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구산면 상마전리 전주이씨 구양재 龜陽齋

댓글 2

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19. 7. 15.

 

2019.7.5. 상마전마을 전주이씨 구양재의 대문 향양문

구산면 상마전경로당 뒤편 구산면 마전리 349번지에는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 재실인 구양재(龜陽齋)가 있다. 구양재의 대문은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편액이 걸렸으며 대문 앞 우측에는 전주이씨세거지(全州李氏世居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향양문 옆의 쪽문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니 좌측에 『해산전주이공은춘송덕비(海山全州李公殷春頌德碑)』가 서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와가에 해산(海山)이 쓴 친필 편액 구양재(龜陽齋)가 걸려 있다. 구양재의 구조는 좌측 2칸은 방이고 우측 1칸의 절반만 마루를 놓고 2칸의 방 앞으로 좁은 마루를 연결했다.
이 방문기록을 위한 검색 중에 「해산유고(海山愚稿) 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이다.」라는 해산 이은춘(李殷春)의 유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책을 사보니 우리지역의 선비들이 살았던 흔적을 알게 됐고, 역사의 기록을 바로 잡고자 노력한 흔적도 있다. 아래에는 구양재에 걸려있는 편액들을 소개한다.

 

향양문(向陽門) 편액

 

 

2019.7.5 구양재 모습
海山 李殷春이 쓴 구양재(龜陽齋) 편액

[원문]
龜陽齋記
天下之情莫不慕 其勢利栄貴 而厭其寒素窮約夫 其勢利栄貴之 爲可樂寒素窮約之 爲可苦雖聖人未甞知其然 而亦無意焉者也 是故孔子曰 富貴如可求 雖執鞭之士 吾亦爲之繇斯 以譚聖人之情 亦無意於凡人也 明矣 然而聖人之所 以爲聖人凡人之所 以爲凡人者必有所 以然而然者矣 惟聖聖哉樂天好道 挺然特立不以世之所 樂者爲樂 而樂其樂不以世之所 苦者爲苦而不苦其苦 全其天養其道樹倫扶綱垂 休光於無窮 而百世之下 風聲攸曁懦者 可以立薄夫 可以敦此聖人之所 以爲聖人而凡人 則不然患得患失乃 至於無所不之 而違天理壞人紀則極矣 雖然生於千載之後 其可樂而不樂其樂 其可苦而不苦其苦 自非深造乎 聖人之道者固莫能 焉惟我先朝德泉君生 於禁中德廣道 降翼贊鴻猷化洽萬姓 錦繡珠玉豊润滿前 可謂極人世之樂 而天資純粹近道不以 是爲樂鳳飄鸞翔超乎 雲漢之表 而無一物縈其情晩年 栖息於錦水之上 銅山之陽苟非 其天書遠召 一不入禁中後世 子孫承襲其風韻遐方幽聚隨分點 取敎子課農不競要津 是以湖山佳處頗多 吾祖之雲仍然世擾居濶或有時節宴遊 而行葦之踐未嘗無餘惜爲夏将半 吾宗殷春君跋涉水陸訪 余海島講世叙 族請其亀陽斋記曰 吾家通政公以德泉君 后全城府院君之耳孫於䆠達泊然無所求取 其山水雲林之樂 尊居於嶺右武陵縣之亀山下 日以書史自娛不使世塵染其衣履比沒葬于 玆山之上厥後子孫 僉詢建数間屋於玆山之陽以 爲奉先聚族講學之所 顔之曰亀陽斋 願得子之一言以發明 先世遺意于 以垂示來裔丕掦道義之訓 其惠甚大子曰 不亦善乎 夫紹述之道 在於自盡 其誠誠之所在 天必諴之况人乎 通政公之賢足有辤於後世 何待余文且 余變局以來三入倭獄酷被凶毒獄中之病 迄今不瘳精神昏瞀筆力從以衰退 未足以闡明 遺範烏乎使 通政公慕厭  其可樂可若之事 而不念先徽之攸 在一片亀山鞠 爲荒原發區鹿豕狉狉 而己安見所謂亀陽齋之巍然於溪光岳色之中 而絃歌之聲至 今不絶使人咨 嗟欽慕之不巳然則 爲其子孫者尤當著存不忘乎 心而可不敬歟 是不可以無記也 若夫山川 風炯朝暮四時之 景與夫賔親文酒會合之樂 以胥余病之得愈 而或與君登斯斋指点摩挲目寓神遊然後寫之未晩也
大韓三十一年己丑五月十四日辛未海上晩逸李淳記

 

구양재기(龜陽齋記)
천하의 인정(人情)은 그 권세와 부귀영화를 좋아하지 않음이 없고 청빈하고 곤궁한 것은 싫어한다. 물론 권세와 부귀영화는 즐기기 쉽고 천빈함과 공궁함은 고통스러운 것이니 비록 성인도 일찍이 그러한 것을 알고 있지만 또한 뜻을 두지 않음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자께서는 “만약 부귀를 구할 수 있다면 비록 수레를 끄는 벼슬아치가 되는 것도 내가 또한 그것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성인의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또한 뭇 사람에게 뜻을 둠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인이 성인(聖人)이 된 까닭과 범인(凡人)이 평범한 사람이 된 까닭은 분명히 그 이유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오직 성인이 성스러운 것은 하늘의 본성을 즐기고 도를 좋아하며 빼어나 우뚝 서서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진정 즐겨야할 것을 좋아한다. 또한 세상이 괴로워하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고 괴로워해야 할 것을 괴로워한다. 그 하늘의 본성을 온전히 하고 그 도를 잘 다스리며 윤리를 바로 세우고 기강을 지해하여 후대의 무궁하게 그 큰 빛이 드리운다.  백세 아래에 그 풍모와 명성이 유연히 옅어지고 낮아질 수 있지만 이러한 성인이 성인인 까닭으로 그것을 다시 돈독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뭇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이해득실을 근심하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하늘의 이치를 어기고 인륜 기강을 무너뜨려 극심함에 이르게 된다. 비록 그러하나 천년 뒤에 태어나서 그 즐길만 한 것으로 하지 좋아하는 것으로 즐기지 않고 그 괴로워 할 만한 것으로 하지 괴로운 것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 스스로 조예가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의 도는 진실로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선조 덕천군(德泉君)은 궁궐의 임금의 자제로 태어나 가라않은 도를 드날리고 그 큰 은택이 만백성에게 미치니 부귀영화가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었으니 인간 세상의 최고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도를 가까이하여 그러한 쾌락을 즐겨하지 않고 봉황이나 난새가 높이 날아올라 저 구름과 은하 위로 환하게 드러나듯이 한 가지 재물에도 그 마음을 얽매지 않고 만년에 금수(錦水) 가 동산(銅山) 남쪽에 은거하시며 진실로 임금의 부름이 와도 한번도 궁궐에 들어가지 않으셨다. 후세의 자손들도 그 기풍과 정신을 이어받아 먼 지방에서 은거하여 살면서 분수에 따라 먹고살며 자식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며 관직에 오르기를 다투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이곳 강산에 아름다운 곳이 자못 많았다. 우리 선조의 후손들은 그러나 세상에 깃들어 사는 것이 성글어서 간혹 절기에 맞추어 향연을 베풀고 놀이를 즐기면서 위씨가 화수(花樹)의 모임을 한 것을 행하려 하지만 막상 여유가 없어 애석해 하던 것이 여름이 다 지날 만큼 되었다. 우리 종중의 은춘(殷春) 군이 물길과 산길을 건너 바닷가의 나를 방문하여 세상을 이야기 하고 족친의 만남을 즐기다가 나에게 구양재기(龜陽齋記)를 청하며 말하였다. ‘우리 집안 통정공(通政公)은 덕천군(德泉君)의 후예로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지이(之耳)의 손자입니다. 벼슬과 영달에 관심이 없어 구하지 않고 산수(山水)의 아름다운 숲을 즐기셨는데 영남 우도의 무릉현(武陵縣) 구산(龜山) 아래에 살면서 날마다 경서와 역사로 스스로즐기시고 세상의 먼지와 때를 옷에 묻히지 않으셨습니다. 이곳에서 돌아가셔서 이 산 아래 장례를 지냈는데 그 뒤 자손들이 모두 이 산 양지 쪽에 몇 칸의 재실을 지어 선조를 봉양하고 문중이 모이며 강학하는 장소로 삼고자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편액을 구양재(龜陽齋)라고 하였으니 그대께서 한마디 말로 선대께서 남기신 뜻을 발혀 후대에 드러내 보여서 그 도의(道義)의 가르침을 크게 일으켜 주시면 그 은혜가 매우 크겠습니다.’ 내가 답하였다. ‘또한 착하지 아니한가. 무릇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 자손에게 물려주는 도는 스스로 그 정성을 다하는데 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통정공(通政公)의 어짊은 충분히 후대에 회자될 만하니 어찌 나의 글을 기다리겟는가. 또 나는 왜침의 변국(變局) 이래로 세 번 왜놈의 옥에 들어가 흉악한 독을 입어 옥중에 병이들어 지금까지 낫지 않아 정신이 혼미하고 필력이 따라서 쇠퇴하니 남기신 법도를 천명하기에 부족하니 어찌하겠는가. 통정공깨서 좋아하고 싫어하시는 것과 즐기고 괴로워하는 일은 선조의 남기신 덕업이 유연히 남았으니 생각지 말면 한 켠의 구산(龜山) 물가의 버려진 들판이 환하게 개발되어 사슴들이 뛰어노는 낙원이 될 것이다. 어찌 보지 않겠는가. 이른바 구양재(龜陽齋)가 우뚝히 맑은 시냇가 푸른 산빛 속에 솟아나 노래하는 소리가 지금에도 끊이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고 흠모하는 곳이 될 따름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손된 사람은 마땅히 높이 드러내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기문이 없을 수 없으니 만약 산천 풍광과 아침 저녁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에 손님과 벗과 글을 읽고 술을 마시며 회합을 즐길 때 나의 병이 더 나아지기를 기다려 혹시 그대와 함께 이 재실에 올라서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눈으로 신령이 즐기시는 것을 본 연후에 이 글을 베껴써도 늦지 않을 것이다.’
대한(大韓)31년 기축 5월 14일 신미(辛未) 해상만일(海上晩逸) 이순(李淳)쓰다.

 

 

 

龜陽齋 原韻     구양재 원운
吾先盛德布春陽  우리 선조 큰 덕이 봄볕같이 펼쳐져서
一世遺名百世芳  한 세상 남긴 이름 영원토록 향기롭구나.
碧瓦數間精舍立  푸른 기와 얹어 두어 칸 재실을 지었으니
靑山三尺哲人藏  푸른 산 세자 높이는 빼어난 인물의 묘소로다.
堪憐諸族相敦睦  모든 일가들 서로 돈독하고 화목하니 참으로 사랑스럽고
亦樂親朋自遠方  친한 벗들 멀리서 찾아오니 그 또한 즐겁구나.
竭力盡誠天必感  힘과 정성 다하니 하늘도 반드시 감동하리라.
尊靈完似在中央  조상님 영령들이 완전히 가운데 계신 것 같네.
八世孫 吉星 謹稿  8세손 길성 삼가 짓다.

 

 

 

龜陽齋 次韻
十載經營再建堂  십년 동안 경영하여 다시 재실을 지어
門楣依舊揭龜陽  대문 위에 옛날처럼 구양재라 걸었도다.
五龍江水東南闊  오룡강 흐르는 물 동남으로 멀리가고
三馬山峯左右强  삼마산 높은 봉우리 좌우로 굳세도다.
地是先人遺杖屨  땅은 여기 조상들이 남긴 자취이며
屋惟來裔祝羹墻  집에는 오직 후손들이 축문 읽고 제사지내네.
根培然後枝猶達  뿌리를 북돋워야 가지가 튼튼하듯
自此雲仍永世昌  지금부터 후손들이 대대로 번창하리.
七世孫 殷春 謹稿 7세손 은춘 삼가 짓다.

龜陽齋 次韻
新齋重建古山陽  옛 산의 양지쪽에 새 재실 다시 지으니
爲此先塋在彼岡  여기 모실 조상님들 저 산에 있었도다.
三璞靑山藏水勢  삼박실 청산은 물줄기를 간직하고
五龍滄海躍金光  오룡강 푸른 바다 금빛으로 물결친다.
仰看板嚜明來跡  현판을 바라보니 내력이 환하고
重擧行裝落遠鄕  행장을 다시 들어 먼 고향에 돌아왔네.
行善之餘多慶福  착한 행실 넘쳐 경사와 복이 많고
春園花草日時長  봄 동산의 화초는 매일 매일 자라리라.
九世孫 鎔浩 謹稿 9세손 용호 삼가 짓다.

 

 

龜陽齋 次韻  구양재 차운
齋曰龜陽門向陽  구양재라 이름하고 양지를 향하여 대문을 내니
此間花樹則春光  이곳의 꽃나무들 금방 봄빛을 띠는 구나.
千秋淸趣猶存跡  천추의 맑은 뜻은 오히려 흔적으로 남고
百世高名不朽芳  영원토록 높은 이름 불후의 향기로다.
無語靑山依舊在  말없는 청산은 옛날처럼 그대로 있고
有聲流水至今長  소리내어 흐르는 물 지금도 길게 뻗어간다.
兵火於焉年已十  전쟁이 지나간 지 어언 20년이 되어
經營重建幾商量  중건을 도모하며 그 얼마나 힘썼던가?
八世孫 泰龍 謹稿 8세손 태룡 삼가 짓다.

 

 

해산전주이공은춘송덕비(海山全州李公殷春頌德碑)
전주이씨 시조(全州李氏 始祖)는 신라 국사공(新羅 國司空)의 벼슬을 하신 휘(諱) 한(翰)이시며, 중시조 덕천군(德泉君) 휘 후생(厚生)은 24세손이고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 휘 성규(成桂)의 차남 조선 이대 왕(朝鮮 二代 王) 정조대왕(正祖大王) 휘 방과(芳果)의 15남 중 10남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휘 춘발(春發)은 덕천군(德泉君)의 20세손으로 조부(祖父)는 김해훈령(金海訓令) 휘 호(箎)이고, 친부(親父) 통덕랑(通德郎) 휘 창년(昌年)이며 서기 1671년 신해생(辛亥生)으로 신녕여씨(新寧余氏)와 혼인 마전(麻田)에 정착하고 장남인 휘 중빈(重彬)은 하마전(下麻田)에 차남 휘 중채(重彩)는 상마전(上麻田)에 삼남 휘 중백(重白)은 입곡(入谷)에서 번성하였다. 휘 은춘공(殷春公)은 휘 중채(重彩)의 6세손이고 아호(雅號)는 해산(海山)으로 시서역의(詩書易醫)에 능통한 당대 영남유림에 우뚝 솟은 문장가요 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전국 유생들에 널리 알려졌고 전국일원에 공의 육필이 장서와 목서각으로 전하고 있어 우리문중을 만 천하에 빛나게 하였음을 증명한다. 공은 종친과 문중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각별하여 종사를 정립(正立)하는데 일평생 진력하심에 모든 종친이 감복하였다. 특히 휘 길성공(吉星公), 휘 태룡공(泰龍公)의 공로와 휘 용호공(鎔浩公)의 재력이 뒷받침되고 종친들의 성금과 노력봉사로 서기 1946년에 종중 재실 구양재(龜陽齋)를 준공하였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한국전쟁으로 재실이 소실되어 서기 1960년에 재건축하였으니 그 노력과 정성은 무엇에 비교할 것이 없도다. 또한 2만여 평의 선영과 2천여 평의 전답을 확보 선조의 유택을 영구보존 재정비하고 흩어진 종친들을 빠짐없이 족보에 수록하여 뿌리의 근본을 일깨워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줌으로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아 주셨으니 그 업적의 칭송을 글로써 다하지 못함이 민망하며 종중의 지도자요 숭조돈종(崇祖敦宗)의 의표(儀表)로서 고귀한 공덕을 높이 받들어 추앙하자는 종원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모아서 공의 그 고귀한 이념을 이 비에 새겨 후대에 귀감으로 삼고자한다.
전주이씨덕천군파춘발공종중 종원일동(全州李氏德泉君派春發公宗中 宗員一同)
명예회장팔세손복주 종회장구세손용규(名譽會長八世孫馥周 宗會長九世孫鎔圭)
추진이원팔세손쌍봉구세손용관경출용식(推進委員八世孫雙奉九世孫鎔觀庚出鎔植)
서기 1999년 己卯 음력 10월 7일
族姪馥周謹撰 星州後人 李在德書(족질 복주 근찬 성주후인 이재덕서)

 

출처 및 참조
해산우고

나는 대한민국 마지막 선비다.-이은춘(번역 이봉수)/자연과 인문(2011.3.7.)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