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21. 4. 25. 06:00

2021.4.24. 창녕 계성면 명리 진주강씨 이유재履有齋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재실齋室 이유재履有齋는 창녕 계성면 명리 1001(월평1길 21)에 위치하며 이곳은 해발 48m 높이고, 위도 35°27'35"N 경도 128°30'41"E이다.

 

이유재履有齋는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의 후손이신 주부主簿 강성姜性이 진주에서 영산靈山 월평月坪으로 이거移居해 살기 시작했다. 

그 후손 람계공覽溪公이 제실祭室을 지었고 그 아들 도천공道川公이 아버지를 위해 모람재慕覽齋를 지었고 그 후 강돈姜潡이 금오공金吾公의 유지에 따라 일가들과 함께 지금의 이유재履有齋를 지었다.

출입문에는 비한문非寒門이라 편액했고 본당本堂은 이유재履有齋라 했으며 우측방은 돈륜당敦倫堂으로 하고 좌측방은 양정실養正室이라 편액 했다. 마루의 우측에 월평고가月坪古宅家란 편액을 걸었고 좌측에는 모람재慕覽齋란 편액이 걸려있다.
대청마루 위에는 송준필宋浚弼¹⁾이 지은 이유재기履有齋記가 걸렸고 마주 보고 장상학張相學이 찬한 이유재상량문履有齋上樑文이 걸려있다. 
대청마루의 중앙 위에는 람계공覽溪公이 지은 월평팔영月坪八詠이란 시가 걸려있다.

 

2021.4.24. 창녕 진주강씨 이유재履有齋 대문
2021.4.24. 창녕 진주강씨 이유재履有齋 대문 편액 비한문

 

2021.4.24. 창녕 진주강씨 이유재履有齋

 

2021.4.24. 전진환이 쓴 창녕 진주강씨 이유재履有齋 편액
2021.4.24. 창녕 진주강씨 이유재기履有齋記

履有齋記
晋陽氏之始祖曰 殷烈公民瞻仕于 麗胙土啓 業積德流社 後昆極繁衍 而顯赫爲東方著姓我 昭敬王時 有主簿 諱性 自晋移于 靈山之月坪 亦以文學行誼世其家 子姓雖流寓他 方不恒厥 居衣履之歲 必以靈歸焉至 覽溪公 返奠于月坪 築精舍數間 隱居求志 爲承先 範門之圖 其有題詠諸詩 可按而知也 其沒也 胤子道川公 奉窆于先兆之次 因置墳菴 扁其楣曰 慕覽齋 以寓孝思 歲月悠荒風雨 交橫 百年之間 齋遂廢而茂草矣 東西過者 相與咨嗟太息於 賢徽之湮沒 而無所於瞻仰也 後孫潡氏 以其先君子 金吾公之遺志謀于 族殫誠經紀 築齋于 古墳菴之墟 幽邃爽朗 不奢不儉 允合於世德之藏 於是乎 山若增而高水 若增而麗怳 然若親先靈之陟降 而悅豫也 旣成遺男 相春相弼 揭余而言曰 舊號慕覽 乃道川公 爲親而作也 今於尊奉 烈壠恐有偏也 願吾子更其號 而記其事 余惟記曰 春秋霜露君子履之 而有怵愴之心 盍以履有易諸 嗚呼 吾東古家 益多盡心 於追遠凡 先人體魄之鄕 講學之地 逞逞起堂 榭以表之 然不數世索 然荒墟率 皆泯湮不傳 今是齋也 廢而復興 揄先徽於 己沉成父志之未就 以盡其繼述之道 吁其動矣 然今世界缺陷 人懷自靖 披出身以顯揚 僅能爲過耳之鳥音 而獨文學行誼 爲傳家之長物 雖諸公不 但霜露怵愴 爲盡於孝思 相與勉勵 從事於詩書禮樂之敎 服膺於孝悌忠信之訓 彬彬有作 益大以弘 則其於奉先 垂後之道 爲盡善也 謹書此歸之以勖 其子孫於 無窮云爾
歲辛未 小春節 冶城 宋浚弼 記

이유재기
진양 강씨의 시조는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이시니 고려조에 벼슬을 하여 봉토를 받고 가업을 열어서 덕을 쌓아 복을 전하여 후손들이 번성하고 몹시 빛나서 우리나라의 널리 알려진 성씨가 되었다. 조선조 소경왕昭敬王 때에 지위가 주부主簿이고 이름이 성性인 분이 진주로부터 영산靈山의 월평月坪으로 옮겨 살게 되었고 역시 학문과 훌륭한 행의로서 가문을 이어왔다. 자손들이 바로 타향에 우거하여도 항상 그곳에 살지 않고 산소는 꼭 영산으로 돌아와 모셨다. 람계공覽溪公에 이르러서 월평月坪으로 돌아와 살면서 정사精舍 수간數間을 짓고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고 선조께서 꾀하셨던 가문의 법도를 이어받았음을 읊으신 여러 시에서 짐작하여 알 수 있다. 돌아가시니 그 아드님 도천공道川公께서 선산 아래에 산소를 받들어 모시고 분암墳菴을 지어 현판을 모람재慕覽齋라 하고 효도하려는 생각으로 머물렀다. 세월이 지나고 거친 비바람에 씻겨 백년 사이에 제실은 폐허가 되어 풀만 무성하게 되고 지나는 사람마다 선조가 남기신 훌륭한 자취가 사라지고 우러러 바라볼 곳이없어지는 것을 크게 한탄하였다. 
후손 돈씨潡氏가 그 선대의 금오공金吾公의 유지에 따라 일가들과 상의하여 정성을 다하여 잘 다스려 옛날 분암이 있었던 자리에 제실을 지으니 그윽하게 깊고 시원스럽게 밝아서 사치스럽지도 검소하지도 않아서 대대로 닦아 온 덕을 감추기에 합당하였다. 이에 산은 더욱 높아 보이고 물은 더욱 맑아 보였으며 황홀하여 선령께서 오르내리시며 기쁘하는 것을 보는듯 하였다. 집짓는 일을 마치고 상춘相春 상필相弼을 보내어 나를 찾아보고 말하기를 옛날의 재호 모람慕覽은 도천공道川公께서 어버이를 위하여 지은 것이라 이제 여러대의 산소를 모심에 있었서는 공평치 못할 것 같으니 선생께서 다시 그 재호를 지어주시고 그 사실을 기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내 기문하여 이르기를 봄과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는 이것을 밟고 슬픈 마음이 생기니 어찌 그것을 쉽게 밟을 수 있으리요. 아! 우리나라의 오랜 가문에서는 더욱 먼 조상을 추모함에 마음을 다하고 모든 선인들의 몸과 기력이 간직된 곳과 학문을 닦던 곳에 해마다 재실을 지어서 이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몇 대를 지나지 않아서 쓸쓸하게 거친 터가 되어 거의 모두가 사라지고 전하지 못한다. 
이제 이 재실은 폐허가 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이미 잠겼던 선조의 훌륭한 일을 더 높이고 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뜻을 성취하여 그것을 이어가는 도리를 다하였으니 아! 그 수고로움이 큼이로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흠이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며 사람들은 스스로 편안함만을 꾀하고 저 출신을 세상에 드날리는 것은 겨우 귀밖으로 지나는 새소리로 삼으며 단지 학문하고 마땅한 행실로서 집안에 전해오는 훌륭한 일로 삼고 비록 여러분들의 다만 서리와 이슬을 밟으면서 슬퍼하는 것으로 효도를 생각함을 다하는 것으로 삼을 뿐 아니라 서로 힘써 시서예악의 가르침에 종사하고 효제충신의 교훈을 가슴에 품고 빛나게 더욱 키우고 넓혀 나간다면 그것이 선조를 받들고 후손에게 복을 드리우는 도리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된다. 삼가 이와 같이 써서 보내어 그 자손들이 무궁하게 힘을 쓸 것으로 삼고저 이와 같이 말하는 바이다. 
신미년 10월 야성 송준필宋浚弼 짓다.

【주석】
송준필宋浚弼¹⁾ :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의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순좌(舜佐), 호는 공산(恭山)이고 아버지는 송기선(宋祺善)이다.
장복추(張福樞)와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이진상(李震相)의 강학에 참석 했다.
1919년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서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과 더불어 활동함으로써 의리정신과 민족의식을 발휘하였다. 만년에는 김천에서 살았다.
저서로는 성리학에 관한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등이 있고, 예학에 관한 『육례수략(六禮修略)』이 있다. 또한 수양론 및 윤리서로는 『오선생미언(五先生微言)』·『정학입문(正學入門)』이 있고, 역사서로는 『속속자치통감강목(續續資治通鑑綱目)』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공산집(恭山集)』이 있다.

 

이유재상량문履有齋上樑文
월평팔영月坪八詠
이유재履有齋 주련

履有齋 주련-[해문]안동 청음 후손 백촌
繼其志 述其事 叙孝友忠信之語
천지의 주재하는 이치를 잘 계승하고,그 일을 잘 이으며, 효성과 우애 충성과 신의의 말을 잘 펼쳐야 한다.
僾然見 肅然聞 謹霜雨蘋藻之薦
선조 모습 어렴풋이 뵈옵는 듯 선조 음성 조심스럽고 엄숙히 듣는 듯 삼가 돌아가신 선조 그리며 제물 차려 제사를 지내드려야 하네.
業可大 功可久 何莫學夫小子
선현들의 덕업은 매우 크며, 그 공적은 오래도록 지속 되는 것이니.
文以會 仁以輔 不亦樂乎有朋
군자는 학문으로 벗을 모으고, 인(仁)으로써 도움을 받으니. 또한 친구 있음이 즐겁지 아니한가.

 

돈륜당敦倫堂
월평고가月坪古家
모람재慕覽齋

 

2021.4.24. 창녕 진주강씨 양정실養正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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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