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프리드리히대왕과 예카테리나대제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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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7년전쟁

2021. 10. 7.

소피아Sophia(예카테리나Catherine the Great여제의 아명)와 부모가 베를린을 방문하기 3년 6개월 전, 당시 28세였던 프리드리히Frederick 2세(그림 참조)는 프로이센Prussia왕위에 올랐고, 유럽은 온갖 음모가 흘러 넘쳤다. 그는 선진의식, 무한한 정열, 정치감각 그리고 (미래에 발휘될) 천재적인 지휘능력이 있었다. 철학, 문학, 예술을 사랑해 부드러운 것처럼 보였지만 마키아벨리Machiavelli식 권모술수를 무자비하게 실행했고, 작은 왕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총동원해 국경을 확장하고 유럽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계획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진격명령만 내리면 되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린 시절 프리드리히는 몽상을 하는 섬세한 소년이었고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William 1세에게서 남자답지 못하다가 자주 얻어맞았다. 
청소년 시절에는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내리고 화려한 벨벳 옷을 즐겨 입었다. 프랑스 문학을 읽고 프랑스어로 시를 썼으며 바이올린, 하프시코드, 플루트 궁정음악을 연주했다. 플루트는 평생의 취미가 되어 100편 이상의 플루트 소나타와 협주곡을 작곡했다. 

 


25세에 왕위계승을 시작했고 보병연대를 지휘했다. 1740년 5월 31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로 즉위했다. 
그의 외모는 평범했다. 170cm의 키에 갸름한 얼굴이었고 크고 약간 돌출된 푸른 눈동자에 앞이마가 훤했다. 그는 격식이나 전통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고 즉위식도 열지 않았다. 6개월 후, 프로이센은 갑자기 전쟁에 돌입했다.
프리드리히는 인구와 자연자원이 적고 라인강에서 발트해까지 끊어져 흩어진 작은 국토를 물려받았다. 베를린이 수도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선제후Eletorate국이 중심이었다. 동쪽에 동프로이센이 있었지만 폴란드왕국의 영지가 가로 막았고 서쪽의 라인, 베스트팔렌Westphalia, 동 프리지아Frisia, 북해에 고립영토Enclave가 흩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심각한 약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센군은 유럽최강이었다. 훈련이 잘된 정규군이 83,000명이나 있었고 장교의 수준도 높았고 현대식 무기가 충분했다. 
프리드리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영토의 지리적 약점을 극복할 생각이었다. 

 


기회가 순식간에 찾아왔다. 1740년 10월 20일, 왕위에 오른 지 5개월 만에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황제 오스트리아의 카를Charles 6세가 급사했다. 합스부르크Hapsburg왕가의 마지막 남성으로 두 딸만 남겨두었고 당시 23세의 큰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가 오스트리아 왕위를 받았다. 

 


프리드리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즉시 지휘관을 소집했다. 10월 28일, 합스부르크왕가 중에서 가장 부유한 슐레지아Silesia를 점령하기로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지도자가 없었고 약한데다가 굶주렸기 때문에 프로이센군이 낙승을 거둘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를 인정하겠다고 맹세했었지만 거침이 없었다. (심지어 청혼까지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저서 히스트와 드 몽떵Historie de Mon Temps에서 ‘야심, 이익을 얻을 기회, 명성에 대한 열망이 확실하게 작용했고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슐레지아는 바로 옆에 있었고 농업과 공업생산력이 높고 개신교도가 대부분이어서 작은 왕국에게는 더 없이 좋은 목표였다. 

 


12월 16일, 온몸을 적시는 차가운 빗속에서 32,000명의 병력이 슐레지아국경을 넘었고 저항은 거의 없었다. 침공이 아니라 일방적인 점령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월 말에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의 전쟁계획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빼놓고 있었다. 그가 개전한 여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대공녀이자 헝가리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외모만 보면 푸른 눈과 금발의 미인으로 얕잡아보기 쉬웠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바보라고 오해한 사람이 많았다. 
정 반대였다. 그녀는 매우 똑똑했고 용감했으며 집요했다. 프리드리히가 슐레지아를 점령하자 빈Vienna는 어쩔 줄을 몰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만 예외였다. 임신초기였는데도 즉각 대응에 나섰다. 군자금을 모으고 병력을 동원하고 신하들을 격려하며 반격준비를 하면서 미래의 후계자 요제프Joseph 2세를 낳았다. 
프리드리히는 얕잡아 보았던 젊은 여성이 슐레지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자 크게 놀랐다. 그리고 4월에 오스트리아군이 보헤미아Bohemia산맥을 넘어 슐레지아에 진입하자 경악했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 슐레지아를 합병했다. 2,250km의 비옥한 농지, 석탄광산, 대도시 그리고 독일계 개신교 150만명을 얻었다. 

 

슐레지아 2차전 호헨프리트베르크Hohenfriedberg전투에서 프로이센 척탄병부대가 오스트리아동맹인 작센군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양측이 각각 60,000명씩 투입한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5,000명을 잃은 반면에, 오스트리아동맹군은 14,000명(포로포함)을 잃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프로이센의 인구는 이제 400만명으로 늘어났다. 대신에 희생이 따랐다. 마리아 테레사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신성한 유산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프리드리히를 평생 증오했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100년이나 반목했다. 

슐레지아를 점령한 프리드리히는 위험한 상황에 몰렸다. 프로이센은 여전히 작은 왕국이었고 국토는 단절된 데다가 전쟁으로 주변 강대국이 견제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두 강대국이 언제라도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다. 
쓴 패배를 맛본 마리아 테레지아말고도 엘리자베타Elizabeth황제(그림 참조)가 통치하는 러시아가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두 강대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었고 러시아와 우호관계가 아니더라도 중립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에 절대로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당부였다. 더구나 엘리자베타는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지도자였다. 
엘리자베타는 황제에 오르자 마자 프로이센을 증오하는 알렉시스 베스투제프 류민Alexis Bestuzev-Ryumin(그림 참조)을 부재상에 임명하고 정무를 맡겼다. 베스츄제프는 평생동안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해양강대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작센-폴란드와 같은 중유럽 지상강대국과 동맹을 맺고 싶어했다. 
프리드리히는 그런 그를 가장 큰 위험요소라고 판단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엘리자베타는 15세인 조카이자 후계자의 신부를 찾던 중이었고,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왕가의 결혼에 개입해 이런 위험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고 했다. 상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의 프로이센대사는 베스투제프가 작센선거후이자 폴란드왕인 아우구스트Augustus 3세의 딸을 집요하게 추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되면 프로이센은 매우 위험한 지경으로 몰리게 되었고 프리드리히는 반드시 막어야 했다. 그는 독일의 명문대가의 공주가 필요했고 안할트-체르브스트Anhalt-Zerbst의 소피아Sophia가 최고의 대안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엘리자베타는 소피아를 선택했고 바로 상페테르부르크로 불러들였다. 프리드리히도 베스투제프가 방해하지 않도록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표트르Peter 3세와 예카테리나황후의 모습입니다. 프리드리히의 예상과 달리, 예카테리나가 아니라 (친 프로이센인)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를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러시아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했고 표트르 3세는 차르가 된 지 6개월만에 축출됩니다. 두 사람은 원래 정략결혼이었고 예카테리나는 내연남이 있었기때문에 표트르의 축출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살해를 사주했다는의혹도 받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소피아가 상페테르부르크 궁정의 환대를 받을만 한 매력이 있는 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모성애가 부족했던 요한나Johanna는 소피아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랬던지 베를린궁정에 홀로 입장했다.
프리드리히가 소피아를 찾자, 그녀는 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음 날에도 같은 이유를 댔고 왕이 계속 압박하자 궁정드레스를 가져오지 않아 나설 수 없다고 실토했다. 
프리드리히는 동생의 드레스를 내주고 바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소피아는 몸에 맞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흔한 장신구도 없이 머리도 다듬지 못하고 궁에 입궁했고 평범한 첫인상을 주었다. 소피아는 부모의 배석없이, 그것도 국왕 바로 옆에서 식사를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프리드리히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는 ‘14세 소녀에게 오페라, 연극, 시, 춤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소피아는 긴장이 풀리자 점차 분명한 대답을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국왕이 어린 아이와의 대화에 심취하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서 쳐다보았다’고 기록했다. 프리드리히는 소피아가 마음에 들었고 잼접시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면서 ‘사랑과 은혜의 손이 전해주는 선물을 받게’라고 말했다. 
소피아에게는 저녁식사가 확실한 이정표였다. 프리드리히는 엘리자베타에게 ‘체르브스트 소공녀는 그 나이에 어울리게 활기차고 즉흥적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지식이 풍부하고 재기넘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때만 해도 소피아는 정략의 도구에 불과했지만 프리드리히도 나중에는 훨씬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14세인 소피아와 32세인 프리드리히는 그 이후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대왕과 여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 두 사람은 동유럽과 중유럽의 역사를 쓰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대외적으로는 소피아에 관심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상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요한나를 프로이센의 첩보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소피아가 러시아 황후가 되려면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엘리자베타 측근으로 프로이센에 유리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는 요한나에게 베스투제프와 외교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러시아의 부재상은 프로이센의 원수이며 소피아의 결혼을 방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요한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베스투제프의 기반을 무너트려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요한나는 쉽게 불타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딸보다 자신을 내세우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소피아의 후원역할로 러시아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중요한 외교중책을 맡은 핵심역할이라고 착각했다. 
요한나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엘리자베타에게 감사하던 마음을 버렸다. 남편이 간곡하게 정치에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던 충고도 흘려버렸다. 그리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러시아황궁으로 떠나는 딸의 안전도 무시했다. 

 

 

이후 이야기는 한참 후에 이어지겠지만, 어머니 요한나는 노골적으로 나대다가 러시아궁정에서 바로 쫓겨났고 예카테리나는 무능한 남편을 축출하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터키를 상대하며 대제the Great 칭호를 얻습니다.

그림은 영국의 당시 국제정치 풍자화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완전히 방향을 바꿔서 폴란드 1차 분할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