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20. 1. 17. 10:43

 

 

 

2020.1.16. 동래정씨 이안재(易安齋)


진동면 인곡리 313-4번지는 창원공원묘원 안쪽 옛 인곡마을이 위치했던 곳으로 마을은 철거 되고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재실인 이안재(易安齋)만 옛 마을을 지키고 있다. 건물은 시멘트벽돌구조이고 대문은 잠겨 있다. 아는 지인의 요청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곳은 방문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안재의 내부를 살폈으나 이안재창건기(易安齋刱建記) 외는 다른 글이 없었다. 그러나 재실 뒤쪽에는 수기의 묘역이 있고 2기의 묘비가 서 있어 그 내용은 다음에 옮겨 볼 것이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44m를 가리키고 「위도 35°08′40″N 경도 128°31′14″E」라 알려 준다.

 

 

 

 

이안재

(易安齋)

대문인 광인문(廣仁門) 전경

 

 

 

광인문(廣仁門) 편액

 

 

 

동래정씨 이안재(易安齋)

 

 

 

동래정씨 이안재(易安齋) 편액

 

 

 

유리창으로 본

동래정씨 이안재창건기(易安齋刱建記)

 

易安齋刱建記
玆土鎭東廣仁村은 名儒易安齋鄭先生之後孫世居之地라 此齋는 公之後裔가 集契積金하고 獻誠金出勞役하여 西曆一九八三年癸亥參月貳參日定礎하고 同四月貳四日上樑하여 同十一月六日遂訖此役하다 齋內聽中央에 設余壇하여 先祀奉享의 聖所로 하고 諸族親睦과 宗事議論의 宗會所로 倂用裝飾하다 古來良俗은 衰頹一路며 洋風澎之除에 眞實로 讚辭不吝이로다.
先生은 我朝顯宗甲寅生으로 貫鄕은 東萊요 諱林起字汝新易安齋는 號요 亦倂講學堂兼燕居之名이었다. 公之上世는 麗朝文科尙書左僕射文安諱穆이요 重大匡蓬原府院君良度公 號愚谷諱良生과 議政府左贊成寶文閣大提學 靖節公號雪壑齋 諱矩는 顯祖다. 昌原大都護府使를 爲始七邑歷典한 諱彦忠과 將仕郎諱와 嶠南名儒司馬號雲溪諱弘錫은 公之高曾祖三世요 禰는 自星州始居昌原한 號愼庵公諱潓며 妣는 順興安氏士人受瑚之女라 公은 晋陽泉谷에 設講學堂하여 引進後學한 功績으로 門人後裔諸士가 銘墓碣衛墓道하고 舊韓末까지 墓享不懈하고 至今도 指之日鄭先生之墓라 稱한다. 其銘에 生而敎授于斯歿而衣履于斯知德者宜百世式于斯라 讚揚하였고 公之行狀에는 篤行博學百世師表文章巨筆立幟騷壇入鄕選者再登道褒者一이라 記錄하고 있다. 英祖己巳歲昌原鄕校移校時에 校任兼都有司를 重任하여 訖其大役하고 撰移校序文한 士人南溪鄭漢杰公은 先生之長侄이며 門下生이다. 有名한 此移校序文은 昌原邑誌에 登載永傳하고 昌原鄕校風化樓에 揭板現存한다. 公之後孫一同이 齋號及刱建記를 託余撰敍함으로 余辭不獲하였으나 再三懇請으로 齋號는 公之號及講學堂兼燕居之名인 易安齋라 하고 齋門은 公之後孫世居之村名을 引用하여 廣仁門이라 定하여 遂敍經旨한다.
西曆一九八三年 癸亥臘月上浣 公之傍裔 淸岩 鄭基泰記

 

이안재창건기(易安齋刱建記)
여기 진동 광인촌(廣仁村)은 유명한 유학자 호 이안재(易安齋) 정선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이 재실은 공의 후손들이 계를 모아 기금을 적립하고 성금을 내고 노역을 하여 1983년 3월 23일 정초(定礎)하고 같은 해 4월 24일 상량(上樑)하여 그해 11월 6일 공역을 마쳤다. 재실 내 청 중앙에 제단을 설치하여 선조 봉향을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로 정하고 종족간의 친목과 종중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장소로써 함께 이용하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양속(良俗)은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서양의 문물이 팽배해가는 이 마당에 이 재실의 건립은 정말 훌륭한 일이도다. 선생은 조선 현종 갑인(甲寅 1674) 생으로 관향은 동래요 휘 임기(林起) 자 여신(汝新) 호 이안재(易安齋)이며 강학당 겸 연거지명(燕居之名)이다. 공의 윗대는 고려 때 문과상서좌복사문안 휘 목(穆)이요 중대광봉원부원군 양도공(良度公) 호 우곡(愚谷) 휘 양생(良生)과 의정부좌찬성보문각대제학 정절공 호 설학재(雪壑齋) 휘 구(矩)는 드러난 조상이다. 창원대도호부사를 위시 7읍을 다스린 휘 언충(彦忠)과 장사랑 휘와 교남명유사마 호 운계(雲溪) 휘 홍석(弘錫)은 공의 고증조(高曾祖) 3세요 나는 성주(星州)에서 창원으로 이거 한 후 신암공(愼庵公) 휘 혜(潓)며 부인은 순흥안씨 사인(士人) 수호(受瑚)의 따님이라 공은 진양 천곡(泉谷)에 강학당을 설립하여 후학을 길러 낸 공적으로 문인과 후손은 여러 선비가 명묘갈묘도(銘墓碣墓道) 하고 구한말(舊韓末)까지 묘 참배를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날을 잡아 정선생 묘에 제사지낸다. 그 명에 「生而敎授于斯歿而衣履于斯知德者宜百世式于斯」라 찬양하였고 공의 행장에는 「篤行博學百世師表文章巨筆立幟騷壇入鄕選者再登道褒者一」이라 기록하고 있다. 영조 기사년 창원향교를 옮겨 지을 당시에 교임 겸 도유사를 중임하여 그 큰일을 마치고 이교서문(移校序文)을 찬한 사인 남계 정한걸(鄭漢杰)공은 선생의 장손 조카이며 공부를 배운 사람이다. 유명한 이교서문은 창원읍지에 등재되어 오래 전해오고 창원향교 풍화루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공의 후손일동이 재실의 이름 및 창건기를 나에게 부탁하여 사양하였으나 재삼 간청하여 재실 이름은 공의 호 강학당(講學堂) 겸 연거지명(燕居之名)인 이안재(易安齋)라 하고 재실문의 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을 인용하여 광인문(廣仁門)이라 정하고 드디어 글의 뜻을 펼쳤다.

서기 1983년 계해년 섣달하순 공의 후예 청암 정기태( 鄭基泰)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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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ㅡ順興案氏로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