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드레드노트부터 항공모함까지 - 캐터펄트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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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2021. 5. 30.

고유명사의 발음이 왔다 갔다... 그리고 현지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정확성과 일관성을 지켜야 하지만, 여러분을 위해 정리하는 자료이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뭐, 오타는 그냥 그러려니 해주세요. 

 

영국해군성 잠수함추적실은 암호를 해독한 후에 재빨리 수송선단의 항로를 변경해서 1941년 하반기에만 300척 이상을 구해냈다. 독일해군은 더 많은 잠수함을 투입했기 때문에 미국이 영국을 원조하기 전에 영국을 전력에서 이탈시키고 소련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영국의 와이트홀Whitehall은 실의에 잠겼었다. 1941년 초, 영국의 밀재고는 겨우 15주만 버틸 수 있었고 고기는 배급을 해도 겨우 2주가 고작이었다. 버터는 8주, 마가린은 3주, 베이컨은 27주의 재고가 있었다. 
상선피해가 워낙 커서 새 상선을 건조해 투입하기 전에 영국이 말라죽을 판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암호해독이라는 기적이 일어났다.

 


독일잠수함이 상선단을 발견하면 다른 잠수함에게 위치를 알려주었고 밤까지 기다렸다가 육상항공기의 정찰범위 밖에서 수상으로 올라와 공격했다. 대량의 암호교신으로 세밀한 작전을 세우고 협력했기 때문에 수송선단은 무방비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울트라Ultra암호해독으로 잠수함의 공격뿐만 아니라 기지를 오가는 항로, 잠수함의 투입규모, 신형 잠수함여부, 작전빈도와 같은 귀중한 배경정보까지 입수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속도, 잠수깊이, 내구성, 무장, 잠수함별 레이더와 교신장비도 파악했다. 
1941년 6월만 해도, 암호해석이 부정확했고 독일잠수함이 호위를 받지 않고 단독으로 서아프리카 수송단을 노렸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했다. 그렇지만 잠수함 급유선이 모조리 격침당했기 때문에 잠수함은 기지로 귀환해서 보급받아야 했고 9월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북대서양은 6월 말부터 피해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호위를 받은 수송선단으로 전환한 덕분도 있었지만 암호해독으로 위험지역을 회피한 덕분이 컸다. 5~6월 피해는 300,000톤에서 100,000톤으로 줄어들었다. 
독일해군은 이런 변화를 알지 못하고 수송선단을 찾아 넓은 바다를 헤맸다. 영국이 에니그마기계를 입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시간으로 작전을 환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정보망에 구멍이 생겼다고 착각했다. 되니츠제독은 직접 정보망을 점검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독일해군은 암호분석가에게 정보망을 점검하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에니그마에 대해 맹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원인을 찾으며 귀중한 시간을 흘려 보냈다. 

1941년 9월, 독일해군의 새로운 시도로 잠시 피해가 늘었다가 10월부터 다시 줄어들었다. 유보트가 80척으로 급증했는데도 11월에는 62,000톤까지 줄어들었다. 독일해군은 아예 대서양수송선단을 포기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행운이 있었다. 영국정보부는 8월에 U-570을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570은 악천후 속에서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파손되었고 함장은 수상에 올라 항복깃발을 올렸다. 견인선이 달려와 아이슬란드에 좌초시켰다. 
승무원이 기밀자료를 파기했지만 잠수함자체가 영국군의 폭뢰성능과 사용을 시험할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는 1941년 말로 대서양전투가 끝났다고 주장한다. 수송선단 보호 차원에서 벗어나 잠수함을 공격할 무기와 전술을 갖추게 되었다. 

 



지중해전역 1940~1941년

덩케르크 해변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영국군은 새로운 적을 만났다. 1940년 6월 10일,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전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함 6척(2척만 전투가능),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12척, 구축함 59척, 어뢰정 67척과 잠수함 116척이 있었다. 
동지중해의 영국해군은 전함 4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21척과 잠수함 6척이 전부였고 프랑스의 전함 1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척과 잠수함 6척을 더 투입할 수 있었다. 몰타Malta에는 잠수함 6척과 구축함 1척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쪽 지중해 해안과 아드리아해에 엄청난 기뢰를 뿌려 두었다. 

 

독일군은 영국의 몰타기지를 제거하지 못해 북아프리카전선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1941년 초에는 30만톤 이상의 수송선단 중 겨우 1만톤 정도만 북아프리카에 도착하고 모두 침몰당했을 정도입니다. 

54척의 잠수함을 전투태세로 전환하였고 바지놀리니Bagnolini가 6월 12일에 영국경순양함 칼립소Calypso를 격침시켰다. 영국은 다시 잠수함 3척을 잃었다. 
영국지중해함대 앤드류 커닝햄Andrew Cunningham제독(사진 참조)은 이탈리아가 참전하기 직전에 지중해 중앙에서 이탈리아군을 상대할 수 있도록 주력을 옮겨 두었다. 6월 11일, 지중해함대는 토브룩Tobruk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리비아로 향하던 이탈리아 순양함과 구축함선단을 요격했다. 
요격을 실패로 끝나서 이탈리아 기뢰제거함 한 척만 격침시켰고 대신에 칼립소를 잃었다. 14일, 프랑스 중순양함 4척과 구축함 11척이 툴롱Toulon을 출발해 제노아Genoa항 등의 이탈리아 해안을 공격했다. 

 


6월 말이 되자, 영국해군은 부제독 제임스 솜머빌James Somerville 휘하에 강력한 H전대를 모았다. 항모 아크 로얄, 전함 베일리언트Valiant와 레졸루션, 순양함 2척과 구축함 11척 그리고 전투순양함 후드Hood였다. 
H전대는 편성된 지 1주일만에 영국해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캐터펄트Catapult작전에 투입되었다. 알제리 오랑Oran과 메르스엘케비르Mers-el-Kebir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함대를 격침시키는 작전이었다. 
솜머빌은 오랑으로 가서 프랑스제독 장술Gensoul의 항복을 받아내고 프랑스함대를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서인도제도로 끌고가서 좌초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3일, 아크로얄함장 홀랜드Holland가 장술과 만났지만 성과가 없었다. 소드피시가 항구 입구에 기뢰를 뿌리고 베일리언트, 레졸루션과 후드가 포문을 열었다. 브레타니Bretagne의 탄약고가 포탄을 맞고 폭발했고 됭케르크Dunkerque와 프로방스Provence가 중파되었고 구축함 2척이 침몰했다. 

 


해가 저물자 전함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와 구축함 5척이 피신하다가 소드피스의 공습을 받았지만 강력한 대공포화를 퍼부어 툴롱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다음 날, 소드피시가 프랑스함대의 기함 됭케르크를 끝내기 위해 공습했다. 
어뢰 4발이 됭케르크 옆에 나란히 좌초해있던 보조함을 맞췄고 그 폭발로 전함의 측면이 터져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는 전함 로렌느Lorraine, 순양함 4척과 소형전투함 다수가 정박해 있었고 프랑스가 항복하기 전까지 커닝햄제독의 지휘를 받았다. 

커닝햄은 프랑스제독 고드프로와Godfroy의 항복을 받아내고 평화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이제 독일군 점령직전에 브레스트에서 탈출한 장 바르Jean Bart와 리슐레이Richelieu가 남았다. 두 전함은 서아프리카 카사블랑카Casablanca와 다카르Dakar에 정박 중이었다. 
7월 8일, 항모 에르메스Hermes의 어뢰정이 항구로 들어가 리슐리에의 방향타와 프로펠러를 노리고 폭뢰를 투하했다. 폭뢰공격이 실패하자 소드피시가 다시 공습했지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2달 후에 아크로얄의 공습을 다시 받았는데 이번에도 뇌격기 9대만 잃고 실패했다. 

이 무자비한 작전으로 프랑스해군 1,297명이 전사했고 논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전과 관련된 최고위 사령관 3명은 모두 무력실행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1940년 여름은 영국에게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영국정부는 페탕Petain의 전후정부의 태도를 알 수 없었고 만약 독일이 프랑스전투함을 고스란히 손에 넣으면 지중해전역은 심각하게 불리해질 수 있었다. 
미국의 참전을 기대할 수 없었던 영국정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7월 7일, 커닝햄은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해 몰타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수송선단을 보호하는 동시에 이탈리아 남부해안을 위협하기로 했다. 순양함 5척의 A전대, 전함 워스파이트Warspite(사진 참조)와 호위구축함의 B전대, 항모 이글, 구축함 10척과 전함 말라야Malaya와 로얄 소브린Royal Sovereign의 C전대로 나누었다. 
2일 전, 이집트 공군기지의 소드피시가 이탈리아 구축함 1척과 4,000톤급 상선 1척을 격침시키고 구축함 1척과 15,000톤급 수송선을 반파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8일, 정찰 중이던 잠수함이 전함 2척 이상의 강력한 전대가 타란토Taranto와 벵가지Benghazi 사이로 남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확인에 나선 소드피시의 보고를 통해 벵가지로 들어오는 수송선단을 엄호 중이라고 판단했다. 

 


커닝햄은 이탈리아전대를 요격하기로 결정했고 오후에 이탈리아 폭격기 126대가 공습해왔다. 항모 이글(사진 참조)이 주요 목표였지만 근접탄 몇 개의 피해가 고작이었고 순양함 1척이 폭탄 1발을 맞았다. 폭격기공습은 3km 고공이었기 때문에 대공포는 무용지물이었다. 
9일 새벽, 그리스 남단 96km에 접근했고 이탈리아해군 전함 2척, 순양함 16척, 구축함 32척의 강력한 전대는 이오니아Ionia해 240km 전방에 있었다.
12시에 거리를 145km까지 좁혔다. 이글은 소드피시 9대를 이륙시켜 이탈리아전대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주력함은 항로를 바꿔 발견하지 못했고 후미의 순양함 1척에게 어뢰를 투하했지만 명중시키지 못했다. 

 

항모 이글은 1942년에 유보트의 공격을 받고 침몰합니다. 

오후 3시, 커닝햄의 선두가 적을 발견하고 바로 포문을 열었다. 워스파이트가 10분 후에 도착했고 381mm 포로 이탈리아순양함을 포격하자 연막을 뿌리고 달아났다. 
3시 45분, 두번째 공습에 나섰고 워스파이트는 이탈리아기함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를 향해 2.4km 거리에서 포격을 퍼부어 피해를 입히고 속도를 18노트까지 늦췄다. 
이탈리아제독은 작전을 멈추고 이탈리아 해안으로 방향을 바꿨고 이탈리아구축함에게 연막을 피우게 했다. 

 

줄리오 체사레는 종전 후인 1949년에 전쟁배상금의 일부로 소련에 넘겨졌고 재무장 중에 사고로 침몰했습니다. 

4시 15분, 소드피시는 바다에 뿌려진 연막 사이로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몇 분 후, 전함 2척을 발견하고 공습에 나섰지만 실제로는 순양함 2척이었다. 순양함은 다시 연막을 피우며 달아났다. 
어뢰를 모두 투하한 소드피시 9대는 항모로 돌아왔다. 오후 5시에 다시 이탈리아폭격기가 고공폭격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오후 5시 30분, 커닝햄은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몰타로 향했다. 공중지원없이 이탈리아해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다음 날, 소드피시가 시실리 아우구스타Augusta에 정박한 순양함과 구축함을 노렸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구축함 1척과 급유선 1척만 남아 있었다. 어뢰를 맞은 구축함은 전복해 바로 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