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우크라이나역사 -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기원 키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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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2022. 5. 23.

이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하게 얽힌 배경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학자마다 키이우 루스Kyivan Rus라는 개념을 민족이나 영토로 혼용하고 있는데 둘 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키이우 -> 키이우 루스 확장 -> 공국과 대공국 -> 몽골 킵차크 한국으로 이어지는데 몽골침입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972년, 스비아토슬라브가 죽자 후계자들은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리스를 노리지 않고 드네르프 부근에 교역중심지를 만들기로 했다. 아들 볼로디미르Volodymyr와 손자 야로슬라브Yaroslav는 50년 이상 키이우를 통치하며 분명한 국경, 정부체제, 사상 등을 갖춰 본격적인 중세영주국이 되었다. 
볼로디미르는 형제들과의 권력암투 전에 스칸디나비아에서 5년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가 바이킹군대를 이끌고 귀국했다. 그는 바이킹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자 지휘관에게 평원경계의 요새를 주고 비잔티움원정에 나설 수 있게 했다. 
이전의 바이킹이 교역과 원정이었다면 이번에는 통치자의 용병으로 왔기 때문에, 키이우 주민에게는 바이킹이 돌아와도 도시에 절대로 들여놓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인척과 신하들의 자식을 고용해서 권력을 분산시키고 지역부족의 영향력을 크게 줄였다. 
이렇게 키이우공국의 바이킹시대가 막을 내렸다. 


980년에 권좌에 오른 볼로디미르는 10년 동안 아버지의 유산을 방어하며 하자르족과 볼가 불가르족을 밀어냈고 서쪽으로 진출해서 폴란드의 요새 몇 곳을 점령했다. 문제는 페체네그족과 다른 유목부족이 계속 침입하는 남쪽 국경이었다. 국경에 요새를 세우고 전쟁포로와 주민을 이주시켜 국경방어에만 주력했다. 
989년, 크림반도 남쪽의 케르소네소스Chersonesus를 포위하고 바실리오스Basil 2세의 여동생과의 결혼을 요구했다. 몇 년 전에 황제는 볼로디미르의 군사지원을 대가로 안나Anna와의 결혼을 약속했었는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케르소네소스가 함락되자, 황제는 동생과 기독교성직자를 대거 크림반도로 보내, 야만인족장이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가 세례를 받으면서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흘렀다. 

 


키이우에 도착하자 이교도 신의 우상물을 모조리 치웠고 드네프르강 언덕의 천둥신 페룬Perun신전을 없애고 주민들을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몇백 년이 걸린 길고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천둥신 페룬인데 바이킹혈통과 연결이 됩니다.


황실과 결혼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볼로디미르의 가문과 영지는 크게 상승했다. 더구나 그는 황제와 같은 세례명을 선택하고 황제의 후광을 이용했다. 나중에 그를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인 콘스탄티우스Constantine황제에 비교하는 기록까지 있었다. 
비잔티움 권력층도 볼로디미르의 결혼은 반대했어도 개종은 환영했다. 그렇지 않아도 100년 전부터 슬라브족의 개종을 위해 성직자를 계속 보냈었다. 

콘스탄티노플리스 대주교는 루스관구장Metropolitanate of Rus을 만들고 자신이 관구장주교를 임명했다. 그리스인이 관구장주교를 맡고 주교는 지역집권층을 임명했다. 최초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키이우 루스의 공식문자로 교회슬라브어Church Slavonic를 썼다. 
볼로디미르는 수도승의 권리와 특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공포하고 자신도 교회에 십일조를 냈다. 키이우 상류층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점차 아래로 그리고 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북부에서는 이교도무당이 기독교에 거세게 저항하며 전도를 하는 전도사를 살해했다. 
키이우 루스는 비잔티움제국과의 갈등을 끝내고 로마제국의 문화와 정치를 수용하며 지중해세계에 문을 열었다. 그 영향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할아버지 스비아토슬라브는 용감한 자, 아버지 볼로디미르는 위대한 자 그리고 아들 야로슬라브는 현명한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건축가라는 칭호를 얻었듯이, 야로슬라브는 대규모 건축을 시도했다. 키이우의 거대한 성벽을 두르고 금문Golden Gate를 세웠다. 돌로 만든 기초는 지금도 남아있다. 
콘스탄티노플리스의 아야 소피아Hagia Sophia를 본따 성 소피아St. Sophia대성당도 세웠다. 그는 비잔티움제국에서 설계자, 기술자와 도공등을 초대해 키이우를 콘스탄티노플리스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많은 책을 직접 그리스에서 슬라브어로 옮겼고 키이우 최초의 문자기록도 남겼다. 

 


키이우가 콘스탄티노플리스를 모방하는 동안, 다른 도시들은 키이우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폴라츠크Polatsk와 노브고로드Novgorod에도 성 소피아성당이 세워졌다. 문자와 교육이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야로슬로브는 단순히 콘스탄티노플리스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대응한 관계를 원했다. 직접 관장구주교를 임명하고 아들을 보내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다. 아들의 함대는 비잔티움함대를 격파하고 돈을 요구했지만 폭풍으로 궤멸했다. 
야로슬로브는 키이우공국을 온전한 국가로 성장시켰고 유럽공국과의 결혼으로 유럽의 장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자신은 스웨덴왕의 딸과 결혼했고 아들 프세볼로드Vsevolod는 다시 비잔티움제국 황실과 결혼했다. 그 외에도 노르웨이, 폴란드, 헝가리, 프랑스 왕가와 결혼했다. 

딩시에는 키이우 루스Kyiv Ru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19세기 학자가 키이우 중심의 정치공동체를 설명하면서 사용했다. 
야로슬로브는 1054년 2월 28일에 죽어 성소피아성당에 묻혔는데 유해는 독일군이 키이우를 점령하면서 사라졌다. 미국으로 옮겨져 우크라이나 동방정교가 브룩클린의 성삼위일체교회Church of the Holy Trinity에 봉안했다는 소문이 있다. 
우크라이나 성직자가 소련군을 피해 미국으로 떠나면서 유물을 가져갔고 자연스럽게 키이우 루스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모두 야로슬로브를 자신의 중세영웅이라고 주장하며 지폐에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야로슬로브가 야로슬라블Yaroslavl을 세운 전설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위가 우크라이나 지폐이고 아래가 러시아 지폐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역사 모두 키이우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참 복잡한 배경입니다. 

야로슬로브가 죽으면서 키이우 루스의 시대가 한 시대가 끝나고 카롤루스Carolingian왕조가 프랑스와 독일로 나뉘어졌듯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로 나누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로슬로브는 자신도 권력투쟁에 무척 고생했었기 때문에 계승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운 지 25년 만에야 많은 형제가 죽고 분열사태가 끝났었다. 그는 아들들에게 공국을 분할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장자에게는 공국계승 정통성을 인정하는 키이우와 노브고로드를 주고, 다른 아들들은 나머지 영토를 주었다. 장자가 죽으면 둘째가 물려 받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형제가 모두 죽으면 다시 첫째의 장자가 이어받았다. 
야로슬로브에게 아들 5명이 있었는데 3명만이 키이우 권좌에 올랐다. 장자 이지아슬라브Iziaslav는 키이우 인접 도시를 받은 두 형제와 권력을 공유했다. 키이우 삼두정치는 폴라츠크Polastk(현재의 벨라루스)를 통치하던 형제가 도전하자 키이우에 감금했다. 

야로슬로브의 손자 볼로디미르 모노하흐Volodymyr Monomakh는 페레이아슬라브Pereiaslav공으로 모스크바 부근까지 방대한 평원과 숲을 통치했다. 이 지역은 비아티치아Viatichia족이 기독교개종을 거부하며 키이우 수도승을 죽였지만 보다 남쪽 국경선이 더 큰 문제거리였다. 유라시아평원의 폴로브치Polovtsi(쿠만Cuman)족이 침입했고 로스 도시국가 전체가 힘을 모아야 했다. 
가장 강력했던 모노마흐는 이 기회를 이용해 할아버지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계승방식을 없애고 1113년에 자신이 키이우권좌를 차지했다. 그 이후 40년 동안 통치자가 18번이나 바뀌는 혼란이 이어졌다. 
모든 사람이 힘이 생길 때마다 키이우를 노렸는데 1169년에 블라디미르-수즈달Vladimir-Suzdal공국(지금의 러시아)의 안드레이 보골리우브스키Andrei Bogoliubsky가 키이우를 차지했다. 다른 통치차와 달리 3일 동안 키이우를 약탈하고 거점으로 삼지 않았다.

 

 

원자료가 블라디미르-수즈달이라고 했는데, 이 당시에는 로스토프-수즈달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안드레이가 블라드미르에 그대로 머물면서 루스의 정치, 경제와 사회문화판도는 크게 바뀌었다. 키이우 주변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동안 정작 외곽의 공국이 부유해지고 강력해졌다. 카르파티아Carpathian산맥 아래의 할리치Halych공국(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은 다뉴브강을 통해 발칸반도와 교역하고 콘스탄티노플리스의 후원을 받았다. 
블라디미르-수즈달공국은 불가르족을 밀어내고 볼가강 교역로를 차지했다. 북서쪽 노브고도르는 발트해교역으로 부유해졌다. 키이우와 드네프르교역로가 유일한 통로가 아니었다. 
지역 공국이 더 부유해지고 강력해지고 키이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안드레이 보골리우브스키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아버지 유리 돌고루키Yurii Dolgoruky는 1147년에 모스크바를 세운 후에 세력을 계속 확장했고 수즈달공의 위치를 이용해 키이우를 차지했다. 안드레이는 아버지의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끼고 키이우 부근의 비슈호로드Vyshhorod를 떠나 북동쪽으로 갔다. 

 

 

모스크바 광장에서 이런 동상을 보면 아하! 모스크바를 세운 유리 돌고루키이구나 하시면 됩니다. 


그는 공국의 수도를 수즈달에서 블라디미르로 옮기고 또 다른 키이우로 만들었다. 성모상도 옮겨서 키이우의 종교적 영향력도 북쪽으로 옮겼다. 1162년, 키이우를 약탈하기 7년 전에 자신이 주교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콘스탄티노플리스에 요청했다. 그는 이미 키이우의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Golden-Domed Cathedral of St. Michael을 모방한 도미션 대성당Golden-Domed Dormition Cathedral을 지어 두었다. 황금문도 설치해서 콘스탄티노플리스의 후광을 이용해 독립하려고 했다.
블라디미르 자연환경에 키이우의 이름을 붙여 아예 키이우 자체를 만들려고 했다. 키이우를 세우고 통치했던 스칸디나비아 바이킹혈통은 이제 슬라브와 지역부족혈통으로 교체되었고 기독교가 퍼져나갈수록 슬라브족의 영향력도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바이킹이었던 지배층이 점차 슬라브족과 지역부족 결합으로 바뀌었고 보야르Boyar라는 귀족층이 생겼다. 전사였지만 평시에는 영지를 관리했다. 보야르는 지주계층으로 공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교회성직자도 특권계층이었다. 

 

보야르를 뚱땡이 지주층으로 오해하는데 초기에는 이런 전사 지도층였습니다. 


나머지 주민은 공에게 세금을 바쳤다. 상인과 장인은 도시회의에 참석해서 지역안건을 결정했다. 키이우나 노브고로드에서는 도시회의가 공국 후계자를 논의하기도 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농부로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자유민 농부와 반자유인 농노가 있었는데 농노는 부채를 갚거나 일정 기한 후에 자유신분을 얻었다. 
전쟁 중에 포로가 된 노예도 있었다. 전사출신의 노예는 기한이 정해져 있었지만 농부출신은 노예신분이 무기한이었다. 

통치자들은 신체적 처형보다는 벌금형으로 금고를 채우고 싶어 했다. 심지어 살인범죄에도 벌금형을 내렸는데 상대의 신분에 따라 금액이 크게 달라졌다. 만약 노예가 자유민을 때린다면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공국마다 관습법이 있었지만 기독교와 교회슬라브어가 퍼지면서 공통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법을 시행하면서 키이우의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다. 각 공국의 정체성 확립이 현대 동슬라브 국가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수즈달공국은 모스크바공국Muscovy 그리고 러시아로 이어졌고 폴라츠크공국은 벨라루스로, 갈리키아-볼히니아Galicia-Volhynia공국은 우크라이나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렇지만 모든 공국이 키이우를 기원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는 수도를 떠나지 않고도 기원을 연구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