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드레드노트부터 항공모함까지 - 군축과 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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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2021. 4. 16.

잠시 중단했던 해전사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blog.daum.net/uesgi2003/1596

오스만과 터키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스만군은 연합군에 대항하기로 했다. 독일군의 도움을 받아 수로에 기뢰를 설치하고 기뢰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해안포도 배치해서 기뢰제거작업을 차단했다. 기뢰를 제거하려면 먼저 해안포요새를 무력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함대를 투입했다. 
전드레드노트 전함 14척(프랑스 4척), 전투순양함 인플렉서블, 신형 드레드노트 퀸 엘리자베스 등의 강력한 영프연합함대가 집결했다. 1915년 2월 19일, 아크 로얄에서 이륙한 항공기의 지시에 따라 다르다넬레스 입구의 요새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요새는 곧바로 파괴되었고 6.4km 거리의 기회를 제거한 후에 2월 26일, 전드레드노트 알비온Albion, 마제스틱Majestic과 벤지언스Vengeance가 해협에 들어서 다르다누스Dardanus요새를 포격했다. 

 


모든 전투함이 투입된 포격은 3월까지 이어졌고 퀸 엘리자베스는 항공정찰의 도움을 받아 380mm(15인치)로로 요새후방까지 두들겼다. 무시무시한 포격에도 성과가 나지 않았고 기뢰제거도 오스만군의 포격과 탐조등 방해로 지연되었다. 
1915년 3월 18일,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전함 3개 전대가 투입되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이레지스터블Irresistible, 오션Ocean과 프랑스 Bouvet가 기뢰에 걸려 침몰했고 인플렉서블과 프랑스 갈리아Gaulois가 파손되었다. 
영국해군은 전드레드노트 퀸과 임플레커블Implacable을 투입해 손실을 보완했지만 지상군이 투입되지 않으면 다르다넬레스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1915년 4월, 그 당시까지 역사상 최대의 상륙작전과 함께 참담한 결과가 예정된 칼리폴리Gallipoli전역이 시작되었다. 성급하게 결정되고 엉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함대는 1916년 1월에 지상군이 철수할 때까지 계속 지원했다. 

 

 

Anzac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군입니다. 

연합군은 약 30만명이 사상당했고 오스만군은 26만명 정도가 사상당했지만 전사자는 더 많았습니다. 


영국해군은 전드레드노트를 3척 더 잃었다. 골리앗Goliath가 1915년 5월에 오스만 구축함 무아베네트Muavenet(그림 참조)의 어뢰를 맞고 750명과 함께 침몰했고, 트라이엄프Triumph와 마제스틱이 같은 달에 독일잠수함 U-21의 공격을 받고 73명과 40명이 죽었다. 

 

오스만해군의 주요 전투함입니다. 무아베네트가 중간에 있군요. 


다르다넬레스에서 실패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상기함 벤 마이 크리Ben-my-Chree는 1915년 6월 12일에 뇌격기로 개조한 쇼트Short 수상기를 2기와 함께 도착했다. 8월 12일, 함을 이륙한 에드몬즈Edmonds는 수상 6m까지 하강해서 100m 거리에서 어뢰를 투하했고 수송선을 격침시켰다. 5일 후에는 다른 수송선을 또 공격해 불태웠다. 
같은 날, 또 다른 쇼트가 엔진고장으로 물위에 내려 앉았다가 적선이 멀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물위를 미끄러져 다가가 어뢰를 쏘아 적선을 침몰시켰다. 벤 마이 크리는 동지중해, 홍해와 인도양에서 활약하다가 소아시아Asia Minor 카스텔로리조Castellorizo 앞바다에서 포격을 맞고 침몰했다. 
영국해군항공단의 정찰기는 아프리카에서도 활약했다. 1915년 7월, 3대의 쇼트가 몸바사Mombasa에서 무장여객선 라코니아Laconia에 실려, 영국 모니터함 세번Severn과 머시Mersey를 도와 독일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를 피신처에서 끌어내 루피지Rufijirkd 상류로 11km까지 몰았다. 전투에서 모니터함의 포격 관측을 도와주다가 피격되어 강에 추락했다가 구조되었다. 

아드리아해전역은 다른 전역에 비해 큰 전투나 작전이 없었다. 1915년에 이탈리아는 드레드노트 6척과 건조 중인 4척으로 참전했다. 이탈리아해군의 전력은 상당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서 성과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해군은 방어에 치중했고 오스트리아의 공습을 피해 보다 안전한 타란토Taranto에 머물렀다. 
오스트리아는 해군재편 중에 전쟁을 맞았다. 신형선박건조를 서둘렀지만 예산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해군총장 몬테쿠콜리Montecuccoli가 정부에 앞서 해군을 적극 지원했다. 
아드리아해에서는 대규모 함대보디는 구축함과 경비정이 주역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항공기를 집중 투입했다. 

흑해에서는 터키가 새로 이름을 붙인 괴벤이 여전히 독일승무원을 태우고 독일의 명령을 받으며 메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1914년 10월 29일, 세바스토폴Sevastopol을 포격했고 러시아 기뢰정을 침몰시켰고 11월에는 크림반도에서 러시아전함의 포격을 맞아 115명이 죽고 중파되었다. 
1916년 1월에는 임페라트리차 예카테리나 2세Imperatritsa Ekaterina II 등과 해전을 벌였고 1920년 1월 20일에는, 영국 모니터함 레글란Raglan과 M28을 침몰시켰다. 포탄과 기뢰 피해를 견디며 활약하다가 1918년 11월에 터키해군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1954년까지 사용되었다.
자매함인 브레슬라우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터키해군으로 출항했다가 기뢰 5발을 맞고 침몰했다.

러시아해군은 처음부터 기뢰를 집중 사용했다. 서류상으로는 발트함대는 전함 4척, 순양함 4척, 잠수함 6척, 구축함과 어뢰정 60척 이상이 있었지만 10년전의 대한해협 패전을 털어내지 못했다. 우세한 전력으로 독일함선을 상대할 때에도 소극적이었고 독일이 스웨덴에서 들여오는 철광석 수입도 차단하지 못했다. 잠수함도 어뢰공격 후에 해상으로 올라오는 이상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1915년 여름, 러시아정부는 영국에게 잠수함을 발트해로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E.9은 구축함 1척, 장갑순양함 프린츠 아달베르트Prinz Adalbert, 상선 몇 척을 침몰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재미있게도 발트해 전역은 1918년 11월 휴전 후에 오히려 불이 붙었다. 1919년, 영국별동대가 에스토니아Estonia를 지원하고 러시아 발트함대가 핀란드만 동쪽 끝의 크론슈타트 기지를 장악하지 못하게 막았다. 
영국공군도 항모를 타고 이동해 해안의 임시공군기지에 각종 공격기를 내려 놓았다. 처음에는 주로 정찰과 잠수함탐지만 하다가 7월 30일, 러시아해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선제공격에 나섰다. 
11대가 50kg 10개, 29kg 6개를 보급선과 건조독에 떨어트려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8월 내내 몇 차례 공습을 이어가다가 17~18일에는 8대가 어뢰정과 협공했다. 
1919년 12월, 크론슈타트가 얼어붙으면서 작전이 중단되었다. 5개월 동안 영국공군은 55대 중에 33대를 잃었지만 전투손실은 3대에 불과했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볼쉐비키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1920년 2월 2일에 철수했다. 

1918년 11월, 1차대전 종전당시 독일대양함대는 전력손실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유틀란트해전 덕분인데, 그 이후에 대양함대는 적극적인 활동없이 기지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종전조건에 따라 대양함대는 해체되었다. 
전함 11척, 전투순양함 5척, 순양함 8척, 구축함 50척이 스카파 플로우Scapa Flow로 가서 해체되었다. 잠수함도 모두 인도되었다. 나머지 순양함 7척, 구축함과 잠수함은 프랑스와 이탈리아해군에게 인도되었다. 나머지 함선은 거의 해체되었다.
독일은 더 이상 잠수함과 해군항공기를 보유할 수 없었고 구형전함 8척, 경순양함 8척, 구축함 32척 등으로 연안방어만 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독일이 절대로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전함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전함은 배수량 10,000톤, 순양함은 6,000톤 이하로 제한했다. 

1922년 2월, 워싱턴해군조약이 체결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일본에게 군축조건을 걸었다. 영국은 주력함을 20척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해체하고 새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했다.
그렇지만 미국에 비해 오래되고 경무장이어서 2척을 새로 건조할 수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20년 이상의 전함교체만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1927년에 새 전함을 건조한 반면에 영국, 미국과 일본은 193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형 전함은 35,000톤 이하, 주포 41cm 이하로 제한되었다. 공습과 어뢰공격에 대비한 보강은 허용되었지만 이것도 3,000톤 아래로 제한되었다. 
항모도 33,000톤 이하의 항모 2척만 건조할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의 항모는 총 135,000톤 이하로, 일본은 81,000톤 이하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60,000톤 이하로 제한되었다. 항모는 20cm 이상의 주포를 장착할 수 없었고 20년 이하의 항모는 교체할 수 없었다. 

5개 국가는 당연히 10,000톤 이하와 무장제한이 없는 순양함 건조에 집중했다. 영국은 9,880톤과 20cm 8문의 켄트Kent급 7척과 비슷한 사양의 런던급 6척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잠수함 건조도 박차를 가했다. 
워싱턴조약의 제한을 받지 않는 독일은 1925년 1월에 경순양함 엠덴Emden을 건조했다. 원래 석탄엔진이었다가 1934년에 기름엔진으로 개수했다. 훈련용으로 해외순방을 하다가 2차대전에도 참전해 노르웨이전투와 기뢰부설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에는 발트해와 러시아공격에 참여했고 1945년 1월에는 쾨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힌덴부르크Hindenburg원수의 관을 이송하는 이상한 작전도 벌였다. 1945년 4월, 공습을 받아 피해를 입었고 1949년에 해체되었다. 

1930년이 되자 경제불황의 심각한 영향을 받아, 일본을 빼고는 모두 워싱턴조약이 허용한 전함을 건조할 여력이 없었다. 1930년 4월, 런던조약으로 영국, 미국과 일본은 1936년까지 전함건조를 중단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2척만 건조할 수 있게 했다. 
독일은 베르사이유Versailles조약을 어기고 극비보안 속에서 잠수함함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1922년 초, 네덜란드 회사의 이름을 빌어 헤이그Hague에 잠수함 설계사무실을 차렸다. 독일 설계자와 기술자가 외국해군의 잠수함을 설계제작한다며 실제로는 독일의 신형 잠수함 원형을 개발하고 있었다. 
1928~1930년, 터키용 1척과 핀란드용 5척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터키용 구르Gur는 1932년에 스페인에서 건조되었고 내부장비는 네덜란드에서 제작했다. 구르는 862톤의 IA 유보트의 원형이었고 두 잠수함은 1939년 개전 당시에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254톤의 핀란드잠수함 707은 IIA형 유보트의 원형이었다. 배경을 숨기기 위해 에스토니아로 수출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1931년부터 매년 새로운 독일 승무원을 핀란드로 보냈고 미래의 유보트함장은 핀란드 비용으로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490톤의 대양용 잠수함이 건조되었고 VII형(그림 참조)의 원형이 되었다. 

 


3년도 안되어서 워싱턴과 런던조약이 휴지조각이 되었다. 1933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해서 극동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렸고 국가연합에서도 탈퇴했다. 일본은 다시 두 조약을 철회하겠다고 선포했다. 
프랑스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와의 갈등 때문에 1935년에 조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도 1935년에 아비시니아Abyssinia를 침공했고 1936년에는 독일이 베르사이유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랜란트Rhineland를 합병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았고 신임수상인 히틀러는 대대적인 재무장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독일해군은 전투순양함을 건조했다. 예정된 5척 중에서 2척만 실제로 건조되었는데 32,000톤의 샤른호스트Scharnhorst가 1934년에 4월부터, 1년 후에는 그나이제나우Gneisenau(그림 참조)가 건조되기 시작했다. 
신형순양함은 19노트의 속력으로 18,530km를 항해하고 28cm 9문, 15cm 15문, 10.5cm 14문, 37mm 대공포 16문, 20mm 대공포 10문, 53cm 어뢰관 6개, 정찰기 4대를 무장했다. 최대 시속은 57km였다. 
샤른호스트는 1936년 10월, 그나이제우나는 12월에 진수되었다. 

 


1930년대 중반, 신형 중순양함도 건조되었다. 뤄초우Lutzow, 자이들리츠Seydlitz,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블뤼허Blucher와 아드미랄 히퍼Admiral Hipper 5척이었는데 뤄초우는 1939년 7월에 진수되어 1940년에 소련해군에게 판매되었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와 탈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경순양함도 진수되었다. 1925년 엠덴의 뒤를 따라, 1927년 카를스루에Karlsruhe, 1928년 쾰른Koln, 1929년 라이프치히Leipzig, 1934년 뉘른베르크Nurnberg, 1937년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가 진수되었다. 
뉘른베르크와 라이프치히는 6,590톤으로 가장 컸고 15cm 9문, 8.9cm 8문, 37mm 대공포 8문, 53cm 어뢰발사관 12개를 무장했고 최대시속 59km였다. 나머지는 5,600톤으로 무장이 상당히 낮춰졌고 이름을 붙이지 않은 3척은 미완성 상태로 있다가 1943년에 해체되었다. 

1935년 6월 20일, 영국과 독일은 협정에 서명했고 독일은 잠수함을 제외한 모든 함선을 영국의 35%로 제한했다. 잠수함은 45%를 건조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독일은 총 24,000톤의 유보트를 마음껏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영국해군은 잠수함 59척을 보유 중이었는데 20척은 1,350~1,805톤, 39척은 410~670톤이었다. 영국은 프랑스나 미국과 사전협의없이 독일과 합의했는데, 독일이 영국의 45%인 26척만 건조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독일은 반대로 총 톤수의 45%를 건조하기로 하고 중소형 잠수함에 박차를 가했다. 1935년 7월, 한달도 안되어서 카를 되니츠Karl Donitz가 유보트 프로젝트 지휘를 맡았다. 되니츠는 1차대전에서 잠수함에 승선했었다. 
되니츠는 300척 이상의 잠수함으로 전쟁에서 해상교역로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1939년 9월, 독일해군은 잠수함 56척이 있었지만 겨우 22척만 대서양에 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VII형으로 10노트 속도로 16,000km를 항해할 수 있었다. 사령탑이 겨우 5.2m밖에 안되어서 주간에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야간에는 포착이 불가능했다. 30초도 안되어서 잠수할 수 있었고 회피 시에는 200m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2노트의 속도로 130시간 동안 잠수할 수 있었다. 
잠수 깊이와 시간은 경쟁국의 잠수함에 비해 2배의 성능이었다. 

독일해군은 잠수함 외에도 대양에서 기술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비스마르크Bismarck(그림 참조)와 티르피츠Tirpitz였다. 41,700톤과 42,900톤으로 19노트의 속력으로 16,677km를 항해할 수 있었다. 38cm 8문, 15cm 12문, 10,5cm 대공포 16문, 37mm 대공포 16문, 20mm 대공포 16문(나중에 58문으로 보강), 53cm 어뢰관 8개를 무장했다. 승선인원은 2,400명이었다. 

 


두 전함 모두 1936년에 건조되었지만 2차대전 발발 당시에는 비스마르크만 진수되었다. 57,000톤급의 대형전함도 6척 계획되었다. H, J, K, L, M, N 중에서 1938년에 H와 J만 건조되다가 독일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오판했기 때문에 1940년 여름에 해체되었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제Friedrich der Grosse와 그로스 도이칠란트Gross Deutschland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했다는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 척의 항모도 계획했다. 1936년에 23,200톤의 그라프 체펠린Graf Zppelin을 건조하고 1938년 12월에 진수했다. 최대 33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고 19노트로 14,824km를 항해할 수 있었다. 
원래는 융커스 Ju87D 급강하폭격기 12대와 메셔슈미트 Bf109F 전투기 30대를 운용하려다가 각각 28대와 12대로 줄였다. 실전에는 한번도 투입되지 못했다. 85% 완성된 상태에서 1940년 5월에 중단되었고, 1942년에 키엘Kiel로 이동해서 완성작업을 이어가다가 1943년에 다시 중단되었다. 1945년 4월에 좌초되었다. 

 


1946년 3월, 소련군이 인양해서 사격연습용으로 사용하다가 침몰시켰다. 2006년 발트해 남부에서 잔해가 발견되었다. 자매함도 선체와 장갑갑판까지 완성되었지만 진수하지 못했고 1940년에 해체되었다. 
1942년, 중순양함 자이들리츠를 항모로 개조하다가 별 진전없이 1945년 4월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좌초시켰고 나중에 소련군이 인양했다. 여객선 3척도 항모로 개조하려고 했지만 계획에 그쳤다. 

1차대전 종전 당시, 영국해군은 44척의 전함이 있었고 1920년까지 29척으로 줄였다. 이 정도면 영국의 해외식민지를 보호하고 급격하게 강화되는 미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지만 워싱턴조약으로 숫자를 더 줄일 수 밖에 없었다. 1930년, 영국해군은 전함 16척, 전투순양함 4척, 항모 6척, 중순양함 20척, 경순양함 40척, 구축함 146척을 보유했다. 
1930년대 중반, 극동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의 위협이 거세지자, 영국은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35,000톤의 킹 조지King George V(그림 참조)급 쾌속전함 5척을 건조했는데 36cm 10문, 13cm 16문을 무장했다. 
일본이 조약을 파기하자, 40,000톤의 라이언Lion급 전함 4척에 41cm 9문을 장착하려다가 취소했다. 기존의 전함은 무장과 장갑을 보수했고 순양함도 상당한 업그레이드를 단행했다. 7,000톤의 린더Leander급 8척은 15cm 8문을 무장했고 5,220톤의 아레수사스Arethusas급 4척은 6문을 무장했다. 9,100톤의 사우스햄프턴Southamptons급 8척, 에딘버러Edinburghs급 2척, 피지Fiji급 11척, 5,770톤의 디도Dido급 11척도 건조했다. 

 


영국이 1차대전 당시에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해군항공전력은 그 이후에 완전히 정체상태였다. 1930년, 경제불황으로 정부는 군축을 단행했고 해군성이 원하는 항공기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1939년 초, 항모 6척 중에서 1935년에 건조된 아크 로얄Ark Royal이 온전한 전력을 갖췄다. 다른 4척은 전함이나 전투순양함을 개장했고 HMS 퓨어리어스Furious는 너무 소형이어서 항모라고 할 수 없었다.
23,000톤의 신형 항모 5척을 계획했지만 최소한 18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1939년 초의 해군항공기는 페어리 소드피시Fairey Swordfish 뇌격기, 블랙번 스쿠아Blackburn Skua 전폭기, 글로스터 시 글레디에이터Gloster Sea Gladiator전투기가 있었지만 모두 구형이었다. 

 

구형 뇌격기인 소드피시가 당시 세계최강의 전함 중 하나였던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올립니다. 


전쟁이 다가오자, 영국해군이 북해와 대서양 북부를 책임지고, 프랑스는 대서양 남부 엄호를 맡고 적의 상선공격을 차단하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해군은 큰 전력이 아니었지만 이후 20년 동안 훌륭한 해군지휘관 덕분에 전력을 많이 강화했다. 
1939년, 5척의 구형전함을 포함해 175척의 전투함을 보유했다. 신형 전함 2척, 구형 항모 2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12척과 다양한 유형의 구축함 70척이 있었다. 순양잠수함 쉬르쿠프Surcouf를 포함해 잠수함도 77척이 있었다. 
쉬르쿠프는 워싱턴조약에서 잠수함에게 허용한 최대구경의 주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최대의 잠수함이었다가 2차대전에서 일본 400 시리즈가 최대 잠수함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35,000톤의 신형전함 4척도 건조 중이거나 계획 중이었다.   

 

잠수함인데도 20cm 주포를 2문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 2월 중미 부근에서 해상충돌 후에 사라졌습니다. 

 


지중해에서는 프랑스가 서부를 영국이 동부를 책임지기로 했는데 프랑스 전투함 일부는 영국 지중해함대의 지휘를 받기로 했다. 
지중해에서는 이탈리아해군인 레기아 마리나Regia Marina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현대식 전함, 순양함과 구축함 그리고 100척 이상의 잠수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탈리아공군의 폭격기 지원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발발하면 중동으로 향하는 모든 상선통행을 차단하기로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이탈리아해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해군의 전력과 해군항공전력은 당시에 물음표였다. 영국은 일본이 대양해군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왔지만 일본이 군국주의가 되면서 우호관계가 끊어졌다. 1930년대까지 일본의 군사행동은 대외비에 부쳐졌다. 
일본은 1922년에 첫번째 항모인 호쇼Hosho(사진 참조)를 진수했고 곧바로 38,200톤의 가가Kaga를 진수했다. 가가는 원래 나가토Nagato급 드레드노트로 건조되다가 워싱턴조약에 따라 중단되었다. 일본은 가가를 해체하지 않고 건조 중에 지진으로 파괴된 아마기Amagi를 교체하기로 했다. 
1928년 3월에 가가를 완성했고 1930년에 연합함대에 취역했다. 1934~35년에 개장되어 비행갑판과 아일랜드를 제대로 갖췄다. 1935년 6월에 재취역해서 아카기Akagi와 함께 1항모사단의 주축이 되었다. 
일본은 1939년까지 항모건조에 박차를 가해 25,675톤의 쇼카쿠Shokaku와 즈이카쿠Zuikaku를 건조했다. 대전간 기간 동안 일본은 항모에 집중하면서도 신형 전함 야마토Yamato(그림 참조)와 무사시Musashi를 건조했다. 67,123톤으로 세계최대이자 최강의 전함이었다. 

 

야마토는 레이테해전에서 해상전을 벌여 미호위항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시켰지만 무사시는 아무런 전과없이 격침되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에 주시하며 해군을 강화했다. 미해군의 첫번째 항모는 랭글리Langley로 1912년에 진수한 석탄화물선 주피터Jupiter를 개장해 화물칸에 분해한 항공기를 수납했다. 아일랜드가 없고 연기는 선측으로 낸 연통으로 배출했다. 1924년 태평양함대에 취역했다. 
1916~17년, 미해군은 일본의 공고Konggo급에 대응해 신형 전투순양함 6척을 주문했다. 워싱턴조약에 따라 부분완성 상태로 중단되었다. 컨스티튜션Constitution(이후 렉싱턴Lexington)과 사라토가Saratoga는 항모로 완성되었다. 
렉싱턴과 사라토가는 1929년 1월에 태평양함대에 취역했고 20cm 주포를 장착했다. 당시 세계최대의 항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