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개혁,원불사

    원불사 단현 2012. 10. 31. 00:08

     

     

     

    무연님이 올려주신 성철스님의 [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라는 글에 중대한 잘못이 있기에, 반박하는 글을 썼습니다.

    검은색과 빨간색은 성철스님의 글이고, 파란색은 단현의 글입니다.

     

     

     

    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

    원시경전에서의 중도사상

     

    성철스님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선(禪)과 교(敎)를 통하여 일관된 최고원리가 중도사상(中道思想)이라는 것을 설명해 왔는데 대중들도 대개는 이해했을 줄 믿습니다.

     

    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라는 이 글을 쓴 분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사상과 부처님의 중도가 같은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조금도 같지 않다는 것을 단현이 증명함으로서 대승불교학자나 스님들이 얼마나 엉터리 불교를 하고 있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붙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원시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모두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믿고 경전 그 자체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발달되고 불교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들의 성립시기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범어본(梵語本)을 언어학적, 문법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이 경전들이 부처님 당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 돌아가신 후 5~6세기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엄경 법화경류들은 힌두교의 신들이 대거 창조된 이후 대부분의 불자들이 힌두교로 개종해버리는 어려움 가운데 불교에도 보살이라는 신들을 만들거나 부처님을 장엄하여 신격화 시켜 보시 받고 공양 받기 위해 만들어진 힌두교적 경전들입니다.

     

    그리고 육조스님께서도 부처님 돌아가신 후 천여 년 뒤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내가 지금까지 부처님 근본사상은 중도(中道)라고 법문한 것이 부처님 뜻과는 관계없는 거짓말이 되어 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시에 친히 하신 말의 기록이 아니라 돌아가신지 5~6백년 뒤에 성립된 경전을 인용하여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이 아니다”고 주장하여 불교계가 크게 당황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이라 합니다.

     

    이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의 주장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경전 연구를 거듭한 결과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은 아니다”고 하는 확증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면 우리 불교의 초기경전으로 대 소승에서 함께 인정하는 아함경은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인가 하고 연구해 보니 아함경조차도 모두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판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불교를 어디 가서 찾아야 될는지 모르게 되어 학자들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신다면 물어나 보겠는데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학문적으로 곤란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학자인 우정백수라는 분이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중요한 사적(史廣)을 기초로 삼고

    둘째, 부처님 당시의 인도 일반 사상을 참고하고

    셋째, 원시경전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부분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종합하면,

    이것만은 꼭 부처님이 설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공통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원칙들을 기둥삼고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알려고 우리가 노력해야지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如是我聞)”고 시작한다고 해서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한 경전이라고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학자들이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어디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하여 불교의 근본사상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의 원시경전인 아함경도 대승경전도 아닌 율장(律藏)을 학자들이 많이 신빙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율장을 보면 시대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나 문법학적으로나 부처님 당시부터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 내려온 것으로서 혹 중간에 오면서 가필한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봐서는 가장 부처님 말씀에 정확하지 않은가 하고 학자들이 판단을 내렸습니다.

     

    율장 가운데서도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학자들은 통칭하여 초전법륜(初轉法備)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편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율장의 초전법륜편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존(世尊)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 (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하였다.」

     

    출가(出家)라는 것은 꼭 승려가 되는 것만이 아니고 인도 당시에는 집을 나가 도를 닦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를 전념으로 닦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변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예를 들면 고(苦)와 낙(樂)이라는 것이다. 이변이라 하면 시비와 선악, 있음과 없음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고와 낙”을 예로 들었느냐 하면 부처님 당시 실정에 비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의 중도는 팔정도를 말합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설하시기 위해 다른 중도도 많이 있는데, 고와 락을 예로 들었다는 엉뚱한 전제를 깔아서 이야기를 전개해 갑니다.

     

    그 당시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고행주의자였으며 다섯 비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행주의자란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자기 육신을 괴롭게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병을 따라 약을 주듯이 고행주의자들인 다섯 비구에게 「고와 낙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苦)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이변을 중요한 단어로 들어냅니다.

    ‘이변을 떠남이 곧 중도다’라고 중도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이 초전법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이라는 것은 세계의 어느 학자이든 간에 확증하고 있으니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중도를 설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근본불교에는 이런 중도대선언이라는 용어자체가 없습니다. 중도론자들이 만든 용어일뿐입니다.

     

    결국 반야부경전이나 용수의 중론에서는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까지 모두 중도이고 中道는 곧 空이라고 주장합니다.

     

    세계의 어느 불교학자이든 간에 율장의 초전법륜편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경전 성립사적으로 보아서 율장보다도 더 앞선 경전인 “숫타니파아타”에서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숫타니파아타의 피안도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변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도 집착하지 아니하느니라.

     

     

    부처님의 중도는 2가지가 있는데

     

    1) 고와 락 가운데 팔정도로 수행한다는 가운데 中도(道 magga)와

     

    2) 나와 대상(이변) 가운데(中) 탐진치 갈애 욕탐이 개입하면 苦가 되기 때문에,

    내가 대상에 사이에 작용하는 탐진치 갈애 욕탐을 떠나는 길을 中도(道 patipada)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나와 대상, 이변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자기 존재와 대상 사이에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탐진치 갈애 욕탐으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말라의 뜻입니다.

     

    그래서 1)의 도 magga와 2)의 도 patipada는 그 뜻부터가 다른 것입니다.

     

    각묵스님의 주석을 붙입니다.

     

    팔정도의 도에 해당하는 단어는 길을 뜻하는 도(道, magga)와 특히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도 닦음(行道, patipada-)의 둘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팔정도라는 표제어에 들어있는 도라는 단어는 길을 뜻하는 막가(magga)이고,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로 옮겨지는 도성제의 도와 ‘중도(中道)’의 도는 도닦음(行道)을 뜻하는 빠띠빠다(patipada-)이다. 여기서 빠띠빠다는 실제 길을 걸어가는 ‘실천’의 의미가 강하게 담긴 중요한 술어라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위의 팔정도가 바로 중도(中道, majjhima- patipada-)라는 점이다. 우리는 중도하면 용수스님의 팔불중도(八不中道)부터 떠올리지만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항상 팔정도로만 나타난다.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전에서 중도가 팔정도를 뜻하는 이상 중도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중도를 팔불중도 등의 견해나 철학으로만 보면 안된다. 중도는 초기불전에서 부처님이 고구정녕히 설하신 팔정도라는 실천체계로 먼저 받아들여야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에 해당하는 빠띠빠다(pati pada-)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a-)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해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1) 고와 락이 아닌 팔정도의 중도와

    2) 탐진치 갈애 욕탐을 떠나는 것을 말하는 중도

    이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지, 용수의 팔불중도의 공사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쓴 분은 이런 중도의 의미를 모르고, 그저 이변에만 집착하지 않는 것이면 무조건 부처님의 중도와 같은 중도라고 이해해버리고, 중도만 주장하면 무조건 불설이고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불교의 근본이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 돌아가신 후 몇 백 년 뒤에 성립되었든지 간에 어떤 경전이든지 중도사상에 입각해서 설법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법이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욕락(欲樂)과 고행의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는 여래에 의하여 정등각(正等覺)되었다」

     

    이 중도대선언은 남전대장경 중부경전에 있는 것을 인용하였고, 오분률(五分律) 사분률(四分律) 등에도 기록되고 있으나 남전대장경파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이변을 떠난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내가 앞에서 말한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선종 등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자들이 잘 몰라서 대승불교를 의심하고 소승불교만이 부처님 불교가 아닌가 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부처님의 근본불교가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 뒤에는 대승비불설은 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이론은 일본의 명치(明治) 말엽에서 대정(大正)초기인 20세기 초엽에 성행했습니다.

     

    중도 즉 공을 깨달으면 곧 무상정등각을 얻는다는 반야심경의 중도와 부처님의 중도(쾌락과 고행에 치우친 수행이 아닌 팔정도의 중도와, 나와 대상 사이에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중간(탐진치 갈애 욕탐)을 버리는 공부인 중도)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법화경 화엄경 반야경 용수의 팔불중도 등의 중도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인도에 있어서 용수(龍樹)보살이나 마명(馬嗚)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운동(大乘佛敎運動)이란 무엇인가?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자신의 불교이지 부처님 불교는 아니라고 하여 소승불교만이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불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불교가 중도에 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판명되므로 해서 그런 주장은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그때까지 있었던 부파불교에서 벗어나 바로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각자의 교리를 주장하게 되니 이 시대를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시대(部派佛敎時代)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18 또는 20 부파불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각 파가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펴서 이것이 불교다 저것이 불교다 하여 논쟁을 많이 하였지만 <모두 어느 한쪽에 집착한 변견>이었으니 이것이 소승불교입니다.

     

    대체로 보면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견(有見)과 없다고 하는 무견(無見)으로 갈라졌는데 대중부(大聚部) 계통에서는 무견(無見)을 주장하는 파가 좀 있기는 있어도 대부분 유견이었고, 상좌부(上座部)는 전통적인 근본불교였기에 무견이었고 다른 상좌부 계통의 부파들도 무견이었지만 설일체유부 경량부 등의 부파에서 유견을 주장했습니다.

    - 상좌부가 유견이었다는 등의 글을 단현이 수정하였음

     

    이렇게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시대에 있어서는 변견으로 근본을 삼았고 소승경전도 그 당시 자기네들이 편집하고 전해 내려오면서 니까야와는 달리 아함경에는 제법 가필(加筆)하고 개필(改筆)하였습니다. 이것이 저간의 사정이었습니다.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破冊顧正)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견(有見)이 아니면 무견(無見)인 소승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보살의 근본 목적이며 사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중론(中讀)과 대지도론(大智度論)을 저술하여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를 천양하였습니다.

     

    부처님은 탐진치를 버리고 욕심과 악의가 없는 성자가 되라는 가르침을 펼치셨지, 팔불중도 등 철학이나 논리학으로서의 중도를 가르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니까야에는 그저 없다 비었다는 단어로서의 공이 있을 뿐 반야부나 용수의 공사상이나 힌두 공이라는 단어는 눈을 씼고 찾아봐도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중도를 주장하면 무조건 불설이다' '중도가 곧 공이기 때문에 공사상 역시 불설이다'라는 해괴한 소리는 너무나 바보 같은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도! 이것만이 부처님의 정통사상이라고 주장하여 그의 제자 제바존자와 같이 부파불교의 추종자들과 일생을 논쟁을 벌여 변견을 부셔버리고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란 시대적으로 봐서는 혹 부처님과 오륙백 년의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상적으로 봐서는 부처님 근본사상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수 등의 중관론자들이 단 하나 잘 한 것은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설일체유부 등의 유견 즉 어떤 식이 있어 윤회한다는 유식론을 타파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무상 무아 사상이 아니라 공이라는 자기들만의 잣대를 들이댔다는 것이 잘못이지요.

    공은 불교사상이 아닙니다.

    브라만교 힌두교의 핵심사상이지요.

     

    그 공을 팔불중도로 철학화하여 부처님의 근본교학을 개무시 하고(12연기에 대한 설명 하나만 빼고) 무효화시킨 뒤 용수의 공만이 유일한 교리로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이변을 떠나 중간을 설명한다는 대승의 중도는 외도의 사상이며 대승경전은 비불설이라는 것을 설명했고, 그들의 중도는 부처님의 중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불자필독자료 게시판의 용수는 왜 칼 맞아 죽었는가?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7를 읽으면 충분한 이해를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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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야 내가 단 하나라도 설한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여래께서는 하나도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아닌 것이랴!"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 부처님은 스스로 근본불교교리를 하천한 것으로 버리셨다고 주장한 후에

    모든 것은 개시허망하여 제상이 비상(공)임을 본다면 진리(참나)를 본다면서(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상은 허망한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물 건너 갔다(所謂佛法者 卽非佛法 :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이 금강경인 것입니다.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할것을 하라. 집착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데 이르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경전으로 최고의 지위에 있습니다. 위 문구 응모소주 이생기심은 힌두논사들이 원형 그대로 가져와서 금강경을 기록했지요. 바가바드기타가 만들어진 이후 최소 약 300년 뒤입니다.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 신은 이름만 불러도, 혹은 믿기만 하면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구원받는 유일신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사상을 가져온 것이 대승의 보살사상이지요.

     

     

    근본불교대학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중도를 머리로 이고다니니
    위에 말같은 말같지 않은 소리를 하지

    중도????
    단현!!! 단현이 중도라는거요
    방글방글이 중도이구요

    책에서 읽고 머리의 뇌에 기억하고
    다니며 중도는 이리이러한것이다 라고 하는건
    중도가아녀요
    중도를 그리는거지요

    빵 을 밀가루로 직접만들어서 먹어야빠민줄아는데
    밀가루에다가 설탕소금이스트를넣고 반죽해서구으면 빠미다 라고 해보이
    빵이 아니라 빵에대한설명이지 이게빵이요???

    마찬가지로 님이 말한건 중도에 대한 설명이지 중도가 아니지요

    바로 아셔야지요
    불교를 하랬더니 정신병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말이 정상적인 사람이 쓸 수 있는 말입니까?
    중도라는 것은 정직하고 진실하며 착한 사람이 되는 가장 빠르고 바른 길을 말합니다.
    개념도 모르는 분이 중언부언합니다.
    중도가 뭔지 개념도 없는 분이 어딜 가나 또라이 같은 소리로 도배를 합니다...
    불교가 윤리학이래며..???
    윤리학에서는 중도란 말이 없는데...

    요즘은 윤리학에서도 중도를 새로 주장하나 보죠???()
    중도라는 것은 탐욕 악의를 떠나기 위해 닦는 올바른 가르침을 말하지요.
    교학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탐욕 악의를 버리는 훈련이고 불교 즉 중도가 그 길을 가장 잘 인도하는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가 정법이고 부처님 설법을 바르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혹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다음카페 원불사를 검색해서 오시면 200여 개의 게시판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하실 수 있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