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창원향교 육영재는 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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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18. 8. 19.



2013.5.24. 창원향교 육영재를 옮겨 세운 관술정 모습


창원향교 육영재(育英齋)는 전통시대 창원의 뛰어난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창원향교의 특수목적 사립학교로 순조 3년 계해(癸亥,1803)년에 건립하여 고종 8(1871)년 서원철폐 시 육영재 건물 또한 훼철되자 1877년 회산감씨(檜山甘氏) 문중에서 인수를 받아 의창구 내리동 38-2번지 반룡산 기슭의 군용지 안에 옮겨 세워 관술정(觀術亭)이라 편액하고 지금까지 문중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모습은 창원향교 명륜당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하는데 원형기둥을 세워 구성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와가이다. 좌·우측 칸과 측면 뒤의 두 칸은 방으로 사용하고 정면 중앙 두 칸과 측면 앞 칸은 우물마루로 사용하고 있다.
창원향교에는 두 개의 육영재기(育英齋記)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처음 창건할 때 곡목의 김해김씨 김익용(金翼龍)공이 기록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그의 후손 김만현(金萬鉉)공이 쓴 육영재기이지만 중수기로 봐야 할 것이다. 이 기문들에서 과거 창원의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창원대도호부로 승격한 사유와 육영재의 육성을 위해 누가 얼마의 돈을 내고 누가 탕진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육영재를 세운 자리가 최초로 창원향교가 세워졌던 곳이며 합성동 청룡산 아래로 이건 했다가 다시 지금의 향교 자리로 이건 했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 준다.
두 개의 육영재기를 통해 당시 학문을 사랑한 부사들의 의지와 유림들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고 창원향교의 재력도 엿볼 수 있다.
누가 일러 역사는 만약이 없다 했던가! 어차피 멸망할 조선이라면 서원철폐를 하지 않아야 일제강점기에 우리 학문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쉬운 일이다. 역시 망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育英齋記


齋以育英名考 得一邑英而敎育之義也 粵我鄕先進 有志於勸導後輩 措置若干財穀 經紀是齋 而事力不逮 爲數十載未遑之典矣 歲己未秋府使 趙公棨來莅是邦 以興替補弊 爲己任 而尤致意於右 文興學之方 摭採老成之論 區劃養士之道 夏以做冬以讀 規模昭詳 而時不佞 亦叅抄撰之列 奉以周旋 始以其經之任 付於金丈鎔汝輝氏 繼又屬余以掌之 而解緩之後 猶惓惓於尋常簡牘之間 期有成就 趙公以一時之守幸 遺愛玆鄕 如是懇篤 則況世居是鄕者乎 昨年冬 僉謀攸同齋役始營 而今府朴公孝晋 亦樂爲之贊 申報營司 且捐俸廩 俾有底續 自士林中因推金丈 以幹成造之役 而占地於府城之東庠舍之西 卽舊校基也 地脉融結 山氣明秀 允爲鍾人傑之道墟 而久蕪草之荒原 於是焉 闢斯址列斯礎 地非偶然 時亦有待 而吾鄕文運之回泰 可占矣 其爲制 模倣明倫堂 而廚庖則立之東序 以備供犧 庫舍則立之西序 以貯財穀 高其門 以爲出入之所 繚以垣 以爲防禦之限 輪奐之美 結構之精 悉中儀度 而聳動瞻聽 則千金之辯 固非容易 五朔之役 亦云支離始也 落落難成 終焉井井有度 盖事固待人而成矣 經劃養士之財 前有趙公之措辨 創立斯齋之役 後有朴公之勤世摯 而若復繼之潤色者 金鎔氏爲之先後 而亦莫非我鄕中諸長老指敎之力也 且金昌魯之勤敏 李震成之監督 各悉其心 俱有其勞 然此非徒人謀攸臧 抑由地靈所濟矣
噫 吾南 素稱鄒魯之鄕 而人材之府庫 以吾鄕言之 百年之前 蓮桂相望 特其餘事 巍勳壯烈 銘彛鼎而垂竹帛 德業行誼 輝當世而牖後學者 彬彬輩出 而且當龍蛇之亂 一邑上下人民 奮忠殉節 無一人降 倭故至有褒陞大都護府之名 則士尙之雅 邑風之美 豈不休哉 顧今環大嶺雄州名邑 養士興學之所 在在相望 而吾鄕斯齋之健 今始得成 則頤不無後時之歎 而亦不無時運之攸關 苟能居於斯齋者 先之以孝悌忠信之行 次之以詩書禮樂之學 而窈慕朱夫子之親鹿洞諸子 張南軒之勸岳麓學者 于以攝齊周旋 從事於爲己工夫 而勿爲名利之所誘奪 則其漸涵浸之效 庶可期百世無贊 而育英齋始可以稱其名矣


上之三年癸亥端陽月上澣 盆城 金翼龍 書


육영재기


재(齋)를 육영이라 이름 한 것은 한 고을의 빼어난 이를 교육한다는 의리이다. 우리 고을의 선배들이 후배들을 권면하여 이끄는데 뜻이 있어 약간의 재물과 곡식을 비치하여 두고 이 재를 운영하여 왔으나 일의 형편과 재력이 미치지 못하여 수십 년 동안 겨를 내지 못한 규정이다. 기미년 가을에 부사 조계(趙棨)¹❩*공이 이 고을에 부임해 와서 쇠퇴한 것을 일으키고 폐단을 바로 잡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아 더욱 문을 높이고 학교를 일으키는 방법에 뜻을 두어 노성(老成)한 사람의 글을 모으고 선비를 기르는 도리를 구획하였다. 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글을 읽게 하여 규모가 밝고 자세하였으며 당시 나 또한 시문을 뽑고 짓는 반열에 참석하여 받들어 두루 힘썼다. 비로소 경영의 임무는 김용(金鎔) 어른 여휘(汝輝)씨에게 부탁하고 이어 또 나에게 맡아 주기를 청하였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 오직 평상시 편지의 사이에 정성을 다하여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하였다. 조공(趙公)은 한 때의 수령으로 다행히 이 고을을 아낌이 이와 같이 정성스럽고 독실 하였으니 이 고을에 대대로 살지 않겠는가.
작년 겨울에 모두 함께 육영재 역사의 시작을 도모하니 지금의 부사 박효진(朴孝晋)²❩*공 또한 즐거이 도왔고 신(申)수령 또한 봉급을 들어 이어감이 있었다. 사림에서 김 어른을 추대하여 조성(造成)의 일을 맡게 하고 부의 동쪽 상사(庠舍)의 서쪽에 터를 잡으니 곧 옛 향교 터이다. 지맥이 모여 있고 산의 기운이 밝게 빼어나 진실로 인걸(人傑)을 낼만한 땅이었으나 오랫동안 무성한 풀로 황폐하였다. 이에 이 터를 닦고 이곳에 초석을 세움에 땅은 우연한 것이 아니며 세월 또한 기다림이 있으니 우리 고을의 문운이 돌아 크게 일어남을 알 수 있도다. 그 모양은 명륜당을 모방하였으니 부엌은 동쪽에 세워 제물(祭物)을 준비하게 하고 창고는 서쪽에 세워 재물과 곡식을 저장하게 하였다. 문을 높게 하여 출입하는 곳으로 하고 담장을 둘러 방어의 경계로 삼았다. 크고 널찍한 아름다운 집을 지은 정성은 모두 법도에 맞았으나 용동(聳動)하여 우러러 보면 천금을 갖춤이 진실로 쉽지 않았고 5개월의 공사 또한 지루 하였다 이른다. 시작할 때에는 아득하여 이루기 어려웠고 마침에는 집집마다 법도가 있으니 대개 일은 진실로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지도다. 선비를 기르는 재물을 도모함에는 앞에 조공(趙公)의 조치가 있었고 이 재의 공사를 시작함에는 뒤에 박공(朴公)의 부지런함이 있었다. 이끌어 다시 이어 빛나게 함은 김용(金鎔)씨가 선후가 되었고 또한 우리 고을 여러 어른들께서 지적하여 가르쳐 주신 힘이 아닌 것이 없다. 또한 김창로(金昌魯)의 부지런하고 민첩함과 이진성(李震成)의 감독은 각각 그 마음을 다하여 갖추어 그 노고가 있었으나 이는 다만 사람들이 도모한 것이 아름다운 것일 뿐만 아니라 지령(地靈)이 도와준 바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 우리 영남은 본디 추로(鄒魯)의 고장이라 일컬었고 인재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우리 고을을 말한다면 백 년 전에는 소과(小科) 대과(大科)에 서로 우러렀고 특히 그 여사(餘事)로 우뚝한 공훈이 장렬하여 조정에 이름이 새겨지고 역사에 전하여 졌다. 덕업과 행의가 당세에 드러났고 후학들이 아름답게 배출되었으며 또한 용사지란(龍蛇之亂)³❩*을 당하여서는 한 고을 위아래 백성들이 충성을 떨치고 순절하여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함이 없었다. 때문에 지극한 포상이 있어 대도호부(大都護府)의 이름에 올랐으니 선비를 숭상하는 우아함과 고을풍속의 아름다움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영남의 웅장한 고을 이름난 마을로 선비를 양성하고 가르침을 진흥하는 곳에 있어 서로 우러름이 있는데 우리 고을에 이 재의 건립이 지금에 이루어졌으니 떳떳하여 훗날에 칭찬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시운에 관계된 바가 없다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이 재에 거하는 자는 효도와 공손과 충성과 믿음의 행실을 우선하고 시서예악의 배움을 다음에 하여 주자(朱子)가 가까이한 녹동서원 제자(諸子)들과 장남헌(張南軒)⁴❩*이 권장한 악록(岳麓)의 배움을 사모할 것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두루 힘써 위기(爲己)⁵❩*의 공부에 종사하고 명리(名利)에 유혹되어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그 점차 젖어 드는 효과는 거의 백세토록 쇠퇴함이 없을 것이며 육영재가 비로소 그 이름이 일컬어 질 것이다.


순조 3년 계해(癸亥 : 1803) 오월 상순에 분성(盆城) 김익룡(金翼龍) 쓰다.


¹❩*조계(趙棨)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정조 18(1794)년에 법성첨사(法聖僉使)로 있었고, 기미(己未,1799)년 6월에 창원부사로 부임하여 신유(辛酉, 1801)년 8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승차하였다. 이후 순조 9(1809)년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있었다.
²❩*박효진(朴孝晋)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정조 11(1786)년에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있었고, 임술(壬戌, 1802) 7월에 창원부사로 부임했다. 순조 3, 계해(癸亥, 1803)년 9월에 교체 되었다. 순조 12(1812)년에 곽산군수(郭山郡守)가 되었으며, 순조 13년에 부호군(副護軍)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822년에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순조 23(1823)년에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가 되었다.
³❩*용사지란(龍蛇之亂) :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 조선은 이 전쟁에서 승리는 했으나 당시 인구 1천만 중 400만이 사라지는 비극을 초래했음.
⁴❩*장남헌(張南軒) : 송나라 사람. 이름은 식(栻), 남헌(南軒)은 호이다. 이학(理學)에 전심하였으며 주자와 교류하였음. 저서에는 [남헌역설(南軒易說)], [남헌집(南軒集)] 등이 있음. [宋史·宋元學案]
⁵❩*위기(爲己) :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


2010.7.20 동읍 곡목마을 김만현공이 살았던 집


育英齋記


余嘗讀朱夫子崇安縣學田記 嫠源縣學書記 竊有所感焉 盖斯道也 其實原於天命之性 而其文 則出於聖人之手 六經孔孟之籍是己 後世之人必 由是而學焉 此學之所以不可無書也 且諸生 有所仰食 可以就學 使其家溫 則雖裏飯而來學可也 若厄於貧 則雖有願學之士 勢有所不得此學之 所以不可無田也 有志兩事者 可不以此兩件事 爲根本田也 盡心致力也 哉 本齋之創久矣 自校學之廢而建之于此 牓之曰育英 盖以聚一鄕英材 而敎育之義也 雖謂之鄕學可也 按舊記 先父老建學牖後之謨 宏深弘遠族父花川公 諱翼龍 手澤尙新而會不百年 規毁物零 弦誦之寢衰者 歲月于玆矣 自鄕中置有司一員 逐年居業者 多者聚十數人 少者聚七八人 不過七八月五六日 供億無資 各自散去 恒以是齋咨矣 往在庚申夏齋會之日 鄕中諸長老參座 而顧左右言曰 以若盛擧財匱人小實是大欠事 自玆以往 有司自齋中薦出 半錢粒穀節以用義以藏 期至實效之地云云 而成完文以給 故同志若而人 合響商確 諸般周旋措劃之方 孜孜業業 各處散在沓二十七斗落 決定睹地價三十六兩 及鹽稅錢半年利五兩 並四十一兩 以有司一周年 日下磨錬 公須員沓二十四斗五刀地 每年賭地價以六十兩決定 以爲居接需用之資 而是沓也 邊於巨川 連被水患 其於需用之資 全無實效 不得已右沓賣得二百金以私分殖代土之意 辛巳某月日 完意斷定 鄕飮錢便分條六十兩 來付於本齋而閔侯 宗鎬 莅官三載 頻設飮禮 以齋錢代用 右錢六十兩 永爲割本顧念 疇襄齋中需用 就緖無計矣 何幸前此幾賢侯莅邑 齋規始新 而前侯之致心養士 捐廩以助之者 亦爲不訾沈侯昌奎一百金 鄭侯周應五十金 徐侯相缶十金 尹侯永夏一百金 燒木六十束 尹侯錫五一百金 粱侯周顯五十金 合四百五十金 內三百金依拾伍例 便分于一邑百八里 觀海亭重修之日 本院便分一百金 以齋錢相換 合便分錢 四百六十金 每年居業時 捧利需用 己成金石之規 前侯右文之風 固逈出尋常 而齋儒周章之力 亦豈云虛徐哉 盧龍洛 金思奭 金萬衡不幸作古人 而金思憲 金思栢 李樟煥 金吉元 安寅錫 僉君子 倡之於前 金鎬源 金璨元 曺瓊煥 安斗馨 金悌源 諸章甫和之於後 於是一邑縫掖之流 席捲坌集跨朔鉛槧齋舍不能容 且居齋時零餘錢 及尹侯錢一百金 歲以分殖厥數至爲千餘 方廣購書冊 豊賣土田 而便分賭地私殖錢 合以名之曰養土錢土地曰養土田 實遵朱夫子書記田記之遺意也 噫與余 心周志合 終始幹事者 不過幾人 而數十年積累之功 幸不爲虧簣之山 苟使來世之人 體吾輩今日之心 則斯學日振 而吾鄕其庶幾乎 辛巳八月日 重建菁莪門 諸公勗余監董 及告落 僉曰 齋樣一新 可以成遠大之規 不可不摭其事實以 示諸後 屬余以記之 余惟 先父老設立之始財力之出 未知何自 而齋舍宏傑 規模周贍如彼其盛也 而後來不克嗣守 幾至乎 茂草之歎矣 及至中歲 草舊更張 節縮以省費 滋殖以厚本 保有今日之稍完 是知興廢 雖係於時之盛衰 而得失 不由乎人之臧否乎 惟願居是齋者 遠法朱子垂世之訓 迎體先父老建齋之規 廉公勤幹 無有龠合竊廩濫巾之私 至於課業 勿以務葩藻 賭科第爲意 惟以孝弟忠信興禮讓正風俗爲本 則是齋也將永世無替 育英之義矣 玆擧顚末俾作後日箴鑑焉


金萬鉉 撰


육영재기


내 일찍이 주부자(朱夫子)의 숭안현학전기(崇安縣學田記)와 이원현학서기(嫠源縣學書記)를 읽고 마음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대개 유학의 도는 하늘이 내린 성품에 그 실재의 기반을 둔다. 그 문장은 성인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육경(六經)과 공자 맹자의 책들이 그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으로 학문을 하니 이것이 학문에 책이 없을 수 없는 까닭이다. 또한 일반적인 젊은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으면 학문의 길로 나아가고 그 집안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으면 비록 먹는 것을 덜어서라도 가서 배워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 가난으로 궁벽하면 비록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라도 그 사정으로 배울 길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학문에 농사지을 땅이 없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 두 가지 일에 뜻이 있는 사람은 또한 이 두 가지 물건과 일을 근본 바탕으로 삼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육영재는 창건한지 오래되었는데 학교를 폐교한 것을 이곳에다 짓고 ‘육영(育英)’이라 이름 하였다. 대개 한 고을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가르치고 기르는 뜻이 있는 것이니 향학(鄕學)이라고 하여도 괜찮을 것이다. 옛 기문(記文)을 살펴보니 선대 고을의 어른들이 학교를 짓고 후세를 장려하는 뜻이 크고 깊고 넓고 멀었다. 집안 어르신인 화천공(花川公) 익용(翼龍)께서 손수 새롭게 지어 아직 백년이 되지 않았으나 건물이 낡고 떨어져 나가 학문을 닦던 자리가 쇠약해진 채 지금까지 세월만 흘렀다. 이에 고을에서 유사를 한 명 두어 드디어 해마다 수업을 진행하려고 사람을 모았는데 많은 때는 십여 명, 작을 때는 칠팔 명이 모였으니 불과 7~8일이나 5~6일만 지나면 공급할 자산이 없어서 각자 흩어져 버렸으니 이것이 항상 탄식할 일이었다. 지난 경신(庚申) 여름 재실 모임에 고을의 여러 어른들이 참석하여 사람을 둘러보고 “만약에 성대한 거사를 하는데 재물이 다하고 사람이 적다는 것은 실로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 이후로는 유사는 재실 중에서 천거하여 뽑고 돈과 곡식의 쓰임을 줄여 절약하여 사용하고 저축하여 실효를 볼 수 있는 상황에 이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시고 글을 완성하여 돌렸다. 이에 뜻이 맞는 사람들 몇 명이 머리를 모으고 의논하여 여러 가지 주선하고 기획하는 방법을 열심히 찾았다. 그리하여 각각 흩어져 있는 논 28두락의 도지가(睹地價) 36냥(兩)과 염세전(鹽稅錢) 반년에 5냥(兩)씩을 합하여 모두 41냥으로 결정하여 유사가 일주년을 기준으로 날마다 갈고 다듬어 공수원답(公須員沓) 24두 5도지(刀地)의 매년 도지가 60냥으로 결정하여 손님을 접대하고 실재 사용하는 자본으로 삼았다. 이 논들이 큰 하천 주변에 있어서 매년 연달아 수해를 당하여 그 실재 사용 자본으로는 전혀 실효가 없어 부득이 이 논들을 모두 200금(金)에 팔고 개인 분식(分殖)으로 다른 땅으로 바꾸는 것으로 신사(辛巳)년 모월 모일에 완전히 결정하기로 하였고 향음전(鄕飮錢)은 몇몇으로 항목을 나누어서 60냥으로 하여 본재(本齋)에 맡겼다. 부사 민종호(閔宗鎬)¹❩*가 부임하여 3년 동안 자주 향연을 열어 재전(齋錢)으로 대용하여 앞의 돈 60냥은 영영 그 원래 의도했던 용도를 상실하였고 재실을 위해 사용하려던 것이 상실되어 사업이 진행됨에 아무른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이전의 몇몇 어진 부사가 읍에 부임하여 재실의 규모가 새롭게 되었다. 이전의 부사(府使)들이 선비를 키우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 창고의 재물을 덜어 그 일을 도운 사람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부사 심창규(沈昌奎)²❩*가 100금, 정주응(鄭周應)³❩* 부사가 50금, 서상악(徐相缶)⁴❩* 부사가 50금, 윤영하(尹永夏)⁵❩* 부사가 100금과 뗄감 60속(束), 윤석오(尹錫五)⁶❩* 부사가 100금, 양주현(粱周顯)⁷❩* 부사가 50금 등 합 450금 중에서 300금은 십오례(拾伍例)에 의거하고 다시 한 읍의 108리에 나누었다. 관해정(觀海亭) 중수 때 다시 본원의 돈 100금을 나누어 재전(齋錢)으로 바꾸어 합하여 다시 460금으로 분전하였다. 매년 거업(居業)을 할 때 그 이자로 비용을 충당하여 이미 확고한 규범을 만들었는데 이는 이전의 부사들이 학문을 권장하는 풍토가 진실로 보통을 훨씬 넘었다고 할 것이지만 재실의 선비들이 두루 돌아다니며 주선한 힘 또한 어찌 헛된 것이라 하겠는가. 노용락(盧龍洛) 김사석(金思奭) 김만형(金萬衡) 등은 불행히 고인이 되셨고 김사현(金思憲) 김사백(金思栢) 이장환(李樟煥) 김길원(金吉元) 안인석(安寅錫) 등의 모든 군자들이 앞에서 주창하고 김호원(金鎬源) 김찬원(金璨元) 조경환(曺瓊煥) 안두형(安斗馨) 김제원(金悌源) 등의 여러 선비들이 뒤에서 호응하였다. 이에 한 고을을 지탱해가는 사람들이 순조롭게 모여서 한달을 넘기면서 사람들이 넘치도록 모여들어 재실에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재계를 지낼 때 남은 돈과 윤부사가 낸 돈 100금을 해마다 분식하여 그 수가 천여금에 이르러 광범위하게 책을 구입하고 땅과 전답을 넉넉히 샀다. 또 다시 도지(賭地)와 사식전(私殖錢)으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 합하여 그 이름을 양사전(養土錢)이라 하고 토지는 양사전(養土田)이라 하였다. 이는 주자의 서기(書記)와 전기(田記)에 남겨진 뜻을 따른 것이다. 아! 나의 마음과 뜻을 같이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주관한 사람이 불과 몇이던가! 수십년 동안 쌓아 온 공이 다행이 주러들지 않고 진실로 후세들로 하여금 우리가 오늘날 마음 먹었던 것을 체득하여 유학이 날로 떨쳐지는 우리 고을이 될 때가 거의 다 되었다. 신사(辛巳)년 8월에 청아문(菁莪門)을 중건 할 때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감동(監董)을 맡겨 낙성을 고하니 모두 말하기를 “재실의 모습이 새로워졌으니 원대한 법도를 이룰만 하니 그 사실을 정리하여 후손들에게 보여야만 할 것이다.” 라고 하여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선대의 어른들이 설립한 처음의 재물과 힘을 모아낸 것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알지 못한다. 재실이 크고 장대하며 규모가 두루 넉넉하여 그 성대함이 그러 하였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잘 이어 지키지 못하고 황폐하게 풀이 무성해진 것을 탄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간 시대에 이르러 옛 모습을 혁신하고 확장하며 비용을 줄여서 절약하고 저축하고 근본을 두텁게 함으로써 넉넉하게 불려서 지금 조금의 완전한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흥망이 비록 시대의 성쇠와 연관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얻고 잃는 것은 사람의 선악(善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바라건대 이 재실에 들어오는 자는 멀리는 주자께서 후세에 남긴 가르침을 본받고 가까이로는 선대 어른들께서 재실을 세우신 모범을 체득하여 겸손하고 공정하며 근면하여 조금도 남을 속이고 으스대는 사사로움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과업을 수행함에 외형적 꾸밈에 힘쓰지 말고 과거시험에 뜻을 두지 말며 오직 효도와 공경, 충성, 믿음으로 예의와 겸양과 올바른 풍속을 흥기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며 이 재실이 장차 영원토록 쇠퇴함이 없으며 또한 육영(育英)의 원래 뜻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이에 그 전말을 갖추어 적어두어 뒷날 거울이 되도록 하였다.


김만현(金萬鉉) 짓다.


¹❩*민종호(閔宗鎬)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고종 5(1868)년 삭천부사(朔川府使)로 있었고, 윤석오의 후임으로 고종 11(甲戌, 1874)년 4월에 부임하였다. 고종 13(丙子, 1876)년 6월에 폄체(貶遞) 되었다. 고종 15(1878)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가 된데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²❩*심창규(沈昌奎)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임인(壬寅, 1842)년 8월에 부임하여 갑진(甲辰)년, 현종 10(1844)년 6월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고 철종 8(185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³❩*정주응(鄭周應)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갑인(甲寅, 1854)년 5월에 부임하여 정사(丁巳, 1857)년 2월에 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옮겨갔다. 철종 11(1860)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고, 철종 13(1862)년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가 되었다. 고종 4(1867)년에 강화부사(江華府使)로 있으면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차함되었고 고종 6(1869)년 총관(摠管)이 된데 이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⁴❩*서상악(徐相缶)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경신(庚申, 1860)년 8월에 부임하여 철종 13(壬戌, 1862)년 6월에 어사(繡)에 의해 파직 되었다. 철종 14(1863)년 구성희(具性喜)와 함께 방축죄인(放逐罪人)이 되었으나 고종 2(1865)년에 구성희와 함께 방송(放送)되었다.
⁵❩*윤영하(尹永夏)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고종 3(1866)년에 김포군수(金浦郡守)가 되고, 정묘(丁卯, 1867)년 4월에 부임하여 고종 5(戊辰, 1868)년 3월에 백성들을 잘 다스려 임금께 이력을 아뢰었다. 기사(己巳, 1869)년 8월에 포상을 하라는 계로 인하여 임기 1년을 더하고 경오(庚午, 1870)년 8월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교체 되었다. 고종 13(1876)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있었다.
⁶❩*윤석오(尹錫五)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고종 5(1868)년 부산첨사(釜山僉使)로 되었고, 경오(庚午, 1870)년 8월에 창원부사로 도임(到任)하였다. 고종 8(辛未, 1871)년 5월에 창원이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겸 영남수군방어사(嶺南水軍防禦使)가 되었다. 포상하라는 계로 인하여 1년을 더하였다. 고종 10(癸酉, 1873)년 8월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차함(근무하지 않고 벼슬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되었다. 고종 11(甲戌, 1874)년 4월에 교체 되었다.
⁷❩*양주현(粱周顯)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경진(庚辰, 1880)년 9월에 부임하였다. 신사(辛巳, 1881)년 4월에 통영에서 인장(印)을 던진 사건으로 경체(徑遞, 임기가 끝나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감)되었다. 고종 19(1882)년 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가 되었으나 1883년에 봉송(封松)의 남벌과 백성을 학대한 죄로 파직된데 이어 창원부사로 있을 때 일로 잡혀 엄형을 당하고 정주목(定州牧)에 정배 되었다. 그 뒤 고종 24(1887)년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2010.7.20 동읍 곡목마을 만휴공의 집에 걸려 있는 편액


*김만현(金萬鉉, 1820~1902) 창원시 동읍 화양리 화목마을에 살았던 사람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내문(乃聞), 호는 만휴(晩休). 금산(琴山) 김귀(金龜)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죽와(竹窩) 김시찬(金時瓚), 어머니는 김신한(金臣漢)의 딸로서 상산김씨(商山金氏)이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소산(小山) 김기호, 남려(南黎) 허유(許愈) 등과 교유하였으며 창원향교와 관련한 여러 편의 기문(記文)을 남겼고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1886년 관해정(觀海亭)을 중창하였다.
그의 글을 담은 『만휴집(晩休集)』은 재종손 김병린(金柄璘) 등이 시문을 모아 1935년 간행하였다. 『만휴집』은 권1에 시(詩) 84수, 권2에 서(書) 29편, 잡저(雜著) 7편, 서(序) 3편, 권3에 기(記) 7편, 발(跋) 2편, 축문(祝文) 5편, 제뢰문(祭誄文) 5편이 실려 있으며, 권4~5는 부록으로 만장(輓章)·제문(祭文)·가장(家狀)·행장(行狀)·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 등이 실려 있다. 서문은 권상규(權相圭)가 썼고, 발문은 조정래(趙正來)와 김광하(金光河)가 썼다.



唱酬育英齋 육영재에서 小山 金琦浩(소산 김기호)

煙塵消息漲京鄕 시끄러운 소식이 경향 각지에 퍼지고
前路悲歌又夕陽 앞길에는 슬픈 노래 흐르고 해마저 저무네.
無計衰年憂社稷 늙은이의 나라 걱정 계책 없으나
有懷終日托壺觴 종일토록 우울하여 술잔을 비우네.
詩中虛老生涯拙 시로서 헛되이 늙은 생애 우졸하지만
亂裏相逢說話長 난리 속에 상봉하니 이야기 길어지네.
且願仁天陸甘雨 원하노니 어진 하늘 단비를 내리셔서
四郊聽水稻花香 사방의 물소리에 벼꽃 향기 풍겼으면.


*창수(唱酬) : 시가(詩歌)나 문장, 노래 따위를 지어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
*김기호(金琦浩,1822~1902) : 조선 후기 창원 출신의 유생(儒生)으로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문범(文範), 호는 소산(小山),소파(小坡)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김성철(金聖哲)이고, 어머니는 김하윤(金夏潤)의 딸로서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사파동 111-7번지에 소산(小山)을 제향하는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그는 같은 마을에 살았던 박정홍(朴定弘)공에게 글을 배웠고 자라면서 주희경(周熙敬)공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40세 전후하여 요천시사(樂川詩社)를 결성하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1865년(고종 2)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 나아가 성재문도가 되었다. 만휴(晩休) 김만현(金萬鉉), 남려(南黎) 허유(許愈), 일산(一山) 조병규(趙昺奎) 등과 교유하였으며, 소산재(小山齋)를 열어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김기호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학문과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소산집(小山集)』, 『예설문답(禮說問答)』, 『성리이기도설(性理理氣圖說)』, 『경학도설(經學圖說)』 등이 있다.
*육영재(育英齋) : 조선 순조 3년(1803)에 건립한 창원향교(昌原鄕校) 육영재를 말한다.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金琦浩-집필자 민긍기
역주 창원부읍지-창원문화원(2005.12.30) 민긍기
창원향교지(하권)-창원향교(2004.11.15.) 향교지편찬위원회
소산집 국역본-김정규(金禎圭, 2013.10.21.)
창원군지-국제신보출판사(1962) 김종하
창원향교 기록화 조사보고서-창원시(2013.3)
남명학고문헌시스템-晩休堂遺集 김만현(金萬鉉)
창원시 문화유적분포지도-창원대학교박물관(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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