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나폴레옹의 총력전 그리고 스페인의 저항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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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2014. 7. 4.


6월 30일 하루에만 사라고사에 1,400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한달 후에는 도심의 병원에 포탄이 떨어져 환자들이 불에 타죽고 시민이 불붙은 환자들을 꺼내는 참사가 벌어졌다. 한 프랑스 목격자는 사라고사가 마치 연거푸 터지는 화산과 같았고 거리는 시체로 덮였다고 기록했다. 

포탄과 수류탄 폭발로 건물의 잔해가 거리에 쌓였고 결국 성문이 부서졌다. 베르디는 항복을 권유했지만, 저항군은 '전투와 단검'이라는 답변을 했다. 베르디는 시내에 진입할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성문까지 부수고도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몇 달 후에, 프랑스군은 경험많은 장 란Lannes 원수가 훨씬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왔고 사라고사의 방어도 훨씬 두터워졌다. 프랑스군은 12월 한 달에만 42,000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으며 사라고사 성벽을 두들겼다. 사라고사에 군인, 시민 그리고 외곽의 피난민까지 몰려들면서 티푸스 전염병이 번졌고 1월에는 매일 350명이 죽어갔다. 



프랑스군은 도시에 진입했지만 그 이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말 그대로 집을 하나씩 점령해나갔다. 집에 화약을 설치하고 터트린 다음에 벽을 허물어 돌덩이로 만든 다음에 다음 집으로 옮겨갔을 정도였다. 양쪽의 병사가 조그만 구멍에 총구를 넣고 방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건물잔해로 길이 사라져서 공병이 돌을 치우고 막대기로 표시한 곳이 새 길이 되었다. 

결국 사라고사는 2월 중순에 항복했다. 사라고사에서 죽은 시민만 50,000명 이상인데 사라고사의 원래 시민 숫자보다 더 많았다. 프랑스군은 사라고사를 점령했지만 지방의 게릴라전때문에 병사들의 피해는 늘어갔고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미국이 2003년에 이라크를 점령한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과 연합군은 이라크의 치안과 평화를 위해 길고도 고생스러운 내전을 벌였고 형식적인 지역정부의 지원도 받았다. 이라크 국민 중 일부는 자신의 안녕만 생각했고, 일부는 외국군을 적으로 생각했고, 일부는 반군에 가담했다. 반군은 정규전에서 미군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민 틈에서 섞여서 비정규전을 가져갔다. 미군은 방어시설 안에만 머물러야 했고 밖에서는 중무장 호송차량을 이용해야 했다.

한 해병은 "같은 마을에서 반군을 거듭해서 소탕해도 그 마을은 달라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스페인에서도 이라크 정부와 같이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허수아비 왕정이 들어섰고 친프랑스파라고 불린, 자칭 개화된 스페인 관료가 협력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은 저항과 멀리 떨어진 상태로 살고 있었고 심지어 프랑스군을 반기지는 않았어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게릴라의 숫자는 늘 40,000명을 넘지 않았다. 


게릴라의 숫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수의 프랑스군(탈영병, 정찰병, 경계병, 전령 등)이 보이면 공격했고 저항을 만나면 바로 퇴각했다. 1807년 11월 20일, 시레라 데 가타를 너머 포르투칼로 향하던 프랑스군 719명 중 80명이 중간에서 실종되었다. 

"유령군대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었는데 마치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 코와 같았다."


 

프랑스군은 작고 기동력있는 게릴라를 추격하기 보다는 몇 곳의 거점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은 통제불능이 되었다. 그들은 마드리드에서 프랑스까지 연결되는 주요 도로만 장악하려고 했다. 스페인 북부, 나바레Navarre 총독 레이유가 1810년에 보낸 편지를 보자. 

"불행하게도, 스페인의 다른 많은 지역과 같이, 우리의 힘은 대포 사정거리까지 뿐이다. 스페인인은 우리가 물속에서 밭을 갈고 있다며 아주 정확하게 비꼬고 있다."



클릭하면 약간 커집니다. 프랑스군의 원정, 스페인의 저항, 영국군의 전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도이니까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양한 사람이 게릴라에 투신했다. 군인과 도적 출신이 지휘했고 '신부'와 '할아버지'같은 다양한 별명을 가졌다. 도적이 게릴라군 행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군만큼이나 동족을 괴롭혔고 프랑스 상인이 통행세를 내며 건드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게릴라군은 해산된 스페인 부대가 주축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대의 모습을 가져갔다. 계급, 부대구성, 군복과 대포(프랑스군에게서 노획한)까지 갖췄다. 

1813년. 나바레의 왕이라고 불린 바스크 게릴라군은 6,000명, 10개 연대를 보유했고 푸른색 군복을 입고 정규전을 충분히 치를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부대를 계속 게릴라전에 주력하면서 38,000명의 프랑스군의 발목을 잡았다. 



나바레의 왕이라고 불렸던 프란시스코 에스포스 이 미나입니다. 고야가 그린 초상화입니다. 그는 웰링턴의 스페인 원정군에 합류해서 프랑스군과 싸웠고 페르디난드의 복위에 반대하다가 추방당했습니다. 


게릴라전의 무한한 동력은 종교였다. 엄청난 수의 성직자와 영향력은 프랑스군도 놀랐다. 1808년, 스페인의 토지세 중 25%가 카톨릭 몫이었다. 1천만 명의 인구 중 신부는 3만, 수도승(수녀와 다른 성직자)은 12만 명이나 되었다. 성직자는 쉼없이 침략자에 대항하는 설교를 했고 심지어 침략군을 죽여도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1808년, 스페인 교리문답은 프랑스를 "예전에는 기독교였지만 지금은 이단"이라고 판정하면서 그들은 사냥감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군 장교 대부분은 이전에도 티롤이나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게릴라)의 저항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도 이전에 주효했던 진압방식을 사용하려고 했다. 게릴라 활동지역에 기동군을 집중 배치시키고, 인질을 잡아두고, 게릴라를 지원하는 마을을 시범삼아 처벌하고, 무기를 소지한 시민을 즉결처형하고, 현지 군대를 징병해서 경비를 맡겼다. 

나폴레옹부터 형에게 마드리드 시민을 본보기로 처형하라며 잔인한 진압을 추천했다. 그는 게릴라의 가족을 프랑스로 압송하거나 게릴라 지역에 중과세를 부과하고 집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잔인한 진압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페인 북부지역이 잠시동안은 조용해졌다. 프랑스군은 지역 귀족이나 지주와 협력하고 기동군은 무기를 소지한 성직자와 포로로 잡힌 게릴라를 모두 처형하는 양동작전을 썼다. 아예 살리엔테Saliente 마을을 지도에서 없애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인질을 잡고 현지 군대를 징병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라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성공은 피상적이며 저항을 잠시 멈춘 것에 불과했다." 저항은 계속 되었고 하루에 평균 25명의 프랑스군이 죽어갔다. 부족한 병력은 프랑스에서 급하게 모은 신병들로 채워졌다. 


1810~1811년, 프랑스군은 점차 정규군처럼 발전하는 프란시스코 에스포스 이 미나의 군대와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노레 샤를 레유Reille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성직자의 반감, 늘어가는 게릴라, 프랑스군의 무기력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부족한 병력을 계속 빼내간다고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1811년 4월에 레유를 비난했다. 무기력하고 너무 관대하다는 이유였다. 

황제에게서 꾸중을 들은 레유는 큰 충격을 받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811년 7월 8일, 그는 수감 중이던 40명의 게릴라 용의자를 총살하고 다른 170명도 총살하겠다고 경고했다. 


부르고스 총독은 게릴라 3명을 처형하고는 창문 아래에 매달아 두었는데 가족이 한 명을 몰래 가져가자 붙잡아서 그 자리를 대신 채워넣었다. 프랑스군의 잔인한 진압은 반대로 더 많은 피를 불러왔다. 프랑스군의 기록에 따르면 게릴라도 프랑스군 포로를 잔인하게 처벌했다. 몸을 반토막내거나, 눈을 뽑거나 생식기를 잘라 입에 물렸다. 정찰하던 프랑스군은 동료가 헛간 문에 못박혀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게릴라 활동마을은 대가를 치뤄야 했다. 1809년 초, 독일용병 부대 중 일부가 아레나스 마을을 돌며 보급품을 구했는데 처음에는 환영하던 마을 주민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병사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아레나스 지역에 대대적인 보복명령이 떨어졌고 프랑스군과 독일용병은 주민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길거리에서 여성을 성폭행했고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벽에다 집어던지며 즐거워했다. 그리고는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 

4년 전에도 스페인을 약탈하고 방화했던 부대가 포르투칼에서 패전하고 지나던 길에 포르토 다 모스 마을 주민 200여명을 성당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모두 죽였다. 


그 당시의 잔인한 현장은 1863년 이후에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처음에는 개화된 스페인인으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초상화까지 그렸던 프랑시스코 데 고야는 프랑스군의 멈출 줄 모르는 만행에 태도를 바꿨다. 그는 전쟁의 재앙Disasters of War라는 에칭화를 그리면서 프랑스와 게릴라 양쪽 모두의 만행에 대해 분노했다. 유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적나라한 장면을 세밀하게 기록에 남겼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도 스페인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게릴라도 프랑스군을 몰아내지 못했다. 에스포스 이 미나의 게릴라군이 정규군 수준까지 강력해졌지만 전장에서 프랑스군을 맞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수만 명의 프랑스군의 발목을 붙잡아두었고, 나폴레옹은 그 귀중한 병력은 러시아와 같은 정말로 중요한 전장에 투입하지 못했다. 프랑스 병사는 스페인의 벽에 "스페인 전쟁: 병사에게는 죽음을, 장교에게는 파멸을, 장군에게는 재산을"이라는 낙서를 남겼다. 


웰링턴의 영국군이 포르투칼에 상륙하고 스페인에서 게릴라군과 합세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리고 부관 윌리암 베레스포드Beresford가 탈라베라, 부사코, 바다호스, 살라만카, 비토리아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뒀다. 

1809년~1810년, 포르투칼로 밀려난 영국군은 요새를 대대적으로 짓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았다. 그리고 1813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스페인 주군병력을 대거 빼내가면서 웰링턴은 프랑스군을 피레네 산맥 너머로 밀어냈고 조제프 보나파르트 왕정은 무너졌다. 


러시아 원정, 독일 등에서 크게 패한 나폴레옹은 이제 프랑스 방어에 급급했고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조제프의 수송마차가 약탈을 당해 온갖 귀중품과 기밀서류를 빼앗겼다. 조제프 보나파르트도 프랑스로 도망갔다가 동생이 폐위당하자 미국 뉴저지로 다시 달아났다. 그곳에서 한적한 농촌 귀족의 삶을 살았는데 그 지역은 오션 스프레이(미국의 유명한 식품회사)의 크렌베리 밭이 되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스페인 독립전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역사천재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The Pride and The Passion이라는 영화를 몇차례 봤기 때문입니다. 

소피아 로렌, 프랭크 시나트라, 캐리 그란트와 같은 명배우들이 열연을 했었죠.


먼저 병력을 모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스페인군의 초대형 포를 천신만고 끝에 아빌라 요새로 끌고가 도시를 공격하는 장면입니다. 포탄 장전모습이 말도 안되지만 1957년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관련 자료들입니다. 설명없이 그대로 나열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게릴라처럼 초라한 모습은 의외로 프랑스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