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2) - 샤일로 전투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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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012. 10. 8.


언젠가 따로 정리하겠지만 요즘 유야무야 지나가는 이명박정부와 조중동의 행태가 '10억' 단위는 그냥 웃으면서 지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식 세계화한다고 엄청난 돈을 날려먹더니 이제는 뜬금없는 홈 페이지로 10억을 투입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IT에서 15년 근무하다보니 직접 개발하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의 견적이 나오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 무현 전대통령의 형 노 건평씨의 뭉치돈 비자금은 '혐의없음'으로 일단락했고 그렇게 거품을 물고 떠들어댔던 조선일보는 다시 민족정론지로 돌아갔습니다. 한 명숙씨 혐의도 그렇고 일단 검찰이 던지면 조선일보가 알아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후에 조용히 무혐의처리하던 몹쓸 버릇은 여전합니다. 10년쯤 지나서 자칭 민족정론지를 자처하는 신문의 열독자 세대가 교체되어야 국민의 발 밑에 조용히 엎드리고 두 손을 내밀게 될 것입니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일도 유체이탈하던 그들이니까, 10년 쯤 후의 변신은 놀랍지도 않겠죠.


오늘은 남북전쟁 초기 서쪽에서 벌어졌던 샤일로(Shiloh) 전투 이야기입니다. 

 

모든 그림은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되고 이번에는 인터넷 자료를 사용해서 클릭하면 커지는 그림도 있고 그대로인 그림도 있습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2) - 샤일로 전투


 

1861년 10월, 알버트 시드니 존스톤(Johnston) 장군은 테네시 네쉬빌(Nashville)의 새사령부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남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친구인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지원요청 전신을 보냈다. "지금 당장 2배의 병력이 필요하네"라고 한탄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원병이 제 발로 찾아오더라도 무장시킬 소총도 군복도 없었다. 

 

그림 설명: 남부 서쪽 전선을 책임졌던 존스톤 장군으로, 이 사진에서는 1860년 남북전쟁 이전의 미군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존스톤이 보낸 전신은 모든 지휘관이 늘 하는 지원요청같아 보이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존스톤은 남군의 서부 총병력 중 2/3을 데리고  북군의 침입을 막아내야 는데 컴버랜드(Cumberland) 산맥에서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500km가 넘는 전선을 지켜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아예 미시시피 강을 북군에게 내주어서도 안되고 미주리와 알칸사스(Arkansas)에 북군이 들어오게 해서도 안되었다. 

그러나 존스톤은 겨우 20,000명의 병력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훈련도 안되었고 집에서 가져온 구식 산탄총이나 수발총으로 무장한 것이 고작이었다. 참모는 아예 "그에게 군대는 없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로버트 리 장군이 실력을 증명하기 전까지, 존스톤이 남군 지휘관 중 최고였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이 맡겨졌다. 58세의 미남형의 그는,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이었지만 농부와 면 농장주가 되겠다고 두 번이나 보직을 사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샌프란시스코에서 텍사스까지 1,300km의 기차길을 따라 리치몬드에 도착했고 간단한 환영회를 가진 후에 바로 북군이 노리고 있던 내쉬빌로 달려갔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다른 유능한 장군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시드니 존스톤 한 사람뿐이다."라고 말했다. 

남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북군의 전력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았다. 1861년 가을, 켄터키, 일리노이즈, 미주리에 산개된 북군의 병력은 남군의 2배가 넘었지만 그들도 신병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무장이 좋지 못했다. 그 당시 남북 모두 군대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특히 남군은 동쪽의 아군이 개비하고 남는 무기를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어서 훨씬 심각했다.

더구나 지리적인 문제때문에 서쪽 남군은 증기선으로나 건널 수 있는 큰 강으로 나뉘어져있었다. 쉽게 건널 수 있었던 동쪽의 작은 지류와 달리, 서쪽의 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남군의 전선을 양쪽을 완전히 단절시키는 천연의 장애물인 동시에 북군은 단 번에 남부 깊숙히 침투할 수 있는 천연의 진격로였다.

 

미시시피강은 자연스럽게 북군의 전략목표가 되었다. 윈필드 스코트가 입안한 아나콘다(Anaconda) 계획은, 북군이 미시시피강을 장악한 후에 남부의 항구를 해상봉쇄해서 마치 큰 뱀의 뱃속에서 녹아내리듯이 남부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존스톤에게는 북군이 침입로로 사용할 수 있는 테네시와 컴버랜드강도 중요했다. 컴버랜드강은 테네시 주를 관통해서 흐르는데, 특히 각종 무기와 군수품을 생산하는 내쉬빌을 지나간다. 그리고 테네시강은 알라바마를 관통하는 350km의 침입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림 설명: 이번 이야기인 샤일로 전투 전황지도입니다. 상세한 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보기 좋지만 전체조망에는 이 지도가 더 알기 쉬워서 이 지도를 사용하겠습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1862년 봄에, 북군은 테네시를 지나 알라바마 주경계까지 바로 진격했고 작은 샤일로 교회에서 남군과 첫 번째로 대규모 전투를 벌이게 된다.

  

어쨌든 존스톤은 당분간 얼마 안되는 병력을 가지고 켄터키 남부에 수비선을 치기로 했다. 켄터키가 중립을 선언했을지라도 중요한 주경계선을 그대로 장악하고 있어야 켄터키에 사는 남부지지자들이 진영을 바꾸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부 군수창인 내쉬빌을 방어하고 북군이 남진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수비선의 서쪽 끝 미시시피 강변의 콜럼버스에는 레오니다스 폴크(Polk) 중장의 11,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폴크 중장 역시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면서도 종교인의 길을 선택해 루이지아나 주교였다가 데이비스 대통령의 간청으로 지휘관에 복귀한 55세의 기품있는 사람이었다.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은 폴크였지만 이번에는 1861년 10월의 위기를 직감하고 콜럼버스로 병사들을 급하게 이동시켰다. 강을 내려다 보는 고지에 대포를 옮겨두고 북군의 배가 보이면 언제라도 격침시킬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존스톤은 내쉬빌을 방어하기 위해 시몬 볼리바 버크너(Buckner) 중장에게 역간의 병력을 주고 내쉬빌 북쪽 100km 지점의 보울링 그린(Bowling Green)을 지키게 했다. 이 마을에는 그린과 배런(Barren)강이 흐르고 있어서 북군의 남진을 막을 가장 좋은 위치였다. 겨울이 지나면서 존스톤은 병력을 계속 증강시켰고 나중에는 22,000명까지 늘렸고 지휘도 윌리엄 하디(Hardee) 중장에게 맡겼다. 

북군의 예상침투로를 봉쇄한 존스톤은 펠릭스 졸리코퍼(Zolicoffer)라는 내쉬빌 정치인에게 4,000명의 병력을 주고 동쪽의 컴버랜드 강을 지키게 했다. 마지막으로 군공병대를 급하게 보내 테네시와 컴버랜드강의 굴곡지점에 2개의 요새를 지었다. 헨리(Henry)요새와 도넬슨(Donelson)요새는 전함으로 침투하는 북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남진하는 북군은 중서부 주에서 새 병력이 합류하면서 처음 37,000명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서쪽 북군은 루이스빌(Louisville) 사령부와 세인트루이스(St. Louis) 사령부에게 지휘권이 양분되었다.

 

그림 설명: 프레몬트가 개인 친위부대로 거느리고 다녔던 루이스빌 시민 근위대입니다. 전쟁 초기에는 미국만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이라 유럽식 군복과 전술을 상당히 선호했었습니다.  

 

세인트 루이스 총 지휘관은, 록키 산맥의 협로를 여러 개 발견해낸 것으로 유명한 존 찰스 프레몬트(Fremont) 중장이었는데, 그는 180cm가 넘는 병사들로만 구성된 개인 친위부대를 거느리고 다녀 비웃음을 사곤 했었다. 그리고 유럽 용병들을 참모로 고용했는데 금과 은으로 치장한 군복을 입고다녀 닭 내장으로 치장한다는 비웃음을 샀다.   

1861년 가을, 프레몬트는 멍청한 실수를 하고 만다. 미주리 지역에서 세력을 더하고 있는 남군 게릴라(남북 경계 주는 남북 게릴라가 활발한 테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를 참지못하고 프레몬트는 북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총을 소지한 민간인은 군법재판을 통해 처형될 수 있다는 계엄령을 발표했다. 

프레몬트의 조치에 대한 보복으로 남군은 북부 지지자들을 처형했고 미주리 주 주변은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프레몬트는 남부 지지자의 소유인 노예는 모두 해방된다고 선포해서, 미주리와 캔터키 그리고 북부를 지지하지만 노예해방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수 백만 명을 남부 지지자로 만들었다. 

 

그의 선동적인 선포에 놀란 북부 연맹의 링컨 대통령은 그 조치를 즉시 취소시키고 2개월 후에 프레몬트를 해임시켰다. 그렇지만 프레몬트가 문제만 일으킨 것은 아니었고, 일리노이즈 카이로(Cairo)에서 구성되는 부대의 지휘관에 그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율리시즈 그랜트(Grant) 장군을 임명하는 놀라운 결정을 하기도 했다. 

 

그림 설명: 일리노이즈 카이로에서 북군 신병을 내리고 있는 증기선 알렉 스코트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상당히 큰 사진이지만 이 사진은 그냥 인터넷에서 가져와서 클릭해도 커지지 않습니다.

 

그랜트는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으로 1846~48년 멕시코 전쟁에서 연대 병참장교를 일부러 벗어나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가했었지만 종전 후에는 오지였던 캘리포니아로 발령을 받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강등되었다는 자책감으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1854년에 강제 전역되었다. 

 

농부로서도 실패한 그랜트는 가족이 운영하는 가죽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남북전쟁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기로 하고, 제21 일리노이즈 보병연대의 연대장으로 복귀했다. (그랜트에게 연대장 자리가 주어진 것이 의아하겠지만, 이 연대는 무능한 연대장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문제가 심각한 연대였습니다.) 의외로 그랜트는 단 며칠 만에 연대의 복잡한 문제를 거의 해결해냈다. 

그랜트는 지휘관 자질을 인정받아 1861년 7월, 중장으로 승진되었고 10월 초에 카이로로 발령을 받았다. 강변의 낙후된 카이로에서도 뛰어난 조직력과 단호한 규율로 잡동사니 북군을 전투부대로 만들어냈다. 

 

그림 설명: 전쟁 초기 정장을 갖춰 입은 그랜트 장군입니다. 당시 지휘관으로는 보기 드물게 외모나 복장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서 종전 협상장에서는 남군의 리 장군이 승리자처럼 보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그의 평소 복장과 외모로 수염도 간결하게 정리한 모습입니다.

아래 그림은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그랜트는 뛰어난 조직력과 함께 "적의 위치를 가장 빨리 알아내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 계속 움직이는 것이 전투의 모든 것"이라며 북군 지휘관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공격적인 성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들의 복지를 신경쓰고 신속하게 처리해서 병사들의 신뢰를 얻었다. 

카이로에서 지휘권을 장악한 그랜트는 일부 병력만 데리고 오하이오로 90km 정도 이동해 켄터키 파두카(Padukah)를 점령했다. 이 곳은 컴버랜드와 테네시 강 입구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요충지로 남군의 폴크 장군이 점령하려고 했지만 그랜트가 선수를 쳐서 보병과 대포를 미리 배치시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3,000명의 병사를 증기선에 실어 폴크 장군의 본대 건너편에 있는 미주리 벨몬트(Belmont)를 공격했다. 폴크가 급히 병력을 강건너로 보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랜트는 위기상황에서 침착하게 병사들을 후퇴시켜 과감함과 냉정함을 자신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남군의 존스톤을 압박하던 지휘관 중 한 명은 그랜트와 같은 고향출신인 윌리암 티컴세 셔먼(Tecumseh Sherman) 장군으로, 과묵한 그랜트와는 달리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쉴새없이 중얼거려서 참모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셔먼 장군도 과감한 전술을 선호하고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리는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렇지만 쉽게 흥분하는 셔먼의 성격은 분명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셔먼이 루이스빌에서 작전을 펼치는 동안, 존스톤은 적에게 일부러 전력을 노출시키며 발을 묶어두고 그 동안 병력을 증강하는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존스톤의 명령을 받은 버크너(Buckner) 장군은 보울링 그린 근처를 이리 저리 일부러 오가며 전력을 과장했고 남군 기병 정찰대는 켄터키 중부와 남부를 질주하며 외톨이가 된 북군을 공격하고 알바니와 홉킨스빌을 점령하기도 했다. 

남군의 허세를 실제 전력으로 착각한 셔먼은 크게 놀라 워싱턴에 200,000명의 추가 병력을 요청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셔먼은 신경쇠약에 걸려 잠시 병가를 내기도 했지만 1862년 초에 파두카의 신규 사단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셔먼이 물러나면서 북군의 기조는 이전과 같은 신중 모드로 되돌아가게 된다. 프레몬트 후임으로 온 홀렉(Halleck) 장군은 행정장교 출신으로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 성격이었고, 셔먼 장군의 후임인 돈 카를로스 뷰엘(Buell) 장군도 군대가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어떤 작전도 펼치지 않으려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군의 허세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반대로 어떤 선공도 준비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군대가 45,000명 수준으로 늘어났는데도 움직이지 않아서 홀렉이 뷰엘을 위협하고 달래서야 북군의 공격에 합류할 정도였다. 

 

버크너가 위장공격을 하는 동안, 켄터키 동부를 방어하고 있던 정치인 출신의 졸리코퍼 장군은 4,000명의 병력을 데리고 북군을 향해 밀 스프링스까지 진격해들어갔다. 그가 컴버랜드 강의 북쪽 강변에서 채 자리를 잡기도 저에 북군의 조지 토마스(Thomas)장군이 공격을 해왔다. 

퇴로가 막힌 남군은 공격만이 살 길이어서 1862년 1월 19일 오전에 몇 개 연대가 북군에게 달려들었지만 토마스 장군은 반격에 나서 남군의 측면을 끊었다. 졸리코퍼 장군은 실수로 북군대열에 뛰어들었다가 전사했고 사기가 떨어진 남군은 몇 척의 바지 선이나 증기선에 올라타고 달아났다. 

 

그림 설명: 펠릭스 졸리코퍼 장군이 실수로 북군에게 뛰어들었다가 전사하는 장면입니다. 남북전쟁 자료가 인터넷에 워낙 많아, 제가 스캔하지 않고 옮겨오면 되어서 많이 편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