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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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전쟁 (5부) - 경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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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2022. 4. 1.

산병Skirmisher, 엽병Jager, 경보병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습니다. 

 

 

경보병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크게 활약한 병과였다. 영국과 유럽대륙은 미국독립전쟁 경보병에 큰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혁명전쟁에서 산병전술은 경직된 구식보병전술을 압도했다. 
그렇지만 최근 연구자료를 보면 프랑스산병에 대해 상당히 과장되어 있고 정예산병은 혁명의식에 고취된 신병이 아니라 전문경보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790년대 프랑스군은 산병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밀집대형보병을 지원하거나 독립적으로 사용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왼쪽이 프랑스 척탄병, 오른쪽이 경보병(볼티죄흐, 도약병)입니다. 척탄병은 원래는 수류탄을 던지고 착검돌격해서 적진을 무너트리는 특수보병이었는데 나폴레옹전쟁에서는 정예보병 정도의 의미입니다. 

 

프랑스군 대대에는 경보병 1개 중대가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경보병을 육성하려고 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1813년이 되자, 오스트리아군은 훈련과 의지부족을 이유로 경보병을 포기했다. 1813년 9월, 라데츠키Radetzky는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 모두 산병전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군은 1806년 참패를 당한 후에 그 원인을 집중분석했고 프랑스군이 전장에서 경보병전술을 압도적으로 잘 사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경보병은  엄격한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며 애국심으로 사기가 높았다. 
1807년~1812년, 프로이센군은 규율과 전술을 개혁하고 보병 중 절반에게 산병훈련을 시켰다. 그렇지만 1813년에는 신병을 급히 모아 부대를 편성했기 때문에 몇주 훈련 후에 전장에 보냈고 개혁효과가 희석되었다. 프랑스군도 신병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영국에서도 1800년 전후에 경보병장교용 지침과 안내서가 출간되었다. 쿠퍼Cooper대위의 경보병 찬가는 대단했다. 
‘경보병은 정말 유용하며 전열병과 맞먹을 정도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은폐한다. 경보병은 군대의 전초병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적을 주시하며 매복하고 야지에서도 기동성이 높아 훨씬 유리하다. 밭과 숲에서는 경보병으로, 전열에서는 정규병으로 사용한다. 전략요충지를 신속하게 점령한다... 
부대가 적의 앞으로 전진하면 경보병이 최전열에 선다. 퇴각할 때에는 후위를 보호하고 보급품을 구할 때에는 경비를 서고 상륙은 가장 먼저하며 가장 마지막에 철수한다.‘

 


일부 영국경보병, 특히 반도전쟁의 경보병사단은 그 가치를 증명했다. 모든 전투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사격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와 바다호스Badajoz를 습격할 때에 다른 어떤 병과보다 과감하게 행동하며 승리를 가져왔다. 
경보병은 개별 병사의 판단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거친 황무지, 숲과 마을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적의 대열을 교란시키고 장교를 저격하고 병사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불안하게 만든다. 
적이 다가오면 재빨리 퇴각했다가 적이 멈추면 다시 몰려들어 끊임없이 괴롭힌다. 적이 대응사격해도 자유롭게 엄폐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적 경보병의 공격을 차단하는데 산병끼리의 총격전이 맹렬하게 벌어진다. 

 


나폴레옹은 산병전투가 가장 치열하고 치명적이라고 했듯이 극도의 훈련,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영국 95와 60보병연대, 왕립독일인군단King’s German Legion의 경보병대대, 독일인엽병Jager연대는 정예산병이면서도 밀집대형 전투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95보병연대 2대대는 워털루전투 내내 밀집대형 전투를 벌였다. 
‘좌익의 언덕에서 프랑스군을 밀어내도록 보병부대를 급히 보냈고 우리 대대도 지원에 나섰다. 95연대는 그 임무를 더 요구할 필요도 없게 깔끔하게 처리했다... 95연대같은 산병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어떤 경보병보다 적은 피해로 임무를 훨씬 완벽하게 수행한다. 용감하고, 협력하고, 기민하고, 지형을 잘 이용하는데 비교대상이 없다. 프랑스군 볼티죄흐보다 훨씬 뛰어났다. 종종 95연대를 지원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왕립독일인군단은 영국으로 망명해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독일인부대입니다. 

모든 산병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았다. 영국군 브룬스위크 오엘연대는 무질서와 탈영으로 악명높아서 각 사단에 1~2개 중대씩 분산시켜야 할 정도였다. 
95연대는 베이커Baker강선총으로 무장했는데 일반 수석(수발, Flintlock)총보다 장전이 느리지만 훨씬 정확했다. 그리고 사격술을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신병은 충분한 사격연습을 하고 특등사수 배지를 달았다. 
산병전은 원거리나 다른 산병처럼 어려운 목표물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사격속도보다는 정확성이 우선이었다. 강선총은 수석총보다 짧아서 누운 상태에서 장전할 수 있었고 전열병은 미리 조합된 탄약집을 사용했지만 산병은 화약과 총탄을 따로 소지했다. 

 

 

전열병의 일반 수석총 사격방법입니다. 

95연대는 강선총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소속감이었다. 개별 병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지형을 활용해 알아서 움직였지만 동료를 생각했다. 프로이센 요르크Yorck장군은 사격술과 팀워크를 강조했다.
‘강선총은 훈련용이 아니었고 엽병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정확한 사격을 했다. 엽병은 항상 2인 1조로 서로를 보호한다는 절대 원칙이 있다. 언제나 한 몸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며 1명이 사격하고 장전할 때에는 다른 1명이 보호한다. 모든 엽병은 이 원칙에 명예와 목숨을 걸고 있다.’

경보병은 자유롭게 판단했지만 장교가 고함이나 호르라기로 전진, 제자리, 사격중지, 후퇴 등의 명령을 내렸다. 다른 병과에서도 그랬듯이, 명령을 고의로 또는 제대로 못들어서 무시했고 산개해 엄폐한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기도 힘들었다. 
규율이 무너진 경우에는 산병전에서 땅에 엎드려 있거나 후방으로 달아날 좋은 기회였다. 영국군은 경보병중대당 중위, 하사, 상사를 1명씩 더 배치해서 그런 상황을 막았다. 
밀집대형에서는 대대가 기본 단위인 반면에, 산병전에서는 중대단위였고 독립적으로 작전했다. 

 


경보병 중 일부만 산병전을 벌이고 나머지는 밀집대형을 유지하며 예비부대나 지원부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프로이센군은 여단(다른 군의 사단)중 2개 대대에서 몇 개 중대만 산병전을 벌이고 2개 중대가 100보 뒤에서 밀집대형으로 대기했고 더 뒤에 대대본대 그리고 그 뒤에 여단본대가 대기했다. 
산병전 병력이 뒤로 물러나 휴식과 보급을 받으면, 뒤에 있던 병력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 프로이센군 보병 중 절반이 산병전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로 산병을 그정도로 많이 편성하지 않았다. 

 


1829년의 영국군장교 기록을 보면
‘10개 중대로 대대를 편성하는데, 1, 2, 7과 8중대는 비스듬히 전진하고 척탄병과 경보병중대가 그 뒤에서 지원병력 역할을 한다. 나머지 4개 중대가 그 뒤에 열을 지어 대기한다. 지원병력이 산병전에 투입되면 3과 6중대가 그 자리를 메운다. 중앙의 2개 중대는 어떤 경우에도 전투를 벌이지 않고, 나머지 8개 중대가 궤멸하면 부대기를 가지고 사단방진 안으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한다. 
지원병력은 산병전 전선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산병전이 길어지면 특정 지점을 두고 양측이 공방을 벌인다. 산병전 병력이 뒤로 물러나 정비하지 않으면 완전히 무너질 수 있고 큰 피해가 없어도 1~2시간 후에 병력을 교체하지 않으면 피로가 누적되고 탄약이 떨어지게 된다. 

산병은 기병에게 매우 취약했다. 야지에 산개된 보병은 기병의 무질서한 돌격조차 막을 수 없다. 지원병력 대열 뒤로 퇴각했다가 함께 예비병력 대열로 퇴각해 방진대열로 방어했다. 
야지에서 지원병력 뒤로 물러날 수 없다면 작은 원형을 만들고 총검을 360도로 내밀고 기병이 그냥 통과해주기만을 빌어야 했다. 후엔테스 데 오뇨로전투에서 영국군 1사단 경보병중대가 프랑스기병의 기습을 받았는데 측면이 무너지면서 단 몇 분 만에 60~80명을 잃고 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는 급히 달려온 영국군기병의 구원을 받았다. 

 


산병은 왜 착검하고 전투를 벌였을까?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산병은 적에게 근접하거나 갑자기 기병이 나타날 경우에만 착검하고, 그 전에는 사격정확성을 위해 착검하지 말라는 원칙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산병전의 지원과 예비병력은 같은 부대에서 차출되거나 각 사단의 대대의 경보병중대와 전문경보병연대의 중대 1~2개를 합쳐서 편성했다. 이런 혼성편제는 작은 전투를 거듭하면서 소속감이 생기는 장점이 있었지만 경보병사단 정도의 전력은 되지 못했다. 

산병전은 2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양측의 본대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을 대에 중간지대에서 경보병끼리 전초전을 벌이거나 경보병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 위해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살라망카에서 오전에 첫 번째 방식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영국군 7사단은 거의 그대로 있었고 몇 명만 사상당했다.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은 700명 이상의 경보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전투에는 200명 미만만 투입했고 나머지는 지원과 예비병력으로 돌렸다. 
매우 치열한 산병전도 있었다. 같은 전투에서 헨넬Hennell중대와 다른 중대가 프랑스군에게 너무 가깝게 접근했다가 장교 3명, 하사관 2명, 병사 76명을 잃었다.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10명 미만의 피해만 입었을 것이다. 

 


비토리아에서는 힐사단의 오캘러한O’Callaghan여단이 수비하나Subijana마을을 손쉽게 점령했고 그 앞의 프랑스군을 괴롭히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든 중대는 각각 전진해서 적과 산병전을 벌이라는 명령이 왔다. 적은 야지에 대기 중이었는데 앞으로 나가자 적의 포대에 노출되었다. 10분도 안되어서 장교 2명과 병사 29명이 부상당하고 중대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 모든 중대는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다가 다른 부대와 교대했다.’ 
34중대의 모일 셰러Moyle Sherer는 같은 전투를 이렇게 기록했다. 
‘마을에는 1명도 없었지만 왼쪽으로 몇 백m 떨어진 숲과 그 위의 골짜기에는 프랑스경보병이 가득했다. 우리 중대는 골짜기 사이에서 산병전을 벌였고 38명 중에 11명을 잃었다. 영국군은 독일군이나 프랑스군처럼 산병전을 잘하지 못한다. 병사들을 통제하다 보면 장교가 훨씬 큰 위험에 노출된다.’ 
오캘러한의 3개 대대는 병사 48명이 죽고 443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산병전 훈련이 제대로 안된 것도 있지만 여단이 맡은 임무가 워낙 위험해서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한쪽이 밀집대형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경우, 그 대열을 엄호하는 경보병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경보병은 본대보다 더 앞에 나서 적의 교란공격을 막아야 했고 적의 포대에 더 오래 노출되었다. 
수비측 경보병도 적의 공격강도를 잘 판단해서 퇴각로가 막히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당연히 치명적인 실수가 벌어졌는데 부사코전투에서 영국군 79연대의 더글라스Douglas대위는 이렇게 기록했다. 
‘경계병력이 차단되었다며 중대를 보내 구원하라는 전령이 왔다. 현장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프랑스군과 근접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즉시 공격에 나서 밀어냈다. 경계병력이 퇴각했고 우리도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훨씬 많은 숫자가 공격해왔다. 병사들이 적에게 돌격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언덕 위로 퇴각하자 포르투갈대대가 프랑스군에게 돌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응원하던 중에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다... 우리 중대는 즉시 퇴각했는데 3명이 죽고 25명이 부상당했다. 64명 중 29명만 온전했다.’ 

 

프랑스군은 훨씬 많은 병력으로 포르투갈을 침공해서 웰링턴의 영국-포르투갈연합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부사코전투 후에 퇴각하다가 총병력의 절반 정도를 잃었고 포르투갈이 독립하게 됩니다. 

부사코는 너무 가파르고 거칠어서 프랑스기병이 기동할 수 없어서 연합군경보병에게 더 없이 좋은 전장이었다. 산등성이 정상에 2,300명, 아래 경사면에 1,500명이 배치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아주 간단한 기록만 남아 있다.
‘포르투갈엽병Cacadores은 명중시킬 때마다 마치 놀이를 즐기듯이 크게 웃었다. 경보병이 술라마을 아래의 숲, 그 다음에 마을, 그 다음에는 산등성이를 방어했다. 경보병사단 절반이 프랑스군을 상대했는데 뒤에 안보이는 곳에 1,800명이 예비병력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군도 연합군경보병을 밀어내려고 모두 산병으로 투입했고 경보병은 프랑스사단 6,000명과 전면전을 벌이기 보다는 최대한 피해를 주며 지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루아종Loison사단은 전체 전투에서 포대, 산병과 전열병에게 162명이 죽고 1,091명이 부상당했다. 
반면에 경보병사단은 겨우 153명만 잃었다. 

 


경보병은 적의 경보병을 밀어내고 적의 대열에 피해를 주고 장교를 저격하고 병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규율을 무너트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포병에게 피해를 주어서 본대가 공격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물러나게 만들면 대성공이었다. 
살라망카전투에서 제임스 라이트James Leith장군의 영국군 5사단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영국군 2개와 포르투갈 1개여단, 총 13개 대대의 6,700명이었다. 사단이 전진하기 전에 경보병이 산병전에 나섰다. 총 1,000명으로 사단전체의 1/6 수준으로 다소 많은 편이었다. 
야지를 2km 정도 전진해서 프랑스 경보병과 만났다. 그리고 프랑스포대까지 접근했다. 
프랑스포대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라이트사단이 전진하는 동안 가장 위험한 순간을 넘겼고 프랑스포병은 새 위치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경보병이 밀집대형보병을 괴롭히면, 1개 중대 정도를 분리시켜서 적의 경보병과 산병전을 벌였다. 적 기병이 근처에 있다면 대열을 무너트릴 수 없기 때문에 경보병의 산발적인 공격을 묵묵히 견뎌내는 수 밖에 없었다. 피해가 크지 않더라도 병사들이 받는 심리적 압박이 무척 심했다. 참을 수 없는 경우에는 일제사격으로 경보병공격을 약화시켰다. 
그렇지만 일단 사격을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었고 적의 본격적인 공격에 대처하기 힘들었다. 

비메이로전투에서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란트만대령은 이렇게 기록했다. 
‘5~60m 거리에서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는 프랑스산병이 보였다. 나를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말머리 아래로 60연대 5대대의 독일병사 한 명이 나타났다. 바로 그에게 저 빌어먹을 놈을 바로 쏘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위험하다고.
그런데 그 병사는 내 목숨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계속 프랑스놈을 처리하라고 재촉했더니 몸을 반쯤 돌리고는 조용히! 난 장교를 노리고 있어!라고 했다. 
장교를 노린다고? 도대체 왜?라고 소리쳤다. 그 놈은 장교에게 빼앗을 것이 많다며 총을 겨눴다. 프랑스놈은 나를 노리고 독일놈은 프랑스장교를 노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총에 맞으면 독일놈이 나를 약탈했을 것이고, 프랑스장교가 총에 맞으면 프랑스놈이 약탈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