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믿거나 말거나 토막전사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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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020. 12. 26.

 

글록 번역이 끝나면 폭풍연재를 시작한다고 했었죠? 

전사이야기를 기다리던 여러분을 위해 마구 마구... 와우 확장판도 미뤄두고 전사를 정리 중입니다. 

심지어 전사정리와 함께, 예타테리나여제 일대기 원서도 읽고 있습니다. 아마 그 분의 이야기도 정리하지 않을까 합니다. 

 

 

 

적십자의 탄생

솔페리노Solferino전투는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최악의 전투 중 하나였다. 1859년 6월 24일,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연합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 30만 명 이상의 대군이 15시간동안 격전을 벌였다. 
앙리 뒤낭Henry Dunant이라는 스위스 사업가는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가던 중에 전투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끔찍한 대학살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모든 언덕과 바위산은 죽음의 현장이다. 그냥 도살이다”라고 기록했다. 

 


전투 후의 현장은 더 끔찍했다. 4만 명의 부상자가 전장에 버려졌고 응급처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낭은 부상자를 도우려고 직접 나섰지만 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좌절했다. 어떤 부상자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비통하게 말했다. “지금 치료를 받는다면 살아 남을 수 있겠지만 밤이 오기 전에 죽겠죠.” 그리고 그는 죽었다. 

 


학살을 직접 목격한 뒤낭은 책을 출판했고 구원에 나설 국제기구 조직을 요청했다. 그의 간절한 노력덕분에 1차 제네바회의가 열렸고 국제구난기구로 이어졌다. 

전장에서 의사와 간호사를 보호하기 위해 중립을 표시하는 상징을 만들었고 국제구난기구에 참가한 국가들이 동의했다. 스위스 사업가의 노력을 기리기 위해 스위스 국기(아래사진)의 색을 반대로 사용해서 적십자라는 상징을 만들었다. 

 


솔페리노전투 당시에 프랑스군은 의사보다 수의사가 더 많았다. 

 



돼지전쟁

1859년, 미국과 대영제국은 캐나다와 오리건Oregon 사이의 산 후안San Juan섬을 두고 분쟁 중이었다. 양측은 서로 점유권을 주장했는데 섬 정착민도 서로를 의심과 적대적인 눈으로 노려보았다. 
섬에 살던 리만 커틀러Lyman Cutlar라는 미국인이 토마토밭을 뒤집고 다니던 돼지를 쏘아 죽이면서 큰 문제가 생겼다. 
영국 돼지였기 때문이다. 

 


영국관리는 커틀러가 보상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섬의 미국인들이 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앞뒤 안가리는 윌리엄 하니William Harney라는 장군이 9보병연대에서 1개 중대를 파견했다. 브리티시콜럼비아British Columbia총독은 전함 한 척을 현장에 급파했다.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4백명의 미국병사가 섬에 참호를 팠고 영국함대가 수천명을 태우고 앞바다에 정박했다. 
전쟁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순간에 이성이 감정을 지배했다. 영국해군장교가 섬에 왕립해병을 상륙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한 덕분에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미국정부는 농부 한 명과 돼지 한 마리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이라는 소식에 경악하고 미군사령관 윈필드 스코트Winfield Scott를 급히 보내 사태를 진정시켰다. 양측은 섬의 공동점유에 합의했고 결국 돼지 한 마리의 희생으로 끝났다. 

돼지전쟁 해트닝 10년 후에, 미국과 영국은 섬의 점유권분쟁을 독일 카이저 빌헬름Kaiser Wilhelm 1세에게 맡겼다. 그는 미국편을 들었고 현재 섬은 워싱턴주에 속해 있다. 

산후안섬에 파견된 미군대위는 “벙커힐Bunker Hill을 재현하자”고 말했다. 그는 조지 피켓George Pickett으로 4년 후의 게티스버그Gettysburg전투에서 미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돌격을 이끌었다. 

 




원주민경비대

루이지애나 원주민경비대는 남북전쟁 초기에 남군 측에서 참전한, 지원민병연대였다. 많은 남군병사가 민병대 출신이었지만 원주민경비대라는 이름처럼 출신배경이 매우 독특했다. 
그들은 전부 뉴올리언스 출신의 흑인이었다. 

도대체 왜 남군을 위해 자원했을까? 일부는 평등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일부는 부동산을 몰수당할 수 있어서 참전했다. 흑인이라도 대부분이 물라토Mulatto(백인과 흑인혼혈)여서 노예보다는 남부백인과 가깝다고 생각했다.  


남군은 원주민경비대를 전장에 투입하지 않고 선전책동에 주로 동원했다. 당연히 남군에 대한 열정이 식어갔고 가치를 증명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북군이 뉴올리언스를 점령하자 많은 병사가 북군으로 전향했다. 그리고 도주노예도 입대했다. 
원주민경비대는 3개연대로 재편성되었고 남군과 북군 모두에서 복무한 유일한 부대였다. 

 


북군에서도 최초의 흑인부대로 포트 허드슨Port Hudson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뛰어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흑인장교는 백인으로 교체되었고 병사는 경비와 노동작업에 더 많이 투입되었다. 

 

 

영화 글로리에 아주 잘, 그리고 감동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열렬한 참전의지에도 불구하고 남군과 북군 모두 원주민경비대를 방치했다. 장교 한 명은 “누구도 우리의 성공을 바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남북전쟁 말기에, 로버트 리Robert Lee는 노예를 징집해서 병사로 투입하자고 제안했지만 남부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남군장군 콥 호웰Cobb Howell은 “노예가 좋은 병사가 될 수 있다면, 노예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원주민경비대 장교 중 한 명이었던 핀치백P.B.S. Pinchback은 루이지애나주지사가 되어서 주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흑인주지사였다. 핀치백은 1/4가 흑인혈통이었다. 아버지가 루이지애나 농장주였고 어머니는 물라토였다. 

북군에 편성된 원주민경비대 3개 연대는 코어 드 아프리케Corps d'Afrique로 불렀다.  

 

 




시가 3개

1862년 9월 13일은 토요일이었지만 인디애나 27연대에게는 보통 때의 행군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지 맥클렐란George McClellan의 북군부대와 같이 메릴랜드의 좁은 도로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남군의 로버트 리가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로버트 리를 인정하지 않는 전사초보자들이 많은데, 남북전쟁 당시의 전력을 보면 북군이 왜 그렇게 고생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갈 정도입니다. 지휘관의 역량차이가 원인 중 하나였는데 그만큼 리의 지휘역량이 뛰어났습니다. 

남북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리가 완승을 거두면 남부를 독립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맥클렐란은 너무 신중하고 우유부단해서 리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27연대는 남군이 며칠 전에 점령했던 들판에서 휴식을 취했다. 3명의 병사가 근처에 무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이에 쌓인 시가 3대였다. 반가운 선물을 발견한 병사들은 바로 시가에 불을 붙였다. 포장지를 버리려고 했는데 바튼 미첼Barton Mitchell상등병은 갑자기 궁금증을 느끼고 포장지를 자세히 보았다.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상등병의 호기심으로 수천명의 목숨을 구하고 국가의 운명을 바꿨다. 남군장교가 리의 진격명령서로 부주의하게 시가를 포장했고 더 부주의하게 들판에 떨어트린 것이었다. 맥클렐란은 하늘이 준 정보에 놀랐고 곧바로 공세로 들어갔다. 

남군은 의도하지 않은 안티텀Antietam전투에 휘말렸고 단 하루의 전투로만 미국역사상 최악의 희생자를 냈다. 단 하루에 5,0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시가 3대 때문이었다. 

 


이 종이가 특별명령 191로 병사들이 발견한 것이다. 리의 부관인 R.H. 칠튼Chilton이 작성한 명령서였는데, 3명 중 한 명이 그와 알던 사이여서 칠튼의 친필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덕분에 멜클렐란은 가짜정보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제플린 1호기

1863년, 프로이센의 젊은 장교였던 페르디난트 폰 제플린Ferdinand von Zepplin백작은 북군 군사고문으로 참전 중이었다. 혈기왕성한 제플린중위는 북군기병대와 함께 말을 타고 달렸고 게티스버그전투 일주일 전에는 남군에게 포로가 될 뻔 했었다. 

제플린은 미국에 이왕 온 김에 계속 탐험하기로 했고 미니애폴리스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은 모험을 만났다. 바로 열기구였다. 

북군에서 기구조종사로 일년간 복무한 존 슈타이너John Steiner가 조종한 열기구였다. 8월 19일, 제플린은 183m를 올라갔고 열기구에 흠뻑 빠졌다. 
슈타이너는 남군진영을 정찰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열기구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슈타이너는 열기구를 담배모양으로 만들고 뒤에 방향타를 붙이면 바람을 타도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제플린은 독일로 돌아가서도 열기구와 슈타이너의 아이디어를 잊지 못했다. 군에서 전역하고 25년 후에, 그는 튼튼하고 조종이 가능한 열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1900년 7월 2일에 제플린 1호기가 비행에 성공해 비행선시대를 열었다. 

열기구군단의 조종사들은 북군에게 귀중한 정찰정보를 입수했다. 타데우스 로우Thaddeus Lowe덕분에 북군은 페어 오크스Fair Oaks전투를 이길 수 있었다. 

 


1900년, 제플린 1호기 LZ-1의 비행순간. 독일은 1차대전 기간 동안 100기 이상의 제플린을 사용했다. 

 


1930년대에는 제플린이 승객을 태우고 대서양을 횡단했다. 1937년 누저지 레이크허스트Lakehurst 상공에서 힌덴부르크Hindenburg가 폭발해 37명이 죽으면서 더 이상 비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