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12부) -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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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2018. 12. 19.


이제 한 두 편의 이야기만 더 정리하면 길고도 지루했던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 끝납니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정리했기 때문에 미완성의 위기를 넘길 수 있겠군요.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12부) - 퇴각


러시아 서부 2군은 20,000명에서 14,000명이 남았고 대부분의 대대는 200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바그라티온 플레쉐를 수비하던 척탄병 6개 대대는 겨우 300명이 남았다. 400명이었던 황후흉갑기병연대는 95명으로 변했다.

프랑스군은 사단장 14, 여단장 33, 참모장교 32, 전속부관 86, 연대장 37명이 전사했다. 양측은 모두 탈진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승부를 내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전장에서 포탄 20,000발을 노획하거나 주워 귀중한 보급을 챙겼다


 

이제 모스크바까지 겨우 18km만 남았다. 러시아군은 914일에 모스크바로 들어섰다. 무라가 모자이즈크Mozhaizk 부근에서 러시아근위기병군단과 자정이 될 때까지 격전을 벌였다.

쿠투조프는 모스크바 서쪽 외곽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모스크바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지만 놀랍게도 지휘관들은 일전을 주장했다. 바클라이는 병력과 모스크바 모두를 잃는다며 반대하며 북쪽으로 이동해 상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자고 주장했고 톨Toll은 칼로우가Kalouga로 후퇴해 전력을 재정비하고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치차고프Tchichagov제독의 병력을 합치자고 주장했다.

프랑스군이 이미 치차고프군을 차단하려고 이동하고 있어서 쿠투조프는 콜롬나Kolomna로 이동했다


한때 러시아의 전쟁영웅이었던 파벨 치차코프는 베레지나강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퇴각을 막지 못해 사령관직에서 물러났고 프랑스로 건너가 조국을 등졌습니다. 

 

러시아군 후위를 맡은 밀로라도비치Miloradovitch는 무라에게 모스크바를 비울 수 있도록 몇 시간의 휴전을 제안했다.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이 모스크바를 떠나고 2시간 후에 입성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클라우제비츠는 밀로라도비치와 함께 재협상하기 위해 무라를 방문했다가 조국 프로이센의 브란덴부르크 울란연대를 보고 복잡한 심정이었다.

양측의 재협상이 결렬되었지만 러시아군은 무사히 퇴각했고 프랑스 기병대는 텅 빈 모스크바에 무혈입성했다. 러시아귀족이 몰려나와 관용을 요청할 것으로 기대했던 나폴레옹은 단 한 명의 관료도 만나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밀로라도비치는 승승장구했고 니콜라이가 황위승계순서를 무시하고 차르에 즉위하자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니콜라이의 명령에 따라 병사를 진정시키던 중에 총에 맞아 1826년 12월에 사망합니다. 



 

915~16, 시내에 화재가 발생했고 프랑스군의 규율은 완전히 무너졌다. 병사들은 마구 약탈했고 모스크바는 대부분 폐허로 변했다.

무라는 러시아군이 와해되었다고 보고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러시아군은 전력을 유지한 채로 후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베시에르Bessieres를 급파해 러시아군을 추격했다. 쿠투조프는 전투를 피하며 계속 후퇴하며 전력을 재정비했다. 보급과 병력은 쉽게 보충되었다.

보병은 신병수준으로 문제가 심각했지만 기병은 대단한 전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코사크가 나폴레옹의 배후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0월이 되자 겨울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벨리즈Velizh까지 후퇴한 후에 빌토르와 우디노와 전선을 연결하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은 쿠투조프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러시아군은 반격을 결정한 상태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맥도날드를 격파하고 빌나Vilna로 이동하기로 했다. 치차고프는 슈바르젠베르크와 레이니에르를 서쪽으로 몰아낸 후에 비트겐슈타인과 합류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베레지나강 너머에 전선을 펼치고 나폴레옹의 퇴각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929일부터 반격을 시작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리가의 병력은 쫓겨 돌아갔고 치차고프는 부그Bug강을 넘지 못했다.

 

코사크가 배후를 계속 괴롭히자 나폴레옹은 빅토르에게 리투아니아로 이동해 비테브스크와 스몰렌스크 사이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빌나 또는 민스크가 위협받으면 알아서 대처하라고 위임했지만 치차고프의 병력은 고작 40,000명을 넘지 않는다고 잘못 알려주었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로 후퇴해서 1813년에 다시 작전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너무 늦은 상태였다. 러시아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빈코보Vinkovo 부근을 공격했다.

빈코보 부근에 주둔해 있던 무라군은 총 25,000명이었고 10,000명 정도의 기병은 도저히 기병이라고 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견인포 180문은 인력으로 움직여야 할 정도였다.

프랑스군이 증원되고 있다는 오보덕분에 러시아군이 추격을 멈춰서 다행이었다. 러시아군은 500명을 잃었고 프랑스군은 장군 2명을 포함해 3,500(포로 1,500), 38문과 많은 보급품을 일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1019, 대육군 95,000, 500문과 마차 40,000대는 모스크바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차에는 보급품과 함께 나폴레옹이 명령한 수많은 문화재가 실려 있었다.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이 툴라Tula와 칼로우가도로를 막아 황폐해진 이전 진격로로 쫓겨가게 할 생각이었다. 민병이 대거 보강되어 병력은 크게 불어났다. 무기가 부족해 창으로 무장했지만 보병중대의 3열을 채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자 비가 내렸고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도로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급하게 끌어 모은 수송마차는 프랑스군의 급한 발목을 계속 붙잡았다. 프랑스군을 견제하던 독투로프Docturov6보병군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로-자로슬라베츠Malo-Jaroslavets를 차단하기로 했다.

1023, 외젠의 선봉대가 말로-자로슬라베츠에 도착했는데 러시아군이 보이지 않자 안심하고 잠에 들었다. 13사단은 강건너 편에서 야영했다. 새벽 4, 독투로프의 엽병연대가 마을을 급습해 프랑스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급히 달려오는 13사단의 접근을 막았다.

사단장 델존Delzon은 직접 선두에 섰다가 이마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아래 그림참조). 동생도 그를 전장에서 끌어내다가 총탄에 맞고 전사했다



 

오전 10, 네와 다부군단이 도착했고 프랑스군이 이 마을로 퇴각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독투로프는 쿠투조프에게 전황을 알리는 전령을 잇달아 보냈다. 프랑스군 14사단이 마을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평원으로 나섰지만 러시아군의 포화가 빗발쳤다.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 7보병군단이 증원되어 프랑스군을 밀어내며 마을 대부분을 차지 했다. 프랑스군이 요새로 만든 교회는 여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외젠은 15사단을 투입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15사단은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력이 충분했고 사기도 높았다.

마을은 4번째 주인이 바뀌며 러시아군이 밀려났다. 러시아군은 계속 증원된 반면에 외젠은 이제 마지막 예비대인 이탈리아근위대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13, 14, 15사단을 합쳐 다섯번째로 마을을 다시 공격했다.

 

그렇지만 마을 이상을 넘어갈 수 없었다. 평원에는 몸을 숨길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고 불덩어리로 변한 마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안에 남아 있던 러시아엽병은 모두 항복했다.

양측은 약 24,000명을 투입했고 프랑스군은 6,000, 러시아군은 8,000명을 잃었다.

1025, 나폴레옹은 손수 전선을 정찰하려고 나섰다가 코사크의 기습을 받았다. 코사크 한 명이 20m 앞까지 다가왔지만 근위대에 밀려 달아났다. 충격을 받은 나폴레옹은 결정적인 오판을 했다. 상당한 러시아군이 부근에 있어서 도강 중에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염려한 그는 네만강을 건너왔던 진격로를 거슬러 퇴각하기로 했다.

그가 정찰대만 보냈어도 쿠투조프가 이미 말로-자로슬라베츠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6,000명을 잃어가며 확보한 귀중한 퇴각로를 포기하고 대신에 전멸의 길로 들어섰다.

 

1018, 북쪽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폴로츠크Polotsk에서 생시르St. Cyr를 공격했다. 프랑스와작센군 27,000명이 러시아군 32,000명을 상대해 양측 각각 10,000명 정도를 잃었다.

남쪽에서는 돔브라우스키Dombrowski가 민스크를 포기했고 러시아군 램버트Lambert1116일에 탈환했다. 놀랍게도 환자 5,000명과 막대한 보급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00,000명이 4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군화 30,000, 군복 등이 그대로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깄다.

1120, 돔브라우스키는 겨우 5,000명의 병력으로 보리소프Borisov(현재의 바리샤프)로 이동했지만 방벽을 세우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21, 램버트가 돔브라우스키를 공격했다. 보리소프 교두보를 두고 양쪽의 포격대결이 5시간 가량 벌어졌고 램버트가 부상을 입고 부관에게 지휘권을 넘겨 주었다. 돔브라우스키는 1,500명을 일고 부상병 2,500명과 포 8문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계속 밀려났다.

러시아군은 투입한 3,500명 중에 절반 이상을 잃었다. 뒤따르던 치차고프는 프랑스군이 떠난 보리소프에 사령부를 차렸다.

우디노는 보리소프패전 소식을 듣고 네모니차Nemonitza로 이동해 돔브라우스키의 패잔병을 합류시킨 후에 보리소프로 이동했다.

 

램버트를 대신해 선봉대를 이끈 팔렌Phalen은 네모니차에서 우디노의 선봉대를 만나 1,5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우디노의 2군단이 보리소프에 들이닥치자 한가롭게 저녁을 먹던 치차고프는 개인 짐을 버리고 황급히 달아났다. 우디노는 강 건너의 러시아군 포대 때문에 끊어진 다리를 수리할 수 없었다.

1129, 나폴레옹은 슈바르첸베르크에게 치차고프를 추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나폴레옹은 말로-자로슬라베츠전투 후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라는 공격재개를, 다부와 다른 원수들은 전면퇴각을 제안했다. 나폴레옹은 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후퇴를 시작했고 뒤늦게 쿠투조프의 퇴각을 알고 나서도 모자이즈크Mozhaizk를 통해 계속 퇴각했다.

북쪽의 2, 6 9군단 그리고 남쪽의 7과 오스트리아군단이 대승을 거두어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문제는 나폴레옹의 본대였다.

 

프랑스군은 지난 5개월 동안 걸어온 길을 따라 스몰렌스크까지 되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도로에 약탈품과 환자가 가득 실린 마차가 발목을 잡았다. 보로디노는 아직 전장의 잔해물과 썩어가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퇴각로는 이미 전쟁의 상처로 황폐해졌기 때문에 병사들은 이전보다 더 잔인하게 약탈했다.

병사들의 규율은 완전히 무너졌다. 사단장급은 나폴레옹의 입만 쳐다보았고 영관급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가 되니 연대가 사라져 패잔병처럼 무질서하게 줄을 이었다.

다부의 1군단이 후위였는데 군단병보다 낙오병이 더 많았고 마차와 견인포로 무질서했다. 나폴레옹은 다부가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야단쳤다. 다부가 수습하기에는 한계를 넘어섰고 다른 부대가 엉망으로 만든 지역을 가장 나중에 통과했다. 군마가 먹을 풀이 완전히 사라져서 수천 마리가 죽어갔다.  

 

쿠투조프는 말로-자로슬라베츠에서 퇴각한 후에 프랑스군의 진로를 찾지 못하다가 10 27일에 추격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안전거리에 머물면서 절대로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오자로프스키Ozharovski가 프랑스군보다 앞서서 보급으로 사용될 모든 것을 파괴했고 밀로라도비치Miloradovitch와 플라토프의 코사크는 프랑스군의 측면과 배후를 괴롭혔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로 가는 길목이 차단당할 까봐 본대를 출발해 근위대의 보호를 받으며 10 31일 뱌즈마Viazma에 먼저 들어섰다. 본대는 90km나 길게 늘어졌고 다부를 질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네에게 다부가 뱌즈마를 통화하면 후위를 맡으라고 명령했다.

11 3, 밀로라도비치의 2개 사단이 뱌즈마에 나타나 외젠과 다부의 퇴각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외젠은 도시에서 겨우 2km 떨어진 상태였고 낙오병이 뒤떨어지지 않도록 멈춰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러시아기병대대 몇 개가 14군단 사이에 끼어들었고 12,000명의 보병이 그 뒤를 따랐다. 외젠은 보병의 접근을 막았지만 뱌즈마Viazma(지도참조) 부근의 이탈리아부대는 밀려났다. 네의 3군단 중 일부가 뱌즈마에서 나와 위기를 수습했다.

두 군단의 간격을 좁히고 위기를 수습하자 러시아군이 다시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포병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군은 화력에서 압도적이었고 프랑스군은 급히 뱌즈마로 들어가느라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밀라도비치는 프랑스군이 공격을 막아내며 후퇴하는 것을 보고 쿠투조프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쿠투조프는 근거리에 있으면서도 병력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전령으로 갔던 영국인참모 윌슨Wilson장군은 쿠투조프를 반역자라고 욕하며 짜르에게 보고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쿠투조프는 겨울 혹한만으로도 프랑스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밀라도비치가 상대하는 프랑스군은 최정예인 반면에 자신의 병력은 대부분이 신병이라 상대가 안된다고 생각했다. 섣부르게 공격에 나섰다가 프랑스군이 회복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쿠투조프의 판단이 옳았다.

밀라도비치는 단독으로 프랑스군을 끊으려 했다. 1군단과 4군단의 전력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외젠은 뱌즈마를 빨리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다부는 20,000명과 80문의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군 5사단은 러시아군이 달라붙자 갑자기 돌아서서 러시아군을 맹렬히 밀어낸 후에 여유있게 전장을 빠져나갔다



 

러시아군의 추격을 뿌리친 프랑스군은 밤새 전열을 재정비했다. 4,000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고 자기 부대가 아닌 곳에 섞여 있는 병력도 상당했다. 이제 전투가 벌어지면 처음보는 병사나 장교와 대열을 맞춰야 했다.

뱌즈마는 불타올랐고 네의 후위포대가 러시아군에게 포문을 열때마다 병사들은 잠에서 깨어 무기를 집어 들었다.

 

11 4, 드디어 겨울이 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도로는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굶주린 군마가 풀을 못 먹고 쓰러졌고 프랑스군은 대포, 장비와 마차를 버리기 시작했다. 사기와 규율이 무너져 내렸다. 군마없이 걷는 기병이 훨씬 많아졌다.

마차마다 부상병이 가득 찼는데 누군가 마차에서 떨어지면 아무도 돕지 않아 그대로 얼어 죽을 정도였다. 군마가 쓰러지면 부근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주린 배를 채웠다. 이제 군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승리나 전우보다 내 목숨이 먼저였다.

 

116, 나폴레옹은 말레Malet가 파리에서 일으킨 쿠데타시도에 대해 추가보고를 받았다. 그는 1022일에 공화정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파리수비대 연대장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아무도 로마왕을 지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장교는 말레의 명령에 따랐다


말레의 처형장면입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으로 파비아총독에서 물러난 그는 부르봉왕가와 접촉하며 왕정회복을 계획했습니다. 파리로 탈출해 국가수비대를 동원하려고 했지만 일직장교가 나폴레옹이 사망했다는 거짓편지를 믿지 않고 그를 체포해 어설픈 쿠데타가 무산되었습니다. 


4군단이 보프Vop강에 도착했고 강물은 얇게 얼어붙어 가슴으로 얼음을 깨며 도강해야 했다. 다시 대부분의 마차와 대포를 강물 속으로 버렸다. 4군단은 보츠강에서 5km 떨어진 곳에서 밤을 보냈고 코사크는 길을 잃거나 부상당한 프랑스병사를 사냥했다.

다행히 외젠이 도착한 도코프스치나Dokhovschina는 진격할 당시에 거치지 않은 곳이어서 추위를 피할 건물과 식량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마을을 불태운 후에 다시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이제 추위로 얼어 죽는 병사가 속출했다. 이탈리아근위대는 32명의 척탄병이 얼어 죽었다.

나폴레옹과 근위대는 외젠에 앞서 119일에 스몰렌스크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전력이 온전한 병력을 모아 위기대응대대로 편성하고 러시아군의 접근을 막게 했다. 그렇지만 러시아군 기병 5,000명과 보병 3,000명을 막기에는 너무 열세였고 바로 스몰렌스크로 퇴각했다


비정규군인 코사크에게 포로로 잡힌 프랑스 흉갑기병입니다. 

 

나폴레옹은 남은 기병을 재편성한 후에 식량배급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열을 이탈한 낙오병에게는 어떤 음식도 주지 않자 보급창을 습격해서 귀중한 식량을 마구 약탈했다. 탄약만큼은 충분해서 지금까지 사용한 모든 탄약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100,000명 중에, 겨우 41,500명 정도가 전력을 유지했다. 14,000명인 근위대와 보병이 된 5,000명의 기병 정도를 믿을 수 있었다. 외젠의 4군단은 겨우 5,000명만, 다부의 1군단은 10,000명 정도가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58군단은 하나로 합쳐도 1,500명이 고작이었다. 한때 막강했던 네의 3군단은 3,000명만 남았다.

나폴레옹은 본대에 비해 상황이 나은 29군단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스몰렌스크를 떠났다. 1116일과 17, 다부와 네가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근위대 대포 때문에 하루에 겨우 25km가 고작이었다. 쿠투조프는 우회로를 통해 90,000명을 넷으로 나누어 앞으로 보냈다



프랑스군 선봉과 오스테르만Ostermann의 러시아군은 거의 동시에 코리티니아Korythinia에 도착했다. 밀로라도비치의 20,000명은 프랑스군보다 15km 앞에 자리잡고 프랑스군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군의 또다른 병력은 쿠라스노이Krasnoi(크라스니)를 기습점령했다가 프랑스군의 반격에 밀려났다. 러시아군의 네번째 부대는 크라스노이와 리아디Liady 사이를 따라 내려가며 프랑스 낙오병을 모조리 붙잡았다.

 

프랑스군은 밤에 코리티니아를 통과했다. 크라스노이에 먼저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낙오병 무리가 선두에 섰다. 8km 앞까지 접근하자 갑자기 코사크가 나타났지만 바로 격퇴당했다.

러시아군 포대가 프랑스군 선두에 포문을 열었고 러시아기병 30개 대대가 베스트팔리아Westphalia부대를 위협했다. 베스트팔리아군은 공포에 질려 대형을 만들지도 못했다 한 장교가 앞에 나서서 명령을 했고 베스트팔리아군은 처음보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전투대형을 펼쳤다.

엑셀망Excelmans장군이었다. 비스튤라Vistularnsrhk 근위대가 그의 뒤를 따라 크라스노이로 접근했고 러시아기병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구근위대Old Guard가 나폴레옹 부근에서 밀집대형을 만들고 유명한 행진곡을 연주하자 나폴레옹은 다른 곡을 연주하라고 명령했다



엑셀망은 나폴레옹의 최후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왕정의 반역죄처벌을 피해 네덜란드로 도망쳤다가 사면받아 프랑스로 돌아왔고 나폴레옹 3세가 즉위하면서 원수에 올랐습니다. 1852년, 낙마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