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천부인권 2020. 12. 27. 19:02

2020.12.25. 웅천 와성臥城마을 뒤에서 본 전경
2020.12.25. 마을 주민인 할머니가 알려 준 신당가는 길
처음 본 신당의 모습

웅천 남문동 542-2번지는 와성臥城마을 입구의 마을 위쪽으로 와성臥城마을의 번영과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신당神堂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21m를 표시하고 「위도35°06'02"N 경도128°45'44"E」라 표시한다.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신당에 제례는 지내지 않으며 할매신당을 모시는 건물은 있을 거라며 대략의 위치를 알려 주는데 처음에는 엉뚱한 곳으로 가서 헤매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와 물으니 방향이 다르다. 할머니가 다시 알려 준 곳으로 가보니 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아예 길은 없고 사람이 이용한 흔적도 없다. 어째거나 없는 길을 뚫고 올라가니 그물망으로 밭 전체를 둘렀다. 그물망을 넘어 밭의 끝부분에 다가가니 풀더미 속에 겨우 흔적이 있다. 신당으로 접근을 하려니 또 다시 그물망을 넘어야 했다. 신당이 있는 정확한 위치만 알았다면 험난한 길로 가지 않고 마을 뒤를 지나가는 시멘트 도로를 이용해서 쉽게 접근했을 것을 어렵게 와성마을 신당을 만났다.
제사祭祀를 모시지 않는 신당은 풀더미에 쌓여서 버려진 폐가가 되었고 환삼덩굴이 감싼 신당은 형체가 불분명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신당의 문은 끈으로 문을 묶어두어 그나마 내부에 동물이 침입하지는 않았다. 2평 정도의 시멘트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1평 정도의 신당을 지었는데 지붕은 시멘트로 만든 일본식 기와를 이었고 앞에만 함석으로 된 문을 달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보니 제단의 좌우에 촛대가 있고 아직도 쓰다만 초가 꽂혀 있으며 단 아래 중앙에는 향로가 있으며 우측에는 검은 색칠한 나무로 만든 신위神位가 누워있었다. 그리고 우측 제단 위에 화투 한모가 놓여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신위를 제단 위 가운데 놓은 뒤 그대로 두고 문을 닫고 처음처럼 끈으로 묶어 둔 후 떠났다. 
1967년 문교부 소속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전국부락¹⁾제당조사질문지全國部落祭堂調査質問紙』의 내용에는 웅천국민²⁾학교熊川國民學校에서 근무한 설창수薛昌洙(당시 40세)씨가 조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신당의 위치는 마을 서쪽 산중턱에 동향으로 있으며, 2평 정도의 함석지붕이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신당 앞 3m에 기목나무(느티나무)가 있다고 했으나 지금 느티나무는 없다. 당시 신목神木의 높이는 10m, 둘레 1m였으며, 할매신당이며, 제주祭主는 부정 없고 온순한 사람을 1개월 전에 선출하고 제주는 외출, 출타를 금하고 매일 목욕하며 정성을 드린다. 제삿날은 음력 정월 3일 오전 1시~2시까지로 하고 제주와 무당이 함께 제를 지낸다. 상차림은 술酒 흰떡白餠 쌀밥白飯 나물 과실果實 명태明太 등이다. 그리고 출어出漁 때나 마을 행사 및 중학교 입시 때 당상堂上 할매에게 기도를 드리는 상례常例가 있다.

【주석】
부락¹⁾ : 부락部落이란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왜놈倭者이 우리 민족을 낮추어 부르는 이름으로 부락部落이라 했다. 부락部落이란 용어는 왜국倭國에는 천민이나 범죄자 및 지적장애인 등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한다.
국민²⁾ : 국민國民이란 용어는 왜놈倭者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부르는 말의 준말이다. 황국의 ‘국’과 신민의 ‘민’을 따서 국민이라 했다. 즉 왜국倭國의 천황天皇의 신하臣下된 자들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을 하찮은 민족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이를 매국노들이 계속해서 사용하다가 ‘인민人民’이라는 말을 북한이 사용한다고 다까끼마사오와 그 일당들이 남한은 ‘국민國民’이라는 말만 사용해야 한다고 억압하면서 굳어진 용어이다. 지금부터라도 이 용어는 헌법에서 삭제해야 한다. 매국노賣國奴들의 주장처럼 북한이 '인민人民'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우리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북한이 한글을 쓰고 있다. 그러면 북한이 쓰는 한글을 왜 우리가 쓰고 있느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동향을 하고 있는 신당 앞에서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에 의하면 와성은 고유명으로 『의실義室』이라 했다는데 조선 때 왜구가 출몰하여 웅천만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을 때 부녀자를 납치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이 마을에 살던 한 부인이 끝내 그들에게 저항을 하고 목숨을 버린 의절義絶을 기리고자 이름한 지명이라는 민간어원설이 있다고 했는데 기록으로 남은게 없다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2015년 2월에 웅천의 남산왜성南山倭城을 방문했을 때 3명의 왜인倭人을 만났는데 왜성을 연구하는 학생들로 보였으며 그들이 보여준 남산왜성南山倭城의 그림에서 와성臥城마을의 모습을 보았다. 그 당시 와성臥城마을은 없고 오로지 왜놈倭者들이 바다를 이용하기 위한 성곽 같은 왜놈倭者 부락部落과 접안시설인 방파제만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왜구倭寇가 이곳을 떠날 때 모든 집들은 불 사르고 떠났지만 배를 접안하는 부두가 있어 이후에 사람들이 이곳 와성마을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와성臥城’이란 지명도 왜놈倭者들이 남긴 성곽의 형태 때문에 지명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당의 문을 열고
신당 내부의 모습
신패를 신단에 올려 두고 
마을 입구에서 차량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도로

출처 및 참조
전국부락제당조사질문지全國部洛祭堂調査質問紙-문교부 문화재관리국(1967)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황정덕/동양문화사(20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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