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고대 역사기록을 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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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기타

2013. 7. 30.


제가 영화, 음악, 공연을 아주 좋아한다고 여러 번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화 이야기가 잦은데 여름 개봉시즌이어서 더욱 그렇게 됩니다. 퍼시픽림이 예상보다 좋지 않은 흥행으로 마감하게 된 반면에 기대하지 않은 흥행작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하정우 주연의 더테러라이브입니다. 하정우씨의 연기는 믿고 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감독의 연출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설국열차보다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 영화관에서는 제발 핸드폰 액정을 꺼주세요. 불필요한 카톡하느라 야광 신호를 뒤로 보내는 것은 민폐 중의 민폐입니다. 거기에 항의를 받고도 계속 하는 것은 진상으로 등극하는 지름길이죠. 저는 상영관에서 콜라컵 던질 뻔 한 적도 있었고 주먹질하고 때릴 뻔 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극장가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습니다. 상영관 내에서 카톡을 해야 할 정도라면 그냥 오지 않는 것이 낫겠죠. 


고대 역사기록을 믿을 수 있을까? 


현재의 그리스와 로마의 전사 이야기는 고대에 작성된 약간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그 기록이 얼마나 정확할까? 


일부는 넓적다리와 인대를 잘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채로 누워있었다. 그들의 목과 목구멍을 열어 안에 있던 피가 빠져나오게 했다. 일부는 머리를 땅에 처박은 채였는데... 얼굴을 덮은 흙으로 숨이 막혀 죽었다. 코나 귀가 잘렸지만 살아남은 누미디아 병사는 자신 위에 죽어 쓰러진 로마병사 아래에서 발버둥을 쳤다. 분노에 눈이 먼 로마군이 자신의 무기를 집어들자 이빨로 물어뜯으며 저항하다가 죽었다. 


죽어가는 그리스 전사 상(기원전 500년)은 에게 사원에 있는 것으로 고대 전사기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 역사학자는 허구와 사실을 구분해야 한다.


상당히 생생한 묘사이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기록은 실제전투가 벌어진 지 200년 후에 작성되었고 당연히 산증인이 남아 있지도 않을 때였다. 그리고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군사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고대 역사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기록자가 머리 속으로 극적으로 그린 상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고대 전투와 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겨진 기록을 참조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와 로마 전사를 연구하는 현대 역사학자는 어쩔 수 없는 고대 기록의 노예인 셈이다. 


고대 전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신뢰성있는 증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시 또는 구술로 역사적 사건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했고 후대의 역사가가 그 사건을 쉽게 기록해서 지금에 와서도 혼란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는 300년 후에 로마에게 이런 기록방식을 전수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와 로마 전사의 문서기록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록 중 일부는 왜곡되고 부정확하며 심지어 각색된 것도 있다. 


우리는 고대 역사가가 기록한 역사는 좀 다르다고 의심해야 한다. 그리스와 로마 역사가는 실제 사건을 묘사하기 보다는 교훈을 가르치거나 권력정치집단이나 개인의 행동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역사를 구술하다보니 위인의 행동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대 역사가는 자신의 작품을 독서보다는 암송용으로 기록했고 유명한 왕이나 장군의 행동과 연설을 각색해서 집어넣었다. 만약 어떤 사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극적인 효과를 위해 그 증거를 포장하고 변형하거나 혼합했다. 전투의 이름, 숫자, 정확한 날짜, 연대기와 지형은 부정확하거나 조작되거나 아예 삭제되는 경우도 많았다. 


전사 기록은 그 일이 벌어지고 아주 오랜 후에 기록되는 경우도 많았다. 전쟁 기록자가 그 시대에 살았던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고대 기록자는 정보원의 신뢰성을 확인하지 않았다. 쓸만한 자료가 거의 없었고 당시에 그 전장을 직접 둘러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고대 역사가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단순히 반복했고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는 정도만 노력했다. 리비우스(기원전 59년~기원후 17년)는 폴리비우스(기원전 200~기원전 118년)의 2차 포에니 전쟁 이야기를 원전으로 삼았고 다시 1세기 후에 디오 카시우스 (기원후 150~235년)가 리비우스의 이야기를 원전삼아 재기록했다. 


아예 원본으로 삼을 이야기조차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폴리비우스의 가장 귀중한 정보원이었던 소실루스와 실레누스 (한니발과 동행했던 그리스 전쟁 기록원)의 작품은 유실되었다. 헤로도투스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참조한 정보원은 기념비 문구와 신탁예언이 전부였다. 

물론 예외도 있다. 아리안(기원후 87~145년)의 알렉산더 원정은 네아르추스, 프톨레미, 아리스토불루스(원정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일대기(그림 참조)를 기록한 신뢰성있는 자료다. 


현재의 전사가들은 전해져오는 번역본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당연히 그 자료는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아니면 군사분야에 무지한 중세 수도승이 옮겨적으면서 오류가 곳곳에 숨어있게 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오류는 숫자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 숫자체계에 대해 잘 모르는 수도승이 가뜩이나 오역되거나 대치된 숫자값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완전히 새 값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역사가는 적의 숫자와 피해정도를 과장하는 경향이 심했고, 수도승의 오류가 겹쳐지면서 기록은 완전히 왜곡되었다. 병력, 거리, 군수품 등의 기록은 보통 숫자로 표현되는데 왜곡된 자료를 지금의 전사가가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사를 다루었던 고대 기록자는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군사경험이 없거나(1) 군사경험이 있는(2) 기록자가 사건이 벌어지고 한참 후에 기록한 경우 그리고 직접 참전해서 원정경험을 기록한(3) 기록자다. 

헤로도투스, 아피안(기원후 95~165년), 리비우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모두 1번 범주에 들어간다. 아피안의 로마 역사는 로마 초기부터 트라얀의 원정까지의 모든 전투를 다루었다. 폴리비우스의 기록과 리비우스의 한니발 전쟁은 포에니 전쟁의 기본 정보원이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의 카르타고와 로마 세력도입니다.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디오 카사우스의 기록은 포괄적이었지만 확인되지 않은 정보원에 의존했고 리비우스의 기록에 의존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전사라기 보다는 소설에 가깝고 군사서술은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정보원이라기 보다는 참조자료에 가깝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폴리비우스, 타시투스(기원후 56~117년)와 라이안은 2번째 범주에 든다. 폴리비우스의 역사는 2차 포에니 전쟁의 사건과 전술 그리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역할에 대해 가장 좋은 자료다. 아카이오스(Achaean) 연합의 기병지휘관이었던 폴리비루스는 아카이오스 전쟁에 참전했었고 인질로 로마에 가기 전까지 그리스군을 지휘했다. 그는 로마에서 스키피오 가문과 친구가 되면서 스크피오의 모든 문서를 읽고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지휘관을 만나 인터뷰하고 전장까지 방문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로마 전쟁에 대한 그의 시각은 정통한 군인의 눈이었고 거의 정확했다. 


아리안도 기병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다키아에 참전했다. 나중에 카파도키아 총독이 되어 2개 군단을 지휘했고 트라얀의 원정에 참여했을 수도 있다. 알렉산더의 원정에 대한 기록은 참전병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고 마케도니아 전술과 군대조직을 가장 잘 알려주는 정보원이 되었다. 

타시투스는 군단 지휘관이었지만 전투를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다. 그의 위대한 기록물 연대기(Annals)는 1세기 당시의 로마군단 전투와 장비에 대해서만 종합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군대경험이 있다고 해서 보다 정확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되며 병사였던 기록자는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다. 살루스트(기원전 86~35년)는 일리리쿰과 캄파니아 그리고 북아프리카 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풍부한 병사였지만, 그의 유구르타(Jugurthine) 전쟁 (로마가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를 상대로 한 전쟁. 유구르타왕은 결국 로마로 끌려가 처형되었다)은 숫자, 날짜, 거리와 병력 자료는 별로 믿을만 하지 않다. 


유구르타 전쟁 당시의 로마군입니다.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요세푸스(Josephus, 기원후 37~100년)는 로마를 상대로 그리고 로마군에 합류해 참전한 베테랑으로 로마군 장비와 무기에 대해 매우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고 있지만 다른 내용은 신뢰성이 없다. 그의 기록 유대(Jewish) 전쟁은 로마의 입김이 크게 반영된 기록일 수도 있다. 


동시대의 전투에 대해 기록했던 병사-기록자 중에서는 투키디데스(기원전 460~395년),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 크세노폰(기원전 431~352년) 그리고 아에네아스 타크티쿠스(기원전 431~352년)이 두드러진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정판을 기록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육상과 해상 모두 참전했고 기원전 5세기 당시의 그리스 팔랑스 전쟁과 해상전술을 직접 목격했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당시의 전술과 전략을 따라올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카이사르는 비평집 Commentaries에서 골의 알레시아 공성전,게오르고비아 전투 등의 다양한 전투에서 있었던 로마 군단의 전투와 공성전을 서술해서 기원전 1세기 당시의 로마의 군사력을 알 수 있는 최고의 정보원이 되었다. 

크세노폰은 아테네 용병장교로 생애 대부분을 군복무로 보냈다. 그는 여러 그리스 국가에 고용되어 동지중해에서 활동했고 심지어 페르시아군에도 고용되었었다. 크세노폰은 많은 그리스 국가간 또는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목격했고 기원전 4세기 당시의 그리스 육상전투를 가장 잘 알려주고 있다. 그의 최고 기록물인 원정 Annabasis는 페르시아왕 키루스군에서의 복무, 쿠낙사 Cunaxa 전투(키루스왕에게 고용된 그리스군은 굉장한 활약을 했지만 키루스왕이 전사하자 후퇴를 했다. 그리스로 페르시아가 강하지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알렉산더가 원정에 나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에서의 패배, 소아시아에서 그리스군을 지휘해 1,600km를 후퇴한 경험을 잘 알려주고 있다. 기병이었던 그는 기병술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크세노폰 기록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영토입니다.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검은 점선이 크세노폰과 10,000명의 그리스 용병의 후퇴경로입니다. 


아네아스 탁티쿠스는 초창기 그리스의 역사를 전사중심으로 기록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전쟁에 대해 여러 개의 구술기록을 남겼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공성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유일하다. 이 기록은 요새화된 도시를 방어하는 상세한 방법을 담고 있다. 펠로폰네소스의 그리스 용병장교였던 아네아스는 에게와 소아이사에서 복무했고 기원전 362년 만티네아 전투(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최대의 육상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기록은 그리스 전쟁을 풍부한 그림으로 묘사해서 특히 가치가 높다. 


만티네아 전투는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패권다툼이었기 때문에 팔랑스 대형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식이었다고 하는군요. 


이런 고대기록이 가지는 오류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가 기댈 수 있는 다른 자료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고대 전사연구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원본을 해독할 수 있는 고전학자의 힘이 절대적이다. 그렇지만 고전학자의 강점은 언어일 뿐이고 군사부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고전학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사를 사소하게 취급했고 거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19세기의 유럽대학 교육은 원전을 해독하는 고전교육이 대부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많은 귀족계급은 고위장교가 되었고 고대의 전투기록을 연구해서 군사적 가치를 찾아냈다. 바실 리델 하트, JFC 풀러, 한스 델브룩 그리고 조지 베이스와 같은 군인겸 역사학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대 전투기록을 다듬었다. 

19세기 말에 일어나 2가지 계기로 고대 전사기록에 대한 연구가 좀더 경험에 의존하게 되었다. 먼저 19세기는 가정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확인한 후에 사실로 수용하는 발명과 발견의 시대였다. 사상 처음으로 전사학자도 고대 전쟁연구에 정신의학, 약학, 영양학, 지도학, 금속학, 공학과 다른 과학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현대전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규모 정규군과 예비군을 유지하려면 병력과 물자를 치밀하게 관리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서 하루에 한 명의 병사가 얼마나 많은 음식과 물을 필요로 하는 지, 1개 여단이 다양한 조건 하에서 얼마나 빨리 행군할 수 있는 지, 특정 거리를 행군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새와 마차가 필요한 지 그리고 야전에서 군대가 얼마나 오래 주둔할 수 있는 지, 다양한 유형의 공격으로 어떤 상처를 입게 되는 지, 적의 포화, 사고와 질병으로 얼마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고 죽는 지를 서류로 집계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군사과학은 이전의 전쟁기술을 완전히 대체한 것이다. 


새 연구방식은 당시 유럽군대가 사용하던 예비군 동원체계의 영향도 받았다. 정규군은 비교적 작은 규모였지만 예비군은 18세에서 45세 사이의 모든 남성을 동원했기 때문에 비교도 안되는 규모였다. 크림 전쟁과 1차 세계대전 중간의 시기에 많은 전투가 있었고 예비군은 참전하거나 군사교육을 받았다. 예비군에는 군사학을 배운 교수와 대학생이 있었고 대학으로 돌아간 후에 고대 전사기록을 연구할 때에 자신의 군대경험을 더 활용하게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새 방식은 신뢰를 받고 있었고 고전학자이면서 전사학자인 교수들이 유럽대학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차대전에서 많은 학자가 죽었지만 말이다. 전후에 살아남은 학자들, 요하네스 크로마예르와 조지 베이스의 고대전사의 전투 지도책 Battle Atlas of Ancient Military History과 한스 델브룩의 4권짜리 전쟁술의 역사 History of the Art of War와 같은 기념비적인 기록이 만들어졌다. 

전후의 정치격동과 2차대전의 재앙은 다시 한 번 고대 전사연구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다. 미국에서는 전사가 한 번도 관심을 모은 적이 없었고 고대 전사연구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작은 분야로 남아있다. 



1980년대부터는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고대전사에 대해 경험기반의 방식이 등장했고 전자혁명덕분에 전세계 도서관과 원격지의 학자 서재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학자들끼리도 즉시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재정지원도 시작되었다. 

예를 들면 옥스포드 대학은 4세기의 3단 갤리선(그림 참조)을 재현해서 운용특징을 직접 실험했다. 


새 연구덕분에 고대 역사학자는 더 많은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라젠비와 앤더슨의 그리스 전쟁에 대한 논문,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칸나에 전투 그리고 필립 사빈의 포에니 전쟁의 전투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근접전의 전술 그리고 공포, 체력소진과 사기가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쿠스 융켈만의 병사의 짐, 속도와 인내력을 실제로 측정해서 고대전투에서 어떤 영향을 주었는 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도날드 엔겔스는 마케도니아군의 병참술을 연구했고 조나단 로스는 기원전 264년~기원후 235년의 로마군의 병참술을 분석해냈다. 카렌 메츠와 리차드 가브리엘은 고대무기의 살상력에 대해 좋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고대 역사학자는 고대 전투기록을 원하는대로 분석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당시의 전투가 어땠는 지를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고대전투를 완벽하게 분석하려면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지향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까지는 불가능하다. 도시화, 산업화와 양차 세계대전으로 고대전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변했다. 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Chaeronea는 아예 쇼핑몰로 바뀌었다. 

1차대전 이후에 특히 지형이 크게 바뀌었는데, 라이프치히 대학의 고대 전사학과장 요하네스 크로마예르와 비엔나의 전쟁기록실장 게오르그 베이스가 고대의 주요 전장을 찾아내 현재와 대조를 했다. 

군사지도 팀을 고용해서 전장을 방문하고 각 사이트의 지형도를 만들어내느라 10년을 보냈다(그림 참조). 

그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전사학자의 조언을 받아서 두 사람은 지도에 부대 배치와 기동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들의 고대 사의 전투 지도책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48년)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기원전 33~34년)까지의 그리스와 로마의 전장을 168개의 칼라 지도로 설명하고 있다.


지도책은 1922년과 28년 사이에 여러 번 출간되었는데, 전체 세트를 출간할 비용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전체 세트를 가지고 있는 학자나 도서관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2차대전을 거치면서 많은 책이 파손되었는데 2008년까지 겨우 28세트만 보존되어서 외부로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2008ㄴ년에 캐나다 온타리오 킹스톤의 국방사관학교가 개인소유의 지도책을 출간해서 캐나다와 유럽의 군사 도서관과 전사학자들에게 전달했다. 

크로마예르와 베이스의 연구덕분에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고대의 피로 물든 전장을 조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