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최상석 사제 2012. 8. 29. 22:41

                                                                        어떤 힘 어떤 에너지로 살아가세요?

                                                 2012년 8월 26일(연중21주) 요한6;56-69 왕상8:22-30,41-43 에페6:10-20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이어가려면 힘 곧 에너지(energy)가 필요합니다. 에너지는 밖으로부터 얻습니다. 생명체에게 에너지를 주는 에너지원을 양식(糧食)이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언가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생명의 역설(逆說, paradox)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밥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기서 힘 곧 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이어갑니다.

 

대부분의 식물은 흙 속의 무기물질과 햇빛을 통하여 영양분을 얻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의 플랑크톤이나 다른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음으로 영양분을 취합니다. 누에는 다른 나뭇잎은 쳐다보지 않고 뽕나무의 이파리 즉 뽕잎만을 먹습니다. 생물체는 아니지만 자동차는 기름이나 전기 에너지를 먹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혹은 무엇에서 에너지를 얻어 살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살 힘을 주고,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살아 갈 이유를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힘 곧 에너지를 주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열심이 살아가게 하는 삶의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떤 사람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세상의 음식에서 힘을 얻어 인생을 삽니다. 누구는 재화나 각종 재산의 증식에서 삶의 에너지를 찾습니다. 누구는 자녀들에게서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힘들어도 자녀 때문에 산다는 분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생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누구는 지식 추구와 지식의 확장에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누구는 이웃에 대한 봉사나 섬김 혹은 사회변혁을 위한 열정에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양식 곧 삶의 에너지가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의 에너지는 대부분 유한한 삶을 위한 에너지입니다. 대부분은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신을 지탱해주는 일시적 에너지입니다. 우주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는 무관한 폐쇄적 에너지요 닫힌 에너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무엇으로 살아야 할 지, 삶의 힘 곧 영원한 삶의 에너지에 대해여 말씀하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6:57) 개역번역에서는 아버지의 힘으로 산다는 말이 ‘아버지로 말미암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에는 ‘because of’로 번역 되어있습니다. ‘--로 말미암아’ 혹은 ‘--때문’에 산다는 말은 곧 ‘--에서 힘을 받아’ 산다는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은 대개 살아가는 나름대로 중요한 이유 혹은 인생의 목적이나 삶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정당도 국가도 회사도 그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나 대통령 후보를 낸 정당은 어떤 가치를 위하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대통령 당선 혹은 정권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당선이 혹은 정권 그 자체가 목적인 그런 대통령이 당선되면 국가와 국민이 불행해 집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생의 에너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 어디에서 힘을 얻어 살아야 할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여 말씀하는 바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느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진 진리의 말씀도, 하느님의 아들로서 행하신 온갖 치유의 기적과 사랑의 섬김도, 하느님 나라의 선포도, 십자가의 고난도, 부활의 영광도 ‘영원한 생명’을 알고, 누리고, 받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생명의 양식도 곧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입니다.

 

유한한 세상에서 100년 내외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가장 큰 은혜와 축복은 ‘영원한 생명’을 알고, 누리고, 받는 것입니다.(요한3;16, 6;40)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불로장생 곧 끝없는 시간의 연속이 아님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의 초월이 곧 영원입니다. 영원 안에서는 시간의 길고 짧음이 없습니다. 젊어서 죽으나 늙어 죽으나 영원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재산의 많고 적음이 없습니다. 지위나 학력의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영원 안에서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분리가 없는 하나요, 거짓이 없는 진리요, 소외가 없는 사랑이 존재하는 그런 절대 세계가 곧 영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영원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영원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요, 우리의 근원이요, 안식처요, 우리가 갈 곳입니다. 영원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오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살지 못하는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은 없습니다. 영원은 우리 인생과 존재의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현대인은 영원을 잘 모릅니다. 영원보다 눈에 보여 지고 손에 만져지는 찰나(刹那)의 세상에 온 마음을 쏟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깜빡깜빡 잘 잊는 증상을 뭐라고 해요? 어떤 아주머니가 택시를 탔다지요? 종로 사는 언니네 집을 가자고 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아주머니가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조금 전에 내가 언니네 가자고 했나요? 동생네 가자고했나요? 그러자 기사아저씨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면서 이러더래요. “아니, 손님 언제 타셨습니까?”

건망증의 극치를 깨우쳐 주는 유머입니다. 바삐 살다보면 언니네라고 했는지 동생네라고 했는지 혹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주시고자하는 가장 큰 선물인 ‘영원한 생명’ 보다 세상적인 축복이나 부수적인 은혜들을 주목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건강, 치유, 물질, 합격, 승진, 집 구입, 교회 건축 등등을 간절히 구합니다. 이런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기도 가운데 오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데 필요한 말씀의 실천, 성령의 은사, 인격의 성숙, 평화의 실천, 사랑의 수고를 위한 기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일상의 풍성한 축복은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총과 축복을 넘어 심지어 부족함의 경험이나 고난과 시련의 경험을 통해서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 인도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풍성함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지만, 약함과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느님을 밝히 만난 욥의 고백이 이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 영생을 누리는 것에 전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영생을 알기는 아는데, 삶 속에서 영생의 삶이 제대로 누려지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 되고, 욕심을 부리고, 이리저리 세상 유혹에 이끌리고, 분노하고 혈기를 냅니다. 영원은 고사하고 단 며칠도 하늘의 천사같이 사랑과 평화와 진리의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수시로 찾아오는 질병과 나이 먹어감에서 오는 허전함이 고통스럽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비교의식이나, 남을 미워하거나 누구에 대한 서운한 생각으로 마음에 평화가 적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실패나 사고나 죽음이 두렵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혹은 영원한 생명에서 오는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오고감이 없으며 시간을 초월한 ‘영원’ 그 자체에서 오는 힘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바로 진리와 사랑입니다. 진리와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영원한 생명의 에너지는 진리입니다.

진리란 곧 진리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살려는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왜나햐면 진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진리가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말씀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진리는 희랍의 언어를 빌리면 로고스(logos), 동양의 언어를 빌리면 도(道)로 표현됩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의 말씀이 곤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과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실망을 하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공생 가운데 가장 큰 위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이 어렵다고, 도대체 생명의 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 할 수 없다고 혹은 생명의 빵보다는 육신을 위한 세상의 빵을 더 원한다며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며 수근 거리며 떠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겠느냐?”(요한6:67)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나와 함께 생명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느냐, 혹은 나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무상한 인생을 택하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너는 무엇을 에너지로 삼고 살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물으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참으로 훌륭한 대답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 이 대답은 주님의 말씀이 진리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인생의 에너지로 삼겠다는 대답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입니다. 참된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란 곧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요한6;56) 진리는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방해하는 많은 근심과 두려움이 모름(무지無知)과 어리석음과 욕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름과 무지는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끌지만, 진리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며,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논어 안연 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에서 형제끼리 권력 투쟁을 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있습니다. 그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인 사마우가 공자님에게 ‘군자(君子)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불우불구’(不憂不懼)라고 대답하십니다. 군자는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자 사마우가 그러면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만 하면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는 ‘자기 내면을 살펴보아 잘못이 없으면(내성불구內省不疚)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겠느냐?’하고 깨우쳐 주십니다.

 

진정한 두려움의 근거는 내 안에 있습니다. 칼을 든 ‘그 사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칼에 찔려 나의 생명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내 생명에 대한 사랑과 걱정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진리만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내면의 근심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을 이기고, 이 땅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을 살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먹어야 할 영원한 생명의 에너지는 사랑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랑에 근거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랑 역시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말씀합니다. 요한1서 4장 7절입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일치로 이끕니다. 사랑은 우주에서 나 혼자가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소외감에서 오는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몇 년 전 일어난 911테러 대참사 사건 기억하시지요,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죽음을 몇 초 앞두고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와 문자메시지의 대부분이 무슨 내용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여보, 사랑해, 우리 딸 애미도 사랑해, 여보 나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다음 세상에서 당신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사랑해 여보”

 

저는 2006년에 아버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폐암으로 약 6개월간 병원에 입원 하셨지요. 자주 못가도 가면 꼭 해드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돌아가시는 날 오전 6시에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정확히 낮 12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임종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처음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아버님의 임종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막상 임종을 맞이하게 되니 당황스럽고 슬펐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안 돼요?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분 앞에서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동안 자주 들려드리던 말씀을 마지막으로 해 드렸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확신만이 헤어짐이나 소외나 분리에서 오는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요한1서 4;18) 사랑만이 영원한 일체감을 느끼게 합니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참된 음료인 주님의 피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사랑의 보혈(寶血)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나와 남(그것,it)을 없애 하나 되게 합니다. 사랑은 주체와 객체의 장벽을 없애 하나 되게 합니다. 나와 남이 있는 곳에는 영원함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나와 남이 없습니다. 형제를 향한 이해와 배려, 화해와 용서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섬김과 어울림이 있는 곳이 영원한 세상입니다. 영원 곧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에너지만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받는 가장 큰 은총과 축복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사실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축복은 죽어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부터 누려야 하는 축복입니다. 지금 여기서 인생의 여정(旅程)에서 만나는 모든 형제자매들과 함께 영원하신 하느님을 섬기며 주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삶을 누리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는 힘이요 에너지는 곧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힘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에너지를 얻어 오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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