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우크라이나 역사 - 러시아내전과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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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2022. 6. 7.

1. 하바드대학 세르히 플로키Serhii Plokhy교수의 정식 출간물을 인용정리하고 있습니다. 

2. 우크라이나어를 모르기때문에 기존의 지명과 인명을 사용합니다. 러시아의 사관을 공유한다고 비난하지 마시길. 

3, 워낙 길고 복잡한 이야기이니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 9장면 https://blog.daum.net/uesgi2003/1704 을 먼저 읽어두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1919년 초, 볼세비키가 다시 공세에 나섰고 통일을 축하한 지 2주도 안 되어서 정부가 키이우를 포기했다. 우크라이나군 상황이 무척 안 좋았기 때문에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1918년에 이전 정부를 상대로 봉기했던 100,000명의 농민부대 중 25,000명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고양으로 돌아가거나 더 이상의 참전을 거부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지역군벌의 부대로 남았다.
지역군벌은 새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아마추어 수준의 행태를 계속했다.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병력은 갈리키아병사(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에 속했다가 포로가 된 우크라이나인)들이었다. 이들은 1917년 2월 혁명 후에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1919년 7월, 50,000명의 우크라이나 갈리키아군이 강을 건너 포돌리아의 우크라이나군에 합류했다. 처음으로 동서공화국 통일의 성과가 보였지만 갈리키아 병력을 따라 폴란드군이 진격하고 있었다.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우크라이나인으로 1918년에 편성한 제1 우크라이나사단입니다. 

리비우를 폴란드에 내주었어도 새로 편성한 농민부대로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19년 4월, 요제프 할러Józef Haller와 60,000명이 갈리키아에 진입하면서 전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1차대전 당시 폴란드군이 오스트리아군으로 참전했다가 프랑스에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는 이들을 동부전선에 보내 볼세비키에 대항하게 했다. 
할러는 우크라이나군을 공격했고 프랑스가 항의하자 우크라이나 전체가 볼세비키라며 우크라이나군을 동쪽으로 밀어냈다. 1919년 여름, 이렇게 밀린 우크라이나 갈리키아군이 포돌리아의 정부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갈리키아군 50,000명, 정부군 25,000명, 우호적인 지역군벌 15,000명의 병력이 모였지만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의 보수적인 지도층은 정부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했고 갈리키아군 지휘관은 지역군벌과 정부군의 규율에 불만이 컸다. 
서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과 갈리키아군은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발트해와 북코카서스 정부가 볼세비키에 저항하고 있었고 러시아남부에서는 제국장교와 돈 코사크가 백군White Army으로 볼세비키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군을 지원했고 안톤 데니킨Anton Denikin장군(사진 왼쪽에서 두번째)은 1919년 초여름에 우크라이나에서 볼세비키에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자 우크라이나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사회주의혁명 자체를 무산시키고 러시아를 복구시키려 했기 때문에 협력할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서우크라이나는 반볼세비키, 반폴란드 백군과 연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동우크라이나는 갈리키아인을 멸시했던 폴란드와 연합해 볼세비키와 백군에 대항하려고 했다. 양쪽 모두 각자의 전쟁 중이었다. 

 

백군의 콜차크Kolchark제독이 연인과 함께 훈련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옆의 영국군은 군사고문단입니다. 

Admiral(2008년) 영화를 보시면 러시아내전, 특히 전투상황이 잘 나옵니다. 

 

 


8월, 백군과 갈리키아군이 동시에 키이우에 진입하자, 갈리키아군은 백군에게 도시를 넘겨주고 조용히 물러나서 정부와 갈리키아 지휘관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생겼다. 1919년 11월, 티푸스전염병이 돌아서 병사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자 살아남은 갈리키아군은 백군에 합류하고 정부군은 폴란드군과 협상했다. 이렇게 통일 우크라이나의 꿈은 산산조각났다. 
1919년 말이 되자, 우크라이나군이 사라졌다. 원래 전력이 약했던 동우크라이나군은 내분까지 생겨서 패전했고 갈리키아군은 백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폴란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동서우크라이나는 너무 오랜 동안 이질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서로의 시각이 달랐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지도층은 통일 우크라이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군이 사라지자, 우크라이나는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다. 폴란드는 연방시절의 국경선까지 최대한 넓히기 위해 갈리키아를 점령하고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로 진격했다. 백군은 서유럽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러시아로 진입했다. 세계혁명을 부르짖는 볼세비키는 우선 군사승리가 관건이었고 우크라이나의 석탄과 곡식이 반드시 필요했다. 
볼세비키가 키이우를 가장 오랫동안 차지했지만 농촌지역은 계속 저항했다. 볼세비키가 액면가 그대로 토지를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강제로 곡식을 몰수해갔다. 농부는 지역군벌에 합류해 볼세비키에 큰 피해를 주었다. 
레닌은 전략을 바꿔, 우크라이나사회주의소비에트공화국Ukrainian Socialist Soviet Republic을 앞세워 우크라이나어로 선전전을 벌였다. 우크라이나 진보주의자를 볼세비키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귀족에게 몰수한 땅에 대형집단농장을 만드는 계획을 중단하고 농부에게 토지를 배분했다. 

전략이 적중해서 볼세비키는 중부와 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했다. 1920년 4월 말, 폴란드군과 우크라이나정부군이 키이우를 향해 진격했고 초기에는 성공을 거뒀다. 5월 7일, 정부군이 다시 키이우에 진입했지만 이번에는 갈리키아군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정부는 갈리키아를 폴란드에게 넘겨주는 대가를 치렀고 동서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치명타를 날렸다. 
6월 13일, 볼세비키가 반격에 나서 폴란드-우크라이나군을 키이우에서 밀어냈다. 당시 최고 명장 중 한 명인 세멘 부됸니Semen Budenny의 제1 기병군이 퇴각하는 병력을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적군Red Army는 벨라루스에서도 진격해 하루 30km 이상의 전선을 넓혔다. 레닌은 리비우를 점령해 자신의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정부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볼세비키가 패했다. 
1920년 8월 중반, 유럽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군이 바르샤바Warsaw외곽에서 적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비스와Vistula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전투에서 볼세비키의 포위망을 뚫었다. 

 

러시아군의 분열, 폴란드국민의 저항, 지휘관 역량으로 반지의제왕 기병전처럼 대역전극이 일어나 볼세비키의 불길이 폴란드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스탈린의 공이 컸다. 그는 부됸니에게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바르샤바로 진격하는 대신에 리비우를 점령하라고 부추겼다. 이제 적군이 지리멸렬한 상태가 되었다. 10월, 양측은 휴전에 합의하고 폴란드-소련국경선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로 정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의 볼히니아와 포돌리아 일부를 차지했지만 키이우까지 넓혀서 완충지대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소련도 비스와강 전투에서 패해 유럽전체로 혁명을 확장하려던 꿈이 깨졌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대전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채로, 3년 동안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이 혼란스러운 전쟁이 이어지면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유대인은 적군, 백군, 우크라이나군, 군벌 모두의 공격을 받았다. 
포그롬Pogrom(유대인 또는 소수민족 대박해)이 일상화되어서, 우크라이나에서만 유대인 3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백군이 20%, 적군이 10%, 군벌이 25%, 우크라이나정부군이 40%의 책임이 있다. 

 


(크림반도는 아예 타타르정부가 무너지고 우크라이나, 독일, 백군과 적군으로 정신없이 주인이 바뀝니다.)

1921년 3월, 러시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폴란드가 라트비아의 리가Liga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폴란드와 소련의 국경선을 그었다. 폴란드는 갈리키아와 러시아가 점령했던 볼히니아를 얻었다. 우크라이나는 1차대전 전처럼 분할되었는데 이번에는 이등분이 아니라 사등분되었다. 
1918년 루마니아가 점령한 부코비나는 루마니아가 그대로 유지했고, 헝가리가 점령했던 자카르파츠카Transcarpathia는 신생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의 영토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자치권 정도가 고작이었다. 
우크라이나영토를 차지한 4개국은 관용과 억압을 오가며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다. 20세기 동유럽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대세였다. 우크라이나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면서도 민족공산주의라는 혼종을 만들어냈다. 
폴란드령의 갈리키아와 볼히니아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는 민족공산주의 프로젝트가 일어났다. 

1922년 12월, 우크라이나사회주의소비에트공화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맹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 소련)의 창설국가가 되었고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했고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민족구성에서 폴란드인을 최소화시키고 러시아인을 줄이는 대신에 우크라이나인을 늘리려 했다.
1920년대 중반, 우크라이나 인구는 약 3,000만명이었는데 그중 우크라이나인이 80% 정도였고 러시아인은 10% 미만, 유대인이 5.5% 정도였다. 반면에 공산당원에서는 완전히 반대여서 55,000명 중 러시아인이 53%이고 우크라이나인은 24%에 불과했다. 
민족공산주의자는 우크라이나 절대다수가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어와 문화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비 우크라이나인이 다수인 당의 반대가 거셌다. 당은 언어정책으로 러시아인과 친러계 노동자계층을 고립시키고 싶지 않았다. 

스탈린은 권력투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이런 요청을 거부했다. 우크라이나 문화와 러시아 문화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에 측근인 카가노비치Kaganovich를 보내 효과적이고 실현가능한 정책을 발표했다. 
1926~27년 고등교육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과정이 33%였던 것이 1929년에는 58%까지 늘어났다. 우크라이나어 신문도 1926년 30%였던 것이 1932년에는 92%로 늘었다. 1932년 6월, 초등학교의 교육과정 중 75%가 우크라이나어였다. 
우크라이나인 외에 유대인, 폴란드인, 그리스인과 불가리아인 등의 소수민족지역도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갖췄고 자국어로 교육을 했다.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전략적이고 미봉책이었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하나이고 한민족이라고 믿었고 당은 러시아인의 지지가 절대적이라고 결정했다. 

1929년, 소련비밀경찰이 첫번째 대대적인 체포작전을 벌였고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이 우크라이나해방동맹이라는 유령단체를 결성했다며 하르키우에서 재판을 열었다. 검찰은 우크라이나 이민자, 폴란드 정부 등과 결탁해서 우크라이나 독립봉기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중앙라다 부의장이자 우크라이나과학학회의 학회장과 전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 수상 등이 체포되었고 판사는 조작된 혐의를 인정하며 15명에게 사형, 192명에게 수감, 87명에게 국내추방형을 결정했다. 

 

(2차대전까지의 격변은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 경제와 문화여서 중략하겠습니다. 
유럽은 볼세비키혁명을 염려해 완충지대를 만들기로 했고 폴란드의 갈리키아 합병을 인정합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통제했고 폴란드인 이주를 권장하며 갈리키아 동부를 동부 소폴란드라고 부릅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에 폴란드인 300,000명이 갈리키아와 볼히니아 토지를 받고 이주합니다.
반대로 전간기에 우크라이나인 200,000명과 유대인 75,000명이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