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창원향교 동·서재에 남긴 애틋한 옛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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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18. 8. 7.



2017.9.26. 풍화루 아래에서 바라 본 동·서재와 명륜당


창원향교는 성현의 뜻에 따라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돈독히 하는 제례(祭禮)와 교육(敎育)의 공간이다. 크게 3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봉행하는 제향 기능을 주관하는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가 있고, 유생에게 유학(儒學)을 교육하는 교학 기능의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東·西齋)의 영역이 있으며, 지방의 문화 향상 등을 도모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사회 교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풍화루(風化樓)의 영역이 있다.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향교는 엄밀히 말해 불교나 기독교와 다른 내세관(來世觀)이 배제 된 교육과 통치의 수단이 함께하는 형태의 종교이다. 따라서 유생들은 성현의 뜻을 쫓아 성경을 배우고 자신을 수련하여 나라를 발전시키는 주역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 했다.
향교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성묘(聖廟 : 대성전)이고 가장 중대한 것은 향례(享禮)이므로 봄과 가을에 석채례(釋菜禮)를 행한다. 강학을 담당한 곳이 명륜당(明倫堂)이고 평소에 유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이다.




2017.2.11. 기숙사인 동재의 모습


동재(東齋)는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전면 4칸 측면 2칸의 의 맞배지붕으로 전면툇칸과 우측 두 번째 칸은 마루이고 나머지 3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일단 향교의 유생이 되면 양반이나 평민의 구별은 없었으나, 조선 후반으로 갈수록 동재는 양반의 자녀가 기숙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2017.2.11. 기숙과 문제 해결의 장소인 서재 모습


서재(西齋)는 기단위에 자연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전면 4칸 측면 2칸의 납도리집의 맞배지붕으로 동재와 동일하다. 좌측 퇴칸만 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설치하여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
창원향교에서 발생하는 폐단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공간은 주로 서재에서 논의 되었는데 서재거폐기(西齋祛弊記), 서재생영세불망(西齋生永世不忘) 등의 기록들이 있어 여기에 소개를 하고자 한다.




창원향교 풍화루에 걸려 있는 서재생영세불망(西齋生永世不忘) 현판


西齋生永世不忘


鄕學之有長 猶國學之有師 鄕之長也 其任掌董率章甫 敎授以明人倫 敦風化之術 又於學中事務 無鉅細無不管轄 如膳烹ㅁ慶儺畜節 對用佸人 丁隷學舍使之ㅇ 生ㅁ用皆所以 尊聖廟衛聖道也 自世敎衰儒風不絶 爲士者 一造有司之席 惟徵遂酒食之是事 視學中物爲一 己囊槖饕餮之ㅇ使 尊聖衛道之地 至或有ㅇ不免鞠爲茂草之歎 學校之設 烏使然哉 余南遊過檜 ㅇ得於ㅇ人之 誦ㅇ說鄕之 故處士金公震桓 不離ㅇ公善 君子人也 嘗爲邑學之長 ㅇ所以修弊補敗一一無不用力而一 新之創建門樓事ㅇ 而有羸餘無所屬 於是公念西齋生 ㅇㅇ於學其數亦不少 而其居有遠近 其力有饒乏 每於ㅇ...ㅇ 有往來之資 住接之費 遂以其土木之 用餘ㅇ付之西齋 又令西齋生ㅇ...ㅇ出米一斗 盖爲生者凡九十 而米稱之ㅇ 而代者ㅇㅇㅇ 以瘚數仍令生徒 分掌取殖生徒 亦樂爲地ㅇ 力遂約束不敢違如 是者有年及今歲收ㅇ七十斛若ㅇ(彳+峙) 而儲之行者無持 齎之艱來者 有供億之豊 仁人之用心 其利博哉余觀 今日學舍之耗 弊已極雖學子之 欲讀書肄業者常 患財竭是學也 旣優有其力 又今西齋生ㅇ 克存之業爲 緩急之須此他 郡之所無 而昌獨有之者也 非處士ㅇ綜事之ㅇ 衛聖之篤固不能 辨衆人之所不能 辨非徒綜事之ㅇ 而非德望風儀之有 以鎭服人心仰何 以克ㅇ母贊 ㅇㅇ于來日 西齋生竭余 而言曰 吾儕小人托名 于學獲ㅇ執事之列 幸賴鄕長老庇覆撫家之澤 ㅇ生等ㅇ其食 而服其事生等ㅇ 無似ㅇ忘其功德之ㅇ 人ㅇ哉念所以不忘之者 惟在於鋪張其事揭之板刻 以ㅇㅇ觀聽博久ㅇ圖 而未得一言之重敢ㅇㅇ于 ㅇㅇ事余辭不文 不獲顧其意不可虛 且念余金氏 ㅇㅇ誼雖未ㅇㅇㅇㅇ得 與其子弟遊 君子固樂道人之善 况平日相ㅇ 與相慕用者乎 不可以已其言者ㅇ事 000初ㅇ俗ㅇㅇ風ㅇㅇㅇ之爲周旋於俎豆之所 ㅇㅇ戒始事 副


有司金致鼎
時有司金昌玉

歲在壬子孟春上元節安陵李宇錥 記


서재생영세불망-서재를 지으면서 여러 은덕을 영원히 잊지 못하다.


향학에 향장이 있는 것은 국학에 스승이 있는 것과 같다. 향교의 향장은 그 임무가 선비들을 감독·통솔하고,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돈독히 하는 방법으로 자제를 가르친다. 또 향교의 사무에 대해서는 큰일과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할한다. 예컨대 제향에 경축행사와 나물의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들과 노복을 검속하여 학사(學舍)에서 그들로 하여금 바르게 한다. 이는 모두 대성전을 높이고 유학을 보위하는 방법이다.
세상의 교화가 쇠미해진 이후로 유학의 풍교는 끊어지지 않아 선비된 이가 한 번 유사(有司)의 자리에 나아가면 오직 몰려다니며 마시고 먹는 것을 일삼는다. 그래서 향교 안의 재물 보기를 자신의 주머니 속 재물로 간주하여 탐욕스럽게 훔쳐 먹어서 공성(孔聖)을 존모하고 유학을 보위하는 장소로 하여금 간혹 잡초가 무성하게 되었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게까지 하니 학교를 설치한 정신이 어찌 그렇게 하라는 것이겠는가?
내가 남쪽 지방을 여행하다가 회산(檜山 : 창원) 지방을 지날 때 사람들 마다 그 고을의 고(故) 처사(處士) 김진환(金震桓)* 공을 칭송하는 말이 입에 떠나지 않는 것을 보았으니, 김공은 훌륭한 군자이다. 일찍이 향교의 향장이 되어 헐은 곳을 수리하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여 하나하나 힘을 쓰지 않은 것이 없어 새로이 하였다. 문루(門樓 : 1764년 풍화루의 창건)를 창건하는 일이 끝나자 자금이 바닥이나 나머지는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이 학문에 힘쓰는 서재의 생도들을 생각해보니 그 숫자 역시 적지 않았는데 그들의 주거지가 먼 이도 있고, 가까운 이도 있으며 집안 형편이 넉넉한 이도 있고 궁핍한 이도 있었다. 그래서 매양...(원문 결락)... 대신하는 자가 ...(원문 결락)... 그 수를 그대로 생도들로 하여금 나누어 관장하여 그 이자를 받게 하니 생도들 역시 즐겁게 힘써 일하고는 마침내 규율을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이렇게 한 지 몇 년이 지나 올해에 이르러 ...(원문 결락)... 70곡(斛)을 거두어 저축해 두었으니 길을 떠나는 이는 노자를 마련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고 멀리서 오는 이에게는 넉넉하게 주식(酒食)을 제공할 수 있었다. 어진 사람이 마음을 잘 쓰니 그 이익이 이토록이나 넓다.
내가 보건데 오늘날 향교의 재정이 이미 극도로 바닥나 비록 학자로서 책을 읽고 학업을 강마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늘 재정의 고갈을 근심한다. 그런데 회산 향교는 재정이 이미 넉넉할 뿐 아니라 또 지금 서재의 생도들이 능히 김 처사의 유업을 잘 승계하여 다급할 때를 잘 가늠하여 꼭 필요한 비용을 잘 쓰고 있으니 이는 다른 고을에 없는 것이요 창원에만 유독 있는 것이다. 김 처사가 지닌 사업 경영의 정성과 성현 보위의 독실함이 아니라면 진실로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니, 보통 사람으로서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갓 사업 경영릐 수완뿐만 아니라 덕망과 풍범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 도리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사업이 후대에 쇠퇴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서재의 생도들이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소인들이 향교에 이름을 얹고 집사의 반열에 끼일 수 있었던 것은 향장 어른께서 저희 집안들을 보살펴 주시고 도와주신 은택입니다. 저희 생도들은 그 사업으로 마련된 음식을 먹고 그 사업으로 마련된 옷을 입고 있으니 저희 생도들이 아무리 불초하다지만 만약 그 공덕을 잊는다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을 방도를 생각해보니 오직 그 사업을 널리 기술하여 판각에 새겨 향청에 걸어서 후세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어 영원히 전해지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을 계획하였으나 귀중한 기문을 얻지 못하고 있삽기에 감히 장덕께 청합니다. ...”
내가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고집할 수 없었고 게다가 그들의 뜻을 헛되게 할 수 없었다. 또 생각건대 내가 김 처사의 집안과는 대대로 세의(世誼)가 있었으므로 비록 ... (원문 결락) ... 그 자제들과 더불어 종유하였다. 군자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훌륭함을 말하기를 즐거워하는데다, 더구나 서로 사모하던 사이의 사람이겠는가. ... (원문 결락) ... 제향을 올리는 곳에 주선하여 ... (원문 결락) ...


유사 김치정(金致鼎)
유사 김창옥(金昌玉)

임자(1792)년 정월 대보름 안릉(安陵) 이우육(李宇錥) 기록하다.


*김진환

金震桓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무재(無齋). 금산(琴山) 김귀(金龜)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준(金浚)이다.
김진환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화양리 화목마을에 살았다. 1736년(영조 12)년에 여러 경상도 유생들과 더불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묘(文廟) 배향 문제와 관련하여 홍봉한(洪鳳漢)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760년에는 고을 사람들의 여망에 따라 문묘의 풍화루(風化樓)를 세우는 일을 맡아 훌륭히 임무를 완수하였다.
죽포(竹圃) 손사익(孫思翼)은 「풍화루기(風化樓記)」에서 선생의 사람 됨을 칭송했다.

*안릉(安陵) : 평안남도 안주시의 옛 별호




2018.1.10. 동·서재 영역과 풍화루



西齋祛弊記

歲庚寅九月十二日 因因山後卒 哭班行低校宮 時日乃西齋儒生聚會之日 而其上任 則時校長金君思栢也 明日西齋堂長黃寄秀 黃菊秀二人來拜而跪云 西齋有一大件祛弊事 仍撫其事實而示之曰 夫有校而有齋有齋而儒生 儒生者出入聖廟 盛具明服 春秋釋菜時 朔望焚香時 各祭壇 及容舍內外官賀禮時 不廢寒暑而告成 而贊謁者何等体禮 何等責任 行事則凡民之首 言地則堂員之亞 而挽迎大同案入錄 視之若陷身之科置子欺年 低死圖避 何者 校隷輩所謂勳鈴 未知刱自何時 而夏而于 牟秋而于租 首奴差使 編索儒生之門 甁甖俱罄 擧家疾首褒橐旣滿 歸隷展眉弊痼至此 莫之革焉 向所謂低 死圖避者此也 迺者鄕論齊發 依各公所下隷上下例 以還穀矯捄之義 言發而施寢矣 幸於今春鄕會之日 以牟租還入十石 排捄於校隷輩事到結梢 永爲恒式縱由乎物議所同 而其間之周章勤道 實是上任之力 乞一言爲也 余曰諾 嘗讀易至困屯革夬四卦 知深味之 而未見其已然也 今於西齋事驗之矣 下隷之無論歉稔 春秋求索 非困而何 鄕論旣發 屢年中止 非屯而何 若以痼獏一時除祛非革而何 自今伊始 永久遵行 非夬而何須亟揭齋楣 俾作後來之鑑戒 且以示上任幹事之瞻民也


七十一歲晩休翁 金萬鉉 書


서재거폐기


경인년(1890년) 9월 12일 인산(因山 : 황태자나 비(妃)들의 장례) 후 졸곡(卒哭)의 반열이 교궁에 밀려들었는데 이날은 곧 서재에 유생들이 모이는 날로 그 상임(上任)은 당시 교장 김사백(金思栢)군이었다.
다음날 서재의 당장 황기수(黃寄秀)와 황국수(黃菊秀) 두 사람이 와서 절하고 꿇어 앉아 말하기를 “서재에 아주 큰 일이 일어났는데 폐단을 없애는 일입니다.”하고 그 사실을 적은 것을 어루만지며 보였는데, “무릇 교(校)가 있어 재(齋)가 있고 재가 있어 유생이 있습니다. 유생이란 성묘(聖廟)를 출입하며 명복(明服)을 잘 차려 입고 봄·가을 석전 때 초하루·보름날 분향할 때에 각 제단 및 재사(齋舍)에서 내·외 관리가 축하의 예를 차릴 때에 추위와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고 고성(告成)하며, 찬자와 알자는 아무른 예절을 지키고 어떤(何等) 임무를 맡아서 일을 거행할 때는 모든 백성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처지를 말하면 당원(堂員)의 다음인데 대동안(大同案)에 기록된 것을 보면 자신이 몰락하는 과정에 자식을 버리고 나이를 속이며 애써 모면하려고 어떤 자는 향교 종의 무리가 됩니다. 이른바 훈령(勳鈴)이 어느 때부터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여름에는 모(牟)로 하고 가을에는 조(租)로 하여 수노(首奴)와 차사(差使)가 유생의 문 앞에 줄지어 곡식항아리가 모두 비고 온 집안이 골치를 앓는데 전대가 이미 가득하여지면 종들은 돌아가 웃으니 폐단과 고질이 이에 이르러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지난번 애써 모면하려는 것이 이것인데 이에 고을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 각 관청 종들의 위아래 예에 의하여 환곡으로 바로 잡자는 의리로 말이 나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 금년 봄 향회(鄕會)가 열리는 날 모조(牟租 : 토종 벼) 10석을 거두어 들여 향교 종들 무리에서 물리치고 일이 끝맺음에 이르러 길이 법으로 삼았습니다. 비록 의논은 함께 하였으나 그 사이에 두루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이끌어 간 것은 실로 상임의 힘이니 한마디 말을 청합니다.”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일찍이 [周易]을 읽다가 곤둔혁쾌(困屯革夬) 네 괘(卦)에 이르러 깊이 음미하였으나 이미 지나간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서재의 일에서 징험하겠도다. 종들이 흉년에도 말할 것 없이 봄·가을 구하고 찾으니 곤궁한 것도 아닌데 어찌 향론(鄕論)이 일어 여러 해 중지 되었으며 생겨난 것도 아닌데 어찌 고질적인 폐단을 일시에 제거 하듯이 하며, 바뀐 것도 아닌데 어찌 지금부터 시작하여 영구히 따라 행하려 하며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어찌 급하게 재(齋)의 문비에 걸려 하는가.”하였다. 훗날 본보기로 삼고 또한 상임과 간사의 넉넉하고 민첩함을 알린다.


71세 늙은 만휴(晩休) 김만현(金萬鉉)*이 쓰다.


*김만현
金萬鉉 :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내문(乃聞), 호는 만휴(晩休). 금산(琴山) 김귀(金龜)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죽와(竹窩) 김시찬(金時瓚), 어머니는 김신한(金臣漢)의 딸로서 상산김씨(商山金氏)이다.
김만현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화양리 화목마을에 살았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소산(小山) 김기호,남려(南黎) 허유(許愈)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1886년 관해정(觀海亭)을 중창하였다.
저서로 『만휴당집(晩休堂集)』이 있다.




풍화루에 걸려 있는  교궁재포실기(校宮宰脯實記) 현판


제례를 지내기 위해 재물이 되는 소를 잡고 어떤 방법으로 이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인 포청기(脯廳記)와 교궁재포실기(校宮宰脯實記)가 있어 당시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아래에는  교궁재포실기(校宮宰脯實記)의 원문과 해문 및 포청기도 함께 쓴다.


校宮宰脯實記


夫聖廟崇奉之典 上自國學 下至州學 莫尊者聖廟 莫重者享禮 春秋行釋菜禮 史有太平之祠 傳有博碩之告 八邊八豆之實脯之用 爲一大件儀節 長廣尺數衡鑑自在 而吾州之俗 以官需米三十石 上下大同色 便作已完之規 宰脯之日 齋任 率校隷入客舍依例監封 而所謂該色 任意宰割 爛用濶狹之手 以若莫重之脯脩只見存羊 每於ㅇ殿庭譫囂往往朋起 執事者雖云有恪 禁之末如仰未知事在何時 而老少章甫 恒以是齋咨雅矣 歲壬午春 崔侯致永 視篆玆土 勵精圖治 淸介廉謹之風 雖古昔循良吏 名可相埒 每月朔望 謁聖之時 趨拜瞻慕之誠逈出尋常 而見校勢之凋 殘憂㦖之心 恒見于外矣 及其大享作脯之時 與齋任金萬彧 李樟珣 曺璟煥 及邑中章甫 金惠栢 李樟煥 金吉元 安寅錫 金鎬源 立言曰 莫重享祀 脯委任於官史手 裁制之間 想難穪節 何况衛道尊奉之地 似近疏忽者乎 自玆爲始 脯牛屠宰于校庖需 長廣厚博依古式監封 餘肉及頭 皮足曷非尾項脛骨等 屬這這打價依 周人什伍例遂年兩等 所出自校中植本 愈久滋長可成遠大之規矣 書曰 愼厥終惟其始 又曰 服田力穡 乃亦有秋 惟願僉君子 愼始敬終 惟懷永圖則不過 幾年校必哿矣 大凡需用之方 以學宮興學之資 爲急先務春弦 夏誦倣之 以夏序殷庠之制 則檜山文學蔚然可興 豈不休哉也 餘緊幹不得不需用 期勿巾濫於哺啜之 科不亦可乎 僉曰唯於是乎 自校中宰脯立規 牛價則大同色 每於六臘月 以錢一百兩式來納 于校宮爲春秋常貢 而章甫中擇受 而有司幹其事 脯脩之豊腆復 見古式四載之間 財殖數百餘縫掖之流 孰可不感歎而興起也 哉猗我崔侯 誠可謂武弁中 若子人也 及人之化 浹洽於三載之間 在野而民懷若保之思 竪蝌篆之石入廟 而士薦豊實之籩 是誰之功歟其在彰善酬功之義 不可無揭楣 一扁玆於春丁 享禮之日 儒論齋發屬余文 以記之顧余不佞識陋才拙
 而體貌所係寧敢 以不文辭諸 聊志顚未


上之卽阼二十三年丙戊暮春下澣 金海 金萬鉉 記


교궁재포실기


무릇 성묘(대성전)을 숭봉하는 법은 위로 국학에서 아래로 주학(州學)에 이르기까지 어디건 예외 없다. 가장 존귀한 것은 성묘이고 가장 중대한 것은 향례이므로 봄과 가을에 석채례(釋菜禮)를 행한다. 역사서에 태뢰(太牢 : 소고기)의 향사가 있고 문헌에 박석(博碩)의 고사가 있어 팔변(八邊)과 팔두(八豆)의 제물에 포 쓰임이 하나의 커다란 의절이 되므로 길이와 너비의 척수와 형감(衡鑑)이 본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고을의 풍속은 관수미(官需米) 30석 내외의 대동색(大同色)으로 한다는 완성된 법규가 있다. 그래서 재포(宰脯 : 포를 만드는 것) 하는 날 재임이 향교의 노복을 거느리고 객사에 들어가 관례에 따라 감봉(監封 : 감독하고 검사한 내용을 봉해서 도장으로 날인하는 것)을 한다. 이른바 해색(該色 : 포를 자르는 직무를 맡은 사람)이 임의대로 고기 자르기를 넓거나 좁게 손놀림을 문란하게 하여, 이토록 막중한 포수(脯脩 : 제수 가운데 얇게 저민 것을 포(脯)라하고 불려서 계피를 안에 넣어 다진 것을 단수(腶脩)라 한다.)를 가지고 그저 의례의 흔적만 근근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해서 매양 대성전 뜰에서 시끄럽게 논란을 벌이다가 왕왕 파벌이 생기곤 한다.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집사가 비록 각별히 금한다고는 하나 종국에는 도리어 일이 언제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노소의 선비들이 항상 이것 때문에 탄식한지가 오래 되었다.
임오년(壬午 : 1882) 봄, 부사 최치영(崔致永)이 우리 고을에 정사를 행하여 정성을 다해 다스리니 청렴하고 근실한 풍속이 비록 옛날 어진 수령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명성을 나란히 할 만 하였다. 매월 초하루에 고을 향교의 대성전에 나아가 알성례(謁聖禮)를 봉행할 때면 나아가 절하고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이 보통의 경우보다 매우 남달랐다. 그래서 향교의 형편이 궁핍하고 쇠잔해진 것을 보고 근심하는 마음이 항상 밖으로 드러났다.
대향(大享)을 지내느라 포를 만드는 때에 미쳐 재임 김만욱(金萬彧), 리장순(李樟珣), 조경환(曺璟煥) 및 고을 내 선비 김혜백(金惠栢), 이장환(李樟煥), 김길원(金吉元), 안인석(安寅錫), 김호원(金鎬源) 등과 함께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막중한 행사에 포육의 관리가 제 손 가는대로 재량껏 자르도록 맡겨두고 있다. 생각건대 까다로운 제향의 의절이요 더구나 보를 보위하고 선성을 존봉(尊奉)하는 자리이니 너무 소홀히 다루는 것이라 생각 된다. 이제부터 이때로 비로소 푸주간을 만들어 감봉하여야 한다. 그리고 남은 고기 및 소머리, 소가죽, 우족, 소갈비, 항정과 사골 등속은 일체 항목별로 값을 매긴다. 주나라 사람들이 십오(什伍)를 나누던 예에 따라 해마다 양쪽에서 나온 이득을 가지고 자본을 만들어야 한다. 향교에서 자본금을 만들어 불리고부터는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불어나 장구하고 원대한 법도가 될 것이다. [서경]에 ‘그 끝을 잘 마무리하려면 오직 그 처음을 잘하라.[愼厥終惟其始 ]’라고 하였고, 또 ‘농부가 논밭에서 일하여 농사에 힘써야 가을에 수확할 것이 있다.[服田力穡 乃亦有秋]’라고 하였으니 여러 군자들께 바라노니 오직 처음을 신중히 하고 끝을 삼가서 영원히 이어갈 계획을 생각한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향교가 틀림없이 부유해질 것이다.
무릇 비용을 마련하여 쓸 방도에 대해서는 학궁에서 학문을 흥성시킬 바탕으로 급선무를 삼고 봄과 여름으로 예악을 익히고 시문을 강습하는 것은 하나라의 서(序)와 은나라 상(庠)의 제도를 모방한다면 회산(창원)의 문학이 울연히 흥성할 수 있을 것이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나머지 부득불 비용을 마련해야할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먹고 마셔서 없애버리지 말도록 기약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이를 본 여러 군자들이 모두 한 마디로 수긍 하였다. 이때부터 향교에서 운영하는 푸주와 우포(牛脯)의 재정에 대한 법규와 소고기의 가격을 정하였으니 대동색은 매년 6월과 12월에 금전 1백 냥 씩을 향교에 납입하는 것으로 상반기와 하반기의 일정한 세공으로 삼았다. 그리고 선비들 가운데 잘 가려 유사가 그 일을 주간하게 하니 포수(脯脩)의 풍성함은 옛 법식을 다시 볼 수 있었고 4년 사이에 재산이 불어났으니 수백여 선비들 중에 누가 감탄하여 흥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최치영 목사는 진실로 무변(武弁) 가운데 군자인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미친 교화가 3년 사이에 깊이 잠겨 골고루 젖어들었으니 들녘의 백성들은 어린아이처럼 돌보아주는 은혜를 입어 송덕비를 세우고자 하고, 성묘(聖廟 대성전)에 들어가는 선비들은 풍성한 제수를 올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덕인가.
선을 표창하고 공훈을 갚는다는 의리에 있어 기문을 지어 현아에 거는 거조가 없을 수가 없다. 이에 봄 석채례를 올리는 날에 선비들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나는 식견이 비루하고 재주가 졸렬하기는 하지만 일의 체면이 몹시 중하니 어찌 감히 문장을 짓지 못하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부족하나마 전말을 기록한다.


성상이 즉위하신 23년(고종 23년 1886년) 병술년 3월하순 김해 김만현(金萬鉉)이 적다.



2018.10.23 창원향교 전경


脯廳記


夫聖廟崇奉之典 上自國學 河至州縣之學 莫不皆有 盖聖廟而其所崇奉 則又莫重於大享之禮也 是以 載記特載釋菜于先聖先師 而史有太牢之祠 傳有博碩之告 則四籩八豆之實 脯爲大件 所謂一元大武是己 長廣形式衡鑑自在 而吾州之俗 以官需米四十石 上下大同色 便作已完之規 宰脯之日 齋任 率校隷入客舍依例監封 而所謂該色 任意宰割 爛用器狹之乎 以若莫重之脯 僅不免存羊 執事者雖云有格 禁之末由 老少章甫 恒以是齋咨矣 歲壬午春 崔侯致永 視篆玆土 濾精圖治 淸介廉謹之風 雖古昔循良吏 殆無過焉 每月朔望 必瞻謁聖廟 見校勢之溤殘 恒憂悶之無已 及大享作脯之日 與齋任及邑中諸章甫 立言曰 莫重享祀脯委之於官吏手 裁制之間 想難稱節 何況尊衛致敬之地 似近 踈忽者乎 自玆爲始 脯牛屠宰于校庖 長廣厚博依古式監封 餘肉及頭 皮足項等屬 一一打價依周年什伍例植本 則一年兩等所殖 漸次滋長可成遠大之規矣 惟願僉君子 愼始惟終期勿巾濫於餔餟之科 一切以學宮興學 危急先務 遵試書禮樂之敎 以倣周序殷庠之制 則楷之文學蔚然復興 豈不休哉 僉曰唯 於是 乎宰脯之日 自章甫中擇定兩有司 幹其事 脯脩豊䑂 復遵古式 四年之間 財殖數百 校事稍完 猗我崔侯 誠可謂武弁中 君子人也 政成三載之間 化洽一境而施措之餘算 及於校宮者又如此 不其偉乎 與誦則偉以貞珉 已留去後之思矣 在校中 豈可泯然已耶 春丁享禮之明日 齋任及諸章甫 以是屬余記之 玆庸略擧大槪 以勗脯廳任司之員 且示賢侯之蹟於無窮也


金萬鉉 記


포청기


무릇 성묘를 우러러 받드는 의식은 위로 국학에서부터 아래로 고을의 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있다. 대개 성묘를 우러러 받듦에는 대제(大祭)의 예보다 중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재기(載記 : 열국에 관한 기록이란 뜻인데 [晉書]에서는 재기라 하여 권말에 강북(江北)에서 명멸(明滅) 했던 16국의 역사를 약술하여 붙였다.)에 특별히 선성과 선사에게 석전 드리는 것을 실었으며, 역사에는 대뢰(大牢 :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제물로 소를 통째로 받치던 일. 원래 소, 양, 돼지를 모두 받치는 것이었으나 뒤에는 소만 바쳤다.)로 제사함이 있고 전(傳)에는 박석(博碩)의 아룀이 있은 즉, 사변팔두(四籩八豆 : 변은 대로 만든 제기로 조사변(朝事籩), 궤식변(饋食籩), 가변(加籩), 수변(羞籩)의 네 가지를 사두라 한다. 두는 나무로 만든 제기로 여덟 가지 그릇을 팔두라 한다.)의 제물에 포(脯)가 대뢰가 되니 이른바 일원대무(一元大武)*1)가 이것이다. 법도와 형식의 모범이 있으나 우리 고을의 풍속은 관수미(官需米 : 수령(守令)의 양식(糧食)으로 일반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던 쌀) 40석 상하로 한다는 대동색(大同色)을 이미 완전한 규약으로 만들었다. 포를 만드는 날에는 재임(齋任)이 향교의 종을 거느리고 객사에 들어가 전례에 의하여 감봉(監封 : 감독하고 검사한 내용을 봉(封)하고 도장을 찍음)하는데 이른바 해당 관리가 임의로 주관하여 잘라 넘치게 쓰고 좁은 제기로 하겠는가. 이와 같이 막중한 것이 포인데 겨우 존양(存羊 : 예전부터 있은 것이란 뜻으로 실제 소용도 없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을 일컫는 말. 자공(子貢)이 고삭(告朔)하는데 쓰는 양(羊)을 없애고자 하니, 공자가 “너는 양을 아끼는가? 나는 예를 좋아 하노라.”한 데서 나온 말로 양이라도 있으면 그런 예가 있었다는 것을 알겠지만 양마저 없애버리면 그런 예가 있었던 것조차도 모르게 된다는 뜻임. [論語 八佾篇])을 면하지 못하고 집사가 비록 바로잡아 금지함이 있다고 하나 끝내 노소의 선비들이 항상 이로서 재계하며 탄식하였다.
임오년 봄에 수령 최치영(崔致永)*2)이 이곳의 수령이 되어 힘쓰고 정성을 다하여 정치를 도모하며 청렴하고 삼가는 풍속이 비록 옛날 어진 관리였으나 겨우 허물이 없었다. 매월 삭망에는 반드시 성묘를 배알하고 향교 형세가 쇠잔함을 보고 항상 근심하고 번민을 마지않았다. 대제의 포를 만드는 날이 되어 재임 및 고을의 선비들과 의견을 내어 이르기를 「향사가 막중한데 포를 관리(官吏)의 손에 맡겨 재제(裁制)하는 사이에 절도에 맞다 생각하기 어려우니 어찌 높이 호위하고 지극히 공경하는 처지에 소홀한 듯이 할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비로소 포는 소를 잡아 향교 포주(庖廚)에서 주관 하고 법도는 두텁고 넓게 하여 옛날 법식에 의하여 감봉하며, 나머지 고기 및 마리와 가죽과 족(足)과 머리 등은 하나하나 값을 매겨 1년 동안 십오(什伍 : [예기 제의]에 “십오는 열 사람 또는 다섯 사람으로 편성된 대오(隊伍)”라고 보임. [사기 상군전]에 “백성을 십오의 조직으로 묶어 서로 고발하게 하고 불응할 때는 연좌(連坐) 시켰다.”하였음)의 예에 의하여 근본으로 한다면 1년에 두 번 이식한 것이 점차 불어나 원대한 규약을 이룰 것이다. 오직 원하건대 여러 군자들이 처음 삼가고 마침을 생각하여 먹고 제사지내는 과정에서 넘쳐나게 하지 말기를 기약하고, 모두 학궁에서 배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가장 우선을 삼아 시서예악(試書禮樂)의 가르침을 따르고 주나라 은나라 학교 제도를 모방한다면 문학이 성하게 부흥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그렇다.”하였다. 이에 포를 주관하는 날 선비 중에 유사 두 명을 뽑아 그 일을 맡게 하니 포가 풍성하였고 옛 법식이 따라서 회복 되었다.
4년간 수백의 재물이 늘어나 향교의 일이 조금 완전하여 졌으니 아! 우리 최후(崔侯)의 정성이 무관(武官)에 군자라 할 만하도다. 3년 동안 다스려 한 고을에 교화가 두루 미쳤고 실제 사용하고 남은 수효가 향교에 미친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훌륭하지 아니한가.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여 비석에 기록하여 남기고 떠난 후에도 사모한다. 향교 가운데 두었으니 어찌 없어 질 수 있겠는가. 봄 향례를 올린 다음날 재임과 여러 선비들이 이로써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이에 그 대략을 들어 포청의 임사하는 사람을 힘쓰게 하고 또한 어진 수령의 자취를 영원히 보이노라.


김만현(金萬鉉) 기록하다.


*1)일원대무
一元大武 : [禮記] 곡례하(曲禮下)에 “소는 일원대무(一元大武), 돼지는 강렵(剛巤), 닭은 한음(翰音), 개는 갱헌(羹獻)이라 한다.”하였다.

*2)최치영
崔致永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임오(壬午 : 1882)년 4월에 부임했다. 계미(癸未 : 1883)년 3월에 방어영(防營)이 혁파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금위천총(禁衛千摠 : 금위영에 딸린 정3품의 무관)으로 옮겨 갔다.
고종 17(1880)년에 숙천부사로 있었고, 1885년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1886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포청기에 기록된 선정비는 현재 창원향교에 없다.



2018.10.23 창원향교 전경


[출처 및 참고]
역주 창원부읍지-창원문화원(2005.12.30.) 민긍기
창원향교지(하권)-창원향교(2004.11.15.) 향교지편찬위원회
창원향교 기록화 조사보고서-창원시(2013.3)
창원군지-국제신보출판사(1962) 김종하
디지털창원문화대전-민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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