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드레드노트부터 항공모함까지 - 대서양 수송선단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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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2021. 5. 10.

고유명사의 발음이 왔다 갔다... 그리고 현지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정확성과 일관성을 지켜야 하지만, 여러분을 위해 정리하는 자료이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뭐, 오타는 그냥 그러려니 해주세요. 

 

9월 말 영국해군과 독일포대는 2일에 걸쳐서 서로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10월 10일, 이번에는 구형전함 HMS 리벤지Revenge의 차례였다. 구축함 5척과 순양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며 쉘부르Cherbourg로 향했고 11일 새벽에 18분 동안 38cm 포탄 120발을 발사했다. 구축함 등은 12cm 포탄을 801발 발사했다. 
온갖 배로 가득 차 있던 항구는 화염덩어리로 변했고 65km 밖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독일군 중포대가 16km 거리에서 대응포격을 했지만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귀환했다. 
10월 16일, HMS 에레버스Erebus가 구축함 2척과 함께 칼레 부근의 프랑스 해안에 45발을 발사했다. 영국해군은 더 이상 육상포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1940년 9월과 10월, 독일구축함은 해협침공로를 확보하려고 기뢰를 계속 부설했고 영국선박을 공격하고 재빨리 빠졌다. 10월 11~12일 밤, 쉘부르를 출발한 독일 어뢰정 5전대는 무장트롤선 2척을 격침시켰고 자유프랑스 잠수함추격선 2척도 격침시켰다. 
영국구축함이 추격에 나섰지만 명중시키지 못했다. 10월 17일, 양측 구축함이 포격을 주고 받았지만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1월 27~28일 영국구축함 5전대가 독일구축함 4척과 전투를 벌여 HMS 재블린이 어뢰 2발을 맞고 탄약고가 폭발했다. 46명이 죽는 큰 피해를 입고도 항구로 견인되어 13개월 동안 수리를 받은 후에 종전까지 살아남았다. 
1940년 말까지 영국은 기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해협에서 침몰한 영국해군 선박 42척 중 28척이 기뢰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바다사자Sealion 침공작전(지도 참조)을 원했지만 독일은 해군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만약 무리해서 시도했다면 전쟁은 훨씬 빨리 끝날 수 있었다. 1940년 10월이 되자, 침공가능성이 거의 사라졌고 히틀러의 관심은 동부전선에 몰렸다. 

 


그렇지만 영국의 생명줄인 해상수송은 더 큰 위협을 받았다. 먼저 U보트가 북해와 대서양 항로를 위협했다. 그리고 포켓전함과 중순양함부터 쾌속무장상선이 해상을 위협했다. 마지막으로 북해/영국해협과 프랑스 대서양해안의 공군기지를 손에 넣은 독일공군의 작전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템즈와 퍼스 오브 포스Firth of Forth를 2일 주기로 오가던 동부해안 수송선단은 S보트의 기습공격을 어쩔 수 없어도 독일공군은 영국공군이 막아주었다. 해협수송단은 워낙 심하게 공습에 노출되어 한동안 중단되었다. 
영국본토공중전Battle of Britain이 끝나면서 영국공군이 수송단을 엄호할 여력이 생겼고 기뢰와 S보트가 가장 위험했다. 

 


대서양 수송선단은 할리팩스, 노바 스코티아 항로는 9~10노트, 시드니, 케이프 브렌튼 아일랜드, 북서쪽에서 오는 수송선단은 7~8노트의 느린 속도로 항해했다. 프리타운, 시에라 레온, 지브랄타를 오가는 선단은 더 느렸다. 유보트와 대함항공기가 프랑스 대서양해안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수송선단의 항로를 변경해야 했다. 
아일랜드 남서쪽 항로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북서쪽과 북부해협North Chennel을 통해 아일랜드 해로 이어지는 항로로 변경했다.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해 전투함을 영국 주변에 집결시켰고 수송선단 호위함이 소수에 그쳐 유보트는 마음껏 사냥했다. 

 


1940년 6월, U보트가 58척 300,000톤을 격침시켜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 4척 이상 무리를 지어 밤과 해상에서 공격해서 영국호위선박의 ASDIC 잠수함탐침장비가 무용지물이었다. 독일해군은 1차대전에 이미 이런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2차대전에서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카를 되니츠Karl Donitz(사진 참조)는 1939년에 해상야간공격을 공개적으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영국해군은 잠수상태의 잠수함에 대해서만 훈련을 받았고 해상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독일해군은 겨우 15척 정도로 대서양 수송선단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렇지만 9월이 시작되면서, 영국과 미국정부는 50척의 미국구축함과 서쪽의 영국영토 임대를 맞교환했다. 미국구축함은 구형에 장비가 부실해서 해전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영국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즉시 전력감이었다. 
그리고 신형 전투함이 계속 진수되어 호위함 숫자가 계속 늘어났다. 대잠전술훈련도 개선되었고 영국해군과 영국공군의 협력도 강화되었다. 
반면에 독일해군은 U보트 숫자가 너무 적었다. 독일해군은 개전을 1944년 이후로 예상했기 때문에 잠수함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15개월 동안 31척을 잃었는데 바로 대체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U보트 승무원은 발트해에서 9개월 훈련을 받고 가상공격을 66차례 거친 후에야 배치되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1940년 말까지 실제로 운용된 잠수함은 22척에 불과했다. 

독일해군은 얼마 안되는 U보트만으로 1940년 가을에 대서양 수송선단을 거의 끊어 놓았다. 10월 18~20일, SC7과 HX71선단은 31척을 잃었다.
이탈리아는 지브랄타해협에서 시험한 후에 대량의 잠수함을 보르도Bordeaux에 배치해 영국수송선단을 위협했다. 10월 말까지, 이탈리아 잠수함 17척이 비스카이만 서쪽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독일잠수함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독일 대형전투함은 대부분 숨을 죽이고 있었던 반면에 6~8문의 포와 어뢰발사관을 무장한 쾌속무장상선은 기승을 부렸다. 아틀란티스Atlantis는 1940년 3월 31일에 출항한 후에 622일 동안 22척, 146,000톤을 격침시켰다. 
1940년 말에는 6척이 더 투입되었다. 상선으로 위장해 비밀지점에서 보급을 받고 먼바다에서 호위없이 홀로 다니는 상선을 공격했다. 코르모란Kormoran은 1940년 7월 9일에 베르겐Bergendmf 출발해 시베리아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나갔다. 당시에는 우호관계였던 소련 쇄빙선의 도움을 받았다. 

 

150mm 포 6문으로 큰 위협이었던 아틀란티스는 1941년 11월 22일에 중순양함 데본셔와 전투를 벌이다 침몰했습니다. 

영국해군도 쾌속여객선을 무장시킨 무장상선순양함을 50척 투입해 독일무장상선을 추적했지만 무장이 너무 빈약해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겨우 몇 차례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영국무장선의 일방적인 피해로 끝났다. 
1945년 11월 5일, 아드미랄 쉬페가 37척의 HX84선단을 공격했는데 무장상선 저비스 베이Jervis Bay가 유일한 호위함이었다. 함장은 연막을 뿌리고 모든 상선에게 재빨리 흩어지라고 명령하고 쉬페를 상대했다가 191명과 함께 전사했다.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선단은 5척이 침몰하고 3척이 파손되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유조선 산 데메트리오San Demetrio는 선원 16명이 전부 탈출했다가 20시간 후에도 침몰하지 않자 다시 승선해서 2일 동안 화재를 진압해 아일랜드 항구로 가져갔다. 
1942년 3월 17일, 산 데메트리오는 어뢰를 맞아 침몰했고 이번에는 더 이상의 행운이 없었다. 

1941년 상반기, 독일공군이 대서양과 북해 수송선단에 큰 피해를 입혔다. 4월에만 116척, 323,000톤을 격침시켜 2차대전 중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4발엔진 포케불크FockeWulf Fw200 콘도르Kondor가 주력이었는데 보르도에서 아일랜드 서부까지 장거리비행을 하며 목표물을 찾아 U보트에게 정보를 주었다. KG40항공대는 1940년 8월~1941년 2월에 363,000톤을 격침시켰고 1941년부터는 해군의 지휘를 받았다. 
1941년 봄에 아일랜드 북부에 영국항공대가 배치되면서 Fw200도 많이 위축되었다. 장거리 브리스톨 뷰파이터Bristol Beaufighter는 독일폭격기를 견제하는데 효과적이었지만 영국공군은 호위함과 항공기의 직접 교신을 허용하지 않아서 불필요한 피해를 발생시켰다. 
1941년 중반부터 현장의 직교신이 허용되었다. 

 


장거리 폭격기에 대응하기 위해 수송선단에 항공기를 배치하기로 했다. 호위항모가 부족했기 때문에 상선에서 펄마르Fulmar나 허리케인Hurricane 한 대를 쏘아 올릴 수 있는 캐터펄트를 장착했다. 일단 이륙하면 다시 착륙할 방법이 없었다.
35척이 이 장치를 장착했고 전투기 캐터펄트Fighter Catapult라고 불렀으며 흰색 휘장을 게양했다. 공군이나 해군 레이더도 장착해서 접근하는 비행기를 포착했다. 
1941년 8월 3일, 이렇게 이륙한 허리케인 한 대가 Fw200을 격추시켰다. 모두 합쳐서 겨우 5대만 격추시켰지만 그래도 독일군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고 수송선단에는 많은 위안이 되었다. 

 


1940~41년 겨울, 여전히 S보트의 위협이 상당했고 영국해군은 1940년 12월에 6모터건보트(MGB)전대를 창설했다. 3척은 루이스Lewis경기관총 4정과 올리콘Oerlikon 1문을 장착했고 프랑스해군용으로 건조된 5척은 루이스 4정과 .303 브라우닝Browning 기관총 4정을 장착했다(그림 참조).
그렇지만 훨씬 심각한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1년 3월, 독일의 막강한 전함 비스마르크Bismarck(아래 사진 참조)가 발트해에서 시험항해를 마쳤다. 14,000톤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도 배치되었다. 
1941년 4월 2일, 독일해군은 비스마르크와 다른 선박을 대서양에 배치했다. 4월 말에는 비스마르크, 프린츠 오이겐, 그나이제나우가 대서양에서 만나 연합군 수송선단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나이제나우는 프랑스 브레스트항에 샤른호스트와 정박해 있었다. 샤른호스트는 보일러를 수리 중이어서 작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샤른호스트가 없어도 막강한 전력이었다. 
비스마르크 혼자서 호위함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두 중순양함이 수송선단을 격침시킬 수 있었다. 

 



그나이제나우와 샤른호스트는 2월 8일에 수송선단 HX106을 발견했지만 전함 HMS 하밀리Ramillies가 호위하고 있어서 공격하지 않았다. 2월 22일, 다른 수송선단을 발견하고 5척, 25,784톤을 격침시켰다.
3월 15일, 북대서양에서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그나이제나우는 7척, 26,693톤을 격침시키고 20,139톤의 유조선 3척을 나포했다. 샤른호스트는 6척 35,080톤을 격침시켰다.
그나이제나우는 영국선원을 구조하던 중에 다른 수송선단에서 이탈해 급히 달려온 HMS 로드니의 공격을 받았다. 그나이제나우는 훨씬 빠른 속도를 이용해 전력이 우월한 로드니에게서 빠져나갔다. 

 

 

영국해군은 즉시 HMS 로드니와 킹 조지 5세를 북쪽으로 보내 HMS 넬슨,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과 함께 독일전투순양함 사냥에 나섰다. 전투순양함 리나운Renown, 항모 아크로얄, 순양함 쉐필드, 구축함 몇 척의 H전대는 지브랄타를 떠나 프랑스 대서양쪽 항구 쪽을 막았다. 
3월 20일, 소드피시 정찰기가 그나이제나우에게 나포된 유조선을 찾아냈다. H전대가 다가오자 독일군은 두 척을 좌초시켰고 다른 한 척은 달아났다. 소드피시는 오후에 독일전투순양함도 찾아냈지만 무선교신이 안되어서 보고했을 때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3월 22일, 두 척은 무사히 브레스트로 귀환했고 첫번째 수송선단 공격에서 22척, 115,622톤을 침몰시켰다. 

3월 22일, 스피트파이어의 사진촬영으로 브레스트에 두 척이 있는 것을 알았다. 윈스턴 처칠은 바로 영국공군에게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31~31일 밤, 109기가 공습에 나섰지만 성과가 없었다. 4월 4~5일에도 54기가 공습했지만 도시와 건조독에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나이제나우는 불발탄의 피해를 우려해 항구 밖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스피트파이어가 사진촬영으로 그나이제나우를 발견했고 4월 6일 새벽, 브리스톨 뷰포트 뇌격기 6대가 나섰지만 한 대만 목표물을 찾아냈다. 대공포 250문의 격렬한 포화를 뚫고 마스트 높이로 날며 457m 거리에서 어뢰를 투하하고 격추되었다. 
어뢰는 그나이제나우를 명중시켰고 몇 달 동안 수리를 받아야 했다. 

 

대략적인 크기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주무장 등의 성능차이가 있으니까 그냥 크기는 재미로만 보면 됩니다. 

이제 독일해군은 고민에 빠졌다. 비스마르크의 자매함 티르피츠Tirpitz가 합류할 때까지 대서양공격을 연기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시험항해를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을 끌다가 영국해군의 대응이 더 강화되기 전에 예정대로 작전을 시작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시간이 지연되면 될수록 북대서양의 밤이 짧아져서 밀항이 어려워졌다. 
바로 공격에 나서면 지중해의 영국해군을 불러들여 그리스를 침공하기 시작한 육군을 도울 수 있었다. 
1941년 4월 8일, 함대사령관 귄터 뤼첸스Gunther Lutjens는 파리에서 카를 되니츠와 만나 비스마르크와 U보트의 협력을 논의했다. 4월 24일, 다시 문제가 터졌다. 프린츠 오이겐이 자기기뢰에 피해를 입어 2주간 수리를 받아야했다. 

 


샤른호스트나 티르피츠가 다시 복귀할 때까지 작전을 미뤄야 했지만 가능한 한 빨리 서두르기로 했다. 5월 초, 뤼첸스는 비스마르크에 승선했고 5월 18일에 암호명 라인위붕Rheinubung과 함께 작전을 시작했다. 
비스마르크 호위함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최신형 구축함 Z10, Z16, Z23호가 도착했고 비스마르크가 작전할 먼바다에는 U보트 16척이 영국전투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조선 20척, 보급선과 기상관측선이 북극에서 대서양 중부까지 길게 늘어섰다. 
18일 오전, 뤼첸스는 선실에서 마지막 회의를 소집했고 작전책임자 카를제독은 베르겐Bergen부근으로 직항해 항해거리가 짧은 프린츠 오이겐이 기름을 보충하는 동안 며칠 대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뤼첸스는 그냥 관통해서 바로 북극해로 나가 재보급한 후에 덴마크해협을 통해 대서양으로 전속력 항해하고 싶어했다. 그는 프린츠 오이겐으로 건너가서 사열을 했다. 그날 오후 두 전투함은 티르피츠와 연습을 했고 프린츠 오이겐은 반자력 장비를 시험했다. 
19일 새벽 2시, 두 전투함이 닻을 올리고 각각 서쪽으로 향했다. 

5월 20일, 스웨덴 순양함 고틀란트Gotland가 독일함대를 발견했고 영국해군은 21일 오전에 적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전투순양함 후드, 구축함 6척을 보내 대서양으로 들어오는 북쪽 통로를 막았다. 
스피트파이어가 베르겐 부근에서 재급유 중인 비스마르크를 촬영했다. 해안사령부 항공기가 출격하려고 했지만 기상악화로 지연되었고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본토함대 주력이 덴마크해협을 경비 중인 중순양함 노포크와 서포크를 지원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후드가 가장 먼저 도착했고 함대 기함인 킹 조지 5세, 항모 빅토리어스Victorious, 순양함 4척과 구축함 6척이 도착했다. 
항모는 워낙 급하게 출발했기 때문에 소드피시 9기와 풀마르 6기가 전부였다. 원래는 중동으로 향하던 병력을 호위하다가 비스마르크 사냥에 동원되었다. 구축함 3척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던 전투순양함 리펄스도 급히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