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우크라이나 역사 - 코사크 수장국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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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2022. 5. 29.

 


1595년, 동방정교 주교 2사람이 로마로 먼 길을 떠났고 교황에게 피렌체 공의회Council of Florence와 비슷한 조건으로 자신들을 가톨릭교회 안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키이우대교구를 로마에게 넘겼다. 

 

1431년, 로마가톨릭이 7번째 공의회를 열고 오스만제국, 동방정교, 교황권위 등을 논의했습니다. 


교황, 왕과 주교단은 합의에 만족했지만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Kostiantyn Ostrozky공과 같은 이해당사자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왕권에 대항하기 위해 동방정교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 로마로 가는 주교를 납치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는 동방정교 귀족과 리투아니아 귀족의 지원을 받아 무장병을 이끌고 브레스트Brest회의로 갔고 왕의 대리인도 무장병과 함께 도착했다. 

가톨릭의회는 통합을 선포했지만 동방정교의회는 통합을 거부하며 콘스탄티노플리스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키이우대교구는 갈리키아, 리비우, 페레미슐Peremyshl은 동방정교로, 볼히니아와 벨라루스는 통합교회(동방가톨릭교회)를 지지했다. 실제로는 가문과 수도원이 양쪽을 오가며 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왕은 통합교회만을 인정했고 수십만 명의 동방정교 신도와 수천 개의 교회는 범죄자가 되었다. 동방정교 귀족은 보장된 권리를 무시당했다며 연방의회에 노골적으로 대항했다.  
통합파와 동방정교는 교회역사와 신학전문가를 동원해 대리전을 펼쳤다. 

브레스트회의와 코사크족의 남동부확장으로 우크라이나는 기독교-무슬림과 동-서 기독교라는 문화적 국경선이 그어졌고 경제,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13세기 중반 몽골침공 이후에 처음으로 키이우가 우크라이나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17세기 전반, 갈리키아의 동방정교 지식인이 키이우로 도피하면서 동방정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방정교가 유서깊은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Kyivan Cave Monastery를 계속 장악했고 1615년에는 리비우의 서적들을 키이우로 옮겼다. 저자, 연구자, 인쇄업자가 그 뒤를 이었다. 
키이우에도 동방정교형제단Orthodox brotherhood이 생겼고 동방정교학교를 열고 11권의 책을 출판해 동방정교 출판중심지가 되었다. 

 

11세기 당시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동굴 수준이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키이우 남동부의 코사크족은 타타르족의 침입을 막아주어 키이우를 안전한 도시로 만들었고 폴란드정부의 압박을 피해 도피한 동방정교 신도들을 보호해서 키이우 르네상스의 숨겨진 조력자였다. 1610년, 족장은 동방정교 신도의 개종을 위해 키이우로 오는 통합파를 모두 죽이겠다고 선포했다. 실제로 드네프르강에 빠트려 죽였고 ‘다른 국가는 말싸움으로 이기려고 하지만 코사크는 행동으로 쟁취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코사크는 동방정교 교회의 소멸도 막았다. 왕이 주교임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동방정교 교회가 사라질 위기였는데 1620년 가을, 당시 존경받던 코사크 지도자가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던 총대주교를 설득해 동방정교 대교구의 축성을 받았다. 
왕은 새 대교구를 인정하지 않고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신임대주교는 키이우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동방정교는 코사크의 보호를 받았고 코사크는 자신을 외부에 알릴 종교와 출판물을 손에 넣었다. 

1632년, 모스크바군이 연방국경을 넘어 동란시기에 잃었던 스몰렌스크 등을 노렸고 연방은 무방비상태로 당했다. 연방은 지기스문트Sigismund 3세가 죽고 새로운 왕선출에 내분 중이었다. 
폴란드는 동방정교 교회를 통합교회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해 내분을 해결하려고 했다. 동방정교는 연방에 충성하고 코사크족은 스몰렌스크전쟁에서 연방군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동방정교 교회는 더 이상 코사크의 보호가 필요없었고 다시 폴란드로 시선을 돌렸다. 
1240년 몽골침공 이후 동방정교 지도에서 사라졌던 키이우는 동방정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스크바는 동란시기의 혼란을 겪고 서방뿐만 아니라 동방기독교세계에서도 고립되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던 콘스탄티노플리스는 개신교를 따라 개혁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1638년, 술탄은 대주교가 코사크와 내통하고 있다며 교수형에 처했다. 

16세기 말 이후, 코사크는 7번의 큰 봉기를 일으켰는데, 1648년 봄에는 대봉기Great Revolt가 있었다. 연방도 이번만큼은 진압하기 힘들었고 코사크수장국이 탄생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로 이어졌다. 그리고 러시아의 개입도 시작되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얽히는 계기가 되었다. 
대봉기는 1591년의 첫 번째 봉기와 똑같이 시작되었다. 지역유지와 코사크장교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그림 참조)의 토지분쟁이 원인이었다. 53세였던 보흐단은 여러 전투에서 폴란드군으로 참전했었고 코사크지휘관이 되었다. 
연방관리가 토지를 빼앗아가자 소송을 제기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투옥되었다. 그는 탈출해서 자포로자 시치로 달아나 족장이 되었다. 1648년 3월, 대봉기가 시작되었다. 

 


이전과 달리, 북쪽으로 진격해 도시를 점령하고 연방군을 상대하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가 동맹을 찾았다. 크림칸국에 보상을 약속했고 칸은 크림북쪽의 노가이군을 지원했다. 엄청난 지원군이었다.
지금은 코사크를 기병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보병이었다. 오지로 탈출한 자유민이었기 때문에 말, 특히 군마를 가질 여력이 없었다. 타타르족의 가세로 기병문제를 해결했고 이제 폴란드군을 평원에서 상대할 전력이 되었다. 
1648년 5월, 코사크와 타타르족은 자포르자 시치 부근의 조브티 보디Zhovti Vody강과 코르순Korsun에서 폴란드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4,000명의 노가이기병도 힘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등록 코사크 6,000명이 합류한 덕분이었다. 폴란드정규군이 전멸했고 장교 수백명이 타타르 포로가 되었다. 

 

우리의 흔한 오해와 달리 당시 코사크는 보병중심이었습니다. 

 


보흐단은 너무나도 큰 승리에 오히려 당황했다. 폴란드군이 사라지고 연방이 혼란상태인데도 그는 진영에서 장고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코사크군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키이우 남쪽에 등록 코사크부대가 집결했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대중봉기가 일어났다. 
농부와 시민은 무장을 갖추고 대지주의 영지와 사병을 공격하고 가톨릭신부를 사냥했다. 우크라이나 유대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보흐단은 유대인을 3~4번째 적으로 간주했지만 농부들은 유대인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1648년 여름 3개월 동안 유대인지역사회가 거의 사라졌다. 14,000~20,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유대인과 기독교상공인의 경쟁, 유대인 임대부동산업자에 대한 농부의 반감,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일부는 동방정교로 개종하거나 코사크군이 입대해서 목숨을 건졌다. 

1648년 가을, 유대인, 폴란드귀족과 가톨릭신부를 학살한 코사크군은 갈리키아의 리비우까지 진출했고 폴란드군이 저지하려다가 포돌리아 필리아브치Pyliavtsi에서 또 참패를 당했다. 코사크와 타타르족은 리비우를 포위했는데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폴란드-우크라이나 민족국경선에서 멈췄다. 
보흐단은 연방해체이라는 원대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사절에게 자신이 루스의 유일한 통치자이며 폴란드인을 비스와Vistula강 너머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자신이 키이우 루스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1648년 12월, 자랑스럽게 키이우에 입성했고 주교가 그를 환영했다. 보흐단은 공에 올랐고 이제 코사크만의 권리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체의 권리를 주장했다. 변방에 머물렀던 코사크족이 새로운 국가탄생을 알렸다. 

 

 

 

짙은 색 부분이 코사크수장국입니다.


1649년 여름, 볼히니아 즈보리브Zboriv전투에서 코사크군이 타타르족의 지원을 받아 다시 승리했고 폴란드는 연방 내에서 코사크 자치국(실제로는 독립국) 건국을 인정했다. 그리고 등록 코사크 숫자를 40,000명까지 늘렸다. 
코사크국수장국Hetmanate은 키이우, 브라츨라브Bratslav와 체르니브Cherniv를 통치할 권리를 가졌다. 군사지휘관인 족장(수장)이 재상, 포병지휘관, 판사와 관리로 구성된 총참모부을 받아 코사크국을 통치했다. 
초기의 군사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대령과 총참모부 의회가 중요안건을 결정했다. 연방행정체제를 유지하면서 오스만제국의 군사와 행정모델을 도입했다. 
수장국을 연대로 나누고 각 연대의 대령이 군사, 행정, 사법과 회계를 책임졌다. 지역도시 이름을 따서 20개 연대로 나누고 각 연대는 언제라도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연대를 보유했다. 더 작은 구역은 중대로 나누고 대위가 대령과 같은 역할과 의무를 했다. 

 

그림에서는 마치 폴란드군이 이기는 것처럼 묘사되었군요. 그리고 방관했던 타타르족도 열심히 싸우고요. 

코사크봉기는 크림칸국의 지원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코사크국은 술탄의 보호령을 받아들이고 1651년 여름 이스탄불을 방문해 술탄의 권한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대신에 오스만지상군의 지원을 요구했는데, 오스만제국은 해상에서 베니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여유가 없었다. 메흐메드Mehmed 4세는 크림칸국에게 지원을 명령했지만 칸국은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실제로 1649년 즈보리브전투에서 칸은 폴란드군을 공격하지 않고 따로 협상을 벌였다. 
보흐단의 염려가 적중했다. 1651년 여름, 볼히니아 베레체치코Berestechko전투에서 타타르족은 격전을 벌이는 중에 대열을 이탈했고 코사크군이 포위당해 참패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칸과 함께 퇴각했던 보흐단은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1651년 가을, 보흐단은 연방과 협상하고 등록 코사크를 20,000명으로 줄이고 브라츨라브와 체르니브를 내주기로 했지만 지키지 않았고 전쟁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코사크국은 믿을 수 없는 타타르족 대신에 몰다비아공국을 새로운 동맹으로 결정했다. 몰다비아공국은 오스만제국의 봉신국으로 연방과의 균형추 역할을 했다. 1650년, 보흐단은 코사크군을 보내 자신의 아들과 몰다비아공의 딸을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으려 했다. 
참패 후에 몰다비아의 태도가 모호해지자, 보흐단은 다시 코사크군을 보내 몰다비아를 협박했는데 바티흐Batih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면서 원하는대로 결혼과 동맹이 성사되었고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타타르족은 이후의 전투에서도 폴란드군이 패전할 위기에 몰리면 대열을 이탈했다. 오스만군은 파병할 여력이 없었고 몰다비아와 정략결혼했던 아들이 동맹에 반대하는 왈라키아Wallachia(현재의 루마니아)와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연합군을 상대하다가 전사했다. 
몰다비아와의 동맹도 무산되면서 오스만제국의 체제로 들어가려는 희망도 깨졌다. 

1654년 1월 8일, 보흐단과 코사크장교단이 페레이아슬라브Pereiaslav에서 모스크바차르국의 알렉세이 로마노프Aleksei Romanov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길고도 복잡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1954년, 소련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재통일 300년주년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면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합류하고 차르의 통치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소련학자들의 주장과 달랐다. 코사크국이나 모스크바 누구도 당시에 민족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보흐단은 전체의회를 열며 오스만제국, 크림칸국, 폴란드, 모스크바차르국 중에 하나를 선택하자고 말했다. 장교단도 이미 모스크바를 선택했기 때문에 의회를 열기 전부터 결과는 결정되어 있었다. 동방정교 통치자가 나머지 대안보다 반발이 적었다. 

 



코사크국과 모스크바는 400년 동안 떨어져 았었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차이가 심했다. 그리고 실제 협상에서 그런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보흐단과 장교단이 조건을 제시하자 모스크바사절은 협상자체를 거부했다. 차르는 선출되는 폴란드왕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약속에 대한 맹세를 요구하자 차르는 신하에게 맹세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장 모스크바병력이 필요했던 보흐단은 어쩔 수 없이 일방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코사크국은 조약을 상호계약이며 차르의 보호령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차르는 코사크국을 봉신국으로 간주하고 어떤 권리나 특권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에 차르는 폴란드왕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었다. 코사크국을 인정하고 등록 코사크를 60,000명으로 늘리고 폴란드왕이 인정했던 권리를 그대로 인정했다. 그리고 코사크국의 서쪽 국경선 한계를 없앴다. 코사크가 원하는 대로 확장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차르국과 코사크군은 연방을 상대로 각각 전쟁에 돌입했다. 코사크국은 모스크바군의 도움을 받아 폴란드국경의 우크라이나에서 공세에 나섰고, 모스크바군은 스몰렌스크 부근에서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로 진격했다. 
1654년, 연방군은 크림칸국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방어했지만 1655년 여름과 가을 반격이 실패했다. 코사크군은 리비우를 포위했고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대공국의 수도인 빌니우스Vilnius에 입성했다. 
폴란드역사에 대홍수Deluge로 기록된 참혹한 시기의 시작이었다. 모스크바와 코사크연합군뿐만 아니라 1655년에는 스웨덴군이 발트해를 넘어 공격했고 바르샤바와 고대수도 크라쿠프Cracow가 함락되었다. 
1656년 가을, 스웨덴의 과도한 확장을 염려한 모스크바는 연방과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는데 코사크국은 협상에서 제외되었다. 코사크국이 모스크바의 보호를 받으려는 기대가 무너졌다.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는 대홍수 후에 완전히 몰락해서 수백년 동안 외세에 시달리고 분할됩니다. 


보흐단은 모스크바-폴란드 합의를 무시하고 스웨덴의 동맹인 트란실바니아와 폴란드의 전쟁을 지원했다. 스웨덴은 확실히 연방을 해체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코사크국의 새로운 동맹이 되기 충분했다. 스웨덴은 코사크국이 점령한 벨라루스까지 인정했다. 
1657년 8월, 보흐단은 마지막 단계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코사크족은 그를 국부, 해방자, 최고의 족장으로 추앙했다. 

 

당시 코사크봉기를 그린 영화 Fire and Sword인데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당시 전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