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우크라이나 역사 - 2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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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2022. 6. 19.

이제 다음 편으로 우크라이나 역사 연재를 마치도록 하갰습니다. 

 

러시아 기관지 프라우다Pravda는 스탈린이 사회주의 공업화socialist industrialization와 집단화collectivization의 지도자라는 기사를 썼다. 사회주의 공업화는 소련방식의 공업혁명으로 정부주도 프로그램으로 중공업개발, 에너지생산, 기계설비구축 등으로 산업생산성을 크게 높인다는 뜻이다. 
집단화는 농부를 국영집단농장에 수용해서 볼세비키노선을 지지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으로 신세대를 교육해서 구시대 관리층을 교체하고 적대적인 자본주의환경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세 프로그램으로 전통적인 농업사회를 현대식 공업강대국으로 바꾸고 기존의 농부 대신에 프롤레아티아를 주류 계층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자금조달이 문제였다. 서방세계는 혁명을 주장하는 정부에 자금을 지원할 리가 없었고 농부와 농업의 자본축적만이 유일한 자금원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영토의 2%밖에 안되지만 인구는 20%나 되었고 농업생산량이 대단했기 때문에, 크레믈린은 우크라이나를 공업화 자금줄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가 크레믈린을 잘 설득해 1차 5개년 계획(1928~33)동안 총 예산 중 20%를 받아냈지만 점차 위험한 소련서부보다는 동부로 공업화 우선순위와 예산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우크라이나 최대의 건축프로젝트는 드니프로HES(DniproHES)다. 

 

미국의 전문가를 초빙해 만든 댐입니다. 

1929년 가을, 스탈린은 집단농장 정책을 추진하며 수만명의 당직자와 당원을 농촌에 파견했다. 이들은 농가를 찾아가 개인소유의 땅, 농기구와 가축을 버리고 집단동장에 합류하라고 강요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우크라이나 농촌의 70%가 집단농장에 합류했다. 
1930년 3월 한달에만 1,700건의 저항이 보고되었고 수십명의 소련관리가 살해당했다. 폴란드국경 부근에서는 마을 전체가 달아나는 일도 벌어졌다. 군대와 비밀경찰이 투입되었다. 
1930년, 소련은 75,000가구를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 오지로 추방했고 많은 사람이 병과 영양실조로 죽었다. 농부의 반발이 가라앉지 않자, 스탈린은 지역관리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집단농장의 절반을 다시 농부에게 돌려주었다. 

 


전술적 후퇴는 잠시뿐이었다. 가을이 되자 다시 본격적으로 집단농장을 추진했고 농부들은 수확을 줄이고 가축을 미리 도살하면서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남동부 공업지대로 달아났다. 
스탈린은 농부의 태업을 문제삼으며 과도한 목표량을 요구했고 특히 우크라이나를 가혹하게 대했다. 소련농산물의 27%를 생산하던 우크라이나는 38%의 목표량을 받았다. 겨울이 되자 우크라이나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수십만명이 굶어 죽었는데 키이우 지역에서만 80,000명이 죽었다. 스탈린은 현장의 호소에 귀를 닫고 기근과 아사라는 단어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당과 당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에 대한 공격빌미로 삼았다. 

 


할당량에 미달한 마을에는 생필품배급을 끊고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몰수했다. 1933년 봄이 되자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아사가 일상이 되었다. 봄이 되어도 굶주린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힘이 없었고 가장 먼저 죽어갔다. 
키이우와 하르키우 지역에서는 각각 100만명이 죽었고 오데사 등에서는 각각 30만명이 죽었다. 돈바스 공업지대조차 175,000명이 굶어죽었다.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400만명이 죽어서 1932~1934년 기간 동안 국민 8명 중 1명이 죽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아리안족의 생활권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고 동유럽이 비옥한 땅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필요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바구나이면서 유대인 정착지였기 때문에 나치독일의 목표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1939~1945년 기간동안 우크라이나는 700만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전쟁전 인구의 16%나 되는 피해였다. 
히틀러는 영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상대하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폴란드를 상대하려고 했다. 영국과의 동맹은 실패했지만 러시아와는 폴란드분할에 합의했다. 러시아가 개전을 미루자, 갈리키아와 볼히니아에 우크라이나국을 세우겠다고 위협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국민을 보호한다며 폴란드국경을 넘었다. 

 


리비우를 비롯해 갈리키아와 볼히니아의 주요 도시를 점령 후, 갈리키아와 볼히니아를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 합병했다.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브레스트 등도 우크라이나에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우크라이나정부는 폴란드어 교육, 연극과 출판을 우크라이나어로 바꿨다. 거대지주의 땅을 국유화하고 가난한 농부들에게 배분해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를 높였다. 
그렇지만 소련이 그리스가톨릭교회의 토지를 몰수하고 역할을 제한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밀월관계가 깨졌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정부와 교육기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1940년, 폴란드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북극,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추방했다. 2월에만 약 14만명의 폴란드인이 추방되었는데 5,000명은 도중에서 병과 영양실조로 죽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직전까지 소련비밀경찰은 우크라이나에서 125만명을 추방했다. 
파리가 함락되자 스탈린은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것으로 생각했고 새로 합병한 지역에서 독일에 협조할 제5열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리고 몰로토프-리벤트로프Molotov-Ribbentrop조약으로 인정받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루마니아 일부를 합병하기로 했다. 
갈리키아와 볼히니아에서와 같이, 토지국유화, 외지인등용, 대량 숙청이 이어졌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침공을 1942년으로 예상했지만 독일군은 1년 먼저 기습했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밀과 석탄이 반드시 필요했다. 독일경제학자들은 소련을 침공해도 독일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독일경제를 고사시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1940년 12월, 히틀러는 바르바로사Barbarossa라는 소련침공암호를 승인했다. 12세기 독일왕이자 신성로마제국황제로 3차십자군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는데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3개월만에 볼가강 너머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히틀러는 레닌그라드Leningrad을 최우선으로, 그 다음에 돈바스 석탄광산을, 그 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싶었다. 독일은 병사들에게 월동장비도 주지 않고 투입했다. 

 

바르바로사황제는 말에서 떨어졌는데 무거운 갑옷때문에 익사했다는 설과 갑자기 찬 강물에 뛰어들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작전명은 불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380만명을 투입했고, 독일남부집단군Army Group South은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독일군은 4,000대의 전차, 7,000문의 포, 4,000기의 항공기를 투입했고 하늘을 완전히 지배했다. 
적군Red Army는 소련 서부국경선에 비슷한 병력, 훨씬 더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배치했었다. 그렇지만 노후장비였고 무엇보다 스탈린이 무차별적으로 숙청해서 경험없는 지휘관이 전투를 지휘했다. 
스탈린이 새로 합병한 영토가 오히려 함정이 되었다. 새로 생긴 국경선을 따라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이 없었다. 독일군은 전격전으로 소련방어선을 뚫고 포위해 궤멸시켰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적군은 루츠크Lutsk, 브로디Brody, 리우네Rivne에서 전차를 총동원해 반격에 나섰다가 훨씬 숫자가 적은 독일군전차에게 격파당했다. 독일군은 3주 만에 최대 1,000km를 전진했고 우크라이나 우측강변 대부분을 점령했다. 
적군은 2,500대의 전차와 2,000기의 항공기를 잃었고 병력손실은 파악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8월, 독일군은 우만Uman부근에서 10만명 이상의 적군을 잡았고 키이우에서는 더 큰 전과를 올렸다. 
스탈린은 레오르기 주코프Georgii Zhukov의 조언을 무시하고 키이우에서 병력을 빼내지 않다가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9월 19일, 키이우가 함락되었고 66만명의 포로를 잡았다. 
10월에는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10만명이, 11월에는 크림 케르치에서 10만명이 포로가 되었다. 연말이 되자, 적군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포기했고 350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소련은 퇴각하면서 공장 550개와 350만명의 기술노동자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독일을 해방자로 반겼다. 우크라이나 서부뿐만 아니라 중부와 동부까지도 기아와 집단농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심지어 국가사회주의 수립,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 수장국 회복을 꿈꾸기도 했다. 

 


이런 환영과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발트해 출신 독일인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알프레드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켜 발트해연합, 벨라루스, 핀란드와 함께 제3 제국의 위성국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영토를 볼가강까지 넓히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과 다른 나치 고위직에게 밀려났고 인종이데올로기와 자원착취로 방향이 잡혔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밝혔던 식민지와화 착취가 결정되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를 3개 지역으로 나누어 폴란드, 벨라루스 등과 합쳤다. 

소련의 체포를 피해 폴란드로 피신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가 독일군정보부의 승인을 받아 우크라이나 2개 대대를 편성하고 리비우에 먼저 들어가 우크라이나독립을 선포했다.

 


독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반데라를 체포하고 우크라이나독립 취소를 강요하다가 집단수용소에 수감했고 두 형제는 아우슈비츠Auschwitz에서 죽었다. 나치경찰은 수백명의 민족운동가를 총살했고 1942년 초, 우크라이나민족운동조직은 독일군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1918년 독일군과 완전히 다른 1941년 독일군의 처사에 우크라이나 중부와 동부도 현실을 깨닫았다. 

스탈린은 1929년 제네바협약Geneva Convention이 자본주의의 결정이라며 동의하지 않았다가 1941년 여름에 결정을 바꿨지만 너무 늦었다. 독일은 소련군포로에게 제네바협약을 적용하지 않았다. 소련군포로에게 어떤 대우나 지원도 하지 않았고 즉결처분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1941년 6월 6일, 사령부는 최전선에 적군 정치장교, 당원과 유대인은 바로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나머지는 임시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부상자와 병자는 총살당했다. 지역주민은 적군에게 징병당했던 가족이 같은 처지일 것으로 생각하고 최대한 포로들을 돌보려고 했다. 
나치는 소련군포로를 열등인종으로 간주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다. 독일도 그렇게 많은 포로가 잡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처음에는 많이 죽을수록 더 좋다고 판단했다. 1941년 11월 이후, 독일은 포로가 귀중한 노동력이라는 것을 깨닫았지만 이미 60% 이상이 죽은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발트해 출신은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았다. 전쟁 초기에는 친인척이 포로를 데려갈 수 있었고, 이후에는 경찰대대에 지원해서 동유럽 치안을 맡기도 했다. 전쟁 후반에는 집단수용소나 처형수용소 경비원으로 보냈다. 
우크라이나 유대인은 집단수용소에 가지 않고 도시 외곽에서 처형당했다. 우크라이나에서만 100만명 정도가 처형되었는데, 키이우에서는 2일 동안 기관총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더니 33,761명이 죽었다. 1941년 9월 29~30일의 대학살을 명령한 쿠르트 에버하르트Kurt Eberhard는 종전 후에 자살했다. 
키이우가 함락되고 5일 후인 9월 19일에 주요 건물에 미리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독일군 고급장교가 많이 죽었고 유대인이 소련첩자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29일 월요일에 모든 유대인은 소지품을 챙겨서 공동묘지 옆으로 집결하라는 통지문이 뿌려졌다. 
남성은 모두 군에 끌려갔기 때문에 여성과 노약자가 대부분인 유대인은 영문도 모른 채로 모두 학살당했다. 유대인 인종청소가 처음으로 시작된 바비 야르Babi Yar massacre학살이었다. 이후 전역에서 유대인학살이 자행되었다. 

 

옷을 모두 벗게 한 후에 끌고 가서 총살했습니다.

1942년 1월부터, 나치는 우크라이나의 농산물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 착취했다. 독일이 당신을 부른다! 아름다운 독일로 가자!라는 광고가 실렸고 독일로 향하는 기차가 키이우를 출발했다. 
그렇지만 광고와 달리 노예노동자로 전락했고 인종차별 배지를 달아야 했다. 독일에서의 처우가 알려지자 매달 40,000명의 노동자를 모집하기 어려워졌다. 괴뢰정부는 마구잡이로 체포해서 독일로 보냈다. 
1942년과 43년, 220만명이 독일로 보내졌고 수많은 사람이 독일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하다가 연합군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반역자로 낙인찍혀 소련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