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우크라이나 역사 - 역사상 최대 전차전, 쿠르스크전투

댓글 0

현대/기타

2022. 6. 8.

 

우크라이나 역사 이야기가 너무 지루한 것 같아서, 우크라이나 영토 안에서 우크라이나 병사도 참전했다고 우기면서 2차대전, 아니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진 쿠르스크전투를 슬그머니 우크라이나 역사편에 넣겠습니다.

원 자료 자체가 러시아와 소련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2차대전 역사가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독일의 승전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멈췄고, 독일의 패전이 쿠르스크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 히틀러가 만슈타인에게 동부전선 전체를 완전히 위임했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2차대전 최고의 명장인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 패전 후에 붕괴하는 전선을 단 한 번의 반격으로 메웠고, 이후 전투에서도 쿠르스크공세가 아니라 지도의 A안처럼 소련군이 공격해 오게 유도하고 포위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히틀러가 거부하자 소련군이 대비하기 전에 준비가 부족해도 바로 공격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안듣죠. 

 

 쿠르스크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책 한권 수준으로 정리해두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정말 뭐하러 이 정도로 미쳤나 싶을 정도로 전사자료를 모았군요. 지금은 책장 어딘가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있을겁니다.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 쿠르스크Kursk, 1943
독일군과 소련군이 쿠르스크 부근에서 격돌하면서 대서사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줄리안 험프리스Julian Humphrys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1943년 여름, 독일군은 히틀러조차 긴장하게 만든, 위험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는 부하에게 ‘이 공격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고 말했다.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전투 후의 소련군추격과 독일군 반격으로 우크라이나 쿠르스크 부근에 거대한 돌출부 전선이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북과 남에서 동시에 협공해서 돌출부의 러시아군을 포위해 섬멸한다는 계획이었고 암호명 성채Citadel작전이라고 불렀다. 작전에 성공하면 과도하게 늘어선 독일군의 전선을 크게 줄여 병력에 여유가 생겼다. 

독일군은 야심찬 계획을 수행할 병력이 필요했고 다른 전선에서 병력, 전차와 비행기를 차출했다. 결국 동부전선의 전차와 비행기 중 70% 정도가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충분했을까? 일반적인 군사상식으로는 공격군의 전력이 수비군에 비해 3배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쿠르스크의 독일군은 그런 우위가 전혀 아니었다. 쿠르스크 주변의 독일군은 심각할 정도로 열세였다. 

독일군은 성능으로 수량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신형 중전차 판터Panther와 타이거 그리고 괴물전차 페르디난트Ferdinand자주포에 승부를 걸었다. 페르디난트는 전차차체에 대구경포를 장착했다. 
우수한 전차로 러시아방어선을 돌파하면 나머지 기갑군이 전선의 구멍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러시아전차병이 타이거보다 훨씬 무서워한 페르디난트 자주포? 구축전차?입니다. 

엄청난 장갑과 장포신으로 당시 러시아의 모든 전차를 능가했는데, 수비가 아닌 공격에 투입하는 바람에 결정적인 약점이 노출되어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흔한 기관총 한 정 달지 않아서 보병이 마음놓고 접근해 파괴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래는 러시아전차교범입니다. 

 


러시아의 직감
그렇지만 러시아군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돌출부를 그냥 둘리 없었고 러시아군은서방동맹이 전해준 정보로 직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히틀러는 병력을 모으고 신형전차가 도착할 때까지 작전을 연기했다. 러시아군은 여분의 시간동안 엄청난 방어선을 구축하고 병력을 모두 배치했다. 

 


독일군은 쿠르스크 어디를 공격하더라도, 몇 km의 대전차호, 지뢰밭과 철책을 통과해야 했고 그동안 수천대의 전차와 25,000문의 포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주요 지점에는 대전차포가 10m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러시아군은 심지어 공격시간까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방어진지 구축을 해두었고 아래와 같은 방어선이 몇 km나 이어졌습니다. 독일전차부대가 녹아내렸다는 표현이 실감날 정도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전차호 공사사진이 재미있습니다. 여성들이 삽들고, 남성병사들은 악기들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7월 5일 이른 아침, 독일군이 공격에 나섰고 바로 적을 얕잡아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소련의 대대적인 선제포격이 시작되었고 독일군이 노리던 기습은 아예 기대할 수도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방어선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전격전은 아예 불가능했다. 

 


한 러시아병사가 45mm 포탄이 타이거를 맞췄는데도 콩알처럼 튀어나갔다고 기록했듯이 소련대전차포가 독일 중전차에 무용지물이었지만 지뢰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가 지뢰밭에 들어가거나 소련군이 지뢰를 들고 와 진로에 놓았다. 전차에 화염병을 던지거나 부착폭발물을 붙였다. 
페르디난트는 기관총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보병공격에 무방비상태로 당했다.

폭우와 폭염
전투기간 내내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와서 하루는 먼지에 덮였다가 다음 날에는 진흙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뜨거운 전차 안에서는 전차병이 무거운 포탄을 장전하느라 탈진과 열사병에 걸렸다. 쇠약해진 병사들은 메스암페타민Pervitin을 먹고 버텼는데, 전차초콜렛이라는 별명이 있는 중독성 약물로 피로를 잊고 자신감을 높여주었다. 전쟁 중 2억개 이상이 배포되었다. 

북쪽에서 진격한 발터 모델Walter Model원수의 독일군은 4일간의 격전 후에 전력이 다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수백 대의 전차를 격파했지만 소련군은 수적 우위를 잃지 않았다. 독일군이 러시아전차부대를 전멸시키면 바로 다른 부대가 나타났다. 러시아군의 병력과 전차는 끝이 없어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은 지상공격기의 공격에 시달렸다. 겨우 15km를 전진한 후에 멈췄다. 

 

히틀러가 모든 것을 쏟아부어 공격에 나섰지만 러시아군의 강력한 방어선에 막혀 지도에서 흰색 부분 정도만 전진한 것이 고작입니다. 



주요 지휘관
4명의 주역이 약 280만명, 전차 8,000대와 비행기 4,200기를 지휘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원수 
남부 독일군 공세를 지휘했다. 그는 1940년 프랑스점령의 주역이었고 193년 초에는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후에 무너지는 전선을 안정화시켰다. 

 


발터 모델원수
북부 독일군 공세를 지휘했다. 총통의 소방수Führer’s Fireman라는 별명이 있듯이 히틀러는 그를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인정했다. 종전 직전에 자살했다. 

 


니콜라이 바투틴Nikolai Vatutin장군
쿠르스크 소련방어선의 남부 지휘관. 1944년 2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공격으로 중상을 당했다.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Konstantin Rokossovsky장군
쿠르스크 소련방어선의 북부 지휘관.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 중 체포, 고문과 수감을 당하고도 살아남았다.

 


남부의 만슈타인군도 같은 처지였지만 격렬한 저항을 돌파한 후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7월 7일, 만슈타인군이 러시아 주방어선을 돌파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소련군이 급히 예비병력을 투입하자 다시 진격속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7월 11일, 최정예 2 SS전차군단의 기갑사단이 쿠르스크 남동쪽 80km 지점의 작은 마을 프로호로프카Prokhorovka에 접근했다. 
그날 밤, 프로호로프카를 공격하기 전에 휴식을 취했는데 엄청난 전차엔진의 굉음이 울려퍼졌다. 러시아군이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영거리전투
이튿날,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실제로는 다른 전투에 더 많은 전차가 투입되었지만, 800대 이상의 전차가 영거리전투를 벌인 전투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러시아군이 일부러 선택한 전술이었다. 원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면 독일전차의 우수한 공격력을 이길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자신의 유효사거리 안으로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독일전차가 숲에서 나와 들판으로 이동하자, 러시아 제5 근위전차군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Rotmistrov는 ‘스탈Stal, 스탈, 스탈(강철)’이라는 암호명령을 보냈고 러시아전차 600대가 독일군에게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독일외무장관의 아들 루돌프 폰 리벤트로프Rudolf von Ribbentrop가 전차중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경사면에 멈춰서 포격했고 여러 대를 맞췄습니다. 다수의 러시아전차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전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말문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언덕 너머 전방 150~200m에 15대, 다시 30대, 다시 40대가 나타났습니다. 나중에는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T-34가 전속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난전으로 이어졌다. 사방에서 전차가 불탔고 전차병이 모두 죽었다. 서로 들이받기도 하고 탄약에 불붙어 폭발하며 포탑이 날아가는 전차도 있었다. 

불타는 전차에서 탈출한 전차병도 불붙었고 땅바닥을 구르며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탈출하지 못한 전차병은 불타는 강철관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날이 저물면서 전투가 끝났고 양쪽이 모두 물러났다. 

들판은 전차묘지로 변했다. 불탄 차체가 널려 있었고 연기를 내뿜는 것도 있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 피해 50대에 비해 200대 정도를 잃었지만 패배하지 않았다. 

 


이튿날, 히틀러는 작전을 취소시켰다. 러시아군은 쿠르스크 북부에서 반격에 나섰고 연합군이 시실리에 상륙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빼내 이탈리아방어에 나섰다.

러시아군이 남부에서도 반격을 시작하자, 전력이 다한 독일군은 퇴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2달 반만에, 230km를 물러났고 독일의 대도박은 실패했다. 

이후의 상황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를 없애는 작전에서 실패하고, 병력, 전차와 비행기 전력이 참담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소련을 훨씬 큰 피해를 입었지만, 피해를 충분히 복구할 수 있었다. 독일군과 달리 방대한 인적자원이 있었고 군수산업이 폭격이나 원자재부족에 시달리지 않았다. 

독일군은 이제 방어에 전념했고 패전은 시간문제였다. 지역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소련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이자 계속 밀려났다. 이듬해 여름, 소련은 벨로러시아Belorussia(현재의 벨라루스Belarus)에서 바그라티온Bagration작전을 개시했다. 
독일전선에 큰 구멍이 생겼고 러시아군은 단 5주 만에  700km를 전진해 바르샤바 외곽까지 접근했다. 8개월 후, 베를린의 문앞에 섰다. 

 

성채작전과 달리, 독일군은 러시아의 바그라티온작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공군 주력이 본토방어를 위해 모두 옮겨갔기 때문에 러시아공군이 하늘을 지배했습니다. 정찰기도 제대로 띄우지 못했고 러시아군의 대공세에 무방비로 당하다가 중앙집단군 자체가 아예 증발했습니다. 

이후부터 독일군포로의 단위가 몇만명 수준이 됩니다. 


T-34와 판터
1941년, 소련 T-34전차의 등장은 독일최고사령부를 놀라게 만들었다. T-34는 우수한 전차였고 소련 전차병의 자질이 유일한 약점이었다. 

 


독일은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전차모델 설계를 개선하기 시작했고 T-34를 능가할 수 있는 신형전차를 생산했다. 가장 유명한 전차가 5형 판터였다. T-34보다 두터운 장갑과 강력한 포로 러시아전차를 능가했다. 
그렇지만 문제투성이였다. 제대로 테스트하지 않고 실전에 투입했기 때문에 안정성이 떨어졌고 많은 판터가 전투를 벌이기 전에 고장났다. 

 

판터가 안정화되었을 때에는 훈련소에서 바로 온 신병들이 대부분이어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공중전
쿠르스크전투는 전차전으로 유명하지만 하늘에서도 사상최대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양측은 수천대의 항공기를 집결시켰고 적 공군기지를 폭격하고 지상군을 덮쳤다. 
루프트바페Luftwaffe는 지상목표물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초반에는 러시아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연료부족에 발목을 잡혔고 점차 러시아공군이 하늘을 점령했다. 독일공군기지는 야간폭격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