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개혁,원불사

    원불사 단현 2012. 7. 29. 14:22

     

     

    이 글은 진흙속의연꽃 게시판의 글

    [장선우 감독의 공개편지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묻습니다”]- (필독바람) 

    의 글에 제가 쓴 답글을 옮긴 것입니다.

     

     

     

     

     

    일개 영화감독?이 불교에 관한 책이나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기에 그저 그려러니 했던 것을 참회합니다.
    더구나 초기불교경전과 교학공부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신 후 불교사상사(불교교리변천사)까지 상세히 공부하신 것이 글에서 여실히 나타나 있어 존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위 글은 질문이라기 보다 한편의 법문으로서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은 분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설법이고 강의입니다.
    많은 재가 단체에서 장선우 감독을 아니 법사님을 모시고 강의를 들을 기회를 가지길 소원합니다.

    말씀처럼 불교는 대승 혹은 힌두교로 변질된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한국 대승불교와 티벳불교는 특별히 더 변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보태서 몇 줄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글을 적습니다.

     

     

     

    대승경전을 보는 바른 시각

    반야심경과 금강경에 속을 것인가?

    원불사 단현

     


    초기불교 시대를 지나 불교사의 위대한 전법사 아쇼카 대왕 시대에 대왕은 나라를 불교승단에 바칠만큼 불교를 숭상합니다.
    모든 불교정사마다 식당을 지어 전국에서 나는 산해진미를 스님들이 공양할 수 있도록 보시한 이후, 그 맛있는 공양물에 눈이 어두운 외도들 중에 방대하기 이를데 없는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줄줄 외우는 힌두논사들이 불교 승단에 귀의하게 됩니다.

    그 이후 본래 논장이 발전하지 않았던 초기불교교단에 일대풍파가 일어나는데 바로 부파불교를 위시한 대승불교입니다.

    힌두논사들은 힌두경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핵심 사상인 공과 아트만(참나)를 가져와, 나와 세상 모두가 허망하고 허무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공이라 하고, 여몽환포영로전이라고 하고 한 마디로 皆是虛妄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상이나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것이어서 내가 행복한 이후 세상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현법 현실주의인데,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이 현실이나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펴기 위해 모든 일체법이 무상하고 나 역시 무상하여 무아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힌두논사들은 이 무상과 무아를 죽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체법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이라고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반야부경전입니다.

     

    니까야에는 허무주의 공이라는 단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허망한 것(아공)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한 것(법공)이라는 단어는 힌두논사들이 만든 것이지요.



    가장 먼저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무상이 아니라 허망한 것인 공이다(조견오온개공).
    색은 즉 허망한 것이다(색즉시공).
    허망한 것이 색이다(공즉시색).
    제법이 모두 허망한 것이다(제법공상).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허망한 것이다(불생불멸).

    라고 무상(단순히 변한다는 것)을 허무주의 염세주의로 변질시킨 후

    수상행식도 없고(무수상행식)
    안의비설신의도 없고(무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도 없다(무색성향미촉법). - 5온 12처 18계 역시 없거나 허망한 것이라는 것.
    무안계 무의식계 무무명 무노사로 부처님의 교학을 무시하거나 부정한 뒤

    결국 고집멸도 조차 없는 것(무고집멸도)이라고 하면서 사제 팔정도까지 부정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초기불교 근본 교리교학을 송두리채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이후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야 내가 단 하나라도 설한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여래께서는 하나도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아닌 것이랴!"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 부처님은 스스로 근본불교교리를 하천한 것으로 버리셨다고 주장한 후에

    모든 것은 개시허망하여 제상이 비상(공)임을 본다면 진리(참나)를 본다면서(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상은 허망한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물 건너 갔다(所謂佛法者 卽非佛法 :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이 금강경인 것입니다.


    이후 유식론자들은 차츰 본색을 나타내어 무아마저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허망한 것(假我)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트만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서 브라만 혹은 힌두신과 합일하면 곧 해탈이고 그 아트만(참나)가 계속 윤회하는 것이라는 힌두교리를 그대로 불교에 적용한 것입니다.

    결국 훗날 무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불교로 유입된 힌두논사들은 무아도 유아도 아닌 어정쩡한 단어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는데...

    아뢰야식 여래장 진아 주인공 그놈 그것 하나 법성 자성 품성 실체 진여 참생명 근본자리 공성 견성 주시자 소소영영한 이것(이뭐꼬) 한물건 본래면목 등등... 한 없이 많은 이름으로 마치 무아가 아닌 그 무엇이 있어 영구히 존속한다는 상주론으로 변질시켜간 것입니다.

    결국 진제종정께서 항상 하시는 법문이 "부모미생전에 본래면목이 뭐냐? 그것은 참나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 해탈열반이니라..." 라고 설법하시는 것입니다.
    .

    .

    아쇼카 대왕 초기까지는 불교승단에 힌두논사들의 유입이 별로 없었지만(아쇼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가 오염되지 않은 근본불교를 그대로 스리랑카로 전함), 아쇼카 대왕의 후기 불교승가에 대한 처우나 공양의 질이 현저히 좋아진 이후 승가에 탁발이 필요 없어진 다음, 불교승가로 대거 유입된 힌두논사들은, 정사에 들어앉아 경전상 불요의경들을 해석한다는 구실로 논쟁을 일삼았고, 이론적으로 일가를 이룬 지도자급 승려를 중심으로 부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무아를 넘어 어떤 식이 있어 존속한다는 유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설일체유부 경량부 독자부 등의 유식사상이 유명한데, 설일체유부는 49일 중음천 사상을 만들어 한국 대승불교의 49재 천도재에 유익하게 활용되는 근거를 남기기도 햇을 정도로 무아사상을 유아사상으로 변질시켜갔습니다.

    이때 힌두논사인 용수가 불교논사로 하루아침에 전향한 후 즉각적으로 한 일은 무아에서 유아로 흐르는 설일체유부 경량부 독자부 등 힌두논사들이 점령한 부파불교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유부의 유아 유식사상을 무아사상으로 환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제법무아라고 하면 될 것을, 힌두교의 공사상(나나 세상 모두가 꿈같고 환상같고 거품같고 그림자 같은 것)을 가져와 나를 허망한 것(가아, 아공)으로 바꾸고, 다시 세상(일체법) 역시 허망한 것(법공)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이 무상(제행무상)하고, 나라는 것은 무아(제법무아)라는 가르침을 힌두교사상을 따라 둘 다 허망한 것이라고 단정지은 것입니다.

    더구나 중론 대지도론 등으로 단순한 허망하다는 뜻의 空이라는 단어에 지극히 복잡한 철학적 의미부여로 인해, 중관학파를 위시한 후대 불교는 공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극심한 논장空불교, 공철학불교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한국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근본불교 교학인 5온 12처 18계 37조도품 4제 8정도 12연기 등이 모두 空에 매몰되어 버리고 우리 스님들은 죽으나 사나 공 하나밖에 모르고 다른 교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참나나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참나는 힌두교의 아트만입니다.

    나와 세상(일체법)은 여몽환포영(공)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 그래서 아트만(참나)를 찾는 것이 해탈이라는 힌두사상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대승불교지요.

    부처님의 무상(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마저 변하는 것이다)과 힌두교의 공(이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한것, 여몽환포영, 허무주의 염세주의)과는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상하다고 하셨지 허망한 것이라고는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무상하기에 집착하면 괴로운 것이라는 것과, 허망하기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무상하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가 아닌 무아라는 것과, 허망하기에 참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불교적인 해탈은 내 안의 절대적인 참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여 탐친치를 여힌 것이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나' '내것'이라는 상을 가지거나, '내가 단멸한다' 혹은 '이 세상은 별 볼일 없지만 저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이 세상은 잠깐 그쳐가는 시험적인 삶이고 진정한 삶은 내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등의 상을 가지므로서 세상 사람은 악해지거나 허무주의에 빠져서 불행해지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상 무아를 체득한 자만이 욕심과 악의에서 벗어난 진정한 성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참나라거나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불교의 바른 교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결국 불교는 그 옛날 초기불교 당시에 잠시 무상 무아 사상을 가졌었다는 정도의 사상사로 기록될 뿐, 지금 인도사상사에서는 공과 참나를 찾는 힌두교의 한 부파로 인식될 뿐, 대승불교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정체성을 찾는 것, 그것은 바로 초기불교사상인 무상 무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공사상과 참나사상의 힌두불교의 원천이 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부터 퇴출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어느분의 답글 :

     

    대승경전(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등)은 분명히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금강경은 불교의 진수를 말씀하신 우주의 진리로 모든 분이 읽고 따라야 하는 불교의 핵심경전입니다 .

    금강경은 나我라는 생각이 멸진된 나我, 즉 진정한 무아의 경지에 들어서 대적정삼매를 통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을 증득하는 수승한 '붓다의 지혜'를 말씀하시고 계시며, 진정한 무아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여야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정수를 나타내신 경전입니다.

    '금강경 내용을 비방하거나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이렇게 왜곡을 하여 중생을 혼란과 혼돈으로 몰아가지 않기를 촉구합니다.

     

     

    단현의 답글 :

     

    부처님은 현상계가 무상하다고 하셨지 실체가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만사가 공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힌두논사들의 말이고
    만사가 공이라는 말은 역시 힌두논사들의 말이지요.

     

    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나라 모든 대승인들은

    반야경과 금강경 모두 무아를 극대화시킨 초기경전 비슷한 걸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저 두 경전은 분명히 부처님의 무상을 공으로 부정했고,

    무아 역시 공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간과한다면 정법으로 나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무상과 허망이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그 사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제법무아와 공이 다른데도 그것마저 분별하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힌두교가 더 좋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것입니다.

     

    차라리 조계종 진제종정스님처럼    
    일체법이 여몽환포영이기 때문에 참나를 찾는 것이 해탈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대승불교는 허망과 참나를 찾는 힌두교일 뿐
    무상과 무아의 불교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스님들이 까딱하면 말씀하시죠.
    "다 허망한 것이여! 모두가 공이여!"

     

    그러나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집착하는 이 현상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나라고 참나라고 집착하는 오온이 무아라는 것을 깨달아라"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를 깨달아야 해탈이라는 것과
    허망하기 때문에 참나를 찾는 것이 해탈이라는 것을 분간할 줄 아는 불자되시기 바랍니다_()_

      

    #
    반야경이나 금강경은 참나 유식으로 넘어가기 전,
    무상과 무아를 공으로 대체한 초기대승불교 경전이라는 것은 앞서 밝힌 바대로입니다.

     

    그러나 중기 대승불교에서
    무상이기에 무아라는 초기불교 교학체계로는,


    참나를 찾는 것이 궁극적인 해탈 열반이라는 힌두교적 깨달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이 무상이 아니라 허망한 것으로,
    나 역시 무아가 아니라 가아 즉 허망한 자아라고 만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힌두논사들의 천년에 이르는 줄기찬 작업으로

    불교는 완전한 힌두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 불교사상사인 것입니다.

     

     

    어떤분의 2번째 답글 :

     

    님의 글은 연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아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면서 억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법인과 사성제, 팔정도, 그리고 연기설을 정확히 공부하시고 글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는 공사상이 아니라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공사상이 무엇인지, 범아일여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도하는 글을 쓰시 않기바랍니다.

     

     

    단현의 답글 :

     

    먼저 범아일여 사상이라는 것은 인도 바라문들이나 후대 힌두논사들이
    세상은 번잡하고 덧없고 허망한 것이지만 현상계 넘어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그 어떤 실체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만든 것이 梵(우주적 자아)지요.

    그리고 我 역시 짧고 덧없는 인생(假我)이지만 그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 아트만(참나)입니다.

    결국 이 두 사상의 근본에는 공(이 세상은 덧없고 허망한 여몽환포영로전)이라는 기본 개념이 전제되었고
    힌두논사들은 일체법(현상계)를 부처님의 무상이 아닌 여몽환포영으로 변질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힌두교의 베다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공사상이고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또한 대승에서는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에서 아뢰야식 여래장 진아 진여 참나 등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공부가 없이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쓸데 없는 대승경전 공부 이제 그만 하시고 인도사상사와 불교철학사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이런 기본 개념을 가지고 공부하면 불교사상사의 핵심과 맥을 뚫는데 크게 도움될 것입니다.

    그리고 힌두교도 대승불교도 초기불교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설을 논하기는 자리가 너무 협소합니다.
    전화주시면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분의 3번째 답글 :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과 불교의 공사상은 반대되는 사상입니다.
    이 두사상을 동일하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범아일여 사상은 한마디로 유有론입니다.

    공사상은 무아, 그리고 우주 본체의 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실체가 없다는 연기의 법칙(무상 고 무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초기 경전(5부 니까야, 4아함부)에서 힌두교의 불생불멸의 유론을 비판하셨습니다.
    불교의 위대한 사상(공, 무아 사상)을 힌두교 사상(유론, 범아일여론, 아트만론)으로 매도하시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힌두교는 실아實我를 주장하지 가아假我)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현의 답글 :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과 불교의 공사상은 반대되는 사상입니다>라고 말씀하셨군요.

     

    그렇습니다.
    힌두교의 공사상과 초기대승경전의 공사상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대승경전의 공사상과 후기 대승경전의 공사상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일체법이 허망한 것이라는 힌두사상을 반영한 반야경이나 금강경의 공사상과
    그 공사상에 복잡한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후기대승불교에서 자리매김한 공사상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초기대승불교에서는 힌두교의 공사상(여몽환포영)을 가져와 무상 무아를 모두 허망한 것(공)이라고 했지만
    용수 등의 중관학파를 그치면서 공이라는 단어는 그저 허망한 것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복잡하기 짝이 없이 철학화하고 확대해석하고 침소봉대 되어 단순한 힌두교적 공사상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기에,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공 하나를 해석하는데 몇년이 걸려도 부족할 정도로
    공이라는 것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이 되어버린 것이고 우리 스님들은 죽으나 사나 공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스님들에게 가서 초기불교 교리에 대해서 말해보라면 입 한 번 못 뗍니다.
    아무것도 모르지요. 오온이 뭔지조차 모릅니다.

     

    앞서 수없이 얘기했지만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교학을 아예 모르는 것은
    힌두논사들이 만든 반야경이나 금강경 같이 초기교학을 모조리 공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몰시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개무시한 결과지요.

     

    무상 무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힌두논사들이 우파니샤드의 공사상을 가져와 금강경이나 반야경 만들어서
    불교의 무상 무아사상을 그저 허망한 것(공)으로 만든 것입니다.

     


    <범아일여 사상은 한마디로 유有론입니다. 공사상은 무아, 그리고 우주 본체의 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실체가 없다는 연기의 법칙(무상 고 무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군요.


    그렇지요. 힌두교는 우주적 자아(범)와 개인적 자아(아트만)을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불교로 유입된 힌두논사들은 부처님의 무상 무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힌두교의 공사상이 무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힌두교의 공사상은 그저 일체법이 허망하다고만 말하고 있지요.


    다만 용수 등이 무아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공으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무아를 무아로 설명하지 않고 공으로 설명했기에 결국 불교를 망친 장본인이 되었다고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초기 경전(5부 니까야, 4아함부)에서 힌두교의 불생불멸의 유론을 비판하셨습니다.
    불교의 위대한 사상(공, 무아 사상)을 힌두교 사상(유론, 범아일여론, 아트만론)으로 매도하시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힌두교는 실아實我를 주장하지 가아假我)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라고 했군요.


    부처님은 600페이지 40권이 넘는 5부니까야 그 방대한 초기경전에서 무상 무아만을 주장하셨지요.
    그래서 브라만교의 그 어떤 실체가 영속한다는 사상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니까야에서 허망하거나 철학적인 공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힌두화 되어버린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상 무아와는 정반대로
    세상은 허망하고 나에게는 실아(참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이런 사상은 결국 보살을 불러들였고, 신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영혼이 있는 것으로 오도되어
    전체 국민의 95%나 되던 불자가 해방 후 1.7%에 지나지 않던 기독교에 너무 쉽게 개종해 가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매 주 일요일 교화나 성당을 가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2005년 조사기준으로 개신교 750만명, 천주교 350만명인데, 일주일에 한 번 절에가는 불자가 10만 명은 될까요?
    절에가는 불자는 일년에 1000원짜리 한장이라도 시주하는 분이 300만명이나 될까요???

     

    불교가 신도 영혼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전에는 오래지 않아 불교는 이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화되었던 것처럼...

     

     

    한국불교개혁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