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20. 1. 9. 11:00

 

2019.3.18. 동읍 영일정씨 상운전(祥雲殿) 전경

 

의창구 동읍 봉곡리 433-1번지에는 고려말 충신의 표본이라 말하는 정몽주의 후예(後裔) 영일정씨(迎日鄭氏)가 지은 재실 상운전(祥雲殿)이 있다. 예전에는 상운전(祥雲殿)의 대문채인 봉연재(鳳延齋)에서 서쪽으로 170m 떨어진 곳에 오월당영일정씨사적비(梧月堂迎日鄭氏事蹟碑)와 유인영일정씨효행비(孺人迎日鄭氏孝行碑) 등이 있었으나 봉곡리를 관통하는 도로공사로 유인영일정씨효행비(孺人迎日鄭氏孝行碑)는 그곳에 묻었고 오월당영일정씨사적비(梧月堂迎日鄭氏事蹟碑)는 봉연재(鳳延齋) 앞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이 오월당사적기(梧月堂事蹟記)는 유당 김종하가 쓴 창원군지에 실려 있다. 오월당영일정씨사적비(梧月堂迎日鄭氏事蹟碑) 내용을 아래와 같이 옮겨 적었다.

 

 

2019.3.18 오월당영일정씨사적비(梧月堂迎日鄭氏事蹟碑) 전면

 

梧月堂迎日鄭氏事蹟碑記
古之名堂者 各有其意 或取其幽僻 戓取其閒 或取其踈放 或取其淤咏不一其端 而今以梧月堂命名者奚取焉盖以其淸閒不俗之意味也 郡之治東二十里許 有梧鳳里鄭公漢七生 而長而老於此洞也 性本淸直器局不小 而地隔邦畿千里之外 未能趨走玉階之下 以售其能守分在野不永人知不問世事捅堂於梧月之間 逍遙自樂十尋繞墻 以待鳳凰之來 捿一片照屋時看 烏鵲之南飛 梧無月難得 寫其淸景 月無梧亦無以助其光彩 是以古之人以月夕送梧價也 噫 廢興盛毁 相尋於無窮 公之歿後 世人滄桑雲仍亦困於傷哉 無暇修葺 而樑折礎壞 荊榛翁蔚苔塵漲滿 無復得見其彷彿矣 其孫允永君 大爲之懼 踵我門而言曰 吾祖生平有四美 坮梧月堂兩所別業 而歲久時移兩皆 顚覆矣 行路亦嗟惜 況我後孫輩乎 其修繕復古 吾輩之擔責 不在煩說 而記文當時 各有之而今皆澌泐 殆盡尤 爲惶恐負罪也 將欲更記事行以 表吾祖之一生心德 而臺記東旅 金丈畧緩其首末至 於堂吾丈肯許之而其事實也 否余惟有 其祖而有其孫也 當此倫綱斁敗之時 君能援於俗累欲闡 其先德洵佳事也 乃爲之畧書其事蹟云爾
壬戌重陽節
           安陵 李鉉燮 撰
           金海 金柄華 書
             孫 光永 謹竪

 

 

오월당영일정씨사적비기(梧月堂迎日鄭氏事蹟碑記)
옛날에 당(堂)에 이름을 지을 때는 각각 그 뜻이 있었다. 혹은 그 장소가 그윽하고 외진 데서 취하고, 혹은 그 분위기가 맑고 한가로운데서 취하고, 혹은 그 주변이 밝게 확 트인 데서 취하고, 혹은 그 주위를 돌며 유람하며 노래했던 뜻을 취하니 그 이름을 짓는 실마리가 하나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 오월당(梧月堂)으로 이름을 지은 것은 어떤 뜻을 취한 것인가. 대개 맑고 한가로우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군(郡)의 동헌 동쪽에 오봉리(梧鳳里)에는 정한칠(鄭漢七)공이 살았다. 공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 생을 마쳤다. 그 성품이 원래 맑고 곧으며 품은 도량이 작지 않았다. 사는 곳이 서울에서 천리나 멀리 떨어져서 궁궐에서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재능을 숨기고 분수를 지키며 시골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것을 바라지 않고 세상일에 관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문을 굳게 닫고 손님이 오는 것도 사양하였다. 달이 환하게 뜨면 오동나무가 아름다운 곳을 골라 당(堂)을 지어 소요(逍遙)하며 스스로 즐겼다. 담장을 높이 둘러 봉황(鳳凰)이 오동숲에 와서 깃들기를 기다렸다. 한조각 달이 집에 비칠 때면 밖으로 나가 가끔 까마귀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조조와 같이 큰 뜻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오동은 달이 없으면 그 맑은 빛깔을 표현하기 어렵고 달 역시 오동나무가 없으면 오동잎에 비치는 아름다운 빛을 드러낼 수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옛사람들은 달이 뜬 밤이면 오동 숲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정취롭게 생각하였다. 아아 무너짐과 일어남, 왕성함과 쇠퇴함이 무궁한 시간 속에 서로 반복되는 것인가. 공께서 돌아가신 후 세상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고 그 자손들도 또한 곤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로인해 당을 수리할 겨를도 없어 들보는 꺾이고 초석은 무너지고 가시나무와 장다리가 만발하고 이끼와 먼지가 가득하여 그 옛날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손자인 윤영(允永) 군이 크게 두려워하여 나의 집으로 찾아와 말하였다. “저의 할아버지의 평생에 사미대(四美臺)와 오월당(梧月堂)이 있어 이 두 곳이 별장이었으나 세월이 지나 오래되니 두 곳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조차 안타까워하며 탄식하는데 자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옛날 그대로 수선하여 복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의 기문(記文)이 각각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갈라져서 없어졌으니 더욱 황공하고 죄스러울 뿐입니다. 장차 다시 그 일이 진행되었던 것을 기록하여 할아버지께서 일생토록 마음먹었던 것을 표하려고 합니다. 대의 기문은 동려(東旅) 김(金)어른이 하셨는데 그 전말을 간략하게 엮었습니다. 당의 기문은 어른께서 허락하셔서 그 사실을 기록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좋다고 하였다. 그러한 훌륭한 할아버지가 있으니 그에 버금가는 자손이 있는 것이다. 지금 윤리가 무너진 시대에 윤영군이 세속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그 선조의 덕을 널리 펼치려하니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다. 이에 그 사실과 행적을 간략하게 적어서 기문으로 삼노라.
임술(壬戌;1922년) 음력 9월 9일
           안릉 이현섭(李鉉燮) 짓고
           김해 김병화(金柄華) 글씨를 쓰고
           손(孫) 광영(光永) 삼가 세우다.

2019.3.18 대문채 봉연재(鳳延齋)
봉연재(鳳延齋) 편액

 

상운전(祥雲殿) 정면
상운전(祥雲殿) 편액

 

 

四美臺記   金容熙
臺在於白山下梧鳳溪上 故嘉善大夫鄭公漢七 自童年遊釣 至老逍遙而命名者也 公歿後 三子俱不得壽 臺無人管領 而遂爲荒廢 荏苒星霜 數十年之間 苔蘚蒼古 蒺藜蔥鬱 人不能省其臺之有無 而視之以荒阡草萊中尋常窮石矣 壬子年間 村人鑿泉于溪邊 其用石材 而切開巖石 臺無形容焉 其時未亡人李氏 率遺孤 苟活於村之夾洞 適見號哭而來曰 此吾尊舅梧月堂藏屨所也 不審視之 胡至於此也 於時村人大驚 拾聚石片 刮垢磨劃 則四美臺梧月堂之字之大者 歷歷可攷 其下題詠 僅記童年遊釣此巖上至老一句 二字以外 不能記得 且臺之命名 取諸何義 抑或王子安之二難幷 四美具之四美歟 是皆可以慨惜也 而石之絶者 不可復續 眚災之過 無如之何矣 乃醵金更刻於舊臺之傍 石小者又小 甚不類於舊也于時 予避世暫寓於此里 與里人往看 爲之嗟歎不已 越后公之後孤允永君 及壯 謁余泣曰 此臺之不守 吾曹之罪也 村人之眚災亦無可怨 願吾丈 記臺之當年事 以遺我后昆 予愀然作而曰 臺之廢興相尋 人不可得而知也 君其有足恃者乎 昔者蘇子之記凌虛臺曰 盖世有足恃者 而不在乎臺之存亡 惟君勉矣哉 昔斯臺之大而高者 猶不能足恃 況今斯臺之遠不及於舊者耶 允永斂衽曰 臺之足恃者 吾祖之蔭德不朽也 守之誠不誠不在吾臺之大不大也 請之愈勤 於是乎佳其誠而書

사미대기(四美臺記)    김용희(金容熙)
사미대(四美臺)는 백산(白山)아래 오봉계(梧鳳溪) 옆에 있다. 고(故) 가선대부(嘉善大夫) 정한칠(鄭漢七) 공이 어려서부터 놀며 낚시하며 늙어서까지 소요(逍遙)하며 이름을 지은 곳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세 아들이 모두 천수를 누리지 못하니 사미대도 관리할 사람이 없게 되어 드디어는 황폐하게 되고 끝없이 시간이 흘러 수십년 사이에 이끼가 무성하여 예스럽게 되어버렸고 납가새와 장다리가 무성하게 피어나 사람들이 그곳에 대(臺)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거진 언덕의 풀과 명아주 사이로 심상치 않은 큰 돌이 하나 있다. 임자(壬子)년에 마을 사람들이 이 개울 가에 샘을 파고 석재를 사용하기 위하여 암석을 절개하였으나 대(臺)의 형용은 없었다. 그 때 미망인 이씨가 하나뿐인 아들을 이끌고 그 마을 협동(夾洞)에서 구차하게 생활하였는데 마침 그것을 보고 울면서 가서 말하였다. “이곳은 우리 시아버지이신 오월당(梧月堂)께서 평생을 지내시던 곳입니다. 찾아 살피지 못하였지만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이에 마을사람들이 놀라서 돌조각들을 주워모아 먼지를 닦아내고 획을 파내어보니 사미대(四美臺) 오월당(梧月堂)이라는 큰 글자가 뚜렷하여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아래에 제영(題詠)이 있는데 겨우 ‘동년유조차암상지노(童年遊釣此巖上至老)’ 즉 ‘어릴 때부터 이 바위 위에서 놀며 낚시하고 늙음에 이르렀네.’라는 한 구절과 두 글자 이외에는 더 기록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대의 이름을 지을 때 어디에서 그 뜻을 취하였는지. 혹 왕자안(王子安)의 등왕각서(滕王閣序)의 내용에서 “四美具 二難幷¹⁾, 즉 오늘 이 자리는 네 가지 아름다운 일이 모두 갖추어졌고 두 가지 갖추기 어려운 일도 함께 갖추었으니.”의 구절에서 말하는 네 가지 아름다움 즉 사미(四美)가 아닌지..가히 애석할 뿐이다. 돌이 잘라진 것은 다시 이어붙일 수 없으니 재앙의 과실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돈을 추렴하여 옛날 사미대가 있던 옆에 다시 글을 새기게 되었는데 돌이 작고 또 작아서 옛날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내가 세상을 피하여 이 마을에 잠시 살았을 때 마을 사람과 같이 가서 보고는 안타까움에 탄식해마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에 공의 외로운 손자인 윤영(允永)군이 장성하여 나를 찾아와 울며 말하였다. “사미대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들의 죄입니다. 시골 사람들이 재앙이 되는 일을 한 것도 또한 원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르신께 부탁하오니 이 사미대가 있을 당시의 일을 기록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남기게 해 주십시오.” 나는 섬뜩한 감동을 느끼며 이에 글을 지었다. “누대가 무너지고 일어나는 일이 서로 이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쉬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대는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옛날 소자(蘇子)가 능허대(凌虛臺)의 기문²⁾에 ‘대개 세상에 믿을만한 것은 누대가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하였으니 그대는 오직 힘쓰기 바란다. 옛날에 이 대가 크고 높았던 것은 믿을만 한 것이 아니며 하물며 지금은 이 대가 옛날 그것에도 미치지 못함에랴.” 윤영(允永)이 옷깃을 여미고 말하였다. “누대에서 믿을 만한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음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는 정성을 기울이거나 기울이지 않는 것 역시 누대의 크고 크지 않음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이에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글을 남기노라.

【주석】
四美具 二難幷¹⁾ : 사미(四美) : 음악, 음식, 문장, 언어 등의 네 가지 아름다운 일을 말한다.
소자(蘇子)가 능허대(凌虛臺)의 기문²⁾ : 소식(蘇軾)의 능허대기(凌虛臺記) (전략)--- 物之廢興成毁(만물이 멸망하고 생겨나는 것과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은) 不可得而知也(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중략)---廢興成毁(멸망하고 생겨나고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은) 相尋於無窮(끝없이 서로 이어져 찾아오는 것이니) 則臺之復爲荒草野田( 이 대가 다시 거친 풀 우거진 들과 밭이 될런지도) 皆不可知也(모두 알 수 없는 일입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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