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19. 12. 31. 21:47

 

2019.12.21. 진북 이목리 모성재 전경

 

합포구 진북면 이목리 237-2번지는 전주이씨 재실인 모성재(慕醒齋)가 있다. 이목리(梨木里)에는 4곳에 전주이씨 재실이 있는데 모성재 앞에도 또 다른 재실이 있다. 모성재를 방문했을 때 대문인 영추문(永追門)은 잠겨있었고 협문인 측면의 문이 열려 있어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마당은 좁은 편이나 잘 정돈된 재실이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와가이다. 편액은 모성재(慕醒齋)라 하였고 상량문, 실기, 건립명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아래에는 그 원문을 옮겼다.

 

 

대문인 영추문(永追門) 모습

 

영추문(永追門) 편액

 

측면에서 본 모성재

 

모성재(慕醒齋) 본당 모습

 

모성재(慕醒齋) 편액

 

 

 


慕醒齋 柱聯 [文山]
龜筮明址營建齋堂 거북등 점괘가 밝은 터를 점지하여 제사 지낼 집을 건축하니
陟降先靈洋洋如格 선조의 신령이 오르내리시고 영혼이 분명 오신 듯하네.
白首同居塤箎和樂 흰머리가 되도록 함께 살고 훈을 불면 피리로 답하고 화합하여 즐기니
子孫永久追慕敢忘 자손은 영구히 추모함을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慕醒齋上樑文
睠玆梨木一區 依然先世菟裘之遺躅 蔚彼桑梓百畒森乎 後孫門欄之連簷 堂構之豈以晩耶 心力之盖有待也 恭惟醒菴處士李公諱震馥 璿派貴宗 栗汀肖裔 詩禮風韻有家學相傳之綿綿 華閥文猷尙月朝稱詡之濟濟 資性之厚蚤有孝友根天 幹盝之餘不停硏鑽對案 聿遵先範 只貽後謨 倣召南之漁樵 實石奮之家法 醒以自署傚靈均之獨淸 悟能知非期元亮之覺是 恨躬不文展志 命弟劬學從師 常怡連枕而樂塤篪 不使析箸而同家室 洵裏俗之可則 是至友之罕儔 伊孝伊仁無替箕裘之襲 積善積德從知椒聊之蕃 營謀齋堂肯構寓慕於囚址 賢勞孫裔罙篤瞻依於先靈 奐焉洞壑之改觀 藹然鄕里之聳頌 爰居爰處 可藏可修 秋降霜風思甄氏之篤慕 春深花樹叙韋家之惇倫 永桽後蔭之綿延 如見先靈之陟降 詎志嗣守之策 宜講紹述之難 載舉脩樑 聊陳偉頌
兒郞偉抛梁東 曙色曚矓周嶽東 一片靈臺提掇法 有如曒日照衿哀
兒郞偉抛梁南 鏡波無恙海浮南 仲連一去無消息 高節千秋有幾男
兒郞偉抛梁西 秋天寥落月生西 萬山霜露增追慕 瞻掃壠秋路不迷
兒郞偉抛梁北 鷲山翠嵂載天北 登登可躡有何難 向上工夫勤着力
兒郞偉抛梁上 陟降精靈宛在上 事死如生誠彌加 齋明盛服倍悽愴
兒郞偉抛梁下 春來花樹連墻下 敦宗日夕誼相和 不獨韋門專美也
伏願上粱之後 齋宇孔安 地靈永佑 謹於言敏於行 念念無忝所生 入以孝出以恭 惓惓聿修厥德
辛未十月下旬德陽君十四代孫雨燮謹記


모성재상량문 慕醒齋上樑文
돌아보건대 이곳 이목(梨木) 마을은 의연히 선대께서 은거하셨던 자취를 잠기셨으니 무성한 저 선대의 전장과 무덤이 넓고도 삼엄하도다. 후손들이 지붕을 맞대고 이어서 사는데 모시는 재실이 어찌 늦었겠는가. 마음과 힘이 모자라 기다렸을 뿐이다. 생각건대 성암처사(醒菴處士) 이진복(李震馥)공은 선파(璿派)의 귀한 집안으로 율정(栗汀)공의 후예이다. 시와 예와 기풍이 집안의 학문으로 서로 전하여 면면히 이어졌고 큰 가문의 뛰어난 문장으로 밤낮으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후덕하여 일찍이 효도와 우애는 하늘이 내렸고 대를 이어갈수록 그것을 다듬고 연마함을 그치지 않았다. 선대의 절의를 스스로 따르고 또 후세들을 위한 계획을 갖추어두니 자못 소남(召南)에 고기잡고 나무하는 노래에 비길만하고 석분(石奮)의 집안이 부모를 본받음과 같도다. 깨어서는 굴원 영균(靈均)이 홀로 맑은 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깨닫고 나서는 도연명(元亮)이 이것을 깨달으려고 기약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문장으로 뜻을 펼칠 수 없음을 한하여 아우는 스승을 따라 학문에 힘쓰게 하였다. 서로 배개를 맞대고 즐기며 서로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분가하여 나가지 않고 한 집에서 살아가니 진실한 마음이 세속의 법칙이 되었다. 이렇게 지극한 우애는 비교할 바 드물 것이다. 이처럼 효성스럽고 어진 선대의 업을 그만둠이 없으며 선과 덕을 쌓음은 시경 초료(椒聊)의 번성을 노래함을 알고 따른 것이다. 그 옛터에 재실을 지어 사모하는 마음을 기대려고 모의하니 어진 후손들이 선대의 영령을 우러러 돈독히 기댐이리라. 환하게 온 골이 새로운 모습이니 애연히 온 고을이 높이 칭송한다. 이곳에서 거처하고 이곳에 무덤을 만들어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견씨가 사정(思亭)을 지어 사모함을 돈독히 한 것을 생각하고 봄에 꽃이 아름다우면 위씨 집안의 순한 가풍으로 화수(花樹)를 이룬 것을 서술한다. 오래 숨겨진 후대의 음덕이 면면히 이어져 선대의 영령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는 듯하니 마땅히 뜻있는 후사들이 지켜야할 책무를 지키고 조상을 이어 받는 어려움도 마땅히 강학하려고 . 들보를 들어 올리게 되었으니 애오라지 육위송(六偉頌)을 펼치노라.
어랑차 들보 동으로 던져라. 새벽빛 둘레의 산에 밝아오는데 한조각 작은 영대(靈臺)에 본보기 비추였네 만약 해 밝게 비치면 슬픈 마음 비추겠네
어랑차 들보 남으로 던져라. 거울같은 바다에 마음놓고 남으로 간 제나라 중연(仲連)은 한번 가서 소식이 없네 높은 절개 천추에 몇 남자 있으리.
어랑차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가을하늘 쓸쓸한데 달은 서쪽하늘에 걸렸으니 만산에 서리내리니 추모의정 더하니 우러러 언덕을 쓸어가니 길에 낙엽쌓이지 않았네
어랑차 들보 북으로 던져라. 수리봉 푸르게 솟아 북두성 아래지만 오르고 또 오르면 무엇이 어려우랴 힘써 공부하면 그만큼 위에 닿으리
어랑차 들보 위로 던져라. 오르내리는 정령 그 자리에 계신 듯 돌아가신 후 산 것처럼 모시니 정성이 더욱 더하네 재실을 맑게 하고 예복을 갖추니 더욱 처창해지네
어랑차 들보 아래로 던져라. 봄 꽃과 나무 담장아래 나란하듯 화목한 종중 밤낮으로 의지하여 화기롭도다. 다만 위씨집안 화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후에 재실은 편안해지고 땅의 진령이 영원히 보우하사 말에는 삼가고 행동에는 민첩하여 생각하고 생각하여 근본을 욕되게 말고,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하여 부지런히 애써 큰 덕을 스스로 닦으리라.
신미(辛未) 10월 하순 덕양군(德陽君) 14대손 우섭(雨燮) 삼가 쓰다.

 

 

 

 

 

慕醒齋實記
我六代祖處士府君의 諱는 震馥이며 字는 君震이고 號는 醒菴이니 肅宗辛巳生으로 甲申五月一日에 卒하시니 享壽六十四歲였다. 府君은 太宗王子孝寧大君의 十三代孫이며 考의 諱는 漢橒이며 號는 梅田이라. 我中祖茂山富正公이 燕山致亂을 만나 멀리 嶺南咸安으로 隱退하시고 그 玄孫 栗汀公의 諱 喧이 이곳 鎭海고을에 卜址하시니 이제 四百餘年이 되었다. 府君이 幼詩로부터 天性이 仁厚하며 稟行이 端正하여 兩親敎育을 盡心承奉하고 養志養體에 至誠이 如一하여 出天의 孝心이었고 일찍 家庭살림을 맡아 晝耕夜讀의 日課로 文學硏磨의 工程을 놓지 아니하였다. 家貧親老에 儒學을 이루지 못함을 自嘆하여 弟氏廣川公을 大家門下에 遊學시켜 마침 學問을 성취하여 自己의 恨을 풀었으며 一生동안 兄弟同居하여 和氣滿堂하고 이를 미루어 家風을 正齋하며 宗族에 敦睦하며 士友에 誠信하며 先祖遺業을 힘을 다하여 繼述하니 鄕里에서 孝友家風을 推重하였다. 嗚呼라 不敏參宰가 먼 歲月동안 가슴에 사무치는 일은 府君의 많은 後孫이 四方에 散居하면서도 追慕의 齋堂을 이루지 못함을 晝宵傷心 끝에 宗中에 發論하고 府君墓下에는 事勢如意치 못하고 梨木世庄地인 저의 舊屋을 撤去하고 垈地를 擴張造成하여 四棟齋閣을 建立하고 慕醒齋라 齋號를 揭額함은 醒菴府君을 永慕하는 뜻이라 萬派의 물이 一源에서 내리는 理致와 같이 한 祖上에 百子千孫이 繁昌하나니 微物禽獸도 報本의 孝誠있거널 하물며 子孫으로써 祖上崇奉을 어이 疏忽히 하리요. 부디 우리 후손들은 歲時名節에 이 齋堂에 모여 府君의 孝友實行과 그 높은 遺德을 기리며 相互間 敦睦의 꽃을 피우며 계례가 자랑하는 正統禮俗을 勸獎하고 이 慕醒齋全境을 子孫代代로 維持鞏固토록 懇切히 當付하는 바이다.
辛未十二月十五日六代孫參宰謹述

 

모성재실기(慕醒齋實記)
우리 6대조 처사부군의 이름은 진복(震馥)이며 자(字)는 군진(君震)이고 호(號)는 성암(醒菴)이니 1701년 생으로 갑신(1764)년 5월 1일에 타계하시니 그의 나이 64세였다. 부군(府君)은 태종왕자 효령대군의 13대손이며 이름은 한운(漢橒)이며 호는 매전(梅田)이라. 우리 중조 무산부정공이 연산(燕山) 때 정치적 난리를 만나 멀리 영남 함안으로 숨어사셨고 그 현손 율정공(栗汀公)의 이름은 훤(喧)으로 이곳 진해고을에 터를 택 한지 어언간 4백년이 되었다.
부군(府君)은 어릴적부터 천성이 어질고 후하였으며 품행이 단정하여 양친의 교육을 마음을 다해 받들고 이어갔으며 뜻을 세우고 몸을 가꾸기를 게을리 않았고 아울러 그 효심이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일찍 가정 살림을 맡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을 읽어 학문을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고 양친이 늙어 유학(儒學)을 이루지 못했음을 한탄하여 동생 광천공(廣川公)을 큰 가문의 문하에 유학시켜 마침내 동생으로 하여금 학문을 성취케 하여 자기의 한을 풀었으며 일생 동안 형제끼리 함께 살면서 그 우애를 돈독히 하였으며 가풍(家風)을 정재(正齋)하여 종족에 친목을 돈독히 하며 벗에게는 정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귀며 선조의 유업에 대해서는 소중히 여겨 이어가니 동네 모든 사람들은 효도하고 우애 있는 집안의 풍토를 세워 추앙하고 소중히 여겼다. 삼재(參宰)가 오랫동안 애통히 생각하고 가슴에 사무치는 일은 부군(府君)의 많은 후손이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추모의 재당(齋堂)을 세우지 못함을 가슴 아파하며 상심한 끝에 종중에 먼저 의견을 꺼내 의논했으나 부군(府君)의 묘 밑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옛 집을 철거하고 대지를 확장 조성하여 4동재각을 건립하고 모성재(慕醒齋)라 재실의 이름을 지어 게시함은 성암부군(醒菴府君)을 길이 사모하는 뜻이라. 이는 수많은 갈래의 물이 하나의 본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이 한 조상 아래 수많은 후손들이 번창함과 같으니 아주 작은 벌레와 새와 짐승도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있거늘 하물며 근원이 있는 자손으로써 조상을 숭상하고 받드는 일을 어찌 소홀히 하리요.
부디 우리 후손들은 세시명절(歲時名節)에 이 재당에 모여 부군(府君)의 효우실행의 높은 뜻을 기리며 서로 간에 화목의 꽃을 피우며 계례가 자랑하는 예절과 풍속을 장려하면서 이 모성재(慕醒齋) 전경을 자손 대대로 공고히 유지토록 간절히 당부하는 바이다.
신미(1991)년 12월 15일 6대손 삼재(參宰) 삼가 서술하다.

 

 

 

 


慕醒齋建立銘
醒菴公追慕齋室落成은 感懷롭다. 鎭北梨木里世居 全州李氏大宗은 小門中別齊閣을 마련하여 享祀日을 定하고 骸子孫이 모여 先靈에 禮拜하며 和睦한 情談으로 崇祖에 關한 議論을 한다. 이러한 遺風은 孔子님의 儒家思想에서 비록 되어 高麗末期의 學者에 依하여 朱子說이 소개되고 李朝中葉 退溪學問이 定立되므로서 儒敎思想으로 百世에 이어저온 우리 民族의 精神文化이며 美風良俗이다. 學問이 分化되면서 職業이 細分되어 生活따라 都市로 移住한 子孫들은 資本萬能으로 道德性을 잃어 가는 現世態에 鄕里에 小說이나마 雄壯한 先室을 建立하여 祖上을 모시고 後孫에게 倫理觀을 심어주는 建立의 着想이나 努力에 贊辞를 보내면서 一男六女養育에 敎師의 薄俸이 問題가 되어 事業家로서 行道가 삶의 基盤을 이룩한 것뿐인데 宗事를 빛낸 마음가짐은 世人의 稱訟을 들을 것이요 後世에 빛나리라.
西紀 一九九二年 壬申八月
金海後人 金仁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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