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8부) - 제롬의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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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2018. 10. 12.


이러다가 또 하나의 미완성 연재가 될 것 같아서 다음 이야기부터는 마구 뛰어 넘어가야겠습니다. 30년 전쟁은 너무 지루해서 계속 이어갈 생각이 없지만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은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요.




6월 28일, 프랑스군은 빌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러시아 후위와 마주쳤다. 경기병이 공격하고 포 몇 발을 쏘자 러시아군은 보급창에 불을 지르고 도시를 내주었다. 

제롬군은 하루 전에 그로드노에 입성했는데 러시아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나머지 부대도 순조롭게 목표를 점령했다. 

바클라이는 플로토프에게 스로므고니Smorgony 보급창을 불지르고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바그라티온은 민스크-보리소프 도로를 방어하면서 서군의 제1, 3군과 연결하기로 했었다. 짜르는 바클라이의 고립이 염려되어 바그라티온에게 바클라이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나폴레옹은 두 군대가 합류하지 못하도록 속도를 더 냈다. 


바그라티온의 2군이 오츠미아나Ochmiana 동쪽에 나타나자, 나폴레옹은 계획을 수정하고 무라에게 바클라이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무라는 기병사단 5개와 혼성 보병군단 1개가 주어졌다. 다부의 병력 중 2개 사단은 빌나에 남아 후방에서 들어오는 보급창을 지키기로 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잠시 지연되었고 이 덕분에 바클라이는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월 29일, 나폴레옹은 정찰을 보내 바클라이의 위치를 파악했고 일부 군단과 전투를 벌였다. 나폴레옹은 그 병력을 바그라티온의 일부 벙력으로 착각했다. 


이 시기는 원래 뜨겁고 메말라야 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도로는 진흙수렁으로 변했다. 보급마차가 움직이지 못하면서 프랑스군은 마구잡이식 약탈로 리투아니아인을 화나게 만들었다. 갑자기 끌어 모은 군마는 혹독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죽었다. 

29일, 악조건을 뚫고 다부의 기병이 민스크로 계속 전진했다. 그는 바그라티온을 고립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숲이 울창한 지형 때문에 불가능한 임무였고 무리한 강행군으로 피해가 누적되어 나폴레옹에게 지원군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외젠은 명령을 받았는데도 빌나로 이동하지 않고 7월 2일 하루를 필로니Piloni에서 낭비했다. 러시아군의 측면기습을 두려워했던 것인데, 나폴레옹에게서 심한 질책을 받은 후에 빌나에 들어섰다. 그렇지만 포병이 워낙 뒤처져서 나폴레옹은 무라, 네, 우디노Oudinot에게도 멈춰서 포병과의 격차를 줄이라고 명령했다. 





제롬이 그의 발목을 잡기에는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에 바그라티온은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롬은 심지어 2일이나 뒤늦게 러시아군이 오츠미아나를 포기했고 바그라티온 7개 사단이 슬로님과 민스크 방면으로 달아났다고 보고했다. 

나폴레옹은 베르티에를 시켜 제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최악의 기동이다. 너는 내 계획을 무산시켰고 최고의 기회를 날렸다’고 질책했다. 제롬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주일 후에 다부와 심한 충돌을 빚고는 지휘권을 내려 놓고 베스트팔리아로 돌아갔다. 

바클라이는 드리사 부근에 병력을 모았지만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다부가 교통로를 끊은 것을 알고 민스크로 이동하기로 했다. 플라토프에게 측면을 최대한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나폴레옹의 막내동생인 제롬은 형덕분에 능력이 맞지 않는 왕위까지 올랐습니다. 제롬에 대해서는 지난 워털루전투에서 충분히 야유를 보냈으니까 여기에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과도한 인척등용은 그래서 안 좋습니다. 


무라는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며 바클라이의 후위를 만나는 족족 격파했다. 제롬도 드디어 전진하기 시작했고 다부가 민스크로 진격하면서 바그라티오니 비테브스크에 도착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으면 되었다. 

무라와 네는 바클라이를 계속 추격했고 나폴레옹은 외젠과 근위대를 모아 남쪽에서 올라가 바그라티온과 바클라이를 끊고 고립된 바클라이를 격파하려고 했다. 나폴레옹은 이미 다부에게 제롬의 베스트팔리아군을 지휘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제롬은 이 결정을 전혀 몰랐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7월 11일까지 민스크에 도착할 수 없다고 보고 다부에게 최대한 빨리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짜르 알렉산드르는 드리사에서의 결전을 결정했었고 다부가 러시아군을 우회해 스몰렌스크로 바로 진격할 까봐 바그라티온을 칠책했다.


 

휴식 중인 러시아군입니다. 


바클라이를 포함한 지휘관들은 드리사 방어전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격론을 걸친 끝에 비테브스크로 후퇴해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바그라티온의 합류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그라티온은 짜르의 편지를 받고는 비웃었다. 자신이 주력을 끌고 다니고 있는 동안 바클라이가 프랑스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2일 후에 먼저 제롬을 격파하고 다부를 상대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스코틀랜드 피가 흐르는 바클라이가 러시아를 배신하고 있다며 순수 혈통의 러시아인을 믿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믿어 달라며 계속 후퇴했다. 


7월 8일, 다부는 민스크에 조심스럽게 접근했지만 바그라티온은 이미 며칠 전에 퇴각한 후였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추격 때문에 더 남쪽으로 퇴각로를 잡았다. 바그라티온은 9일 동안 행군해 제스비즈Jesvizh에 도착해 72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다. 

나폴레옹의 계획대로였다면 제롬이 7일에 이미 그곳에 있다가 바그라티온을 격하게 환영해야 했지만 제롬은 보이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환상적인 계획은 이렇게 실패했다. 제롬의 이해못할 명령불복종과 나폴레옹의 방임, 진흙탕이 된 도로와 병사들의 체력 때문에 귀중한 기회가 날아갔다. 

7월 9일, 나폴레옹은 맥도날드Macdonald에게 자콥슈타트Jacobstadt로, 다부는 보리소프와 오르샤Orsha로, 제롬은 바그타리온을 계속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제롬이 마지못해 전진을 시작하자 토리마소프Tormassov가 서부 3군을 편성해 바그라티온을 지원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잘 레니에르Jean Reynier의 작센군이 슬로님에 머물면서 독립적으로 토르마소프를 상대하기로 했다. 


7월 12일, 러시아군이 드리사에 집결할 것이 분명해지자, 나폴레옹은 남쪽 측면에 예정대로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다부의 기병이 보리소프를 점령하고 제롬과 전선을 연결했다. 이튿날 다부는 바그라티온을 격파할 기회가 생겼다고 보고 제롬에게 나폴레옹의 비밀명령을 알리며 베스트팔리아군의 지휘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제롬은 황당하게 군단을 멈추고 참모장인 마찬드Marchand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나폴레옹의 명령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부는 제롬의 멍청한 결정을 뒤늦게 알고 설득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부 혼자서는 바그라티온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힐레프Mohilev(현재의 벨라루스 마힐료프)로 이동해 비테브스크로 향하는 길목을 막았다. 


제롬에게서 하루 아침에 지휘권을 넘겨받은 마찬드는 바그라티온의 퇴각로를 끊어야 할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사단장들도 행군을 멈추고 명령을 기다리다가 다부에게 명령을 요청했지만 다부도 속수무책이었다. 

플라토프는 15일까지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으며 로마노프Romanov를 사수하고 있었다. 주력 대부분은 보우스바Vousva 동쪽 강변에 있었다. 15일 오전 제1 폴란드경기병연대가 플라토프의 선봉대를 공격해왔다. 

코사크기병은 퇴각하며 폴란드군을 매복으로 유인했다. 코사크의 나머지 병력이 공격에 나섰고 폴란드군도 맞대응에 나섰다. 폴란드군은 700기 중 279기를 잃었고 프랑스군 군단이 도착하면서 코사크가 후퇴했다.

플라토프는 강을 다시 건넌 후에 다리를 불태웠다. 마을에 배치했던 코사크 견인포 2문은 간단한 포격전 후에 바로 파괴되었다. 


7월 19일, 다부는 제롬에게서 절대로 지휘하지 않겠다는 응답을 받고 7군단의 사단지휘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는 슬루츠크Slutsk로, 라투르모버그Latour-Maubourg는 바그라티온의 위치를 찾으러 보브루이스크Bobruisk로, 타후Tharreau는 보리소프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나폴레옹도 제롬의 이탈을 뒤늦게 알고 다부의 성급한 지휘권 요구를 질책했다. 그는 포니아토프스키에게 지휘권을 주고 바그라티온을 계속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부에게는 모힐레프Mohilev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7월 20일, 다부는 명령문서를 받기도 전에 모힐레프를 공격해 수비대 2,000명을 밀어내고 막대한 보급품을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배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하고 기병대 일부를 배후로 돌렸다. 나폴레옹이 상상 속의 적을 상대하는 동안 다부는 바그라티온의 반격을 받았다. 이그나티에프Iganatiev 증원군까지 도착하면서 다부는 2배가 넘는 병력을 상대했다. 다부는 기병 6,000명과 보병 22,000명이 전부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던 폴란드의 요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입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부상을 입고 먼저 귀국했고 러시아의 제안을 물리치고 다시 병력을 모아 나폴레옹을 지원했습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전투에서 다시 부상을 입고 익사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돌격하는 그의 모습입니다. 



7월 21일, 다부는 모힐레프에서 약간 떨어진 다슈코프카Dashkovka로 정찰대를 내보냈고 곧바로 러시아군의 선봉대와 부딪쳤다. 정찰대가 고지에 이르자 3,000명의 코사크군이 주위를 둘러쌌다. 1개 중대는 바로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 3개 중대는 퇴각했다. 정찰대를 뒤따르던 프랑스 85 전열병연대가 포를 몇 발 쏘자 코사크군이 사라졌다. 

다부가 전장으로 선택한 살타노프카Slatanovka는 숲과 작은 개울이 얽혀 있어서 러시아군의 많은 병력이 배치될 수 없었다. 다부는 22일 저녁 내내 진지를 보강하고 다리를 가로 막거나 무너트렸다. 주변 건물 사이의 허점도 틀어 막았다. 

우익인 파토바Fatova에는 6개 대대를 배치하고 좌익인 살타보프가 부근에는 4개 대대를 배치했다. 우익 뒤에는 예비대로 4개 대대를 두고 나머지 병력은 중앙 예비대로 돌렸다. 


23일 오전 7시, 러시아 라에프스키Raevsky장군이 엽병연대 2개를 이끌고 나타났다. 바그라티온은 그에게 보병 10개 연대, 기병 12개 중대, 코사크 3개 연대와 포 72문을 주고 살타노프스카에서 다부를 밀어내라고 명령했다. 

오전 7시 30분, 러시아군이 프랑스 전초소를 점령했다. 주력이 프랑스군 정면으로 서서히 접근하는 동안 다른 병력이 파토바 부근의 숲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오렐Orel과 니베고로드Nivegorod연대가 마을 점령했지만 마을 뒤의 밀밭에 매복해 있던 프랑스군 4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파토바에 접근하던 폴타바Poltava연대 등의 병력도 곧바로 다시 밀려났다. 러시아군의 공격은 박자가 맞지 않아서 지리멸렬하게 끝났고 오히려 프랑스군의 반격에 몰리기 시작했다. 


다부는 바그라티온의 주력이 우익에 몰린다고 생각했지만 정찰대는 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기병을 보내 러시아군 중앙을 공격하는 보병사단을 지원했다. 61과 85전열병연대는 개울을 건너 러시아군 좌익을 공격했고 데세Dessaix사단은 러시아군의 배후로 돌아 러시아군을 혼란으로 몰아 넣었다. 바그라티온은 프랑스군이 좌익을 무너트리자 전군 퇴각을 명령했다. 

61과 111전열병연대는 어두워질 때까지 러시아군을 추격했다. 프랑스군은 2배가 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살타노프스카를 지켜냈다. 프랑스군은 4,134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2,548명을 잃고 200명이 포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