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상륙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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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영국

2021. 4. 9.

대체역사라고 하죠. What if로 이런 저런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상상해보는 것이죠.

그 중에 빠지지 않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상륙했다면? 입니다. 

 

당연히 세계역사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겁니다. 세계역사는 스페인중심으로 흘렀을테고 미국은 스페인어를 사용했겠죠. 

 

전문학자의 논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어서 BBC의 역사 뒤집기 기사를 가져와봤습니다. 영국 역사학자의 시각이니까 당시 영국의 사정을 가장 정확하게 알테고, 객관적일겁니다.

 

실제 역사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잘 읽어보세요.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1부)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1부)

역사를 공부하면서 크게 2가지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먼저 아무 책이나 펼쳐도 놀라운 인물과 사건이 이어지며, 내가 몰랐던 지식의 창고를 발견하며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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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2부)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2부)

16세기 서유럽역사 그것도 해양사에 대해서는 정리한 적이 없으니 이야기를 좀 자세하게 설명해야겠습니다. 여러 자료를 참조하다 보니 분량이 좀 나올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3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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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3부)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3부)

칼레와 그하블린느 전투, 그리고 무적함대의 궤멸까지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 되어서 3부는 짧더라도 칼레전투까지만 정리해야겠습니다. 이미 무적함대의 궤멸이라는 스포일러를 꺼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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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4부)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4부)

토요일 밤 하워드는 윌리암 윈터William Winter가 화공선 공격을 해보자는 의견을 전폭수용하고 기함 아크로얄로 시모어, 드레이크, 호킨스와 프로비셔를 불러 작전회의를 가졌다. 하워드는 도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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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Armada의 원정실패로 유럽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파르마Parma공과 27,000명의 원정군이 플랑드르Flanders에서 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했다면 엘리자베스 1세의 왕정과 개신교 영국의 운명은 정말로 암울했을 것이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스페인군이 영국에 계획대로 켄트 마게이트Kent Margate(지도참조)에 상륙했다면, 일주일 안에 방어군이 거의 없는 런던에 입성해 여왕과 대신은 포로가 되거나 죽었을 것이다. 영국은 다시 가톨릭으로 회귀했고 미래의 영국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엘리자베스의 용맹무쌍한 바다해적이 아니라 전술과 날씨 때문에 패전했다. 엘리자베스왕정의 금고는 바닥을 보였고 영국선박은 화약과 탄약이 부족했다. 그래서 1588년 7월과 8월에 영국해협에서 벌어진 9일간의 해전에서 역사상 최강인 해군에게 치명타를 날리지 못했다. 

 


영국으로 향했던 129척 중에서 겨우 6척만 해전에서 침몰했다. 최소한 50척, 최대 64척이 대서양태풍으로 침몰했고 나머지 함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흩어져서 스페인북부로 간신히 돌아왔다. 
13,500명 이상의 선원과 병사가 귀국하지 못했다. 절대 다수의 사상자는 영국대포가 아니라 음식부족, 질병과 무능한 조직 때문에 발생했다. 


30년전, 스페인 펠리페Philip II는 메리Mary 1세과 마지못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영국왕국은 반드시 바다를 지배해야 한다. 왕국은 운명이 바다에 걸려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무장상선을 고용하고 자원병을 받아 침략군과 바다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해군은 왕국의 성벽이었고 최전방이자 최후방이었다. 
수십년 동안 육상방어를 등한시하였었기 때문에 강력한 적이 상륙하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1587년 3월, 영국해협 부근의 영지는 각각 대포 6문이 고작이었다. 43년 전에 프랑스가 침략했던 서섹스 블레칭톤 힐Sussex Bletchington Hill은 여전히 보수가 안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영국은 완전무장한 정규군이 없었고 스코틀랜드 국경선의 버윅Berwick과 해협해안의 도버Dover성의 작은 수비대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엘리자베스의 왕국은 종교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절반 정도는 가톨릭을 고수했고 스페인군이 개신교 왕정을 공격하면 스페인군을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레스터Leicester백작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가 남부에서 스페인원정군을 상대할 엘리자베스군을 맡았다. 그는 침략군뿐만 아니라 왕정과 종교에 반대해 문제를 일으키려는 모든 세력을 상대해야 했다. 왕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만세력을 처벌할 권한을 가졌다. 


엘리자베스의 신하 중 일부는 애국심보다 이익을 우선했다. 1587년, 브리스톨Bristol을 출발한 영국상선 12척이 무적함대에게 보급하다가 발각되었다. 300~2000파운드 가치의 수화물 중에는 심지어 탄약, 화약, 화승총과 무기까지 있었다. 발각된 상선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비를 베풀었을 것 같지는 않다. 
월터 랄레Walter Ralegh경의 이복동생 존 길버트John Gilbert경은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경의 서부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1588년 3월에 명령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항로를 순항했다. 
엘리자베스의 군사고문관은 스페인원정군이 켄트해안이 아니라 엑세스Essex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다. 


템즈강Thames하구는 런던의 중심으로 곧바로 이어졌고 양옆은 넓은 진흙밭이어서 배를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기술자 페드리고 지암벨리Fedrigo Giambelli가 고안한 쇠사슬을 켄트 그레이브센드Gravesend에 가로질러 설치했다. 강바닥에 120척의 돛대를 박고 쇠사슬을 연결시켜 런던으로 통하는 선박통행을 막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물이 밀려들자 바로 끊어졌다. 
영국해협 부근의 해변을 상세하게 조사하자 약점이 아는 곳이 없었다. 도싯Dorset만 해도, 11개 만이 지적되었다. ‘치디억Chideock과 차머스Charmouth에 보트를 댈 수 있는데 날씨가 아주 좋아야 하고 북풍이 불어야 한다. 스와니지Swanage만은 100척을 댈 수 있고 보트 200척으로 병사를 상륙시킬 수 있다. 언제라도 좌초될 염려없이 퇴각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왕정은 시간, 군자금과 자원이 모두 부족해서 모래사장에 나무막대를 박아 보트정박 장애물을 세우고 참호를 파는 정도로 방어를 보강했다. 몇 문 안되는 대포를 보호하기 위해 진흙방벽을 올렸고 병사들은 화승총, 활과 화살로 무장했다. 

전략요충지 와이트Wight섬의 요새는 최소한 1.22m 높이에 2.44m 두께로 전면에 날카로운 봉을 박고 넓은 해자를 팠다. 그렇지만 총독인 조지 케리George Carey경은 대포가 겨우 4문에 불과했고 화약은 하루치가 고작이었다. 

 


포츠머스Portsmouth에 급히 세운 방벽은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해체되었다. 4개월 만에 흙으로 새 방벽을 세웠는데 이번에는 물을 채운 해자와 화살촉 모양으로 돌출된 석재 요새 5곳을 갖췄다. 그렇지만 포츠머스 수비대 중 절반은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이와 체력이어서 웃음을 샀고 서섹스백작은 구형 철제대포가 산산조각날 때에 간신히 위험을 피했다. 1587년 11월 여왕즉위기념일에, 바다쪽 탑이 너무 오래되고 썩어서 포 한방 쏘지 않았을 정도였다. 


14세기 초부터 영국남부에는 경보용 봉화불이 준비되었다. 24km 거리마다 높은 언덕 위에 나무구조물을 세우고 그 위에 철제 바스켓을 올려두었다. 켄트와 데번Devon은 43개의 봉화불을 준비했고 서섹스와 햄프셔Hampshire는 각각 24개가 있었다.  
3~10월의 비교적 온화한 계절에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남자 2명을 12시간 교대로 배치했다. 불시에 현장검증을 했고 딴전을 피울까봐 개를 데리고 있지 못하게 했다. 
지루하고 고생스러운 봉사의무였다. 켄트 봉화에서는 오래된 나무헛간이 무너져서 새 근무소를 세웠다. 경비원이 잠들지 못하게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었고 악천후만 피할 수 있었다. 봉화방향의 구멍에서 꼿꼿이 서 있어야 했다. 모든 경비원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적선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에섹스의 스텐웨이Stanway 봉화 경비원 2명은 옥수수밭에서 새를 잡다가 처벌을 받았다. 
1586년 7월, 5명이 햄프셔 봉화에 일부러 불을 질러 스페인 함대가 나타났다는 거짓정보를 퍼트리고 소란한 틈을 타서 식량을 훔치려고 했다. 그리고 지역부자의 집을 털고 윈체스터Winchester 감옥에 있는 성공회예배 거부자를 빼내려고 했다. 일부는 용서를 받았고 일부는 런던으로 호송되어 배후를 조사받았다. 


엘리자베스의 민병대 수준을 보면, 1940년 나치의 침공에 대비해 모인 지역방위지원병 아빠부대Dad’s Army(사진참조. 영국영화)는 정예병처럼 보일 정도였다. 1588년 소집에서 100명만 정규군 수준이었고 일부는 40년 전의 헨리 8세의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전쟁에 참전했던 노병이었다. 

 


지역민병대와 훈련부대에서 보병과 기병을 추렸다. 네덜란드에 파병한 영국군 1,000명을 불러들였지만 곧바로 켄트 은신처로 달아나 숨었다. 
귀족과 지역유지gentry가 민병대장교를 맡았는데 애국심보다는 자신의 재산보호가 더 중요했다. 해안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해변에서 적에게 맞서기보다는 내륙으로 가족과 재산을 옮기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피난할 경우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협박에 다시 돌아왔다. 

 

당시 민병대와 정규군입니다. 


핵심전력을 둘로 나누었다. 먼저 레스터Leicester의 1군은 보병 27,000명과 기병 2,418명으로 상륙한 적을 막기로 했다. 여왕의 조카 헌스돈Hunsdon이 지휘하는 2군은 보병 28,900명과 기병 4,400명으로 규모가 더 컸다. 엘리자베스만을 지키기 위해 소집되었는데, 수도가 함락되면 윈저성으로 여왕과 함께 이동할 예정이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엘리자베스의 장관에게 영국군의 전통무기인 활과 화살로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1415년, 아쟁쿠르Agincourt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는데 1588년에도 스페인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용병은 석궁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는 주장이 있었고 심지어 적을 상대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노여움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독일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홀란트에서 화승총을 구입했지만 대부분의 민병대는 활과 화살로 무장했고 정규전투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민병대 내에 불순분자가 섞이지 않도록 모병관 앞에서 여왕에 대한 충성맹세를 했다. 


햄프셔 민병대 훈련을 위해 파견된 니콜라스 도트리Nicholas Dawtrey대위는 와이트섬에 보병 3,000명을 보내면 윈체스터에는 병력이 남지 않아서 창병 몇 명으로 사방을 지켜야 한다고 경고했다. 
지역민병대는 집에서 멀리 가려고 하지 않았고 갑자기 와이트나 포츠머스에 끌려가면 가족이 무방비상태로 남겨져서 위험에 노출된다고 불평했다. 
햄프셔는 9,088명을 징병했지만 도트리는 무장상태가 너무 허술해서 투구가 없거나 칼이 없거나 뭔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규율도 문제였다. 도싯에서는 3,159명을 징병했는데 그 중에 1,800명은 군사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고 적을 상대하기 전에 서로를 죽일 거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무적함대가 콘월Cornwall을 지나가자 코니시Cornish민병대는 이웃지역으로 이동해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추수해야 할 밭에 가 있었고 결국에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스페인 침략군은 이제 다른 사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원정군이 공성포를 가지고 켄트에 상륙했다면 영국의 허술한 민병대와 방어선은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파르마Parma공은 1592년 노르망디를 침공한 후에 겨우 6일 만에 200km를 돌파한 적이 있었다. 그의 강력한 22,000명 병력이면 상륙 후 1주일만에 런던에 입성했을 것이다.   
스페인함대가 칼레Calais를 출항하자 강제 모병된 도버의 민병대 4,000명이 두려움을 느끼고 탈영했다. 네덜란드 화승총병 800명을 급히 데려와 항구방어를 맡겼지만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켄트지역민의 충성도 믿을 수 없었다. 일부는 스페인군의 성공에 기뻐했고 실패에 슬퍼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영국인보다 스페인군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페인군은 당연히 사전에 내부 협력자와 체포할 지도자를 미리 결정해 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사로잡아서 로마로 보낼 계획이었다.  

 


스페인군이 승리했다면 암울한 운명일 맞이했을 명단에는 레스터백작, 워익Warwick백작, 헌팅턴Huntingdon백작, 월싱햄Walsingham장관, 크리스토퍼 해튼Christopher Hatton, 헌스돈 등이 있었다. 궁정을 지배한 원흉들이며 추밀원Privy Council의 지도급 인사들이라는 이유였다.   
가톨릭과 스페인령 영국의 친구명단에는 서레이Surrey백작, 런던탑에 갇혀 있는 노포크Norfolk공(실제로는 아룬델Arundel백작)의 후계자, 함대에 포로로 잡혀 있는 해로우든의 복스가 있었다. 노포크의 잠재적인 협력자 4명에는 ‘영국여왕을 사칭한 엘리자베스의 후견인이었던 헨리 베딩필드Henry Bedingfield도 있었다.
문서에 따르면 랭커셔Lancashire에서 더비Derby백작과 리버풀Liverpool을 제외한 나머지 상당부분, 특히 평민이 가톨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웨스트모어랜드Westmorland와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는 스페인국왕에게 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륙작전은 상당히 위험한 군사작전으로 날씨와 바다가 도와주어야 했다. 그리고 영국함대를 먼저 격파해야 했다. 

로버트 허친슨Robert Hutchinson은 튜더Tudor왕조 전문역사가로 헨리 8세와 프란시스 월싱햄의 전기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