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 슬라브족과 바이킹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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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정치

2022. 5. 19.

1. 우리가 관심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2. 우크라이나어를 모르기때문에 기존의 지명과 인명을 사용합니다. 러시아의 사관을 공유한다고 비난하지 마시길. 

3. 족, 부족, 인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학술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혼용하겠습니다. 

4. 우크라이나 중남부 정도가 고작인 시대입니다. 우크라이나 북부와 러시아 역사는 암흑시대입니다. 

 

그리스와 우크라이나평원 부족이 교역과 문화교류관계였다면 로마와의 관계는 교역과 전쟁이었다. 4세기에는 무척 적대적이었는데 유라시아와 동유럽 민족이 대거 이동하면서 5세기 후반에는 로마제국이 붕괴할 정도였다. 동로마(비잔티움Byzantium)제국은 평원유목인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북쪽의 농경부족을 흡수했고 15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다. 
고트Goth와 훈Hun족이 로마제국붕괴의 주요 원인이었다. 고트족은 독일계이고, 훈족은 몽골평원계를 중심으로 무수한 중앙아시아부족이 연합한 것으로 믿고 있다. 6세기 중반에는 훈족이 사라지고 투르크방언을 말하는 부족이 그 자리를 메웠다. 

 


고트와 훈족 등은 우크라이나에도 밀려들어 평원을 장악했다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부족연합인 슬라브Slav족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인도-유럽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원전 7~3세기에 동쪽에서 유럽으로 온 것으로 추측되고 헤로도토스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 전에 동유럽에 정착했다. 
흑해평원 북쪽의 숲지역을 차지했고 지중해 사람들은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650년 경 흑해평원의 민족 상황입니다.

 

6세기 초, 훈족에게 밀려난 슬라브족이 대거 비잔티움제국 국경선에 모습을 드러냈고, 비잔티움제국은 스클라베니Sclaveni(남슬라브족)와 안테스Antes(동슬라브족)로 구분해서 불렀다. 스클라베니는 다뉴브와 드네스트르Dniester강 사이에서, 안테스는 드네스트르와 드네프르강 사이의 지역을 차지했다. 

 

 

드네스트르와 드네프르강은 우크라이나역사에서 무척 중요하니까 위치를 잘 기억해두세요. 


언어학자들은 슬라브족의 본토가 드네프르와 비스와Vistula강(폴란드 동부) 사이, 주로 볼히니아Volhynia와 프리피야티Prypiat습지로 추측하고 있다. 이들의 출현으로 유스티니아누스대제Justinian the Great가 난처해졌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27~567년 동안 비잔티움제국을 통치하며 서로마제국을 포함한 제국전체의 복귀를 원했다. 다뉴브강 국경에서 지역부족이 계속 침공해오자 원정에 나섰다. 530년대 초반 칠부디우스Chilbudius사령관이 다뉴브 북쪽으로 넘어가 안테스족에게 승리를 거뒀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안티쿠스Anticus(안테스 정복자)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렇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3년 후. 칠부디우스가 전사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시 국경선방어 정도로 만족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분열시켜 정복하는 로마방식을 선택했다. 530년대 말이 되자 안테스와 스클라베니가 전쟁을 벌였는데 전쟁 중에도 비잔티움제국의 국경을 계속 넘었다. 안테스족은 발칸반도 동부의 트라키아Thrace를 침공해 수많은 노예를 끌고 갔다. 자신감을 얻은 안테스족은 비잔티움에게 용병을 제안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부족을 다뉴브 북쪽에 주둔시켰다. 
안테스족은 다른 부족처럼 군복무를 대가로 급여를 받았다. 칠부디아스를 사로잡았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안테스족의 지휘관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제국의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안테스족을 제국의 시민으로 인정하라는 요구였지만 거절당했다. 
오래 전에 전사한 칠부디아스를 사칭한 가짜를 체포해서 처형했다. 안테스족은 제국의 동맹신분으로 만족해야 했다. 

 


안테스와 스클라베니족은 언어, 종교와 관습이 같았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슬라브족인 반유목민으로, 무척 작은 판잣집에서 홀로 살다가 거처를 계속 옮겼다. 슬라브전사는 키가 크고 다부졌다. 안전과 편안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고 오물에 덮여 있었다. 
의외로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스클라베니와 안테스부족 모두 1인 통치체제가 아니었고 주민들의 의견을 구했다. 반나체로 전투에 나섰지만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중세 스코틀랜드인과 달리 평상시에는 옷을 제대로 입고 성기를 노출하지 않았다. 전투시에는 대부분 맨발에 작은 방패와 짧은 창을 들었고 갑옷을 입지 않았다. 일부는 아예 상의를 벗었고 바지를 엉덩이 밑까지 걷어 올렸다. 

 

같은 시기의 게르만족인데 슬라브족 전사도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600년 경의 다른 기록을 보면, 슬라브족은 여행객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다수의 의견을 따르거나 조약을 지키지 않았다. 강부근의 숲이나 습지에 집을 지어 적의 침입을 막았다. 야지에서 대형을 갖추고 회전을 벌이기 보다는 기습을 노렸다. 
단창, 나무활과 짧은 화살을 무장했다. 포로를 노예로 삼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풀어주었다. 
슬라브족은 천둥신을 믿는 단일종교였고 가축이나 제물을 바쳤다. 질병에 걸리거나 전쟁에 나서면 신에게 안전을 빌며 제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슬라브족의 독립생활은 7세기 초에, 아바르Avar족이 침공하면서 끝났다. 아바르족은 북부 카스피평원에서 내려온, 투르크어 부족연합이었다. 아바르족은 11~12세기까지 머물었는데 나쁜 기록을 남겼다.
키이우Kyivan 수도승dl 원초기록Primary Chronicle을 집필했는데 지역 전설과 비잔티움 자료를 정리했다. 아바르족은 슬라브족을 침공했고 부크Buh강에 살던 또 다른 슬라브족인 둘레비아Dulebia족을 괴롭혔다. 
‘아바르족이 여행을 떠날 때에는 말이 아니라 슬라브여성 3~5명이 마차에 묶여 끌었다. 그런 만행은 신의 노여움을 샀다. 그들은 모두 멸망했으며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루스Rus속담에 이런 말이 전해진다. 아바르족처럼 멸망했다.“ 

 

녹색지역을 두고 계속 주인이 바뀝니다. 저 너머의 역사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제 점차 북부로 무대가 이동합니다. 


아바르족은 불가르Bulgar족. 다시 하자르Khazar족으로 대체되었고 7세기 말까지 비교적 평화스러운 시간이 지났다. 하자르족은 훨씬 좋은 기록을 남겼다. 투르크 카자르족은 교역에 관심이 있었고 외국의 영향에 우호적이었다. 기독교선교사를 반겼고 유대교를 수용했다. 
하자르족의 중심은 볼가Volga강 하류의 이틸Itil과 돈강의 사르켈Sarkel이었다. 카자르 지배층은 볼가강에서 페르시아제국과 아랍으로 연결된 교역로를 장악하고 부를 쌓았다.  

 

본문의 내용보다 300년 후인 9~10세기 하자르중기병입니다. 

620년대, 하자르족은 비잔티움제국과 조약을 맺었고 흑해 북부연안까지 진출했다. 4세기에 고트족이 멸망시킨 올비아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비잔티움군이 크림반도 남쪽 연안의 작은 지역을 계속 유지했다.
하자르족은 비잔티움제국의 동맹으로 페르시아와 아랍에 대항하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교역로인 콘스탄티노플리스Constantinople교역로를 보호했다. 
하자르족이 우크라이나 동부와 중부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슬라브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정확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훨씬 나중에 키이우 연대기록가가 유일한 정보원이다. 
6세기 직전에 하자르족은 키이우Kyiv를 서쪽끝 거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키이Kyi라는 지역통치자가 마을을 세웠는데 두 형제가 언덕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드네프르로 흐르는 강에는 여동생의 이름 리비드Lybid를 붙였다. 
강변에는 키이우를 세운 4형제의 동상이 서 있고 우크라이나 수도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카르파티아Carpathian산맥 서쪽에 12개의 슬라브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라도가Ladoga호수(현재의 상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동쪽으로는 볼가강 상류와 오카Oka강, 남쪽으로는 드네스트르와 드네프르 중류까지 퍼져 있었고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선조들이었다. 
언어학자들은 방언으로 동부 슬라브족으로 정의하고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의 서부 슬라브 그리고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구 유고슬라비아계의 남부 슬라브족과 구분했다. 
기독교 수도승인 기록가는 이들을 야만인으로 묘사했다. 

동부 슬라브족은 다른 슬라브족보다 거처를 자주 옮기지 않았다. 통나무집에 살았는데 4채~30채의 마을이 서로 가까이에 만들어졌다. 마을들 중앙에 적의 침공에 대비하는 요새를 지었다. 추장이 있었지만 민주주의 체제였다. 
비잔티움 기록과 비교하면 개인위생은 많이 좋아졌다. 키이우에 기독교를 전했다는 성 안드레아St. Andrew에 따르면 슬라브족 마을에 나무로 지은 목욕탕이 있었고 한증막을 즐겼는데 나뭇가지로 너무 거칠게 때려서 거의 죽다시피 했다고 한다. 
아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현재의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슬라브족에 대해서는 야만인으로 기록했다. 
‘마치 동물처럼 살았다. 서로 죽였고 더러운 것을 먹었고 결혼하지 않고 그냥 여자를 납치했다. 마을에서 축제가 벌어지면 춤추고 술마시다가 눈이 맞은 여성과 사라졌다. 모두 아내가 2~3명씩 있었다.’

 


이런 기록은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키이우 수도승은 기독교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멸시했고 훨씬 뒤에 기록을 집필했다. 반대로 10세기 중반, 코르도바Cordoba 무어인Moor 이브라힘 이븐 야쿱Ibrahim ibn Ya’qub은 서부 슬라브족을 방문했는데, 슬라브족의 결혼관이 강했고 지참금으로 부를 얻었다고 기록했다. 
결혼 전에 예비부부가 미리 성관계를 가졌고 미혼여성은 자유연해를 했지만 일단 결혼하면 여성은 절대로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했는데 아내가 처녀였다면 자유롭게 다른 남자를 만나라며 돌려보냈다. 

우크라이나 슬라브족에 대한 10~11세기 이전의 기록은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비잔티움, 고트족, 이교도 미신에 사로잡힌 기독교인의 자료가 전부다. 어느 기록이던 슬라브족을 기독교제국이나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는 야만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슬라브족이 동유럽에 어떻게 정착했는 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슬라브족은 유목민침공과 달리 천천히 그리고 평화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정착했다. 

8~11세기 중반까지 바이킹시대가 있었다. 야만인침공의 종식이라고 부르던 시기였는데 실제로는 스웨덴, 노르웨이와 덴마크 바이킹이 침공했고 서유럽은 노르드인Norsemen 또는 노르만인Normans이라고, 동유럽에서는 바랑기아인Varangians이라고 불렀다. 바이킹은 전 지역을 약탈하고 정복하고 통치했으며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793년 6월 8일에 정확하게 바이킹시대가 시작되었다. 노르웨이를 출발한 바이킹해적이 영국해안 린디스판Lindisfarne섬의 수도원을 약탈했다. 수도승 몇 명을 바다에 던지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고 갔다. 이후 프랑스해안의 노르망디Normandy에도 나타나서 바이킹시대를 알렸다. 

 

바이킹계 바랑기아인은 비잔티움황제의 근위대로 고용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은 838년 경에 루스Rus왕이 보낸 사절단이 황궁을 방문해 우호관계를 요청하면서 처음으로 바이킹과 접촉했다. 그들은 귀국길에 적대적인 부족이 많다고 두려워해 황제가 독일을 통하는 길을 주선해주었다.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의 아들 루도비쿠스 1세Louis the Pious는 그들을 간첩이라고 의심했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귀국길에 슬라브족의 공격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959년, 바이킹함대가 지중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리스로 접근했고 860년 6월 8일, 콘스탄티노플리스를 공격했다. 비잔티움함대는 아랍과 바이킹을 대비해 에게해와 지중해에 있었기 때문에 미하일Michael 3세가 소아시아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바이킹은 장기전에 대비하지 않았고 수도의 성벽을 넘을 수도 없어서 외곽을 돌며 마구 약탈하고 살상했다. 무방비상태의 도시와 마을은 신에게 기도를 드렸고 8월 4일에 바이킹이 사라지자 성모보호축일Feast of the Protection of the Mother of God을 지정했다. 
그런데 정작 비잔티움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고 바이킹의 통로였던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축제를 즐겼다. 

 


비잔티움은 루스라고 기록에 남겼는데 루스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가 기원으로 추측하고 있다. 스웨덴어로 노를 젓는 남자라는 뜻이었다. 발트해와 핀란드만을 거쳐 라도가호수를 건너고 볼가강 상류로 진출했다. 

 

키이우 루스시대를 연 루리크Rurik형제가 라도가호수에 첫발을 내딛은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이주에 대해서는 바이킹 이야기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루스 바이킹은 교역을 위해 동유럽에 왔다. 최종 목표는 막대한 부가 있는 중동이었고 동유럽을 통과해야 갈 수 있었다. 지역부족은 우호적이지 않았고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털가죽과 꿀뿐만 아니라 노예교역도 했다. 
바이킹은 교역로보호와 노예획득을 위해 지역부족을 점령했고 공물을 모아 중동Saracen교역로로 실어날랐다. 루스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카스피아Caspia해까지 바이킹 교역로를 만들었다. 

비잔티움제국의 교역품도 우크라이나 숲평원의 곡식에서 훨씬 북쪽의 노예, 꿀, 왁스, 털가죽으로 바뀌었다. 911년, 바이킹은 비잔티움제국과 조약을 맺고 실크 교역권을 얻어냈다. 
콘티나누스 7세Constantine VII Porphyrogenitus의 기록에 따르면, 슬라브족은 매년 늘어가는 공물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저항했다. 드네프르 동쪽 강변에 살던 데레블리아니아인Derevlianian의 말Mal공이 키이우공 잉그바르Ingvar를 죽였다. 그리고 미망인 올하Olha(러시아 올가Olga)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지역 슬라브족와 바이킹의 패권다툼이었다.
올하는 말과 일행을 키이우로 유인해 배와 함께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데레블리아니아 지도층을 다시 불러들여 증기탕에 가두고 온도를 높여 죽였다. 

 

성인으로 추대된 올하는 무척 단호한 표정이 특징입니다.

10세기 중반이 되자, 중앙아시아의 은광산이 완전히 바닥났고 루스 바이킹은 교역대신에 전쟁을 선택했다. 올하의 아들 스비아토슬라브Sviatoslav는 키이우의 첫 번째 통치자로 동부 슬라브부족을 모두 굴복시켰다. 그리고 카자르족도 공격해 키이우의 영향력을 볼가강의 하자르 카간국Khazar kaganate까지 넓혔다. 
그는 수도를 키이우에서 다뉴브강으로 옮겨 교역로를 장악하고 싶었다. 선대의 헬기Helgi(올레그Oleg)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유리한 교역조건을 얻어낸 적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리스 성문에 방패를 거는 모습입니다. 당시 비잔티움제국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황제에게서 대가를 받고 발칸 불가르Balkan Bulgar족을 침공해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비잔티움제국은 영토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흑해평원의 새로운 유목부족 페체네그Pecheneg를 설득해 키이우를 공격했다. 
스비아토슬라브는 급히 귀국했다가 969년에 불가리아로 다시 돌아가 아드리아노플Adrianople(현재의 에디른Edirne)을 포위했다. 콘스탄티노플리스에서 불과 250km 거리였다. 황제는 급히 군대를 보내 도시를 구원하고 자신이 직접 출전해 루스군을 포위했다. 
971년 7월, 스비아토슬라브는 비잔티움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고 불가리아를 떠나 크림반도 남부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조건으로 그를 풀어주었다. 스비아토슬라브는 드네프르 급류(사진 참조)에 막혀 배에서 내렸다가 페체네그기병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황제가 페체네그족장에게 뇌물을 주었고 족장은 그를 죽인 후에 두개골로 술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비아토슬라브의 죽음으로 우크라이나의 바이킹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는 키이우의 기반을 다졌고 방대한 숲과 평원지역을 점령하고 지중해세계로 통하는 길을 열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후계자는 더 이상의 확장을 포기하고 키이우를 중심으로 기존체제를 보호하는데 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