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로마군단의 무덤 페르시아 – 율리아누스 황제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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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2014. 10. 15.


로마군단의 무덤 페르시아 율리아누스 황제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팔루자Fallujah, 라마디Ramadi, 바그다드Baghdad 사마라Samarra 지난 10 동안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지명이다. 1,600 전에도 율리아누스 황제가 원정길에 나서면서 생소한 도시는 문명세계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동서양의 강대국, 로마와 파르티아(사산 페르시아) 7 동안 지금의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로마는 동진하고 파르티아는 서진을 해 셀레우코스 제국을 분할점령하면서 두 제국은 700년이 넘는 분쟁을 겪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땅이라는 그리스어. 지금의 이라크) 사산 페르시아의 영토 대부분으로 지금의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수도 크테시폰Ctesiphon 있었다.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이 로마의 곡창지대였던 것처럼, 티그리스Tigris 유프라테스Euphrates 사이의 옥토는 페르시아의 곡창지대였다. 그리고 파르티아와 사산 페르시아의 기병이 마음껏 풀을 뜯을 있는 전략요충지이기도 했다.

 

디아클레티아누스Diocletian (기원후 297) 재임기간 동안 로마는 페르시아왕 나르세스Narses 밀어내며 로마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티그리스 너머의 땅까지 합병했다. 현재의 시리아 북동부, 이라크 북부와 터키 남부의 쿠르드 지역이 모두 로마의 손에 들어왔다.

페르시아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지만 로마에 대응할 힘을 기르는 데까지 세대는 기다려야 했다.

 

기원후 309, 호르미즈드Hormizd 2세가 죽자 페르시아 귀족은 무능한 왕자를 죽이고 아직 미망인의 안에 있는 유복자에게 왕관을 물려주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왕이 샤푸르Shapur 2세는 강력한 군주로 페르시아를 70 동안 통치했다.


 


호르미즈드 2세가 로마군 지휘관을 포로로 잡은 모습입니다. 


337 콘스탄틴Constantine 1세가 죽자, 샤푸르는 로마에게 복수전을 펼치기로 했다. 338, 346, 350년에 그의 군대는 로마군을 격파하고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약탈했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의 강력한 요새 도시는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 티그리스강을 다시 건너가야만 했다.

 

그는 이후 350~357 기간 동안 동쪽의 강력한 적인 백색 훈족White Huns(일명 에프탈족) 침입을 막는데 골몰했다.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아낸 샤푸르는 그들을 흡수해 359년에는 로마군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많은 기병으로 지평선을 가득 채운그의 군대는 유프라테스강의 범람으로 발길을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미다Amida 돌렸다. 샤푸르는 아미다를 점령해 약탈했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다시 겨울숙영을 위해 후퇴해야 했다


360 , 페르시아군은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와 로마의 요새도시 개를 점령했다. 지난 원정에서도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았던 니시비스Nisibis 이번에도 샤푸르의 공격을 막아냈다.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2세는 국내외의 때문에 항상 배후를 조심해야 했고 사촌 플라비우스 클라디우스 율리아누스(율리안)에게 서로마군을 맡기고 라인강 일대를 지키게 했다.

율리아누스는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공부만 하던 사람이었는데도 라인강을 넘어온 게르만족을 차례라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강너머까지 추격해서 국경을 강화시키는 놀라운 실력을 보였다.



율리아누스와 서로마군이 기원후 357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게르만족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를 견제하고 너무 유명해진 조카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서로마군의 핵심전력을 소아시아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율리아누스는 명령을 따르려고 했지만 군단은 반란을 일으키고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율리아누스는 난처한 상황에 몰렸다. 명령을 따르면 군단은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다. 군단의 요구를 따르면 본국의 황제와 내전을 벌여야 했다. 그는 반란을 선택했다.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 국경에서 병력을 빼내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361 11 3 내전에 불안해 하던 로마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일이 벌어졌다. 콘스탄티우스가 급사를 했고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들어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국내를 안정시킨 후에 곧바로 안티오크Antioch 이동해 페르시아의 위협을 근원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362년부터는 훈족의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샤푸르와의 계약이 만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계속 서진해서 100 후에 유라시아 스텝을 넘어 서로마를 위협하게 된다.

강력한 전력을 잃은 샤푸르는 율리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의 분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사절을 일부러 모욕해서 자신의 분명한 뜻을 밝혔다.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만 모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혐오했던 콘스탄틴의 궁전에서 기독교인으로 자랐지만 교육은 아테네 그리스 학교에서 철학수업을 받았다. 그는 오랜 종교에 심취했고 기독교를 배척해서 배교도라는 별명을 하나 얻었다.

그는 서로마군에 있을 때만 해도 다교도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동로마군과 함께 하면서 이교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동맹군이자 기독교인인 아르메니아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363 3, 율리아누스는 최대 10 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넜다. 그는 카레Carrhae 들렀다. 기원전 53, 로마는 파르티아 페르시아와 이곳에서 번째 전투를 벌였고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와 2 명이 죽고 1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패를 당했었다.

이후 로마는 파르티아 궁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방패를 보강하고 기병과 경궁병을 대폭 늘렸다.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설 때에는 언제나 마름쇠를 가지고 갔다. 그렇지만 아무리 무기를 보강하고 전술을 바꾸어도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300년대 당시의 로마군의 무장입니다. 우리가 로마군의 전형으로 생각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마름쇠입니다. 주로 기병을 막는 방어장치였습니다.

 

카레는 로마에게 나쁜 기억만 안겨주었다. 기원후 217, 카라칼라Caracalla 황제는 카레의 유명한 달신전 성지순례를 하던 중에 암살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크라수스Crassus 군대가 전멸했던 근처이기도 했다.

(카라칼라 황제는 속주시민에게도 로마시민권을 인정하는 자비로운 황제였지만 페르시아 공주와의 결혼과 군대와의 반목으로 경호대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율리아누스는 훼손된 달신전을 방문한 후에 복구를 명령했다.

 

고대신에게 기원을 올린 그는 원정길에 올랐고 번째이자 가장 치명적인 오판을 했다. 3 명의 별동대를 만들어 아르메니아군과 함께 이란 북서부의 메데아Medea 지역을 공격해 페르시아군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로 했다.

로마군은 이전에도 페르시아 깊숙이 침공했던 적이 있었다. 기원전 36,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크라수스의 패전을 보복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메데아를 침공했다가 2 명을 잃는 일이 있었다.

기원후 231, 알렉산드르 세베루스Severus 황제가 세갈래 길로 페르시아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메데아를 무인지경으로 휩쓸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협력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로마군의 후퇴길은 지역을 잘아는 궁기병에게 막혔다. 결국 세베루스의 남부 별동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참패를 당했다.


율리아누스는 이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병력 1/3 아르메니아로 보내 아르메니아 기병과 함께 메데아를 공격한 후에 남쪽으로 내려와 페르시아 수도 크테시폰 공략에 합류하게 했다.

율리아누스는 본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진격했는데 대열은 평원에 길게 늘어졌다. 아랍동맹 기병이 좌측을 경비했고 우측은 모리타니아Mauritania Gaul 기병이 엄호했다.

 

로마군은 고르디아누스Gordianus 3세의 기념비를 지나갔다. 그는 기원후 244년에 사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에게 팔루자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친위대에게 살해당했다.

로마군 사이에는 샤푸르의 이복형인 호르미즈가 있었다. 그는 323년에 탈출해 로마기병을 이끌고 있었다. 원정이 성공하면 호르미즈드가 사산 왕에 올라 로마와 협력할 예정이었다.

 

로마군은 아나타Anatha 요새도시를 포위하고 관대한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수비군은 페르시아군이 멀리 있고 보복이 두려워 성문을 열었다.

아나타를 불태운 율리아누스는 계속 남진해서 틸루타Thilutha 요새를 다시 포위했다. 수비대장에게서 중립약속을 받은 후에 다시 원정로에 올랐다.

 

4 , 로마군은 버려진 디아키라Diacira 들러 그대로 남겨진 곡식과 소금을 노획한 후에 불태웠다.

이제 페르시아군 선봉대가 로마군 정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샤푸르는 훈족 동맹도 없고 3 명의 로마 별동대가 북쪽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율리아누스에게는 소수의 경기병과 궁병만 내보내 진격속도를 늦추려고 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로마군의 약탈로 집을 잃은 아랍전사들이 힘을 보태주었다



부족장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로마군진영에서 1km 밖에 나타났다. 율리아누스는 화살 사정거리 밖에 병사들을 정렬시킨 후에 전력을 다해 적에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로마군은 대형을 갖춘 후에 천천히 접근하는 전술이 보통이었는데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공격을 받은 페르시아 궁병은 화살을 날리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라마디와 팔루자 사이의 수로에는 페리사보라Perisabora 요새가 있었다. 나중에 안바르Al-Anbar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에도 그렇게 불리는 지역이다.

수비군은 강과 수로 사이에 도랑을 파서 사방을 물로 채웠다.

 

적대적인 부족을 등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율리아누스는 항복을 권유했다. 수비군은 항복하지 않았고 로마군은 밤새 도랑을 메우고 공성무기를 배치했다. 하루 만에 성벽이 무너졌고 로마군은 성안으로 진입했다. 수비군은 높은 절벽으로 후퇴해 계속 저항했다.

로마군은 마지막 성채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자 공성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성탑을 수비군은 그제서야 항복조건을 내밀었다.수비대장 마메르시데스는 절벽 아래로 혼자 내려와 호르미즈드와 협상했다. 율리아누스는 2,500명이 모두 페르시아로 가도 좋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후에 페리사보라를 불태웠다. 그렇지만 페르시아는 마메르시데스의 모든 가족을 말뚝에 박아 처형했다.



로마군이 헬레폴리스라고 부르던 그리스식 공성탑입니다. 

 

마오자말카Maozamalcha 직접 정찰하던 율리아누스는 기습을 받고 목숨을 잃을 했다. 화가 그는 도시를 점령하기로 했다. 번의 공격이 실패하자 로마군의 장기인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도시 주변에 겹의 토성을 세우고 도랑을 메우고 지하갱도를 파들어갔다.

기병은 페르시아군의 접근을 막고 군수품이 반입되지 못하게 막았다. 결국 완강하게 버티던 요새도시는 지하갱도에 무너졌고 이제 수도 크테시폰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페르시아 황제는 방대한 영지를 소유했는데 그의 빌라에는 야생동물원까지 있었다. 로마군은 동물원의 모든 동물을 잡아 모처럼 배부른 식사를 했다.

지금까지 로마군 견제에 그치던 페르시아 별동대는 이제 수도가 위협을 받자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로 했다. 페르시아군은 티그리스강 반대편에서 로마군의 도강을 기다렸다.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군이 밤에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밤에 도강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모든 지휘관이 반대를 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80명을 실을 있는 수송선이 여러 동원되었다. 수영을 잘하는 병사는 나무방패에 의지해서 강을 건넜다. 번째 부대가 동쪽강변에 도착하자 페르시아군이 경보를 울리고 횃불을 던져 불을 밝혔다.

율리아누스는 횃불을 페르시아군의 총공격으로 보고 전병력의 도강을 명령했다.

 

아침이 되자 양쪽 군대는 처음으로 백병전을 벌이게 되었다. 페르시아군은 급하게 동원한 코끼리를 투입했고 율리아누스는 몸을 사리지 않고 최전선을 돌아다니며 명령을 내렸다.

어둠이 내리자 페르시아군은 크테시폰의 성벽 안으로 달아났지만 로마군은 추격하지 않아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 페르시아군 2,500, 로마군 70 손실로 율리아누스는 다시 임기응변으로 작전을 성공시켰다.


 

로마군의 최종목표인 크테시폰은 이전에도 트라얀Trajan,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urelius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점령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대였던 파르티아는 요새건설 지식이 없었던 반면에 사산 페르시아는 로마의 건축술을 배웠고 크테시폰의 성벽도 그만큼 두텁고 높아졌다.

크테스폰을 점령하려면 살인적인 메소포티미아 여름 동안 길고도 고통스러운 공성전을 각오해야 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곳에 있었다. 북쪽으로 나누어 보낸 별동대가 지금쯤이면 남부로 내려와 자신과 합류해야 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군이 페르시아 침공을 두려워하며 로마진영에서 이탈했고 메데아를 떠돌던 별동대는 샤푸르가 이끄는 페르시아 본대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

 

크테시폰의 시민은 휴전을 제안했지만 율리아누스는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로마군 진영에 몰려든 페르시아 이탈자와 피난민은 잘못된 정보를 많이 알려주었다.

이제 율리아누스는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크테시폰을 무력으로 점령하기에는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별동대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수도를 버리고 떠난 샤푸브와 페르시아 본대의 위치도 알지 못했다. 행군로에 있던 모든 도시를 불태웠기 때문에 식량을 구할 곳도 없었다.

이대로 주저하다가는 배후를 끊겨 말라 죽을 수도 있었다.

 

데려온 병력 1/3 배를 타고 식량을 구하는 중이었다. 페르시아 배반자 누군가가 이들을 투입하면 크테시폰을 함락시킬 있다는 정보를 주었고 율리아누스는 모든 배를 태우라고 명령했다. 군단병은 불타는 배를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율리아누스는 선원까지 동원해 티그리스 동쪽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지역은 로마군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어서 후퇴하더라도 식량을 구할 있었다.

이번에는 페르시아의 차례였다. 그들은 로마군의 진격로에 있는 모든 농장을 불태우고 가축을 가져갔다. 불길이 얼마나 거셌던지 지금의 바그다드 부근까지 갔던 로마군은 불길이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려야 정도였다.

 

북쪽의 위협을 막아낸 샤푸르가 남쪽으로 내려와 별동대와 합류했다. 이제 로마진영에 있던 아랍부족도 판세변화를 읽고는 페르시아군으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길고도 행군을 계속했다. 배를 불태웠기 때문에 티그리스강을 건널 없었고 포로까지 데려가느라 대열은 6km 넘게 이어졌다. 그리고 식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페르시아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측면과 후위를 공격하며 계속 로마군의 발목을 잡았다. 결정적인 피해는 주지 못해도 멀리서 날리는 화살 그리고 기습은 로마군의 전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363 6 26, 로마군이 사마라에 도착하자, 페르시아군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위기를 느낀 율리아누스가 갑옷을 챙겨 입지도 못하고 급히 나섰고 친위대까지 전투에 휘말리면서 황제는 홀로 떨어져 있었다.

근거리에서 던진 창이 그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고 후방으로 옮겨졌다.

황제의 부상을 로마군은 대열을 무너트리고 페르시아군에게 달려들었고 코끼리와 두터운 화살세례도 그들의 분노를 막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시각으로 그린 율리아누스 황제의 부상장면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로마군은 승리를 거뒀지만 황제를 잃었다. 율리아누스는 그날 밤에 죽었고 군단장들은 군대 내에서 황제를 선출하기로 했다.

서로마 그리고 게르만 군단장은 이교도였고 동로마 군단장은 기독교였다. 협상안으로 유명한 장군의 아들인 참모장 플라비우스 요비아누스Jovianus 선출되었다.

요비아누스는 선왕과 같은 지휘능력은 부족했지만 북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후에 샤푸르와의 협상에 성공해 로마국경선을 넘는데 성공했다.

 

로마는 샤푸르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밖에 없었고 메소포타미아는 200 동안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율리아누스의 야심만만했던 원정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갈등은 이후 300년을 지속되다가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인 아랍민족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영원히 합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