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진주만기습에 대해 잘 몰랐던 사실 12가지

댓글 0

현대/2차대전

2022. 1. 1.

진주만기습 그리고 12가지 사실
일본의 진주만 미태평양함대 기습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그 공격이 2차대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을까? 에반 모즐리Evan Mawdsley교수가 잘 알려지지 않은 12개의 진실을 설명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선전포고없이 진주만의 태평양함대를 기습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은 치욕의 날이라고 선언했다. 일요일 아침, 수백대의 일본항공기가 전함 21척을 침몰시키거나 파괴했고 항공기 150기를 파괴했고 2,000명 이상의 미국인을 죽였다. 

그런데 여러분은 공격과 그 결과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2차대전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그리고 진주만기습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을까?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55분, 갑자기 일본전폭기가 하와이 오아후Oahu섬의 진주만 상공을 가득 메웠고 폭탄과 총탄을 정박한 선박에 퍼부었다. 
8시 10분, 820kg 폭탄 1개가 USS 애리조나Arizona전함의 갑판을 뚫고 들어가 탄약창을 터트렸다. 전함은 폭발과 함께 침몰했고 안에 갇혔던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어뢰가 USS 오클라호마Oklahoma전함의 장갑에 명중했고 400명이 타고 있던 오클라호마는 옆으로 쓰러져 침몰했다. 

 

1916년에 시험운항 중인 애리조나입니다. 개보수를 거쳤지만 그래도 2차대전 당시에는 구형전함이었습니다. 

 


겨우 2시간 만에, 일본군은 20척의 미국선박을 침몰시키거나 파괴했고 항공기는 300기를 파괴했다. 2,5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고 1,000명 정도가 부상당했다. 

분노한 루즈벨트대통령은 의회에 대일본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뉴스로 공격소식을 들은 의회와 미국국민은 대통령의 분노를 공감했고 국가수호를 다짐했다. 젊은이가 모병소에 몰려들었고 의회는 곧바로 참전에 동의했다. 반대표는 단 1명이었다. 3일 후, 일본동맹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의회도 선전포고로 대응했다. 

온갖 토론과 협상을 거치며 2년 동안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 태평양전쟁은 진주만과 상관없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진주만기습 몇시간 전에 당시 영국령이던 말라야북부에 상륙했고 더 많은 병력이 중립인 태국 앞바다에 상륙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하와이작전이라고 부르는 기습공격은 지원공격이었고 남부작전Southern Operation이 주공으로 말라야, 필리핀과 네덜란드 동인도를 노렸다. 일본은 이미 1년 반 동안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다. 

 


2 일본은 헐 노트Hull Note 때문에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 아니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은 일본에게 문서를 전달했는데, 흔한 오해와 달리 최후통첩은 아니었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요구였다.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전면철수해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문서였다.

 

 
헐 노트가 전달될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남부와 하와이작전을 실행 중이었다. 일본연합함대는 11월 17일에 이미 쿠릴열도의 전방기지로 출발했고 26일에는 진주만으로 향했다. 

3 진주만기습은 극도로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었다. 
2차대전 작전 중 계획과 준비가 가장 잘 된 작전이었다. 항모 6척, 전함 2척과 순양함 3척이 북태평양을 약 6,000km 항해하면서 발각되지 않았다. 악천후가 닥치면 해상에서 호위구축함에게 재보급할 수 없었다. 하와이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피해를 입은 선박은 그대로 버리고 와야 했다. 그래서 미군지휘관은 하와이기습을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4 일본해군 고위장교는 대대적인 진주만기습에 반대했다.
연합함대 최고사령관 야마모토제독이 진주만기습을 제안했는데, 야마모토의 상관인 군령부Naval General Staff총장 나가노Nagano가 강하게 반대했다. 나가노는 공군전력을 크게 믿지 않았고 원거리작전에 연합함대 주력을 투입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특히 그는 일본군이 이미 원거리의 말라야와 필리핀을 공격하기로 계획했는데 동시에 하와이까지 항모전력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주력항모 6척을 모두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1936년 당시 군령부 지휘부입니다. 가장 위 오른쪽이 나가노 오사미입니다. 

5 일본잠수함에게 큰 기대를 했었다.  
일본군 순양잠수함 26척 정도가 하와이 부근에 집결했고, 공습에서 살아남은 미국선박을 요격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실제로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고 1월에 하와이 부근에서 항모 1척이 피해를 입는 정도에 그쳤다. 모함에서 발진한 2인승 소형잠수정 5척이 12월 7일에 항구로 잠입하려다가 실패했다. 공습 1시간 15분 전에 미구축함이 소형잠수정 1척을 격침시켰고 일본은 잠수함작전 때문에 진주만기습을 실패할 뻔 했다. 

 


6 워싱턴이나 런던 모두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역설적으로 미국과 영국정보부가 진주만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군의 준비에 대한 외교통신을 도청해서 많은 정보를 입수했지만 하와이나 필리핀이 아니라 태국, 말라야, 네덜란드 동인도와 관련된 것으로 분석했다. 
11월 24일, 태평양의 미지휘관은 전쟁경고를 받았다. 루즈벨트대통령도 영국에게 일본과 전쟁을 하면 미국이 지원하겠다며 비공식으로 약속했다. 루즈벨트와 처칠이 사전에 진주만기습에 대해 알았는지는 불분명하다. 

7 미국의 공격작전계획 때문에 일본군의 진주만접근을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다. 
태평양에 장거리정찰기를 많이 배치했지만 하와이 방어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미육군은 B-17 플라잉 포트리스Flying Fortress중폭격기를 필리핀으로 보냈고 해군이 보유한 PBY 카탈리나Catalina 비행정 80기도 필리핀이나 일본군이 점령한 마샬군도에 배치했다. 

 

비행거리 4,000km로 대활약을 했던 카탈리나입니다. 

8 진주만기습으로 미함대가 궤멸된 것은 아니다. 
진주만에 줄 지어 정박한 전함 중에서 구형전함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만 완파되었다. 전사한 수병 2,026명 중에서 1,606명이 두 전함에 탑승했다가 죽었고 육군은 겨우 218명만 전사했다. 캘리포니아, 웨스트 버지니아와 네바다는 항구의 얕은 바닥에 그대로 가라 앉았다가 모두 건져냈다. 그 중 웨스트 버지니아와 네바다는 전면개보수 때문에 1944년까지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펜실바니아Pennsylvania, 메릴랜드Maryland와 테네시Tennessee는 건조독이나 계류장에 정박해 있다가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 피해를 입은 전함 6척 모두 2차대전 후반의 항모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구형이었다. 태평양함대의 항모 3척은 먼 바다에 나가 있었고 중순양함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해군은 대서양에 신형항모 3척, 신형전함 2척과 구형전함 6척을 더 가지고 있었다. 

9 3차공습을 막은 나구모제독의 결정이 옳았다. 
일본은 30분 간격으로 1차와 2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기동대사령관 나구모는 복귀한 항공기를 재보급해 불타는 미국전투함과 기름저장소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구모는 신속하게 빠져나가라는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 언제나 공격은 무척 위험한 작전이었고 일본해군항공기의 숫자가 적어서 미군이 기동대를 추격하면 손실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나구모는 미항모 3척의 위치를 알지 못했고 1차 공격에서 얼마나 많은 미항공기가 살아남았는 지를 알 수 없었다. 

10 진주만의 미지휘관은 희생양이 아니었다.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킴멜Kimmel제독과 미육군사령관 쇼트Short는 공격 며칠 후에 경질되었다. 몇 개월 후, 미정부조사에서 두 장성의 근무태만과 오판이 발견되었다. 두 사람 모두 해임되었다. 
많은 작가가 킴멜과 쇼트를 옹호했지만, 두 사람은 11월 24일에 전쟁경고를 통지받았는데도 휘하 병력을 제대로 준비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워싱턴의 상관들은 오판에 대해 공개적인 비난을 받지 않았고, 하와이 해상방어를 책임진 블로치Bloch제독은 징계를 피했다. 미육군과 해군의 허술한 공조는 킴멜과 쇼트가 책임질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11 히틀러는 진주만기습 때문에 미국에 선전포고한 것이 아니다. 
루즈벨트대통령은 일본군이 독일의 제안을 따랐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실제로 히틀러와 독일군부는 진주만기습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일본군이 남동아시아에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곧바로 영국 그 후에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1940년 9월 3국동맹에 따라 일본, 이탈리아와 독일은,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국이 공격하면 참전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전쟁발발 직전에 독일은 비밀리에 어떠한 경우에도 일본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루즈벨트대통령은 일본외교통신을 해독해 이 내용을 알고 있었고 12월 8일 의회에 일본만을 상대로 선전포고할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고립주의 추세 때문에, 루즈벨트대통령은 독일이 먼저 선전포고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히틀러는 12월 11일에 국가의회의사당Reichstag에서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루즈벨트는 다시 의회에 요청해서 독일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12 일본에게는 진주만기습이 절반의 성공이었다.
진주만기습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의 이전 군사전략은 싱가폴과 하와이에 강력한 전력을 집중시키고 양면전선으로 일본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진주만기습으로 미국쪽 장애물을 제거해 말라야, 필리핀과 네덜란드 동인도를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었다. 
반면, 야마모토제독은 미항모전력을 전멸시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선전포고없이 일요일에 기습해 수천 명을 죽였기 때문에 미국국민의 분노를 샀고 오히려 총력전 의지를 굳히게 되었다.  

 



에반 모즐리는 글래스고대학 사학과 교수로 December 1941: Twelve Days that Began a World War (Yale University Press, 2011)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