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20. 1. 21. 22:05


2020.1.21. 곡목마을 소금당 전경


동읍의 곡목마을은 김해김씨의 세거지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 된 곳이라 우리지역에서는 김해김씨라 부르지 않고 곡목김씨라고 부른다. 의창구 동읍 화양리 612-1번지에 위치한 소금당(溯琴堂)은 조선 후기 선비 곡천(谷川) 김상정(金尙鼎)¹⁾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소금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곡목마을을 찾을 때면 재실을 볼 수 있는지 후손들을 만나 봤지만 열쇄가 없어 지금까지 내부는 구경하지 못하고 기록으로만 접근한다. 대문은 경앙문(景仰門)이고 본체는 소금당(溯琴堂)이며 뒤쪽에는 위패를 모신 묘당(廟堂)이 있다. 본체의 평면 형식은 창원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으로,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좌우 측면과 정면에 마루를 둔 형태이다. 남쪽 방을 율수헌(聿修軒)이라 하고, 북쪽 방을 돈목실(敦睦室)이라 한다. 기문은 창원군지(1962)에 실려 있으며 번역은 박태성이 한 것을 옮겼다.



대문체 경앙문(景仰門)



 경앙문(景仰門) 편액



소금당(溯琴堂)


溯琴堂記 
自宗法不立 民無統紀而惟立廟 雖士庶 猶得祀及高曾 故同高祖之族 於是得益相親 其自族兄弟以外 至於漸疎漸遠之宗 則所賴以別宗支 序昭穆者 又有世譜矣 然大姓世家宗族 聚處鄕里 非有大尊奉其同出之先祖 而統合爲一寓慕之所 使之俱生其水原木本之思 而推之以及於敬宗收族之道 則亦難保其能相親愛 無所乖戾 而於敦化善俗 終有所格矣 此人家宗室之所由仿也 昌原花木金氏 嶠南望也 其宅玆土也 實自翰林琴山公始 琴山公 以經學文章 負望一時 佔畢齋金文忠公 嘗與之友善 其蹟 載文集 以忤李克墩 謫昌原 自後 子孫繁衍 簪纓相繼 而尤以儒術文行著 迄今四百年之久 而爲彌盛焉 盖公 積善垂裕之實 有以致之也 豈無其所本乎哉 村舊有花山祠 妥公後孫柳溪谷川兩先生 直其南偏有講堂 名花山齋 祠後見撤 因建小閣于講堂之後 爲世德祠 後又廢 至中年又建谷川別廟於其址 而講堂則歷年太久 頹敗不可復仍 於是 凡爲琴山公後孫者 公議齊發 無論居遠邇 各隨力出金 始役不數月而告訖功 扁之曰溯琴堂 盖以溯慕琴山而 爲金氏之大宗室也 其爲制 五楹四架 左右皆爲堂 中二架 合爲室 前有門 皆有名號 室曰敦睦 堂之軒曰聿修 門爲景仰 而所名溯琴堂者 特揭于中楣之前者也 冑孫成學 奉其門長老淸河 柄埰二氏 而與之聯書 以於告朋彦曰 吾金大宗室 以歲戊戌成 當求記以徵於後世 以屬吾子 朋彦 自知非其任 顧契誼素有在 不可以辭 於是系之曰 金氏以琴山公 爲始遷而同本之大祖 則其致崇於琴山 而有所建立以爲宗室也 固宜 而其命義立規 自與講堂之舊別矣 自是以往 世能守之 至無窮已 則金氏之繼盛於世 亦當與之無窮已也 顧世之爲親說者 若墓若譜若宗室之凡由族姓而起者 槪以爲封建之制之殘餘而忽焉 是不知夫人倫相禪 其分布維合 勢有所不能已也 金氏之孫 毋爲其所誤 而益兢兢焉 務世其良規 其可哉
安朋彦 記


소금당기(溯琴堂記)  [해문-박태성]
종중의 법도가 세워지지 않으면서 백성들이 계통과 기강을 잃어버렸고 오직 묘당(廟堂)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선비나 서민이라도 오히려 증조나 고조의 제사를 드리니 고조부를 같이하는 혈족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같은 혈족의 형제 이외는 점차 멀어져 소원한 종인(宗人)에 이르면 따로 분파된 종중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 소목(昭穆)의 차례는 세보(世譜)에 남아 있다. 큰 성씨들이 세가(世家)를 이루는 종족으로서 향리에 모여서 사는 경우에는 한 선조에게서 같이 태어난 자손들이 그 할아버지만을 크게 존중하여 받들 뿐만 아니라 여러 선조를 통합하여서 숭모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것으로 물이 근원이 있고 나무가 뿌리가 있는 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종중을 존중하고 종족을 거두는 도리를 갖추게 한다. 이로 인해 능히 서로 친애하는 마음을 보존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고, 교화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여 끝내는  올바른 격식이 갖추어지게 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가문이나 종실(宗室)이 본받는 근본이 된다. 창원(昌原) 화목(花木)의 김씨(金氏)는 교남(嶠南)에 명망이 있는 가문이다. 그들이 이 땅에 집을 마련한 것은 한림(翰林) 금산공(琴山公)에게서 비롯되었다. 금산공(琴山公)은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으로써 한 시대의 촉망을 받았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문충공(金文忠公)과 좋은 교분을 맺어 그 행적이 문집에 실려 있다. 이극돈(李克墩)의 미움을 받아 창원(昌原)에 유배되어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이 대를 이었고  유술(儒術)과 문행(文行)으로 드러난 것이 지금까지 사백년에 이르면서 점차 더욱 성대해졌다. 대개 공은 선을 쌓고 두터운 덕을 베풀어 정성을 다하여 그것을 실행하였으니 어찌 그 근본이 없겠는가. 화목에 옛날에 화산사(花山祠)가 있었는데 공(公)과 그 후손 유계(柳溪), 곡천(谷川) 두 선생을 모신 곳이다. 바로 그 남쪽에 강당이 있는데 그 이름이 화산재(花山齋)이다. 화산사는 후에 철폐를 당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강당 뒤에 작은 전각을 짓고 세덕사(世德祠)라고 하였는데 이마저도 후에 다시 폐지되었다. 근래에 다시 곡천(谷川)의 별묘(別廟)를 그 자리에 세웠지만 강당은 너무 오랜 세월이지나 무너져서 복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금산공 후손들의 공론이 동시에 일어나 사는 곳이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각각 그 힘에 따라 돈을 내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공역이 완성되어 그 편액을 소금당(溯琴堂)이라 지었다. 대개 금산공(琴山公)을 연모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김씨의 큰 종실(宗室)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 규모는 다섯 기둥에 네 칸인데 좌우는 모두 당(堂)이 되고 중간의 두 칸을 합쳐서 실(室)로 하고 앞에는 문이 있다. 각각 그 이름이 있는데 중간의 실(室)은 돈목(敦睦)이며 당(堂)은 율수(聿修) 문은 경앙(景仰)이라 하고 소금당(溯琴堂)이라는 이름은 중간 문설주 위에 특별하게 걸어두었다. 그 주손(冑孫)인 성학(成學)이 그 가문의 장로인 청하(淸河) 병채(柄埰) 두 분을 모시고 연명으로 편지를 써서 나에게 고하였다. “우리 김씨 대종실(大宗室)이 무술(戊戌)년에 이루어졌으니 마땅히 그 기문(記文)을 써서 후세에 징험함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대에게 부탁하노라.” 나 붕언(朋彦)이 생각하기에 스스로 그 임무에 마땅하지 않음을 알지만 본디 서로 아름다운 친분이 있었으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붙여서 썼다. 김씨는 금산공(琴山公)이 처음 자리를 옮겨서 같은 뿌리로 삼는 큰 할아버지로 생각하니 금산(琴山)을 정성스레 숭모하고 건물을 세워 종실로 삼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 일이다. 그 명분과 의리로서 모범이 되었으니 강당이 오래 된 것과는 별개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능히 그것을 지켜 무궁함에 이르게 될 것이니 김씨의 세대가 번성하게 이어짐이 또한 무궁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묘를 짓고 족보를 다듬고 종실을 짓는 일이 씨족이나 성씨를 기반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봉건적 잔재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인륜이 면면히 이어져 그 흩어져 있던 것이 합쳐지고 그 기세가 능히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김씨의 자손들은 그 잘못된 말을 새겨듣지 말고 더욱 삼가고 대대로 좋은 규범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안붕언(安朋彦)²⁾ 짓다.


【주석】

김상정(金尙鼎)¹⁾ : 김상정(金尙鼎;1668∼1728)의 자(字)는 덕삼(德三), 호는 곡천(谷川)이고 본관(本貫)은 김해(金海)이다.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1846년(헌종 12) 화산사(花山祠)에 봉향되었다가, 대원군 때인 1868년(고종 5) 화산사가 훼철되자 별묘(別廟)를 건립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별묘도 훼철 되자 소금당을 짓고 그 뒤쪽에 사당을 지어 김상정(金尙鼎)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곡천선생문집(谷川先生文集)』이 있다.


안붕언(安朋彦)²⁾ : 안붕언(安朋彦;1904~1976)의 호는 육천(育泉)이고 광주인이다. 육천은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선생 문하의 거유(巨儒)인데, 명필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이 그의 글에 반해 초청하였으나 육천은 “그가 나를 학문으로 초청했으면 가겠으나, 하나의 기예에 속하는 서예로 초청했으므로 거절 한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육천 선생은 실제로 유불선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 국학자 이가원 교수는 “연암 박지원 이후 최고의 학자”로 다른 사람을 젖혀놓고 육천 선생을 꼽았다. 육천은 말년에 만난 동원 이정래를 끔찍이 아끼고 챙겼다고 한다. 육천 선생의 필법은 중국의 왕희지체 외에 최고 명필로 치는 우임체를 이어받은 것이다. 우우임(于右任)은 중국의 명필들이 써놓은 것을 수천 첩 탁본한 뒤 그 중 제일 잘된 글씨 1000자를 모아 그 글씨를 연마함으로써 독특한 자기만의 서체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육천 선생은 일찍이 우우임(于右任)이 남긴 서첩(于右任正統書法)을 구해 썼고 죽기 직전 그 서첩을 동원에게 전해주었다.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소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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