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나폴레옹전쟁 (6부) - 보병대형과 훈련

댓글 0

근대/나폴레옹전쟁

2022. 4. 17.

요즘 꽃심고 잡초 뽑느라 다시 속도가 느려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난 2년 동안 많이 뒤집고 다듬은 덕분에 올해는 그 범위가 훨씬 작아졌습니다. 

 

그 당시 유럽군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병과는 보병이었다. 전체전력 중 60~90%를 차지했고 가장 저렴하면서도 변화무쌍한 병과였다. 지휘관은 기병과 포병을 더 원했겠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양측의 보병간에 벌어졌고 워털루전투의 나폴레옹처럼 보병이 부족하면 승리할 수 없었다. 
보병의 기본단위는 대대이며 300~1,200명으로 편차가 심했는데 보통 500~700명이었다. 살라망카전투에서 영국군 42연대 1대대는 1,079명이었던 반면에 44연대 2대대는 겨우 251명이었다. 
전투에 참가한 영국과 독일군 44개 대대 중에 5개는 800명 이상이었고 9개는 400명 미만으로 평균 572명이었다. 다른 전투에서도 상황에 따라 양측의 대대병력은 큰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군은 1808년까지 대대당 9개 중대를 유지하다가 6개(경보병1, 척탄병1, 전열병4)로 바꿨다. 오스트리아군은 6개 중대, 프로이센군은 4개, 영국군은 10개 중대를 편성했다. 2개 중대를 사단Division이라고 불러서 10개 이상의 대대를 가진 진짜 사단과 혼동할 수 있다. 

 

 

1812년 황제근위대 중 척탄병인데... 영화를 보다보면 저 흰색 군복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하는 엉뚱한 걱정을 합니다.  


영국군 일부 연대는 1~2개 대대만 가지기도 했다. 2대대는 본토수비대로 남거나 1대대의 손실을 보충하는 목적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다른 나라의 경우, 신병을 훈련시키고 충원하는 용도로 보급창Depot대대를 연대에 함께 편성했다. 프랑스는 대대를 나누어서 스페인과 러시아에 동시에 투입했는데 보통은 같은 연대에서 같은 전투에 참가했다. 
반도전쟁에서는 사단급 이상의 편제가 필요없어서 상대적으로 부대규모가 작았지만 중앙유럽에서는 사단 여러 개를 경기병여단이나 사단, 포병예비부대와 묶어서 군군단Army Corps를 편성했다. 
군단규모도 편차가 심해서, 러시아침공 당시 다부Davout군단은 10,000명 정도였다.  

 

보병은 대부분 밀집대형으로 싸웠다. 경보병과 특수부대만 산병전을 벌였는데 대대전체가 경보병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보통은 횡, 열(종)이나 기병이 위협하면 방진대형을 만들었다. 
18세기에 정착한 횡대형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에도 이어졌다. 중대가 일렬로 늘어섰는데 600명 대대는 2열로 약 200m로 늘어섰다. 횡대형은 모든 전력을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포격에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고 피해가 발생해도 부대전체에 고르게 분산되었다. 
그렇지만 거친 지형을 빠르게 전진하다보면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기 쉬웠다. 200m 너비의 1개 대대도 포격을 무릅쓰고 전진하면 대형이 무너지는데 7~800m의 대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떤 대대가 약간 각도를 좁혀서 전진하면 어느 한쪽은 몰리고 다른 한쪽은 텅비었다. 
만약 적기병이 이런 순간을 노리고 있다면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고 전진을 멈추고 병사들을 정비하면 적의 포격을 더 오래 맞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와의 공조가 깨졌다. 그래서 횡대형은 아주 훈련이 잘된 부대만이 가능했는데 반대로 수비에서는 횡대형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다른 단점도 있었다. 장교와 하사관이 넓게 분산되어서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기 힘들었고 특히 훈련이 안된 병사들에게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측면방어가 허술해서 기습을 당하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1열 뒤에 지원병력을 충분히 두어서 그런 위험에 대처했다. 병력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거나 지형보호도 못 받을 경우에는 양쪽 끝은 열대형을 하거나 방진대형을 했다. 

 

이제 영화 워털루를 보면 보병대형과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2열 이상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마르몽Marmont원수는 3열이 무용지물이라고 했고 구비옹 생시르Gouvion St Cyr도 3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병부대인 경우 3열은 부상병이 피신할 도피처가 되지 못했고 연습에서는 3열이 장전한 총을 2열에게 넘겨주어 연사효과를 높였지만 실전에서는 3열도 사격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군대가 3열이 대형을 보강한다고 지지했다. 장교와 하사관의 통제범위가 좁아지고 앞열의 피해를 바로 충원할 수 있었다. 3열이 없다면 대대는 얼마 안가 1열횡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미대륙군은 2열횡대가 유용할 수 있었지만 전투강도가 훨씬 심했던 유럽에서는 3열횡대가 아닌 경우 대열이 바로 무너질 수 있었다. 

열(종)Column대형은 프랑스 군사전문가들이 몇십년 동안 검토하다가 혁명전쟁부터 사용되었다. 1개 대대가 50~80명 횡대로 9~12개 열을 만들었다. 20~50m 너비에 10~15m 길이의 대형이 되었고 공격에 나설 때에는 횡대형으로 바꾸었다. 

 


2개 중대 횡대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연대 전체를 열대형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거친 지형이거나 전선이 좁은 경우에만 사용했다. 대대 단위로 열대형을 만들고 그 간격을 넓히면 횡대형이나 방진형으로 보다 쉽게 바꿀 수 있었지만 근접전에서는 아무런 장점이 없었다. 
열대형은 많은 장점이 있었다. 인접부대와 보조를 맞출 필요가 없어서 신속하게 전진할 수 있었고 전선을 좁힐 수 있었다. 장교와 하사관이 분산되지 않아서 병사들 바로 뒤에서 통제할 수 있었고 앞이나 뒷열의 동료가 서로를 응원하며 사기를 높였다. 측면을 공격받으면 바깥쪽 열이 외곽으로 돌아서 강한 방어막을 만들 수 있었다. 
훈련이 부족한 부대는 열대형이 최선이었다. 

반면에 횡대형보다 포격피해가 컸다. 산탄포나 산병의 공격이 앞줄에 집중되어 전진속도 느려지고 뒷열의 병사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피해를 입기도 전에 등돌려 달아날 수 있었다. 
가장 큰 단점은 적의 횡대형보다 화력이 크게 부족해서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적 전방 250m 정도까지 열대형으로 접근해서 적이 동요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대로 밀고 들어가 적대형을 무너트리거나, 적이 전혀 동요하지 않으면 횡대형으로 바꾼다음 맞대결을 벌였다. 
실전은 이론과 달랐고 적도 그렇게 수동적이지 않았다. 횡대형으로 바꾸는데 시간이 걸렸는데 적이 이 순간을 노리고 반격에 나서면 대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대형을 바꾸는 동안 적의 포격과 사격을 그대로 맞아야했고 대형을 바꾸느라 멈춰야했기 때문에 기세좋던 동력이 모두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오어드어 미스트I'ordre mixte라는 혼성대형을 사용하기도 했다. 횡과 열대형을 혼합한 것으로 3개 대대에서 1개는 중앙에 횡대형으로, 2개는 양쪽 옆의 열대형으로 배치했다. 부족한 화력을 보충하고 취약한 측면방어도 강화하고 비교적 작은 범위에 강력한 전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열대형보다 느리고 복잡한데다가 병력이 충분한 경우에만 가능한 대형이었다. 그래서 연합군은 물론이고 프랑스군 자체에서도 기본 보병전술이 되지 못했다. 
대신에 다른 형태의 혼성대형을 많이 사용했다. 1808년부터 유럽국가들은 열대형을 주로 사용했는데 대부분의 병력이 신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방어를 할 경우에는 2열 횡대를 사용했다. 1열과 2열 간격을 넓힌 후에 1열이 무너져 패잔병이 달아나더라도 2열은 대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바로 반격에 나섰다. 
공격에 나설 때에도 2열 횡대였는데 이번에는 1열 대형의 사이 뒤에 서서 빈틈을 없앴다. 본대 앞에는 산병이, 가장 뒤에는 예비병력이 섰다. 1열의 공격이 무산되어도 2열이 피해를 입은 적을 무너트린다는 전술이었지만 실전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혼성대형은 병사들이 명령에 따라 밀집대형을 만들 수 있도록 훈련해야 했다. 훈련을 통해 명령복종과 단체정신을 익혔다. 소음,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대형을 바꾸고 총을 장전하고 발사해야 했다.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대혼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세밀한 훈련을 거듭했다. 훈련교재가 아주 많이 남아 있지만 실제 전장에서의 상황은 단편적인 기록이 전부다. 
‘아마 영국군 전체에서 이렇게 엄격하게 훈련받은 연대는 없을 것이다. 병사가 대열 안에서 기침을 하면 처벌을 받았다. 일순간이라도 수석총이 어깨에서 미끄러지면 처벌받았다. 쉬어 자세 중에 배낭을 건드리면 처벌받았다. 그래서 88연대는 행군에도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랄프 애버크롬비Ralph Abercromby는 1801년 이집트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영국군의 18가지 기동법이 너무 복잡하다고 판단하고 기본 기동 몇 개에만 집중한 단순버전을 만들었다. 특히 프랑스의 압도적인 기병을 막을 방진대형을 보강했다. 
1813년, 웰링턴은 신병과 베테랑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고 혹평했는데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1820년대, 프랑스군 장교들은 1791년의 훈련교범을 완전히 뜯어 고치고 절대적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잡한 훈련이 실전에서 무용지물이라고 깨달았다. 
실전에서는 대대횡대가 분당 90보(평보), 105보(속보), 120보(경보)의 속도를 지켰는지도 불확실하다. 

프로이센장교의 기록을 보면
‘오후 2시 정도가 되자 여단장의 명령에 따라 속보에서 구보로 바뀌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더 빨라졌다.’ 
프랑스군 기록에서도 ‘돌격준비를 하고 속보대열을 유지했지만 언제나 구보로 변했다. 총격을 받으면 참을 수 없었다. 병사들이 흥분하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전진속도를 올렸다.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황제폐하 만사! 전진하자! 승리하자!를 외치게 된다.’
열대형은 병사들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횡대형보다 혼란의 정도가 작았다. 장교들은 돌격으로 적을 무너트린 후에도 병사들의 대열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제대로 훈련된 부대가 실전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숙련도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부대를 완벽하게 훈련시키려면 3년 정도가 걸렸다. 
영국은 1803~5년동안 대부분의 병력이 훈련을 받고 있었고 웰링턴은 반도전쟁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베레스포드는 포르투갈군을 개혁하는데 1년을 보냈고 부사코전투 후에 다시 몇 개월에 걸쳐서 훈련시켰다. 
프랑스대육군도 1805~7년 영국침공을 위해 북해연안에서 2년 동안 훈련했던 병사들과 야심찬 젊은 장교들 덕분에 전성기를 보냈다. 훈련소에서 여단, 사단 심지어 군단규모로 모의전을 벌였다. 
장교들은 귀중한 경험을 얻었고 병사들은 부대소속감과 동료애를 얻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군의 경우를 보면 훈련과 규율이 전부는 아니었다. 프로이센 대대는 전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규율이 잘 잡혀 있었지만 평화로운 시기를 거치면서 중간 장교의 자질이 크게 떨어졌고 전술도 프랑스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1813년, 프로이센군은 훈련도가 이전보다 많이 부족했지만 풍부한 전투경험을 축적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은 훈련이나 전술이 아니라 높은 사기가 장점이었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군도 1806년의 정예 대육군이 아니라 신병으로 급조된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대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 고참근위대Old Guard와 신참근위대Young Guard입니다. 신참근위대는 신병 중에 선별해서 편성했고, 고참근위대는 복무기간과 체격조건까지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