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21. 1. 17. 16:45

2021.1.16. 정촌면 관봉리 봉동마을 진주강씨 후산재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 1029(문정로 104-7)번지 봉동마을에는 진주강씨의 재실인 후산재後山齋가 있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49m를 표시하고, 위도 35°07'39"N 경도 128°08'32"E라 표시한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분은 후손으로 비워 두었던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게 된 것은 도둑이 재실에 들어와 문짝을 훔쳐가고 여러 가지 집기들도 도둑 맞았기 때문이라 한다. 인근의 강씨 소유 다른 재실은 편액까지 훔쳐가는 바람에 혹시 후산재도 편액을 도둑 맞을까 염려하여 떼 놓았다고 한다. 그래도 편액 하나라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하자 어렵게 가져온 것이 ‘봉강정사鳳岡精舍’라는 편액이었다. 후산재後山齋 이전에는 봉강정사鳳岡精舍로 사용하다가 이후 새로운 이름을 가진 것이 후산재 였던것 같다.
후산재는 대문채와 일직선상의 남서방향으로 자리했고 서쪽에 앉은 추모헌追慕軒은 고직사가 된 모양이다. 

 

2021.1.16. 정촌면 관봉리 봉동마을 진주강씨 후산재 대문
2021.1.16. 정촌면 관봉리 봉동마을 진주강씨 후산재 모습
후산재기 後山齋記

後山齋記
世之騷人韻士 別構樓閣臺榭 以爲觀賞遊息之所者甚多 而必扁額以表之 題詠以侈之 然其所志者扁 所有者汗謾 則雖樑棟壯偉 丹頀赫煌繞之以溪山 栽之以花卉 皆無只觀也 若太學生姜公之後山齋 其亦異乎人也哉 蓋公志尙高邁 自少讀聖賢書 講貫於修己治人之方 若將出而有爲見世道日下 恥與時輩競遂 遂斂跡幽潜 專意向上 辛未秋 始於其先祖忍齋公齋舍之下 因澗阿林泉之勝 建立一齋 諷誦經傳 昑哦詩篇 悠然有出塵之想 中爲同祿所災 鞠爲茂草 公每慨惜之 擬欲改築 而有志未就矣 其胤子兄弟屢年經紀 於壬寅春 乃重建於所居村北鳳凰山之南 凡爲屋四架東西爲堂 中爲房室 齋號仍舊 門立四楹 周之以垣 前鑿方塘 可數畝種之以苃荷 長松繞於後 修以挻於傍 因設家塾 藏書數千券 聚宗黨子弟 鄕里後進 延師而敎之 有時會講習禮 鄕邦賴之 只以爲異日陽復之兆 又於齋之南 建一屋子題其顔 曰追慕軒蓋慕先公之遺澤也 噫呼 若公父子聖非所謂父作之子述之乎 創始守成家 國無以異焉 則傳曰 創業垂統爲可繼也 上舍公有焉 書曰 肯構肯堂 其胤子兄弟 可以 當之 是可與騷人韻士之遊觀琓賞之飾者同一語哉 所取所用 可謂公而不偏切 而不汗謾矣 其仲胤處士君 今䢜己觀化 其伯季氏 送處士君之胤栢淳 要余記之 略書齋之成毁始末 而終之以一言 公之 子孫若念前後經始之不易 而思善繼述 使堂宇長存 則公必曰 余有後而居塾之 諸生 亦必講誦 不掇修節 不懈然後 可以不負公之父子之公心厚德矣 盍相與勉之哉 齋號後山 以其在家後之山 而亦寓謙退 後於人之義云爾
柔兆執徐菊月上澣 通政大夫成均館 大司成侍講院原任司書 永嘉 金福漢 謹書

후산재기 後山齋記
세상의 소인운사騷人韻士들이 누각이나 정자를 별도로 지어서 관상觀賞하고 유식遊息하는 곳으로 삼는 자 심히 많으니 반드시 액호를 달아 표하고 시를 써붙여 치장을 하나 그러나 그 뜻한바 편벽하고 간직한 바가 들떠서 절실함이 없는 즉 비록 재목이 웅장하고 단청이 빛나며 산수가 둘러있고 화초가 심어져 있어도 모두 볼 것이 없으니 태학생太學生 강공의 후산재後山齋 같은 것은 그 또한 이런 사람들과 다름이 있어 대개 공은 뜻을 숭상함이 고매高邁하여 젊어서부터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 몸을 닦고 사람 다스리는 법을 익히 배워서 장차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함이 있을 것 같았으나 세상의 도道가 날로 못해감을 보고 시속 무리들과 경쟁하기를 부끄러이 여기어 종적을 거두고 깊숙이 잠기어 학문 향상에 전념하였다. 신미辛未년 가을에 선조先祖 인재공忍齋公의 재실 아래 산골물 흐르는 언덕과 숲과 샘이 있는 빼어난 곳을 의지하여 재실 하나를 세우고 경전經傳을 외우고 시편을 읊으며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속세를 벋어날 생각이 있었으나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그터에 잡초가 무성하게 됨에 공公이 매양 개탄하며 애석히 여겨 개축하고자 하였으나 뜻만 두고서 이루지 못하였다. 그 아들 형제가 몇 년을 경영하여 임인 봄에 마을 북쪽 봉황산 남쪽에 중건하였다. 무릇 4칸 집을 지었으니 동서로 마루를 하고 중앙에 방을 넣었으며 재실의 이름은 옛 그대로 하고 서편에 문을 세웠으며 원장을 둘러치고 앞에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으며 큰 소나무가 후원에 둘러있고 긴 대나무가 옆에 솟아있다. 여기에 서당을 개설하여 수천권의 서책을 장서하고 종중 자제들과 향리의 후진들을 모아 놓고 스승을 초빙하여 가르쳤으며 때로 모이여 강습하고 예禮를 익히니 향방이 이에 힘입어 후일 밝은 세상이 다시 돌아오는 조짐이 된다할 것이다. 다시 재실 남쪽에 집 하나를 세워 추모헌이라 현판 붙쳤으니 대개 선친의 끼친 은택을 사모함이었다. 아! 공의 부자父子같은 이는 성인이 이른바 아버지가 지은 것을 아들이 이어감이 아니리오. 처음 세우고 이루어 지켜감이 가정이나 국가가 이에 다름 없은 즉 전하는 말에 가로되 업을 창시하고 대통을 이루어서 가히 이어간다 하였으니 상사공上舍公께서 이었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이룬 것을 아들이 이어간다 하였으니 이는 아들 형제에 해당함이니 이 가히 소인운사騷人韻士가 놀이하고 완상玩賞하고자 꾸며놓은 것과 한가지로 말하겠는가. 가지는바와 쓰이는바가 가히 공본되어 편벽하지 않고 절실하여 한만汗謾하지 않다할 것이다. 그 가운데 아들 처사군處士君이 이제 갑자기 돌아가니 그의 맏형과 끝의 아우가 처사군의 아들 백순栢淳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간략히 재실이 이루어지고 훼손된 전말을 쓰고 마지막 한말씀하노니 공의 자손들이 만약 전후로 재실을 창건하기 쉽지 않음을 명념하여 착하게 계술함을 생각하여 당우堂宇로 하여금 기리 보존케 하면 반드시 공公이 나도 후後가 있다 할 것이며 서당에 기거하는 생도들 또한 반드시 강송講誦을 그치지 않고 몸 닦고 신칙함을 게을리 아니한 연후에 가히 공의 부자분 공분된 마음과 후한 덕을 버리지 않는다 할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으리오. 재실 이름을 후산재後山齋라한 것은 재실이 집 뒤산에 있기 때문이요 또한 겸손하여 사람들 뒤에 한다는 뜻을 부친 것이라 한다.
유조집서柔兆執徐(병진丙辰, 1916) 음력 9월상한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시강원원임사서 
영가永嘉 김복한金福漢 삼가 쓰다.

 

후산재실기 後山齋實記
봉강정사 鳳岡精舍 편액

後山齋上梁文
伏以 伊蔚伊蒿不禁孝子之恨 我泉我石忍棄先人之基謦欬如新棟宇載落恭 惟故上舍姜公風騷志 節 詩禮家傳登龍虎而和塤篪若將進塗之斯闢狎 魚鳥而送日月孰知微意之攸歸四方之弧矢易蹉 得喪奚問兼山之時義曰止動靜自由蓋天旣厚我 以生恁地亦從吾所好惟孝友于兄弟自可爲政於 一家所樂寓之湖山足以送老於餘日顧瞻海宇每 發感憤之懷歎息衰風敢萌驕吝之累吟能妙境筆 能會象只爲發舒精神貞不絶俗通不踰閑要是寬 大胷度引壺觴而樂情性依然太初之遺民超物我 而遊形骸自有脫略之門戶詩成屋未就八十年琴 書可忘年老子是聽古今人風韻何別水月寒而一 心如昨風樹悲而萬事傷今手澤之存遺書有不忍 讀者志事之述肯堂又詎敢忽諸今日人間非昔時 不可更待後山坊名仍舊地何必他求乃有克家子 之遹追先徽亦粤同井友之樂成人美薈蔚▼(孱+刂)而嘉 樹動色井甃滌而玉㵎騰鳴子心便見父心風儀不 老亭號卽是翁號羹墻可承修梁告功善頌相役
兒郞偉拋樑東坐待朝暾初出東苟得人心皦若許 百年應不落空空
兒郞偉拋樑西矗城縹渺日將西在辰太歲知何事 風雨前江怒氣啼
兒郞偉拋樑南松楸相望舞仙南先城古色蒼然在 長使雲仍食德甘
兒郞偉拋樑北月牙千丈鎭于北天風有約時來吹 滿灑淸詩一爽腹
兒郞偉拋樑上歷歷聲光如在上盡日園林行住墟 愀然應復見眞像
兒郞偉拋樑下人心如水日趍下須向源頭勤著心 箇中原有顯親者
伏願上樑之後簷帷不改雲物長存詩禮箕裘垂庇 庥於式穀春秋霜露寓典型於無竆
農山文集卷之十一

 

출처 
진주누정지-진주문화원/동아인쇄출판사(199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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