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 9장면

댓글 0

현대/기타

2022. 1. 29.

우크라이나 침공이 가시화되면서 커뮤니티마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군요. 

대부분이 단편적인 기사 하나 하나에 반응을 하며 카더라를 섞는 억측입니다. 

우크라이나? 그게 뭔데?라는 근시안보다는 그래도 카더라의 억측이 낫지만요.

 

이 기회에 러시아가 왜 그러는 지,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왜 그렇게 되었는 지를 공부하는 것도 좋겠죠. 

BBC의 자료인데 이 정도만 제대로 읽어도 엉터리 카더라는 쉽게 걸러낼 수 있을겁니다. 

 

세르히 예켈치크Serhy Yekelchyk는 빅토리아대학 독일과 슬라브역사 전문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관계를 오랜 동안 연구했고 2020년에 Ukraine: What Everyone Needs to Know를 출간했다. 

 

 

 

우크라이나의 위치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EU/Nato 회원국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사이의 동유럽에 있다. 북쪽에 벨라루스Belarus, 남쪽에 몰도바Moldova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결정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접경국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인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분리되었다. 그렇지만 소련의 일부였기 때문에 러시아와 사회, 문화와 경제배경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어는?
우크라이나어가 유일한 국가공인어다. 그렇지만 서쪽지역만 우크라이나어가 대세이고, 최근까지 대부분의 도시와 산업지역은 러시아어가 공용어다. 2000년대에 새 세대가 학교에서 우크라이나어를 배우면서 바뀌고 있다. 러시아침공과 우크라이나어 입법으로 우크라이나어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정복할까?
대부분의 국가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불법점유라고 생각한다. 2차대전 이후 유럽국가가 다른 국가의 영토를 합병한 첫 번째 사례다. 러시아정부가 부인하고 있지만 러시아 지원병과 정규군이 러시아 국경의 돈바스지역의 친러시아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s을 지원하고 있다. 

 

나토는?
1949년 4월 4일 워싱턴조약에 따라, 12개 회원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sation(Nato)를 결성했다. 영국, 캐나다, 미국 등이 참여했고 정치와 군사수단으로 회원국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한다는 목적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동맹인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우크라이나는 NATO 이외의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였고 2008년의 미-우크라이나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대한 선언서US-Ukraine Charter on Strategic Partnership로 명문화시켰고 2021년에 다시 발효되었다. 

재발효된 조항에 따르면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에 대응할 수 있도록 미국이 최선을 다한다고 약속했지만, 우크라이나군 재정비, 데이터 공유 등과 같은 조치에 국한되어 있다. 전쟁발발 시에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방어할 의무나 약속은 없다.

우크라이나에 미군과 영국군이 주둔 중인가? 
미, 캐나다, 영과 다른 유럽국가의 군사교관 수백 명이, 내전지역과 정반대에 있는 폴란드국경 부근의 야보리프Yavoriv 훈련장에서 우크라이나군에게 방어전술과 지뢰제거 기법을 가르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이나 영국군이 참전할 것인가? 
어느 국가도 러시아가 서방에 적대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냉전Cold War 당시에도, 양진영은 서로를 직접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했고, 베트남전쟁처럼 언제나 대리전을 펼쳤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고 전력이 강한 편이어서 서방국가가 파병할 필요가 없다. 훈련장으로 야보리프를 선택한 것도 폴란드국경에서 겨우 20km 거리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모든 훈련교관이 폴란드로 이동했다가 전선이 안정화되면 다시 복귀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NATO에 가입할 것인가?
NATO 가입 자체가 우크라이나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정규군도 NATO기준에 맞춰 단계별로 정비 중이다. 그렇지만 2008년, NATO 회원국이 우크라이나 가입승인안 상정을 검토했을 때에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자극시킬 수 있다며 거부했다. 
푸틴의 행동에 따라 변경될 여지가 많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위기: 현재로 이어진 역사의 9장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긴장이 고조되고,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어서 언제라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우크라이나는 위기에 몰렸고, 러시아는 이웃국가를 위협하고 있을까?
현재의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한뿌리에서 시작된 두 국가의 역사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우크라이나 역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전문가인 세르히 예켈치크교수가 결정적인 9가지 순간을 설명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8년 동안 분쟁을 일으켰다. 2014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정치혼란을 이용해 남부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합병했다. 이후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의 후원을 입은 반란군이 돈바스Donbas 공업지대에서 내전을 계속 벌였고 지금까지 약 14,000명이 죽고 150만 명이 피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세계는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된 약 10만 명의 러시아군에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는 침공계획을 부인하지만 서방진영에 나토NATO의 동진확장을 중단하겠다는 공식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푸틴대통령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다른 구소련국가들의 NATO가입을 막고 있다. 

러시아의 외무차관 세르게이 랴브코프Sergei Ryabkov는 현재의 상황을 1962년 쿠바미사일위기와 비교한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다가 미국과 벌인 13일의 대결로 역사가 마크 와이트Mark White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충돌로 꼽았다. 

이제 세르히 예켈치크가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위기로 이어진 9가지 결정적인 순간을 설명한다. 

1. 9세기: 키예프 루스Kievan Rus
9세기 말경에 스스로 루스라고 부르는 노르드인Norsemen 집단이 지금의 북서 러시아인 동 슬라브 지역에 정착했고 드네프르Dnieper강을 따라 이동하다가 키에프(현재의 우크라이나 수도)를 만들었다. 역사가는 이 거대한 중세 도시국가를 키에프 루스라고 부른다. 

 


노르드인은 슬라브 원주민에 바로 흡수되었고 루스 또는 루신인Rusyns로 불렀다. 루스 도시국가가 바로 현재의 중앙 우크라이나다. 12세기, 훨씬 북동부 국경에 모스크바가 생겼다. 988년, 볼로디메르Volodimer대공(우크라이나는 볼로디미르Volodymyr, 러시아는 블라디미르Vladimir)이 비잔티움Byzantium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루스는 대부분 고대교회 슬라브어Old Church Slavonic를 읽거나 말하지 못했고 동슬라브East Slavic 방언을 사용했는데 여기에서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가 파생되었다. 

13세기 중반, 몽골제국이 루스 공국연합을 간단하게 정복했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중세 루스의 역사를 이어받았다. 

2. 1654년: 페레야슬라프조약Treaty of Pereiaslav (또는 페레야슬라프협약Pereyaslav Agreement)
몽골제국이 14세기 말에 몰락하자, 모스크바대공국과 리투아니아Lithuania대공국(나중에 폴란드와 연합)이 이전의 루스영토를 분할했다. 폴란드의 남쪽 국경에 우크라이나 코사크Cossack라는 새 정착민이 생겨났고 크림 타타르Crimean Tatar의 약탈을 막아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는 대부분 억압을 피해 달아난 농노출신인 자유민으로 폴란드 남쪽 스텝지역에서 투르크와 타타르를 상대했다. 

 

 

'영원히 모스크바와 함께, 영원히 러시아인과 함께'의 조약 300주년 기념화입니다. 


우크라이나라는 말이 있었는데도 지역민은 자신을 루신인, 러시아인은 모스크바인Muscovites이라고 불렀다. 17세기 초가 되자, 우크라이나의 동방정교Orthodox Christian인은 폴란드의 가톨릭종교정책과 농노제확산에 반대했다. 농노제는 농부가 토지에 묶여 함께 팔리는 노예제도였다. 
1648년, 코사크수장Hetman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1595~1657)가 폴란드정권에 대대적인 저항을 일으켰고 코사크 수장국Hetmanate(군사국가)이 탄생했다. 코사크사회는 겉으로는 폴란드왕의 통치를 받지만 실제로는 독립에 가까운 자치권을 행사했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복제화를 거실에 걸고 싶었는데 아내의 필사적인 저항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풍경화를 걸었습니다. 

1676년, 우크라이나 코사크가 투르크군을 격파했는데도 술탄이 항복요구를 해오자 비웃는 답장을 쓰는 장면입니다. 

코사크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에 대항할 동맹을 찾다가 1654년 페레야슬라프조약을 맺고 동방정교 러시아 차르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보호의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이후 러시아는 코사크영토를 흡수했고 1709년 이반 마제파Ivan Mazepa수장(1639–1709)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러시아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마제파는 러시아를 침공한 스웨덴왕 카를 12세에게 운명을 걸었지만 폴타바전투에서 결정적인 패전을 겪었고, 카를과 함께 투르크로 넘어갔다가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이미 아주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3. 1876년: 엠스법Ems Act
1764년, 예카테리나여제Catherine II(1729–96)는 아예 코사크수장국과 우크라이나 자치권을 몰수하고 러시아군이 드네프르강의 코사크거점을 파괴했다. 코사크장교는 서류만 제출하면 러시아귀족과 동등한 특권을 보장했지만 우크라이나 농부는 농노신세로 전락했다. 
18세기 말, 예카테리나는 폴란드를 분할점령하면서 1654년부터 폴란드가 점유하던 우크라이나지역도 합병했다. 

 

 

예카테리나여제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싶은데 벌써 몇년째 미루고 있군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워낙 복잡하게 얽혀서 지역과 인물에 대해 시간을 많이 들여야합니다. 예카테리나 자신도 러시아가 아니라 프로이센 슈테틴출신입니다.

 

코사크수장국이 해체되자 범유럽 낭만주의pan-European Romanticism을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우크라이나역사와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40년대, 우크라이나의 국가음유시인 타라스 쉐브첸코Taras Shevchenko(1814–61)가 우크라이나어로 첫 번째 시를 출판했고 농노제 폐지와 자유 슬라브연합을 원하는 비밀정치사회를 공동설립했다. 

폴란드에서 오스트리아제국으로 넘어간 서쪽 루스 영토에서도 우크라이나 국가각성national revival이 일어나고 있었다. 1863년, 러시아정권은 우크라이나어로 작성된 교육자료 출판을 금지시켰다. 1876년,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1818–81)차르는 온천휴양지인 독일 바트엠스Bad Ems에서 휴가를 즐기면서 엠스법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어로 된 모든 출판물을 금서로 정한다는 법이었다. 
러시아제국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문화를 강요했다. 우크라이나를 더 거대한 러시아의 작은 러시아부족민이라고 생각하는 충성스러운 우크라이나인에게 보상하고, 저항할 경우에는 일자리를 빼앗고 체포하고 추방하며 보복했다. 
우크라이나 애국자들은 우크라이나인 정체성을 부각시켜 러시아인과 확실하게 구분하기 시작했다. 


4. 1918년: 우크라이나 독립
1917년, 러시아군주제가 붕괴하고 내전과 정치혼란이 이어지자, 우크라이나 애국자들이 중앙의회Central Rada를 결성했다가 혁명의회로 강화시켰다. 
러시아임시정부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Ukrainian People’s Republic(UNR)의 자치권을 인정했다가 볼세비키Bolsheviks가 취소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소련에 합병시키려고 했다. 

1918년 1월, UNR은 완전독립을 선포하고 브레스트Brest에서 동맹국Central Powers(독일,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오스만)과 평화조약을 맺었고 볼세비키도 그 뒤를 따랐다. 
독일정부는 이전의 수장체제를 따라 우크라이나 군주제를 세웠지만 1차대전 후에 UNR이 완전독립하며 동서우크라이나가 통일했다. 

러시아 적군과 백군의 내전(1917­–22)이 일어났고 UNR은 거대한 충돌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1922년, 볼세비키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공화국Soviet Ukrainian Republic를 세우고 벨라루스, 남북캅카스Transcaucasia(현재의 조지아Georgia, 아르메니아Armenia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와 함께 소련의 설립구성국가로 편입시켰다. 

 



그렇지만 1930년대 초, 스탈린이 다시 우크라이나 정체성 파괴에 착수했다. 집단농장 강제이주정책으로 1932~33년에만 약 4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농부가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는 이 비극을 홀로도모르Holodomor(기아살해)라고 부르고 있고 전세계가 인종학살로 간주하는 반면에 러시아는 부인하고 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문화도 파괴하며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동생이라고 부르던 제정러시아의 개념을 주입시켰다. 

 



5. 1945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확장
스탈린은 동-중앙유럽을 분할하기로 히틀러와 합의한 후에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고, 폴란드가 1919년에 볼세비키에게 승리를 거둬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우크라이나영토를 우크라이나 USSR에 합병했다. 레닌은 그 당시에 유럽전체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고 했다가 폴란드의 분전에 가로 막혔다. 
1945년,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서, 처칠과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이 지역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합의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를 압박해 루스영토를 받아냈다. 

정열적인 당 총서기 니키타 흐루시체프Nikita Khrushchev (1894–1971)의 결정에 따라 우크라이나 SSR은 거의 모든 영토를 우크라이나에 합병하게 되었다. 흐루시체프는 우크라이나 애국자들이 그렇게 바라던 우크라이나 통일을 이뤘지만 우크라이나의 자치권보다는 러시아 흡수정책을 그대로 이어갔다.
폴란드영토였던 지역의 우크라이나 국수주의자들은 1950년대까지 소련통치에 강력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흐루시체프가 쿠바미사일 위기에서 발을 빼고, 서방과 공존을 주장하면서 소련과 중공이 갈라서는 계기가 됩니다. 

6. 1954년: 크림반도 양도
우크라이나 남쪽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와 이어진 영토였을 뿐이고 절대적인 전략적 가치 때문에 1921년에 러시아에 합병된 자치공화국이었다.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이 다수가 아니었고, 러시아는 크림 타타르의 문화를 그대로 인정했다. 
크림 타타르는 13세기부터 반도에 살고 있었고 러시아제국이 1783년에 크림칸국Crimean Khanate을 무너트릴 때까지 통치했다. 러시아는 서쪽 위성국과 새로 독립한 아시아위성국에게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1944년, 적군Red Army이 독일군에게서 크림반도를 탈환하자, 스탈린은 타타르인을 강제로 이전시키는 인종청소를 벌였다. 순식간에 러시아인이 다수가 되었다. 2차대전으로 반도의 경제와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흐루시체프는 페레야슬라프조약 300주년을 기념하고 우크라이나인으로 부흥시키기 위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SSR에 양도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우크라이나 관료들을 만족시키고 새로 합병한 서쪽지역의 국수주의를 누르고 러시아 문화를 주입시키고 싶었다. 


7. 1991년: 소련붕괴
미하일 고르바체프Mikhail Gorbachev(1931–)가 사상통제를 완화하자 소련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운동이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민주주의활동가는 연합해 발언의 자유와 자유선거 등의 새 시대를 열었다.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대통령(1931–2007) 행정부는 소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독립국가 러시아에 집중했다. 옐친은 소련의 유산을 거부하며 우크라이나 레오니드 크라브추크Leonid Kravchuk대통령(1934–)와 행동을 같이 했다.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로 소련탈퇴를 결정했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정식분리 절차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에 경제개혁이 실패하면서 옐친과 다른 러시아 지도자는 우크라이나 문화정책을 비판하고 크림반도 양도를 문제 삼으며 국내 불만세력의 소련향수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1997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조약을 체결하고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Budapest Memorandum에서 러시아와 서방국가가 보장했던 우크라이나 국경을 재확인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대신에 소련이 설치한 핵미사일 기지를 해체하기로 약속했는데, 이 조약은 2019년 3월 31일에 만료되었다. 

 

 

핵미사일 기지관광이 1인당 230달러, 10시간 정도 걸린다는군요.


8.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내전
우크라이나 국민혁명으로 친러시아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대통령을 축출하고 친서방 민주진영이 집권하자, 러시아는 혼란을 틈타서 크림반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러시아인이 다수인데다가 우크라이나어를 배울 필요없이 더 높은 급여와 직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합병을 반길 것으로 예측했다. 
그렇지만 조작된 국민투표로도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북한, 시리아, 베네주엘라와 같은 친러시아 국가를 제외한 전세계가 합병을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오렌지혁명과 존엄성Dignity혁명으로 친러시아 대통령을 축출했습니다. 

서방의 경제제재가 잇따르자 크림반도의 러시아기관은 우크라이나와 크림 타타르 지역민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도 크림반도를 확실하게 손에 넣자, 친러시아 세력이 우세한 우크라이나 남동부지역의 내전을 조장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인 계열의 낙후된 공업도시 돈바스에서만 내전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군이 내전을 진압하려고 하자, 푸틴행정부는 정규군을 비공식적으로 파병해 친러시아 분리주의자와 러시아 지원병을 보호했다. 

 


2015년 가을까지 내전이 벌어졌고 2017년과 2020년 초에 다시 격전이 벌어져서 14,000명이 죽고 150만 명이 피난했다. 


9. 2021년: 러시아군 집결과 최후통첩
돈바스 내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매일 총격전과 희생자가 보고되고 있다. 2015년, 노르망디형식 회담Normandy Format에서 독일, 프랑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모여 군사행동을 피할 방법을 찾았다. 
2015년 벨라루스 수도인 민스크에서 민스크협정Minsk Protocol에 동의하며 평화해결의 길을 열었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에서 중단된 상태다. 
러시아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주둔을 인정하고 철수한다는 조치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이 진입한 상태에서 동서 인민공화국의 지방선거를 치른다는 조치에 반대하고 있다. 

 


2021년 말, 서방과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은 러시아군이 국경부근에 집결하고 있고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정부는 단순한 군사훈련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서방에 NATO의 동쪽확장 금지를 명문화하라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1997년 이후 NATO에 가입한 회원국에 특정 무기배치 금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와 같은 소련해체 이후의 국가와 NATO 군사협력 중단 등을 요구했다. 
그동안 러시아언론은 NATO의 대러시아 공격이나 돈바스지역의 우크라이나군 공세 등의 공포스러운 보도를 마구 쏟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