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일본은 1941년에 왜 진주만을 기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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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2021. 12. 30.

 

이번에도 BBC 자료입니다. 

일왕 등의 표현은 제가 결정한 것입니다. 지명은 본국, 영어와 한자 등을 병행할 수 있어서 좀 혼선이 있습니다. 
당연히 진주만 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미리 정리해두었습니다. 그걸 참조하면 더 재미있을겁니다. 

 

그리고 국내 고사직전인 전사분야에서 반가운 책이 또 출간되었습니다.

 

 

그래픽노블로 원자폭탄 개발의 비화를 제대로 소개했습니다. 

만화여서 보기는 쉬운데 프랑스풍이라 안 맞는 분도 있을겁니다.  

 

 

짙어지는 전운: 일본은 1941년에 왜 진주만을 기습했을까?

일본이 1930년대에 맹렬하게 제국을 건설하자 미국이 계속 경보를 울렸다. 그렇지만 루즈벨트대통령은 1차대전의 고통을 기억하는 대중에게 다시 전쟁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1931년 9월 중순, 일본군은 만주를 합병하려는 모략을 꾸몄고 도쿄에서 ‘계획노출. 다테카와 도착 전에 실행’이라는 경고전보를 받았다. 일본정부는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승인하지 않고 다테카와 요시츠구Yoshitsugu Tatekawa중장을 보내 막으려고 했다. 

 

 

중앙이 다테카와이고 1940년 소련대사로 떠나기 전 모습입니다. 


9월 18일 저녁, 다테카와가 탄 기차가 선양Mukden에 도착하자, 미리 통지를 받은 군장교들은 그를 도심의 고급 찻집으로 안내해 차, 정종과 기생을 접대했다.
저녁 10시 20분, 일본군은 선양 근처의 일본군 철로에 작은 폭탄을 터트렸다(사진 참조).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을 비난하며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19일 정오가 되자 남만주철도회사South Manchuria Railway의 거점고시 대부분을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도 연달아 점령했다. 그렇게 15년전쟁Fifteen-Year War이 일어났고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일본군의 조작은 소용이 없었다. 1931년 9월 22일, 미국무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전신을 보냈다. ‘일본군이 상당한 사전준비 끝에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 전세계는 선양사건이 결국에는 진주만으로 이어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정부는 무력으로 탄생한 국가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일본정부에게 중국에서 철수하라는 공식적인 선포였다. 

시간을 앞으로 돌려 1919년 1월, 강대국이 파리강화회담장에 모여 1차대전 수습을 협의했을 때에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나란히 앉았지만 주역이 될 수 없었다. 
일본은 회담장에 2가지 목표를 가지고 참석했다. 먼저,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인종평등 문구를 넣고 싶었다. 미국은 반일본인법을 계속 강화시켰고 191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California Alien Land Law으로 이민농부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싱가폴, 홍콩, 상하이 등의 해외식민지에서도 일본인사업가를 노골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이 너무 심해서, 1868년 쇼군막부 폐지 후에 일본군현대화를 주도했던 야마가타 아리모토Aritomo Yamagata공작은 백인종의 황인종 차별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서방강대국은 베르사이유조약에 인종차별금지 조항을 넣지 않았고 이후 일본은 초강경 국가주의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독일제국의 아시아자산을 영구적으로 이전해달라고 요구했었는데 이것도 신통치 않았다. 중국 동부의 자오저우만 조차지Kiautschou Bay를 얻어냈다가 다시 중국에 반환해야 했다. 독일의 남태평양 식민지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나누어 차지했다. 

1921년 11월의 워싱턴해군군축조약Washington Naval Conference은 일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 당시 대량살상무기였던 전함건조를 제한하는 다자간 군축조약이었는데, 미국과 영국은 525,000톤이 인정된 반면에 일본은 315,000톤을 인정받았다. 일본 국수주의자들은 서방국가가 불공정한 처사를 벌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명한 국수주의 지식인 미츠카와 가메타로Kametaro Mitsukawa는 서방강대국이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아시아를 완전히 굴복시킬 작정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주류 정치인들은 국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국가연맹과 워싱턴군축조약 등의 종전합의를 지지했다. 메이지헌법Meiji Constitution이 1930년 초에 완전히 변경되는 일이 벌어졌다. 1868년에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시키고 헌법과 일왕제를 결합한 불완전한 헌법이었지만 일본 민주주의의 근간이었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영향이 컸다. 군파벌과 언론은 국민의 불만을 이용해 국수주의와 반자본주의를 추진했다. 더구나 젊은 일왕 히로히토는 메이지헌법이 보장한 특권으로 군파벌을 통제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Osachi Hamaguchi수상이 도쿄역에 들어섰다가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8개월 후에 죽었는데 암살범은 극우국수주의 애국사Aikokusha(‘Society of Patriots’)당원이었다. 애국사는 1920년대에 결성된 극우조직 중 하나였다. 
경제침체로 깊게 빠져들자 1930년의 런던해군감축조약London Naval Treaty과 서방에 대한 반발이 더해져, 일본국민은 암살사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8개월 후인 1932년 2월 9일, 전재무대신이 혈맹당Ketsumeidan(‘League of Blood’) 학생당원의 총격을 받았고 단 다쿠마Takuma Dan후작도 중역으로 재직 중이던 미츠이은행 밖에서 살해당했다. 미국 공대를 졸업해 서방에 우호적이었고 국가연맹의장 리튼Lytton공작의 선양사건조사를 지원했었다. 
1932년 5월 15일, 이번에는 해군하급장교로 구성된 반자본주의집단이 이누카이Inukai수상을 집에서 살해했다. 전설적인 코미디배우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도 살해대상이었지만 이누카이의 아들과 함께 스모경기를 보러 외출 중이어서 목숨을 건졌다. 일본 극우주의의 테러는 국민의 환영을 받았고 테러범은 가벼운 수감형만 받았다. 

 


암살의 여파는 굉장히 컸다. 일왕은 다수당인 정우회Seiyūkai에서 후임수상을 선택하지 않고 강경 군파벌인 마코토 사이토자작Saitō Makoto을 새수상으로 선임했다. 이후 정당은 유명무실해졌고 1940년에 고노에 후미마로Fumimaro Konoe수상(히틀러 코스프레 인물)의 지휘에 따라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대정익찬회Imperial Rule Assistance Association로 흡수되었다. 독일 나치당을 따라 1당독재국가가 되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국제주의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해, 1936년 2월 26일, 19명의 젊은 장교가 일왕을 보호하고 국가정신을 보호하겠다며 쿠데타를 시도했다. 선원과 병사에 대한 칙어Imperial Rescript for Seamen and Soldiers를 주장했다. 모든 병사는 신성한 국가의 수호자 임무를 기억하고 일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는 1882년의 행동강령이다.  2,700자의 문서로 무사도의 사무라이가치를 현대식 훈련과 병기사용에 결합시킨 세뇌작업용이었다. 

많은 일본군장성은 반신반인의 신화숭배에 빠져 젊은 장교의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그렇지만 일왕은 기대와 다르게 반응했다. 1932년과 달리, 쿠데타 장교는 정부자체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일왕은 유죄처분하고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도 종전 후에는 일왕이 무기력한 입헌군주였다는 오해가 깊게 자리 잡았다. 

일왕은 쿠데타시도 후에 군파벌을 통제하지 않고 정치권으로 세력을 넓히도록 방치했다. 1936년 5월, 현역 장군과 제독만 전쟁대신에 취임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고 육군과 해군은 모든 정부구성에 대해 거부권을 가지게 되었다. 아주 작은 법개정만으로 일본은 군사독재국가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채 1년도 안되어서 일본은 중국과 다시 전쟁에 돌입했고 중국전역을 점령하려고 했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려고 벌인 선양사건은 1933년 탕구휴전Tanggu Truce으로 끝났고 일본은 만주와 만리장성 남쪽 160km 제한구역을 받아냈다. 
일본만주군은 중국영토를 조금씩 침입했고 1937년이 되자 북경은 거의 포위된 상태였다. 

 


1937년 7월 7일, 북경 남부 루거우차오Marco Polo Bridge(사진 참조)에서 갑작스런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양국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타이위안Taiyuan, 상하이, 난징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난징에서는 300,000명 이상의 중국인이 학살당했다. 중일전쟁은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중국인 2,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국제동맹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936년 11월에 나치독일과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을 맺고 스탈린의 소련을 상대하려고 했다. 이탈리아도 1년 후에 추축국에 합류했다.

 


1936 이후, 만주 광동군이 개발한 명령(계획)경제모델이 일본에서도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일본산업은행Industrial Bank of Japan을 통해 전쟁물자 산업체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계획경제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1938년 국가총동원령National Mobilization Law으로 국내소비를 줄였다. 
식품보다 무기에 더 집중했는데, 독일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경제모델이었다. 육군과 해군을 장악한 일본의 극우파는 동아시아에서 서방의 영향을 줄이겠다며 자급자족의 대동아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을 추진했다. 다윈의 적자생존을 따랐다. 철학자 카노고기 카즈노부Kazunobu Kanokogi는 ‘일본이 아시아에 제국을 세울 수 없다면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예언했다. 

 


자연스럽게 총력전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소련을 두려워했고 국경에서 전면전을 벌였다가 몽골-만주국경의 할힌골Khalkhin전투(그림 참조)에서 참패를 당했다. 1941년 4월, 소련과 협정을 맺고 북부국경을 중립지역으로 만든 후에,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장개석군을 공격했다. 장개석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의 국수주의 지도자로 충칭Chongqing 서부에 포위된 상태였다. 일본군은 충칭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1940년 9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했다. 

 


1941년이 되자 일본제국은 끊임없는 군사행동으로 한국과 대만을 포함해 534,000km2에서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중국동부까지 점령해 4,144,000km2로 확장했다. 일본군 점령지의 인구는 1억명에서 3억명으로 늘었다. 

 



일본이 아시아를 마구 점령하는 동안에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미국은 19세기에 일본과의 교역을 하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었고, 중국영토에서 격전을 벌였고, 하와이왕국을 점령했고, 필리핀도 합병했다. 그렇지만 1930년대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1차대전 후에 고립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유럽의 부패하고 비민주주의 왕정 때문에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이익을 얻은 전쟁모리배War profiteering도 비난했다. 1934년의 베스트셀러인 죽음의 상인Merchants of Death과 같은 출판물이 큰 영향을 미쳤고 미국인은 국제문제에서 중립을 택했다.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로 국내문제가 최우선이 되었다. 보호주의 스무트-할리관세법Smoot-Hawley Act (1930)으로 수입품 20,000개의 관세를 높였고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을 재확인했다. 전설적인 평론가 월터 립만Walter Lippmann은 1936년에 미국의 정책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Th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is to remain free and untangled라는 칼럼을 쓰며 미국의 관점을 대표했다. 
1932년과 1936년,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FDR)대통령은 고립주의 노선으로 당선되었다. 군통수권자인 루즈벨트는 세계에서 겨우 18번째로 큰 군대를 보유했는데 벨기에, 포르투갈과 스위스보다도 적은 규모였다. 

 


루즈벨트는 재선 직후에 노선변경을 시도했다. 1937년 10월 5일 시카고 연설에서, ‘세계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절대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전쟁의 참혹한 영향과 참전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루즈벨트가 이끄는 대로 대중도 변했다. 일본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미국의 고립주의 결의는 옅어졌다. 난징학살과 성폭행, 인도차이나 침공, 양츠강 USS 파나이Panay침몰이 이어졌다. 

 

일본군부내 강경파가 일부러 미국을 자극시키려고 항공기 13대로 파나이호를 침몰시키고 46명이 사상당했습니다. 


무엇보다 1940년 9월에 독일, 일본과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조약Tripartite Pact이 가장 큰 경종을 울렸다. 일반 미국인도 전체주의 세계에서 더 이상 고립되어서는 안된다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대통령은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비밀지원을 시작했다. 
1941년 무기대여법으로 영국에게 군사지원하고 장개석의 국민당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했다. 

 


무엇보다 루즈벨트행정부의 강경파는 일본에 대한 강력한 제재조치를 반대하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이라는 큰 장애물을 넘었다. 1941년 7월 25일, 루즈벨트는 미국내 일본의 금융자산을 모두 동결해서 일본군부의 자금줄을 조였다. 
일본내각은 제국이 피폐해져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1942년이 되면 필수 일상품 11개 중 8개가 크게 부족해진다고 분석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기름수입량의 80%를 차지하는 캘리포니아 기름을 구입할 수 없었다. 

기름공급이 중단되면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9월 3일, 고노에내각은 미국의 금융동렬과 기름금수 조치에 대항해 대본영Imperial General Headquarters이 만든 제국국가정책 실행계획을 협의했다. 
서방강대국이 조치를 완화하지 않는다면, 필요한 경우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기로 결의했다.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유전과 미국령의 필리핀을 최대한 빨리 점령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가능하다면 영국육군과 해군전력이 막강한 싱가폴도 점령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말라야와 미얀마도 점령하기로 했다. 
일본해군 주력함대는 필리핀구원에 나선 미함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미육해군연합위원회는 1920년에 주황색 전쟁계획을 수립했었는데, 일본해군은 태평양 서쪽 진입항로인 마샬군도Marshall Islands에서 미해군을 궤멸시키기로 했다. 1905년 대한해협에서 러시아해군을 전멸시킨 도고Togo의 전설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연합함대Combined Fleet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Isoroku Yamamoto제독은 미국을 상대로 완전히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와이의 미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하려고 했다. 
기습으로 미태평양함대를 전멸시켜서 미해군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키고 싶었다. 특히 미래 해전의 기둥인 항공모함이 목표였다. 일본은 그 동안 태평양제도의 방어막을 강화하고 동남아시아 제국의 천연자원 공급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진주만에서 태평양함대가 궤멸되면 미정부가 휴전을 제안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 계획은 연합함대의 주축인 항모 6척을 적의 공격권 안으로 보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전략이었다. 더구나 항모는 영국이 타란토Taranto해전(그림 참조)에서 이탈리아해군을 공격한 것이 유일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야마모토는 일본의 최신형 뇌격기와 어뢰에 자신이 있었다. 비밀리에 설계하고 개선시켜 속도, 거리와 정확도면에서 세계최고였다. 군부의 반대가 빗발치자 야마모토는 차라리 사임하겠다며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미국과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자, 일본은 1940년 11월 27일에 전외무대신 노무라 키치사부로Kichisaburō Nomura제독을 워싱턴으로 파견해 영구적인 평화를 협상했다. 미국은 스팀슨독트린에 따라 개방교역, 아시아국가의 평화적인 정권교체, 다른 국가의 문제 불간섭을 요구했다. 더 나아가 나치독일과의 동맹취소를 강하게 요구했다. 
1941년 7월, 일본이 프랑스 비시Vichy정부와 공동방위와 군사협력에 대한 조약Protocol Concerning Joint Defence and Joint Military Cooperation에 서명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넘겨받으면서 더 이상의 협상이 불가능해졌다. 

일본은 루즈벨트가 의회를 설득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킬 시간을 벌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름재고가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내각은 미국에게 자산동력을 풀어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어서 협상전망이 어두웠다. 
일왕 측근은 1941년 10월 17일에 호전적인 도조 히데키Hideki Tojo를 수상으로 임명해서 전쟁밖에 대안이 남지 않았다. 도조는 극우파로 1934년 수필에서 반드시 세계에 일본의 정신을 전파하고 일본제국의 문화와 이데올로기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일왕은 11월 5일 내각회의에서 야마모토의 기습공격을 승인했고 이튿날, 노무라대사는 워싱턴에 마지막 제안을 했다. 일본군을 중국에서 일부만 철수시키겠다는 제안 A였다. 
미국은 암호해독으로 다른 제안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일본의 제안 B는 미국이 자산동결을 풀고 장개석군 지원을 중단하면 인도차이나 남부에서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루즈벨트는 11월 26일 암호해독으로 일본이 11월 29일 이후에 공격을 감행한다는 정보를 알았고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군대이동을 분석해 동남아시아 어디인가가 목표이지만 야마모토의 연합함대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연합함대는 일본 북부 끝의 쿠릴열도Kuril Islands에서 무선교신을 하지 않고 대기 중이었다. 

 


그동안 코델 헐 국무장관은 협상진전이 없자, 노무라대사에게 중국과 인도차이나전면철수 등의 10가지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일왕은 미국의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며, 1941년 12월 1일에 도조에게 진주만, 필리핀과 말라야 동시공격을 허락했다. 
이렇게해서 1931년 선양사건과 함께 시작한 중국침공은 영국제국뿐만 아니라 세계최강국 미국과도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