우려가 사라지자, 디나부르크Dinaburg와 리가Riga 점령을 염두에 두고 두 도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철저한 사전준비로 두 요새도시를 단 15일 만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베스트팔리아군에게는 러시아가 바르샤바대공국을 공격할 경우에만 움직이고 그렇지 않으면 국경을 수비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으면 베스트팔리아군이 프랑스군의 우익이 되고 다부가 좌익을 맡기로 했다. 



라트비아의 리가와 디나부르크(다우가프필스, 러시아는 드빈스크) 위치입니다. 리가는 러시아가 북해로 진출하기 위해 무척 공들였던 전략거점이었습니다. 


러시아군도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1810년 초, 핀란드의 병력을 리투아니아와 남쪽으로 이동시켰는데 당시 투르크와 전쟁 중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9월에는 리가 등의 여러 도시에 보급창을 만들기 시작했다. 

1811년 5월에는 리투아니아에 4개 사단을 증파해서 총 7개 사단이 주둔했다. 각 사단은 약 7,800명의 병력이었으니까 50,000명 이상의 전력이었다. 이 밖에 코사크 비정규군과 용기병 연대 9,000명이 있었다. 포돌리아Podolia 등에 2개 사단이 있었지만 11,000명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폴란드 국경에 3개 기병사단을 증편했고 주요 요새에도 보병을 증파했지만 별 의미없는 전력이었다. 

전쟁에 대비해 볼히니아Volhynia, 포돌리아와 키에프Kiev에 밀 13,000,000리터, 밀가루 1,650,000리터, 오트 19,2000,000리터를 저장해 두었다. 스웨덴국경 부근에도 비슷한 규모의 보급창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주 또는 개성과 같은 우크라이나 키에프입니다. 모스크바는 1156년에 건설되기 시작한 반면에 키에프는 이미 600년 전부터 주요 도시였고 키에프공국으로 발전했습니다. 1240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수도로 자리잡게 됩니다. 


키에프는 3,000명을 동원해 요새를 건설했고 디나부르크도 32개 대대를 동원해 요새도시로 바꾸었다. 특히 디나부르크는 600문의 포를 배치하고 주변에 깊은 참호를 파서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투르크 국경에서도 병력을 빼냈다. 4월에 약 50,000명을 이동시켰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던 프랑스군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중순 러시아는 120,000명 규모의 4개 군단을 편성했다. 보병 90,000명, 기병 30,000명, 포 250문 외에 코사크 비정규군으로 상당한 규모였다. 

6월이 되자 리투아니아 전선의 러시아군은 보병 74,000명, 기병 18,500명과 예비대 6,750명으로 불어났다. 리가는 이중성벽, 60문의 중포와 30,000명의 수비대로 보강되었고 장기전에 대비해 1억 리터 이상의 군수품을 저장했다. 


그렇지만 급하게 증원하고 개편했기 때문에 실제 전력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32보병사단은 겨우 2개 연대에 불과했고 일부 엽병예비대대는 240명이 고작이었다. 1흉갑기병사단의 예비대대는 126기밖에 없었다. 

완전개편 후에도 대대평균병력은 650명을 넘지 않았고 연대는 1,600명 미만이었다. 사단병력은 10,000명 정도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이 참전하면 프로이센과 단치히를 침공해서 가장 먼저 이탈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프랑스동맹인 스웨덴에 대해서는 올란드제도Aaland Islands와 핀란드 국경의 20,000명 외에 러시아근위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다뉴브Danube강 일대의 수비에만 집중했다. 

러시아는 프랑스침공 직전에 투루크와 평화조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남부전선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