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개혁,원불사

    원불사 단현 2012. 10. 28. 18:34

     

     

     

     

    어느 글의 답글로 적은 글입니다.

     

    용수는 왜 칼 맞아 죽었는가?

    원불사 단현 2012.10.28

     

     

    대승불교의 중도와 초전법륜경에 나타난 수행의 중도가 같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공을 말하는 것이고, 그 공은 한국 대승불교인들이 끔찍하게 좋아하고 소의경전으로 삼는 금강경 중에 가장 핵심이 되기 때문에 大尾를 장식한데서도 충분히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을 한 마디로 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공은 이 세상 일체는 오고 감이 없는 까닭에(不去不來) 생주이멸이 성립하지 않고(不生不滅), 까닭에 유위(현상계)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계이고(色卽是空), 유위가 성립하지 않는 까닭에 열반조차 성립하지 않는다(無苦集滅道)<용수 근본중송 7장 33게>.

    즉 중관학파들은 이 세상이 마치 환상 같고 꿈과 같고 신기루 같다며<중송 7장 34게> 오직 공일 뿐, 부처님의 근본교학은 쓸데없는 것(無色受想行識 無苦集滅道 無無明 無老死)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나와 대상이 공(夢幻泡影露電)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 열반(照見五蘊皆空 渡一切苦厄 究竟涅槃 無上正等覺)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반야심경>.

    용수는 초기 힌두논사들의 반야부 경전의 공사상이 논리적으로 좀 부족하다 생각하여 힌두공을 분석하여 철학화 논리화 하는데, 공성과 연기와 중도가 그 하나의 의미이다<용수 회쟁론 71게>. 그 의미를 축약한 것이 八不中道이고 이 팔불중도로 근본불교와 아비담마불교 교학의 허구성을 증명한 것입니다.

    성철스님의 중도는 양 극단을 무시한다 비판한다는 용수의 중도이지, 양 극단의 중간을 의미하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에 있어서의 苦와 樂의 중간인 팔정도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현실적이고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가르침으로 오직 이 세상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결코 환상속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힌두교는 "세상 일체가 無常한 것이 아니라 虛妄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단 한 가지 꼭 아셔야 할 것은 반야부경전(금강경 반야경 유마경 등)은 부처님의 무상 무아의 근본교학을 부정하고, 허망하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단순한 힌두 공사상으로 복귀를 주장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브라만교나 기독교의 주장과 동일한 것으로 이 세상은 짧은 순간 사는 것이고 사람이 영원히 살곳은 저 세상이라는, 현생은 허무주의 염세주의라는 것입니다.

    용수는 이 공사상을 펼치기 위해 힌두논사들의 반야부 경전을 발굴하여 유포시키면서 반야부 경전의 공사상을 논리적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그의 저서 根本中頌(中觀論頌)에서 반야부 경전과 베다 우파니샤드 속의 공사상의 핵심을 가려내어 8개의 不中道를 만듭니다. 더 나아가 용수 이후 만들어진 유마경에서는 공이라는 것은 문자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면서도 不二法門이랍시고 33개의 중도를 만들어 냅니다<유마경 9장 入不二法門品>. 물론 그 공의 핵심은 브라만이 입김으로 만든 세상은 환상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없다는(無生法忍), 진리를 깨달으면 도무지 애착하거나 집착하여 번뇌 고통을 일으키지 않아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전에 부파불교를 형성한 힌두논사들이 아비달마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마음이라고 주장하거나, 어떤 識이 있어 윤회한다거나, 我空이지만 法有라거나 해서 부처님의 무상 무아를 부정할 때, 반야중관자들이 공사상을 들고나와 我空 法空을 주장한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모든 근본교학을 부정해버린 공사상은 결국 부처님의 근본사상과는 너무나 달라지고 변질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용수의 공이라는 것은 여몽환포영로전일뿐만 아니라 아지랑이 신기루(건달바성) 허공 메아리 거울에 비친 모습 허깨비로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마치 실제가 아닌 악몽이 나를 식은 땀을 흘리게 만들듯이 꿈 꾸는 것과 같아서 세상만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집착하는 것이 곧 고통이라고 가르치는<김성철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74p>, 본래 브라만교 베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힌두교도들은 공(나와 대상은 환상계)이기 때문에 브라만이 그 몸을 가루내어 불어서 만 생명체에게 심어준 원소(아뜨만)를 찾아 브라만과 합일하여 해탈하자는 것이고, 후대 불교도들은 역시 공이기 때문에 참나를 찾아 해탈하자는 것으로, 결국 불교가 힌두화 되는 시작이 중관 공성주의자들이었고 곧 불교는 힌두교의 한 학파로서 힌두교 속으로 매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철저히 해체하고 분석해서 무상 무아를 체득하여 깨달아라는 근본불교의 어렵고 복잡한 교학은 아무 쓸데 없는 헛소리다.", "그런 분별심은 팔불중도로 깨끗이 거두고, 거저 모든 것은 허상이고 공하다는 것을 철저히 직관 하였을 때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깨달아 아라한이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쉬워도 너~~~무 쉬운 힌두 공사상...

    경허선사의 파계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계행청정 사무량심을 닦아 깨닫고 욕심과 악의가 추호도 없는 성인이 되어 인천의 스승으로서 모범된 수행을 하라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뒤로하고, 세상이 허망한데 무슨 분별인가 공사상을 깨달은 자는 지극한 무해행이 곧 깨달은 자의 표식이 될 것이라는 허황된 중관 공사상을 쫓아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국 대승불교는 오직 공밖에 모르고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중도만 입에 달고 살지만, 그들은 자기가 얼마나 무식한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불교사상사적인 공부 없이 힌두 공이나 용수의 중도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라고 주장하고서는 일평생 바른 불교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래 글은 2012.09 미디어붓다의 기사에 답글을 올렸더니 가객이라는 분이 댓글을 주셔서 다시 쓴 글을 올렸습니다.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는 어떻게 다른가?  

    원불사 단현 2012.09.19

     


    공이라는 것은 근본불교의 모든 교학을 뿌리 채 부정하고, 일체법이나 사상 철학, 모든 것을 뭉뚱거려 공이라는 단어 하나 속에 매몰시킨 힌두교의 핵심사상으로, 나와 대상 즉 우주 전체가 브라만이 창조한 환상계의 원리로 한마디로 여몽환포영로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중 용수는 반야부의 공사상을 그럴듯한 팔불중도로 철학화한 것이지만, 성철스님이나 성철교수는 결국 철학화한 공의 중도 속에 매몰되어, 중도가 곧 진리인 양 모든 것을 중도라는 이름으로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비행기티켓 보다 그 티켓을 담은 봉투가 진리고, 장난감 보다 그 포장케이스가 더 예쁘 보인다고 장난감을 내던지고 케이스를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같은 사고인 것입니다.

    본래의 공은 본래 무상무아를 설명하거나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반야부경전을 쓴 힌두논사들과 용수의 팔불중도나 중관학파는 공 속에 모든 불교의 교학을 매몰시킨 것이지요. 

    무상 무아를 깨닫기 위해 상견과 단견을 타파하기 위해 세우신 부처님의 중도와, 힌두 공사상의 철학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정립한 용수의 중도가 얼마나 같고 다른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힌두불교의 근본사상인 공을 고도로 철학화 한 것을 기준한 사고로, 마치 썩은 새끼줄로 반도체의 나노단위를 재려하는 것이나 같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모든 것이 허망한 환상계라는 힌두교적 사고로 보면 부처님의 그 복잡한 교리체계가 웃음 한 마디 보다 더 부질없는 것이고, 더구나 용수의 팔불중도나 중관학파의 공철학으로 보면 더욱 하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야부경전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이고 공이며, 금강경에서는 부처님 자신의 입으로, 버린 뗏목이고 비설이라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힌두논사들의 공사상은 인도의 비주류사상이었던 근본불교를 타파하고 힌두교로 환원시키는 본래의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고, 한국 대승불교는 아직 공병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반야심경 금강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 교학이나 논장, 위빠사나 명상에 심취한 재가불자들에게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5, 다양하고 풍요로운 부처님의 중도사상 http://blog.daum.net/bolee591/16155279을 읽으시면 될 것입니다.

     

     

    가객이라는 분의 답글

     

    불쌍한 영혼이여,

    용수(나가르주나)를 힌두교쪽 스파이로 몰기 위한 당신의 피나는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허나 용수의 불교 입문은 이른 바 소승으로 출발하였소이다. 워낙에 뛰어난 천재라서 장로스님들은 용수를 소승승단을 이끌 차기 지도자로 키웠더랬는데, 용수의 공부가 정점에 올랐을 때 용수는 자신의 한계를 보았소이다.
    용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대승을 비방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개의 천재스님들이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대승을 비난하였다가 참회하고 대승으로 귀의를 하는 경우는 불교역사상에 비일비재합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용수는 초기불교로 입문하여 대승으로 갈아 탄 것이지, 힌두교 구루 생활하다가 불교교단에 잠입해서 불교를 힌두화 시킨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수가 초기불교경전의 달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마시길 바라오.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가 다르다 하였는데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하는 구료. 결론적으로 쉽게 말해 주리다.

    부처님은 중도의 다양한 측면을  여러 사례로, 비유로써 설법하였지요
    용수는 초기경전에 나오는 다양한 중도에 관한 이 설법들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용수가 새로운 중도를 주창한게 아니라 부처님의 다양한 중도 설법을 [요약정리]했다구요.


    초기경전속 중도에 대한 설법이 교과서라면
    용수는 공부하는 학생입장에서 초기경전속 여러 중도에 대해
    기억하기 쉽게 [요약정리]한 것이고 간단하고 세련되게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용수는 초기경전 공부를 통해 중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고
    용수 이후의 사람들이 부처님의 중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하게 체계화 시켰습니다.

    이런 공로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용수! 하면, 자동적으로 '팔불중도' '공' 하는 단어와
    연결짓는 겁니다. 용수가  불교에 없는 개념인 '공'을 불교에 접목한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신봉해 마지 않는 초기경전에 이미 '공'의 개념이 있었고 용수가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도 스님들이 '공'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술어가 오래전 선가에서 사용된 술어지만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여겨지듯이 '공'이란 단어도 용수가 주창한 것은 아니지만 용수의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벌어진 것 뿐입니다.

    어쨌든 용수가 힌두교 스파이라는 당시의 새로운 학설을 접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소승승단에 입문하여 초기경 달인이었던 용수의 역사마저 부정하진 마세요.
    물론 용수를 힌두교논사로 만들어야만 대승을 욕할 수 있는 당신의 입장을 이해는 해요.

     

     

     

    용수의 공과 부처님의 공, 용수의 중도와 부처님의 중도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원불사 단현 2012.09.27

     

     

    용수는 본래 힌두논사였습니다. 물론 불교로 귀의하였는데 용수가 살던 시대는 이미 상좌부는 없었기에, 부파불교나 대승불교 중 하나의 교단으로 귀의하게 됩니다. (스리랑카로 건너간 상좌부 외에 인도의 상좌부는 분별설부로 남았다가 후 150년 용수시대에 이미 소멸되었음)  

     

    용수가 귀의한 곳은 상좌부는 물론 힌두논사들이 점령한 부파불교도 아니고, 이미 보살불교로 회귀한 힌두불교도 아닌, 아직은 제법 건전한 초기대승불교의 한 분파였고, 이름 하자면 공사상을 핵심으로 여기던 초기중관학파였습니다.

     

    중관학파의 논사가 된 용수는 어떤 불변의 식이 있어 윤회한다는 설일체유부나 독자부 경량부 등을 공격함과 동시에, 중관학파의 공을 더욱 철학화하는 작업을 서둘렀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근본중송이고, 그 핵심적인 주장이 팔불중도이고, 이 팔불중도라는 것은 공의 철학적인 해석이지요. 

     

    그렇다면 이 중도와 공의 개념부터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오류에 빠질 것입니다. 

     

    흔히 모든 대승불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중도와 공이 과연 근본불교의 무상 무아를 대체하기 위해서 공을 주장한 것인가? 아니면 공의 또 다른 모습이 있는가? 

     

    공이라는 단어는 니까야 7000여 권 아함경 2105권 중에 그저 빈 것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한두 번 쓰여져 있습니다. 니까야 중에서는 맛지마니까야 121경 공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 122경 공에 대한 가르침의 큰 경 두 곳에서 겨우 한두 번 나오고, 아함경은 잡아함경 13권 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등에서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 비었다를 설하시기 위해 무를 대신해 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역시 두어 번 나올 뿐입니다.

     

    즉 근본불교에 대승의 공사상은 눈을 씼고 찾아봐도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용수 같은 대승 空은 비불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본불교의 무상 무아와 초기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어떻게 다른가를 알기 위해서 먼저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공사상을 설명합니다.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브라흐만이 세상을 창조할 때 브라흐만이 입김을 불어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그 세상은 환상계로 실제 하는 것이 아닌 꿈 같고 환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일러 空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상은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만한 곳이고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살아가야 할 대상이지만, 인간의 탐욕과 악의로 불행과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는 무상 무아를 깨달아라고 가르치신 것이지요. 결코 허망한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의 일생은 허무하다거나 세상을 염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지요.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는 그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없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아서 더욱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세상을 허망한 대상으로 보았고, 그래서 브라흐만이 자신의 몸 일부를 가루내어 자신의 창조물 모두에게 깃들게 한 실체적 본질인 아뜨만을 찾아 브르흐만과 합일하는 것이 해탈 열반이라고 가르칠 때, 부처님께서는 유일신 창조신이라는 것은 사람의 관념이 만들어 낸 소산이고, 영혼조차 없는 무아라고 가르치시며 신이나 영혼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무상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 탐욕과 악의를 버릴 수 있는 지름길이며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는 해탈이라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공사상과 무상 무아사상은 전혀 다른 사상임에도, 힌두교 논사들이 부처님의 무상 무아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본래의 힌두교 사상인 공사상으로 회귀하기 위해 만든 경전인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한국 대승불교인들은 아직도 불교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 금강경에서 무상과 무아가 아닌 공으로 부처님의 교학을 부정하고 힌두화 시킨 내용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대승경전을 보는 바른 시각 / 반야심경과 금강경에 속을 것인가?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0] [반야심경 금강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 교학이나 논장, 위빠사나 명상에 심취한 재가불자들에게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5]를 읽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중도란 무엇인가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한 마디로 고락중도와 단상중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수의 팔불중도는 오직 공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힌두교의 공철학을 불교의 이름으로 제시한 것일 뿐 부처님의 근본교리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것이지요. 

     

    불생불멸(不生不滅) : 개별존재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대한 부정. 불상부단(不常不斷) : 존재의 영원함과 단절됨에 대한 부정. 불일불이(不一不異) : 존재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부정. 불래불거(不來不去) : 존재의 개별 원인과 개별 결과에 대한 부정.  

     

    이것은 여몽환포영하는 현상계의 존재 모두가 공하다는 것을 8가지로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본래 허망한 존재에게 무엇을 따질 것인가? 좋고 나쁜 것도 옳고 그름도 없는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해서 끝까지 파고들어 그 진리를 꿰뚫어라는 근본불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딴판이지요. 

     

    그러나 부처님의 수행에서의 중도로서 쾌락이나 고행의 극단이 아닌 바른 사고와 행위의 중도를 설하셨고, 상견과 단견이 아닌 무아지만 업이 윤회한다는 중도를 설하신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가 같은 것이라고 논문을 발표하거나 설법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지요.

     

    부처님과 용수의 중도가 어떻게 다른지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부처님의 중도사상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ao1M/851]에서 확인 바랍니다.

     

    용수는 무상 무아가 아닌 여몽환포영 즉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환상계의 허상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기에, 초기불교로 돌아가기 위해 근본중송을 지은 것이 아니라 힌두교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용수는 근본주의자의 손에 칼을 맞아 죽었고, 후대 그의 수제자 제바 역시 칼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 시대 근본주의자들은 용수나 중관학파가 부처님의 근본교학을 허무는 힌두마구니로 보였던 것이지요.

     

    용수는 저 팔불중도로 부처님의 2~12연기까지 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연기법마저 팔불중도로 해석해버립니다. 결국 연기하는 모든 것은 여몽환포영(공이고 허망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허망하기에 참나를 찾아야 해탈한다는 힌두교가 대승불교가 된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이만큼만 씁니다.

    부족한 것은 원불사 카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개혁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