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최상석 사제 2012. 6. 13. 08:26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며 살아가기

2012년 6월 10일(연중10주) 마르3:20-35 1사무8:4-11,16-20 2고린4:13-5:1

 

세상을 살다보면 한번 쯤 오해(誤解)를 했거나, 오해를 받았거나, 오해에 대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것을 오해라고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할 때,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오해를 낳아 종종 엉뚱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 때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전쟁도 전쟁 이면의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있었겠지만, 형식적으로는 이라크에 대규모 살상 무기가 있다는 잘못된 정보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전쟁 끝나고 보니 그런 무기는 없는 걸로 판명이 났지요. 겉으로 보면 오해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수많은 생명이 죽은 것이지요.

 

오해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요.

개와 고양이가 서로 사이가 나쁜 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개는 반갑고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들어 올립니다. 그래서 고양이가 꼬리를 올리고 있으면 “야, 너도 기분이 졿구나” 하고 함께 놀자며 달려든다고 하지요. 그러나 사실 고양이는 겁이 나거나 화가 나거나 긴장이 될 때 꼬리를 높이 쳐든다고 합니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달려드는 개가 싫어서 화를 내지요. 반대로 고양이는 반갑거나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낮춥니다. 그래서 개가 꼬리를 내리고 있으면, 개도 기분이 좋은 줄 알고 반가워 덥석 달려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는 겁이 나거나 화가 나면 꼬리를 내립니다. 그래서 개는 좋아서 달려오는 고양이가 자기를 공격하려는 줄 알고 으르렁 거리며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에 개와 고양이는 늘 사이가 안 좋다고 합니다.

오해에 대한 예화 한 가지 할까요?

남편을 잘 내조하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매우 착하고 바른 어느 며느리가 몇 달 동안 운전학원에 다녀서 드디어 가까스로 운전면허를 땄다고 합니다, 그래서 면허 딴 지 며칠 만에 시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백화점으로 쇼핑을 갔답니다. 초보 운전인지라 운전솜씨가 서툴러 실수를 할 때마다 상대방 운전자에게 손을 흔들거나, 애교어린 미소를 담아 고개를 살짝 살짝 숙이며 미안함을 표시했답니다. 그러자, 뒷좌석에 앉아 있는 시어머니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들이 퇴근하자 시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놓고 매우 심각하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야, 어멈이 요즘 운전학원에 다니면서, 이놈 저놈 뭇 사내들을 많이 사귄 것 같다, 백화점에 갔더니만 아는 남자들이 무척 많더라, 다 손 흔들어 주며 인사하더라. 애야, 어멈 조심해라!"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데서, 사실을 사실과 다르게 보는데서, 또는 사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데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단순한 오해이든 악의적인 오해이든 오해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해의 가장 결정적인 부작용은 있는 그대로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결코 진실을 볼 수 없으며, 진리를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 결국 오해는 의심, 잘못된 판단, 뜬소문(所聞), 유언비어(流言蜚語), 비방, 모독, 흑색선전(黑色宣傳), 인간관계의 단절 등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도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때로 악의적인 흑색선전도 받으셨습니다. 대표적인 오해는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얼마나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졌는지 급기야는 이 소문을 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이리저리 찾아 다녔을 정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옵니다.

또 다른 오해는 아마 이는 오해라기보다는 악의적인 흑색선전에 해당 될 것인데 예수께서 베엘 제불이나 마귀두목의 힘에 사로잡혀 마귀를 쫒아 내고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유다교의 율법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지어낸 소문이지요. 베엘 제불이란 이방종교에서 믿는 신으로 그 의미는 ‘집의 주인’ 혹은 ‘신들을 거느리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귀신두목이란 유대 지역의 귀신인 사탄을 의미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 제불이나 사탄의 하수인이이 되어 그들의 힘을 빌려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낸다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는 몹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오히려 마귀 두목의 곧 악령의 힘으로 이런 일을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니, 성령의 일을 알아보고 받아들여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악령의 일이라고 배척하고 모독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타까워하신 것은 사람들로부터 받으신 오해나 비방이 아니라, 오해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알아보지 못하고, 성령의 일을 성령의 일로 알아보지 못하는 악의적 오해에 사로잡힌 율법학자들의 무지와 편견과 악의 이었습니다. 악의적 오해는 진실을 볼 수 없게 하며,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3;29)

오늘 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예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한다는 율법학자들이 정작 성령의 일과 악령의 일을 제대로 구분하는 영적 식별(識別)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상의 삶에 필요한 일상의 식별도 매우 중요합니다. 일의 선후에 대한 식별,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식별, 선과 악, 참과 거짓에 대한 식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에게 영적 식별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어떤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 구별하는 영적 식별이 있어야 합니다. 식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해 없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열린 마음과 신중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선입관이나 어떤 굳어진 생각으로 기울어진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존중해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절대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지닌 경험과 판단도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열린 마음입니다. 또한 모든 일들에 있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형이하학적 차원을 넘는 즉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주관화, 파편화, 절대화에서 편견과 오해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과 가치체계에 대한 고려와 존중 그리고 경청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신중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해와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뜻, 성령의 활동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민감한 대상이 다릅니다. 누구는 옷이나 화장이나 외모에 민감합니다. 누구는 가구나 차량에 민감합니다. 누구는 남편의 승진이나 월급이나 태도에 민감합니다. 누구는 자녀의 성적에 민감합니다. 누구는 말에 민감합니다. 누구는 자존심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라면, 다른 모든 일보다 더 마음을 쓰고 민감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가,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인가?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의 모든 일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손을 내미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마음을 모으고, 귀를 모으는 자발적 경청을 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상 19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아합 왕이 지지하던 바알예언자 450명과 대결하여 이긴 후 자신을 죽이려는 아합 왕에게 쫓겨 호렙산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 속에 서 보았고, 큰 지진 속에서도 서 보았고, 불길 속에서도 서 보았는데 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하느님의 음성’이 들여왔습니다. 하느님은 일상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 민감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을 가로막거나 모독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르3:35)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내 어머니가 되고 내 형제가 되고 내 자매가 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그 시작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식별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식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 차원의 영적 식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식별은 우리에게 시련 가운데 고난을 이길 힘을 줍니다. 혼란 가운데 혼란을 정리 할 지혜와 결단을 줍니다. 내가 무엇을 보아야 할지, 무엇을 들어야 할지 우리의 일상의 삶의 방향을 알려 줍니다.

오늘날 개인은 물론 우리 시대의 생명윤리에 대하여도 하느님의 뜻을 묻는 진지한 사회적 식별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언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우리도 왕이 통치하는 국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자, 많은 걱정을 하며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하느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이방 나라처럼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정치체제가 염려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제도가 좋은지 확신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대하여 진지한 식별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적 이유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쉽게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종자(種子)의 유전자 조작, 장기 이식, 생명복제, 동물윤리와 동물권(動物權)의 범위 문제, 동성애 문제 등등에 대한 영적 식별이 필요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고는 저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혹은 저 사람은 베엘제불이나 사탄의 하수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이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진리 앞에서 진리를 거짓으로 조롱 할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처럼 자신의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일생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살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일을 악령의 일이라 말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가로막거나 모독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이 주신 축복의 기회를 길가에 버리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 축복을 짐이요 고역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진리와 하느님의 음성에 둔감해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성령을 모독하며 살게 됩니다. 이는 생각하기 조차 싫은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성령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활동을 식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시작이요, 신앙을 통하여 주시는 평화와 진리와 자유를 누리는 복된 삶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처럼 기도와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조용하고 여린 소리”를 통하여 날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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